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나만 아는 말이 있다. 나만 아는 마음이 있다.
예전에는 그 이야기를, 그 말을, 그 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알아주길 원해서) 글도 쓰고, 대화도 하고, 설교도 하고 했었다.
개중에는 공감하는 이도, 귀 기울이는 이도, 들여다 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 이야기가, 내 말이, 내 마음이. 나와 같은 색깔, 나와 같은 크기, 나와 같은 밀도가 되는 이는 없었다.
당연하다. 그는 내가 아니니까. 나도 그가 아니니까.
시간이 꽤 흘렀다. 15년…7년…1년…
쌓인 시간들로 인하여 알아차린 두 가지가 있다.
아무리 글을 쓰고 대화하고 설교를 해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언젠가는 알게되겠지라는 소망을 두고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나는 꽤 느긋해졌다.)
반면 나만 아는 이야기를, 나만 아는 말을, 나만 아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래저래 표현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나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천지 그 어디에 나만 아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직까지 남아 있겠는가?! 더더욱이 더이상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 이 말, 이 마음을 각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알리고 있고, 또는 삭이고 있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으로 현재의 자신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알려주는 존재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애타게 찾다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진짜 나는, 진짜 그는. 내가 알아차린 그 이성과 감성의 주체인가? 산물인가?
만약 주체라 한다면 나는 나를, 그를 알게된 것인가?
반면 산물이라면 나는 나의, 그의 이성과 감성을 통해 그것을 알게된 것인가?
표현되어진 그래서 알아차린 그 이성과 감성은 나의, 그의 어제와 오늘뿐이다.
내일의 나는, 그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오직 한 분, 오직 사랑, 사랑이신 하나님 말고는 알 사람이 없다.
단, 사랑하면 알 수도 있다. 사랑이란 나를 알고 그를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자신을 있는 힘껏 사랑해 주는 이를 결국 어디론가 떠나보내는 것이,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나만 아는 이야기, 나만 아는 말, 나만 아는 마음은 이성과 감성 너머에서 잉태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나도 나를 잘 모르는 것이다.
잉태된 그것은 내 안에서 출산을 기다린다. 이미 알고 있는 그 누군가와의 만남을 위해서…(바란건데 출산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나 자신이길)
이성과 감성 너머는 머지않는 내일이다. 인간의 어제와 오늘은 항상 내일을 포함한다. 내일이 되면 내 이성과 감성의 실체인 나를, 그를, 또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때로 내일이 오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도 인생이다. 이 인생을 뒤늦은 후회, 가슴저미는 미련이라고도 부른다.
그만 아는 이야기와 그만 아는 말과 그만 아는 마음을 알아주는 사랑이 내 안에도 있기를 바란다.
내 이성과 감성 너머의 나라는 사람을 알아봐 주는 사랑이 있기를 바란다.
그와, 그들과 함께 이성과 감성 너머를 해아려보는 것이 신앙이다. 그 너머를 알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란 오늘의 이성과 감성을 통해 내일의 나에게서, 그에게서, 그것에게서 자유해지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늘의 이성과 감성 너머에서 잉태되는 나만의 이야기와 말과 마음이 나를 ‘나만’이라는 것에 고립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나만’의 또다른 이름은 교만, 불통, 몰이해, 염려, 불행 등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또다른 이름은 행복, 희망과 확신, 포용, 공감, 겸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