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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묵상글 들 (연중 21주 목요일-엄마가 되지 말고 집사가 되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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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1주 목요일-엄마가 되지 말고 집사가 되라!
엄마가 되지 말고 집사가 되고,
원장이 되지 말고 집사가 되라!
원장이 되지 말고 집사가 되라는 말은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엄마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제일 따듯하고 포근함을 주는 말이고,
언제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나 원천과 같은 말인데
어찌 엄마가 되지 말고 그까짓 집사가 되라는 말입니까?
인정의 엄마가 되지 말고 영적인 엄마가 되라는 거지요.
그러니 인정의 엄마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집사가 되지 말고 계속 엄마가 되면 되겠지요.
그러나 집사가 되고, 영적인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주인 집의 식솔'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식구들은 나의 식구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잘 돌보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맡긴 하느님의 식솔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식구들 특히 내 자녀들이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식속들이라는 인식과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이 인식이 확고하고 이것을 잘 의식하고 살면
영적으로 잘 돌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으로 잘 돌보는 것이냐이고,
그것은 주님 말씀대로 '제때에 양식을 내주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제때가 언제냐 그것입니다.
제때란 우선 내가 정한 때가 아니고 술 먹고 노느라 제때를 놓치고
아무 때나 양식을 내주는 그런 내멋대로의 때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고 가족들이 원하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원하는 때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양식을 내줘야 하는가도 보겠습니다.
마태오복음의 오늘 얘기는 루카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정해진 양식'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바꿔 이해하면 양식도 집사가 제멋대로
식단을 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영적인 식단을 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식단은 모든 건강을 고려하는 식단이어야 합니다.
그저께 우리의 건강은 육신의 건강뿐 아니라 심리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다 고려해야 한다고 했는데
영적인 식단은 이 모든 건강을 아우르는 식단입니다.
주님께서 빵으로 유혹하는 악마에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거지요.
마음의 양식은 물론 주님의 살과 피와 주님의 말씀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마침 성 아오스딩의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의 축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성녀 모니카는 방탕하고 방황하던 아들 아오스딩을
가톨릭 신앙에로 인도한 훌륭한 어머니인데 아오스딩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그녀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성녀 모니카야말로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잘 주는 집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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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연중 2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어있어라
깨어있는 삶이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의 관계 안에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늘 준비하고 삽니다. 사실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 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깨어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깨어 있는 사람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잠든 사람이 있고, 깨어나는 사람이 있으며, 깨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깨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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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4,42-51: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사람들은 종말의 때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종말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분을 만나게 되고, 확실히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뵙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고 있었다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늘 노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죽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늘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3절)
우리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45절)의 모습이어야 한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지혜롭거나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야 ‘동료 종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기 위해서는 슬기가, 어려울 때 양식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그러한 종에게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7절)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이다. 이 종이 하늘의 보물을 받는 것은 이 지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영예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영예를 입은 것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못된 종”(48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종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판을 전혀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여기에서 주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또 다른 직무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를 처단하여”(51절)라는 것은 영으로부터 자녀 됨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웃음거리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벌 때문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온 마음을 바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되어, 더욱 더 충만한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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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한상우 신부님. 성녀 모니카 기념일.깨어 있어라.(마태 24, 42)
신앙 아니면
이겨낼 수 없는
성녀 모니카의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뜻을 비우고
또 비우는
사랑입니다.
서로의
바램과 뜻이
어긋나며
걸어가는
어머니와
자식의 아픈
관계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식을 믿고
안아주고
알아주었던
모니카의
사랑입니다.
근심을 기도로
바꾸었던 성녀
모니카의
여정입니다.
모든 길은
끝내
하느님께로
이어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어머니에게서
자식에게로
이어집니다.
슬픔을 밝혀주는
신앙을 끌어안고
우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시 성녀
모니카를 통해
그녀의 아드님
아우구스티노가
하느님 사랑을
알게됩니다.
