손혁재 8시간 ·
2024.1.7 #손혁재_장치이야기 #선거 #6대총선 #박정희 #최고회의
제6대 총선 부활에 난무한 변칙들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던 5.16 쿠데타 세력은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을 허용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그 이전에 이미 정당을 사전조직하고, 자기들에 유리한 정치 구도와 선거 구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선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에 항의해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했지만 쿠데타 세력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1962년 3월 16일 제정된 정치활동정화법 명분은 “정치활동을 정화하고 정치도의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을 쫓아내는 악법이었습니다. 최고회의에 설치된 정치정화위원회가 “특정한 지위에 있었거나 특정한 행위를 한 자의 정치적 활동” 적격 여부를 판정했습니다.
적격 판정을 못받으면 1968년 8월 15일까지 정치활동이 금지되지만 불복신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금지 시한이 1968년인 건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닦기 위해 1963년과 1967년에 실시될 두 차례 국회의원 총선 출마를 막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정화위원회는 5월 31일까지 4,386명을 심사해 3,050명에게 정치활동 부적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승만 정권 여당인 자유당, 원래는 한 당이었지만 집권 한 뒤 갈라져 장면 정부에서 여야로 대립했던 된 민주당과 신민당 지도부가 대부분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4.19 혁명 이후 정치활동이 허용된 혁신정당 지도자들도 부적격으로 분류했습니다. 전직 고위관리, 비판적 언론인, 부정축재자,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지도부 등도 포함됐습니다.
군사혁명재판에서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장면 총리도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옛 민주당 신파가 재창당한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건 장 총리가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묶여 있었던 탓입니다. 장 총리가 병이 들자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5월 정화대상자에서 해제시켰으나 장 총리는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군부의 반대 세력도 정치활동정화 대상자로 묶어놓았습니다. 여섯 차례 실시된 정화대상자 해제조치에서 빠져 금지 시한까지 묶여 있던 70명 가운데 군 출신 반혁명사건 관련자들이 19명이나 됐습니다. 혁신계 인사들보다는 적지만 자유당이나 민주당 관계자들보다 군내 박정희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민정 이양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화당을 사전 조직하고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강력한 경쟁자들의 출마를 막는 등 반칙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민정 이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건 최고회의와 군부였습니다. 김동하 최고회의 고문 등 ‘혁명 동지’들이 공화당 사전조직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김재춘 최고위원이 박병권 국방장관과 3군사령관과 함께 박정희 의장을 만나 대선 불출마를 요구했습니다. 정치는 민간인에게 맡기고 군인들은 5.16 때 약속대로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명분에 밀린 박 의장이 민정에 불참한다는 ‘2.18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정치는 민간에게 맡기되 부정부패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허정 등 민간 정치인들도 박병권 장관과 3군사령관을 만나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2.27 선서’를 합니다. 그런데 3월 15일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이 최고회의 앞에서 ‘군정연장’ 요구시위를 벌였고, 다음날 박정희 의장이 군정을 4년간 연장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최고회의는 ‘비상사태수습을위한임시조치법’을 제정했습니다.
정치활동 허용으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정당활동을 다시 중지시키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며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란 미국의 압력으로 박정희 의장은 군정연장을 보류한다는 ‘4.8성명’을 발표했지만. 김동하 등 군부 내 반대파를 쿠데타 혐의로 제거했습니다. 이렇듯 제6대 총선으로 가기까지는 변칙이 난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