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의 시대
김보람
선 없이 전화를 하고
선 없는 이어폰을 낀다
파란불 깜빡깜빡
곧바로 연결되는 무선의 시대
땅속으로 숨어 버리는 선들
불편하여 사라지는 선들
그래도 두 손만큼은 꼭 잡자
우리 마음 그래야 연결되지
하트 시그널 깜빡깜빡.
-《동화향기·동시향기》 (2021 봄호)
비밀번호 1950
김완기
우리 집 아파트
시골 할머니 오실 적마다
엄마 아빠는 일터 가고
우리 남매는 학교 가고
집 비어도 걱정 없대요.
1950년 6.25 피난 길
길가에서 태어났다는 할머니
그 날을 잊지 못한대요
비밀번호도 1950.
-『들꽃 백화점』 (2022 아침마중)
통하는 사이
김은오
일 마치고도
밭둑에 오래오래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
운동장에서 멍 때리고 있다
학원에 늦는 내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 준다
운동장이 자꾸 말을 걸지?
공이 자꾸 더 놀자 그러지?
채소들도 그래
돌아오려고 하면
뒤에서 자꾸 불러
-《동시마중》 (2023 5·6월호)
드디어 때가 됐어
김현서
우리끼리만 잘 수 있는 밤
어른들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밤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고릴라를 불러내 함께 노는 밤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 맞는 밤
먼지 냄새가 나도록 실컷
베개 싸움을 하며 깔깔거리는 밤
분명 우리밖에 없는데
하마 콧구멍처럼 까만 창문으로
흰 천을 두른 유령이 보이는 밤
꼭 닫아 둔 문이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밤
어른들이 나타나면
사라지는 밤
-《동시마중》 (2023 3·4월호)
내가 키우는 달
류경일
나는 달을 키우고 있다
지난 겨울밤 동장군이 난리 칠 때
학원 다녀오는 내 뒤를 따라
내 방까지 들어와 버린 초승달을
엄마 허락도 없이 몰래 키우고 있다
먹이도 목줄도 필요 없고
“월월” 짖지도 않는다
얌전히 내 눈빛만 먹고 살아서
하늘에 풀어놓고 키워도 걱정 없다
어두운 밤길 나서면
나만 졸졸 따라 다니는 달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자라는 모습만 보아도
키우는 맛이 달달한 달
추운 오늘 밤에는 달달달달
떨고 있을 야윈 그믐달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 주었다
오래
-《동시 먹는 달팽이》 (2021 봄호)
나, 비 왔다
박정식
텃밭 채소들과 비는
친구 사이
무야! 나, 비 왔다!
놀다 가고
배추야! 나, 비 왔다!
하더니 요즘 안 온다.
상추, 고추, 파, 마늘이 기다려 봐도
안 온다.
딱했는지
물통 든 물뿌리개가
텃밭으로 들어간다.
얘들아! 나, 비 왔다!
-『얘들아! 나 왔다』 (2023 오늘의 좋은 동시 푸른사상)
사진관에서
오선자
할머니 생신날
가족사진을 찍었어.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는데
“다 됐습니다.
할머니,
주름살은 살짝 지워드릴게요.”
“아 그대로 두세요.
주름살 만든 세월 덕분에
우리 손주들 얻었는데.”
-《동시발전소》 (2021 가을호)
행운이 올까
윤동미
네 잎 클로버 무더기를 발견했다
정신없이
한 움큼을 뜯었다
그중에서
예쁜 것만 남기고 못난 건 버렸다
아깝지도 않았다
책갈피에 끼우며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얻은 것에도
행운이 찾아올까?
-《시와소금》 (2022 겨울호)
밤 한 마리
이상교
깜깜한 한밤중이
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낳았다
환한 대낮에
깜깜한 밤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동시빵가게 32호》 (2023 2)
그림자 빌려드려요
이화주
큰 나무는 큰 그림자
작은 나무는 작은 그림자
사자도
기린도
고양이도
그 그림자 빌려, 쉬었다 간다.
그 그림자 돌려주고 간다.
누군가
또 쉬었다 가라고.
-《아동문학평론》 (2023 봄호)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