서로를 살리는
신앙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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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연중 제21주간 목요일.(성녀 모니카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깨어 있어라. ♣
복음서에 나오는 종말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2)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
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4)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서 오신다.
5) 심판 때에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종말과 재림의 날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실감 나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막연하게 언젠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라고,
지금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방심과 자만심이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회개를 미루게 되고,
‘깨어 있지 않은’(전혀 준비되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종말이 정말로 올까?” 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데, 지나간 시간이 많을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집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종말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각 개인의 인생의 종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은 채로,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하느님의 뜻’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종말과 재림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과 처벌의 날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
2) 그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갑자기 올 것이다.
3) 그러니 ‘항상(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어라.”는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어라.”입니다.
(어떤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됩니다.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벌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 아니라,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점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는 점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을 도둑이 오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 자체는
특별한 뜻이 없고, 그날이 갑자기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오는 도둑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심판도 처벌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 24,45-47).”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잘 살면 주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 자체가 큰 상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8-51).”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교회를 망친 죄에 대해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이라는 말은,
앞의 23장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에서
거듭 반복되었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불성실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고되었던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불행’은 심판, 처벌, 멸망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말씀을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하면,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인생을 막 산 사람은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라는 말씀은,
‘갑자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라는 뜻인데,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예상할 수도 없고
미리 계산할 수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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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새벽을 열며. 성녀 모니카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저는 아버지의 조기교육 탓이었는지 컴퓨터를 80년대 초반부터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점점 사람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던 90년대에 제게 문의를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컴퓨터 조립을 해달라는 사람도 많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달라는 부탁도 많았지요. 그런데 컴퓨터 전원을 켜도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이 의외로 많은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모니터의 전원을 켜지 않았거나, 모니터와 컴퓨터를 연결하지 않아서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편리함과 재미를 주는 컴퓨터이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결국 아무런 역할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계만 사용법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 각자에 대한 사용법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복잡한 사용법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기초로 우리 자신을 이 세상 안에서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봐야 합니다. 이 사용설명서가 바로 기도, 묵상, 미사, 성경 읽기, 자선, 희생 등입니다.
나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지금 내 안에서 의미 있는 가치가 나오고 있지 못한다면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올 때 깨어서 일하고 있는 종이고,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오려면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주인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종입니다. 깨어 있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이 언제 올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먼저 채우려고 합니다. 자기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나에 대한 올바른 사용은 세상 것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만족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잘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깨어 준비하는 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성경, 기도, 묵상, 미사, 자선, 희생 등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신 사용설명서를 잘 숙지해서 제대로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종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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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다(골드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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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의 늑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고 먼 옛날, 어느 나라에 ‘흑백방리’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며 살았지요. 하얀 늑대는 이해와 용서를 먹고 자랐고, 검은 늑대는 질투와 분노를 먹잇감으로 삼았습니다.
늑대들은 새끼들일 때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몸집이 커지면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검은 늑대가 하얀 늑대를 공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하얀 늑대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곤 했습니다. 어느 쪽이 이겼을까요?
답은 더 많은 먹이를 먹고 자란 늑대였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마음에도 이 두 마리의 늑대가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늑대가 살아남았습니까? 내 마음의 힘센 늑대는 어떤 늑대입니까?
이해와 용서의 먹이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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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종말론적 담화문’이라고 불리는 마태오 복음 23―25장은 흔히 ‘심판 설교’라고도 합니다.
좀 더 살펴본다면 23장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을 담은 유다교 심판 설교이고,
24―25장은 세상 마지막 때에 관한 종말 심판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종말이 언제 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종말 심판을 대비하여 늘 깨어 준비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그리고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 참조)를 언급하십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비유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기는 종들을 잘 관리하고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종입니다.
이렇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는 주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 여기고는 맡겨진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종은 불충실한 종입니다. 결국 주인은 그 종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도 못한 시간에 돌아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입니다.
비유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지만 불충실한 종에게 내리는 주인의 ‘처단’이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말에서 처단은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의 그리스어 ‘처단하다’는 고대 페르시아의 극형 방식인 ‘둘로 잘라 버리다’를 뜻하기에,
불충실한 종의 최후는 그만큼 비참하리라는 것입니다.
충실한 종이 되어 종말을 깨어 준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복음적 담화문인 산상 설교의 결론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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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변을 보면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외모까지 멋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계획도 훌륭한 분입니다.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려는 분들입니다. 대학원에 다녀서 자격증을 얻기도 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먼저 나오곤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님이 자신의 능력을 못 알아본다고 합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간 곳은 너무 작다고 이야기합니다. 주교님께서 잘 못 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큰 본당에서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좌 신부님을 만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능력도, 재능도, 외모도 불평과 불만을 만나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주변을 보면 또 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분들입니다. 노래도 거의 자유롭게 부르고, 말도 평범하고, 주어진 대로 사는 분입니다. 욕심이 많지 않아서 굳이 다른 것을 새롭게 배우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웃고,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엄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배울 것이 많다고 합니다. 온유한 본당 신부님을 만나면 사제생활이 기쁘다고 합니다. 작은 본당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합니다. 신설 본당에서는 성전 건축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을 때는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님이 오시니 같이 식사를 해서 좋다고 합니다. 늘 감사의 씨를 뿌리니 감사의 꽃이 핍니다. 웃음의 씨를 뿌리니 웃음꽃이 핍니다. 성당을 3개나 신축했는데도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발이 더 빠른 분입니다. 성실함이 감사를 만나면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는 도그마(신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선포한 지역 교회는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려면 많았을 것입니다. 남을 탓할 수도 있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늘 기도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시련도, 갈등도, 분열도, 박해도, 칼도,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사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도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쁨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한 씨는 백배, 천배, 만배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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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 이수철 신부님.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어디에?
- 주님이, 내가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다 -
미래를, 희망을, 길을, 문을, 보물을 찾듯이 요즘은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좀체로 미래가 희망이 길이 문이 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많은 분들이 마음에 드리운 어두움에 답답해하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많이들 불안해하고 두려워 합니다.
올해 1월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의 재난이 계속되고 있으며 수해로 인한 손실도 매우 큽니다.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어디에?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이 내가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라는 결론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닮아갈 때
바로 우리 하나하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주님처럼, 나 스스로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 되어 하루하루 성인聖人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식사후 산책할 때 동요를 부르는 재미로, 행복으로 삽니다.
언제까지 일른지는 모릅니다만 시냇물이 마르고 물오리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되리란 예감입니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동요가 ‘새나라의 어린이’ ‘섬집아기’와 더불어 보물처럼 반갑고 힘이 납니다.
이 세곡은 산책때 마다 부르는 필수곡이기도 합니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지금 보니 보통 동요가 아닙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 꾿꾿이, 반듯하게 살아가는 보물같은 이들을 상징하는 ‘아기’요 ‘옥수수’입니다.
정말 힘이 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밝고 힘찬 참 좋은 동요입니다.
모름지기 동요는 노래는 시는 글은 이래야 합니다. 생명과 빛을,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어제 산책중 숨어 크게 자란 하우스 옆 그늘밑 호박이 숨겨진 보물처럼 반갑고 고마워 사진을 찍어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데레사! 요즘 힘들겠어요! 믿음의 힘 선물 받으시고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요즘 많이 힘들었는데 선생님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어 눈물이 나네요. 매달린 호박처럼, 저도 주님께 매달려
선생님 강론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요즘은 눈물이 많아졌어요. 선생님!”-
“믿음의 힘을 선물받으니 기운이 납니다. 힘찬 하루를 살겠습니다.”
“어머, 신부님! 보기만해도 힘이나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호박 사진을 나누며 여러분의 답글을 보니 저도 힘이 났습니다.
이런 숨겨진 호박처럼 하느님께 매달려 믿음으로 살아가는 내가 바로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요 성인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충분한 은총을 주셨고 주시고 있고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니카 성녀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큰 감동을 선사하는 지금도 곁에 살아있는 듯 느껴지는 1700년전 성녀입니다.
성녀에 관한 주옥같은 일화는 참으로 많습니다. 길다 싶지만 가능한 많이 인용합니다.
-‘성녀의 남편 파트리치우스는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결코 성녀를 때린 적은 없었다. 신심깊고 순종하는 성녀를 존경했으며 날로 유순해져 세례까지 받았다. 까다로운 시어머니도 성녀 편이 되었다.’
‘매일 교회 전례에 참석하여 인내의 덕을 키웠고 힘든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들에게는 “네가 네 혀를 잘 다스린다면 너는 결코 남편에게 두드려 맞는 일도 없을 것이며 남편도 언젠가는 더 좋아질 것이다.”’
‘모니카는 주교에게 아들의 비행을 고쳐달라고 청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주교는 성녀에게 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을 당부하며 다음 같은 말로 격려했다. “이렇게 많은 눈물의 아들이 멸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어 ‘고백록’에서 성녀의 아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입니다.
-‘저 여종은 몸으로 저를 이 현세의 빛 속으로 빚어주고 마음으로는 제가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하는 성녀의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마당에 여기서 아직도 뭘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승살이에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나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하느님께서 나한테 과분하게 베풀어 주셔서 네가 지상 행복을 멸시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을 보게 해주셨구나. 그러니 여기서 내가 더 뭘하겠느냐?”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
성인축일은 성인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각자 고유의 성인으로 살아가라 우리를 격려하고 분발케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미래가, 희망이, 길이, 문이, 보물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이미 거룩한 성도聖徒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진리 말씀이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총과 평화의 선물에 늘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여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이 기다림의 기쁨이, 희망이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미래요 희망이요 길이요 문이요 보물이요 성인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복음 말씀처럼 깨어 사는 것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의 기쁨에 깨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해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약간 몇마디 빼고 첨가했습니다. 구원의 행복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주님을 기다리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맡겨진 책임에 충실함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주셨습니다.
미래는 희망은 길은 문은 보물은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오늘 나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미래로 희망으로 길로 문으로 보물로, 당신의 성인으로 살게하십니다.
“주님,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넘치는 당신 은혜를 기억하고 알리며,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리이다.”(시편145,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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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녀 모니카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섬기는 이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타 중인 주인을 맞이해야 하는 종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종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종이라면 그 "때"를 모르기에 항시 준비를 하는 한편, 또 모르기에 기대와 설레임도 품게 됩니다. 긴장과 희망은 "무지"의 양면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마태 24,45)
주님께서 우리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길 바라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그런 존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대접 받고 편하려고 우리에게 부당하고 힘든 일을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그분이 먼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십니다.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편 121,3)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 졸음도 잠도 마다하고 백성 곁에 머무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하셨듯, 우리 삶이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동행하셨지요. 그분은 우리가 당신 현존을 알건 모르건 개의치 않으시고 묵묵히 당신의 사랑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동반자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머무르고 계시지요.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당신을 희생제물로 대속하시면서까지 철저히 종처럼 되셨습니다.
께어 있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바람에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닮아갔으면 하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수행하시면서 기쁘고 행복했던 종의 깨어 있음과 기다림, 충실한 사랑을 우리도 맛보게 해 주고 싶으신 겁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서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성실하신 분이십니다."(1코린 1,9)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역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합니다.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은 신부인 백성의 배신과 냉담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충실함은 본래 하느님의 속성이지요.
"그분께서 ...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1코린 1,9)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목적을 "친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교는 '사귐'이고 '알아감'입니다. '나눔'이고 '서로를 주고받음'이지요. 마주한 두 존재가 차츰 서로 안에 스며들어가서 깃들다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일치'에 이르지요. '하나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일치하자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기시니 우리도 기꺼이 그분 곁자리로 내려가서 종이 되어야 주님과 일치가 가능하겠지요. 그분께서 성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충실히, 또 그분께서 지혜이신 것처럼 우리도 슬기롭게, 부족하나마 까치발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닮아보려 애쓰는 행복한 종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1코린 1,5)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종이 되었다고 해서 비굴해지거나 빈한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풍요를 누립니다. 종이면서 주인을 나누어 받았기에 그렇지요. 그분과 관계 맺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녀 모니카와 함께 행복한 종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님과 누리는 친교와 일치를 향해 오늘도 깨어 섬기고 기쁘게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 24,46)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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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녀 모니카 기념일>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
'끊임없이 간청하신 어머니!'
오늘은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이신 성녀 모니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많은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녀들의 회개를 위해 애쓰고 계시는 모든 어머님들도 기억합니다.
성녀 모니까는 위대한 어머니이십니다.
남편을 개종시키고, 아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고백록'을 쓰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한 때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영지주의에 속해 있었던 '마니교'라는 이단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이런 아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신 분이고, 어머니의 이러한 노력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한 어머니 모니카의 이런 끈질긴 기도는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11,8)
끊임없이 간청하신 어머니와 이 간청을 들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에 힘입어, 마침내 아들 아우구스티노는 방탕한 생활을 접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멋진 어머니 모니카!
자랑스런 어머니 모니카!
끈질긴 어머니 모니카!
우리도 이런 모니카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종말의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회개와 너의 회개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지금 여기에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할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나 자신의 회개와 너의 회개를 위해 노력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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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이영근 신부님.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앞의 23장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불행선언을 통해 심판하신 다음,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신 다음, 종말에 관한 “도적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올 것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 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깨어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3-44)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 어떻게 깨어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는 ‘충실함’이요, 다른 하나는 ‘슬기로움’입니다. 곧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깨어있음”의 표시임을 말해줍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14,45)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45)과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맡겨진 사람과 일에 충실함이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께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종’에게는 바로 이러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맡겨진 이와 맡겨진 일을 주인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맡겨진 양식’,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일 자체도 그분의 일이며, 그분이 맡긴 일입니다.
이처럼, “깨어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분께 대한 신뢰요, 그분의 뜻에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그러기에 ‘충실함’과 ‘슬기로움’은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과 “깨어있음”에서 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소홀이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소서,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 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소서,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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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뜻은 수면제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을 때와 잠자고 있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깨어있을 때는 있고, 잠잘 때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식’입니다.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자각몽’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꿈을 꾸면서도 의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꿈이네. 그럼 이쪽으로 날아볼까?’라고 하면서 꿈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잠자면서도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깨어있으면서도 잠자는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리고 그 선악과를 아담이 받아먹을 때는 깨어있으면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잠을 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어도 내 자기 뜻에 묶여있으면 잠자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뜻’입니다. 내가 내 뜻을 추구하고 있는지, 혹은 그 뜻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의식해야 합니다. 물건을 놓을 때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디 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나는 항상 내 뜻을 만들어 나를 잠들게 만듭니다.
'1408’(2007)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은 한 작가가 겪은 무서운 일을 담은 영화입니다. ‘1408’은 한 호텔의 방 호수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1시간 내로 모두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사후세계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그 방에서 자보기로 합니다. 호텔 지배인은 말리지만 주인공의 고집이 너무 셉니다. 그래서 좋은 코냑 한 병을 선물로 주고는 허락합니다.
그 방에 들어간 주인공은 온갖 환상에 시달립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딸을 잃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해야만 한다는 죄책감과 딸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 방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고 죽은 딸이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시체로 변하고 오랜만에 가슴에 안은 딸은 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납니다. 기쁨만큼이나 고통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방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방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지배인이 준 코냑에 불을 붙여 방을 태워버립니다. 자신도 연기에 질식되어 갑니다. 감독판에서는 소방관에 의해 주인공은 가까스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1408호에서도 자유로워지고 과거의 집착에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1408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깨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자아를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아를 태워버릴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는 것 같아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자아의 욕구에 더는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아와 반대되는 새로운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자아와 반대되는 의식적인 행동을 ‘오른쪽’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항상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깨어나게 됩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 장애 아이들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50m 달리기 경주가 열렸고 한 소녀가 1등을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나 1등 했어!”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너무 지나치게 감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로소 자신의 방에서 탈출하여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 없습니다. 나를 달리게 만드는 누군가의 뜻을 의식하고 그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나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믿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다면 뱀의 뜻을 따라줄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식솔들을 맡기고 제때 양식을 내주게 하고 떠났다면 주인이 없어도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먹고 마시며 식솔들을 괴롭히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매 순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것이 지옥 같은 자아가 만든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를 깨어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주님의 뜻입니다. 자아의 욕구는 수면제이고 주님의 뜻은 각성제와 같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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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니카 성녀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뭉클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태극기의 위엄과 가치가, 소위 '태극기 부대'라는 사람들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도 가슴 속에 태극기를 품고 다니시던 독립 운동가들이나 애국지사들이,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시며 통탄하실 것을 생각하니, 후손된 사람으로서 차마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신성하고 존엄한 태극기의 격을 심각하게 실추시키고 있는 그들을 향해, '태극기 부대' 라는 말 대신, '태극기 모독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정이 솟구치는 '엄마'라는 단어가, 일부 몰지각한 몇사람들, 소위 '엄마 부대' 라는 사람들 때문에 그 의미와 가치가 무참히 훼손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태는 다른 사람들이 부리는데 이 큰 부끄러움은 왜 우리들의 몫이어야 합니까? 세상의 수많은 위대한 엄마들을 웃프게 만드는 일당들을 '엄마 부대'라는 용어 대신 '엄마 모독 부대'라고 칭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대한 엄마이신 모니카 성녀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대학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란 큰 인물 뒤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희생과 헌신, 불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다 다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방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때로 타일러도 보고, 때로 야단도 치고, 때로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밤 새워 기도도 해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아들 때문에 밤낮없이 울고 다니던 그녀에게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문제 청소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와 타락 앞에 취한 어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영웅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 아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한 가지 전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長期戰)’이었습니다. 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무한한 인내,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모니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방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타락의 세월은 점점 길어지고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남편 역시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고 매일 울고 다니다보니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요 추앙받는 대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오늘 모니카 성녀가 우리 가정에, 또 교육자들에게 건네시는 메시지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존재 자체로 고통의 원천인 자녀나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 혹독한 마음 고생을 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즉시 모니카 성녀를 바라보면 됩니다. 매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가요? 일년 이년이 아니라 16년 동안,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절히 기도해오셨나요?
혹시라도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무시한 채 내 의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를 위해 단기적인 전략뿐만 아니라 중장기적 전략도 세워놓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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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7. 성녀 모니카 기념-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모니카 성녀는 교회학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332년 북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 알제리 수크아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심 깊은 모니카는 남편 파트리시오를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들이 주교 암브로시오로 부터 세례를 받게 한 것도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눈물어린 헌신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모범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푸신 은총과 감사, 깨어서 집 주인을 기다려라.'입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난 이들과의 대화, 일, 사건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생활, 허물과 그릇됨.. 복음적 생활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나의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촌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 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1코린1,3-9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대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는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
마태 24,45-46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그리스도 제자로 살아감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 믿음, 은사, 재능, 재물 등을 통해서 시간과 장소, 건강과 여건이 주어지는 한 그곳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게 준 이런 선물들은 그것을 편함과 즐김 등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나누며 또한 이것을 위해서 연대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공동선을 위한 사랑의 나눔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와 그가 하느님께로 회두하도록 눈물을 흘리며 두드리고 찾았습니다. 그의 은사를 나누었습닏. 하느님은 어머니 모니카의 간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복음에서 행복한 종은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일하고 있는 종! 이었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긴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실하고 충실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 기쁜 소식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여 참 행복을 얻습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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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7일 목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매일미사
_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https://youtu.be/t_BvvnyEVy8 (30:10)
•2020. 8. 27.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8월 27일 목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매일미사
Memorial of Saint Monica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집전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42-51
***** 신부님 강론 9:55 부터 14:00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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