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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 너, 삶
- 안희연의 당근밭 걷기에 대하여
현순영
1. 다성성과 욕망, 지금의 나를 인정하려는 마음
안희연의 시집 당근밭 걷기에서 가장 먼저 파악되는 특징은 다성성(多聲性)이다. 이 시집에는 여러 존재들의 말, 목소리가 공존하는 시들이 많다. 시의 화자가 자신의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말을 직접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하거나 상상하면서 그들을 발화(發話) 주체로 등장시키는 시들이 많은 것이다. 예컨대 「부록씨 삶으로 데려오기」에는 시적 화자와 함께 부록 씨(당신), 연인들, 방문객, 조각가 등이 모두 발화 주체로 등장한다. 그런데 발화는 대개 욕망의 드러냄이다. 말해졌거나 말해지고 있거나 말해질 ‘말[語]’은 발화 주체의 욕망의 표현(변형, 왜곡이라 해도)이거나 그림자다. ‘말’과 욕망의 관계는 연주와 악보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당근밭 걷기의 다성적인 시들에는 여러 발화 주체의 욕망이 함께 드리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표제시 「당근밭 걷기」를 보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두더지의 눈//나는 있다//달빛 아래 펼쳐지는/당근밭//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 「당근밭 걷기」 전문
이 시의 발화 주체는 시적 화자 “나”, “그”, “두더지”이다. “나”는 자신의 말을 하면서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고 간접 인용하기도 하며 “그”를 발화 주체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의 눈빛”과 두더지의 “눈”은 말[語]과 같은 값을 지닌다. 따라서 “나”는 말과 눈빛으로, “그”는 말로, “두더지”는 눈으로 각자의 욕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 욕망은 당근에 대한 욕망이다.
“그”는 “나”에게 넓은 땅을 주었다. “나”는 넓은 땅을 갖게 된 것이 처음이고 믿기지 않아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그 땅에 무엇을 심어 볼까 궁리하며 그것이 무엇이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넓은 땅과 함께 뭔가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된 것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라는 문장은 “나”의 상상 속에서 그 욕망이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나”의 궁리와 바람과 상상은 부풀지 못한다. “그”가 “나”에게 당근의 색을 설명하며 그 땅에 당근을 심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당근에 대한 “그”의 욕망을 암시한다. “그”는 그 욕망을 “나”에게 전이시켰다. “나”는 자신이 바란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미세하게 휘청했다. 그러나 “나”는 곧 당근을 기르기로 한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이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눈빛”은 당근을 바라는 “나”의 욕망의 드러남이다. 그런데 당근이 “나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욕망의 대상이 그것을 욕망하는 주체의 내면, 자신을 향하는 욕망의 구조와 형식을 간파하고 스스로를 교묘히 세련해 가며 그 욕망을 증폭시키는 일. 자본주의, 상업주의 세계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로서 온갖 상품을 욕망한다. 그런데 상품은 우리의 욕망을 간파한다. 우리는 주체이고자 하나 사실은 객체다. “나의 당근들”이라는 표현은 ‘내가 욕망하는 당근들’이라는 뜻이면서 ‘나를 욕망하는 당근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후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나의 당근들”의 뉘앙스는 ‘나의 주인님’의 뉘앙스와 비슷해진다.
당근을 재배하는 것은 두더지를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당근은 두더지에게도 욕망의 대상이다. “나”가 수확한 당근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준 뒤 마주하는 “두더지의 눈”은 (두더지의 시력이 매우 안 좋다고 해도) 당근에 대한 그것의 욕망의 드러남이다.
「당근밭 걷기」를 한 예로 살필 수 있듯이, 안희연의 시집 당근밭 걷기의 여러 시에서 확인되는 다성성은 여러 존재가 발화로써 각자의 욕망을 드러낸 결과이다. 다성성은 한 화자가 자신의 말과 목소리로 시 속 시간, 공간, 상황을 장악하고 주재하는 정통 서정시의 특질과는 거리가 멀다. 당근밭 걷기의 다성적 시들의 화자는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적 주체의 지위를 스스로 약화하거나 포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를 세계화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를 자아화하든 자아를 세계화하든 자아는 변형될 수밖에 없다. 그 변형은 자기초월적 확장일 수도 있고 자기성찰적 축소일 수도 있으나 현재의 자아가 부정되거나 극복되는 사태라는 점에서는 같다. 당근밭 걷기의 다성적 시들의 화자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다성적 시들의 화자뿐만이 아니다. 단성적(單聲的) 시들의 유일한 화자는 그러한 의지를 더욱 또렷이 언표한다. 「야광운」, 「반건조 살구」, 「파랑」 등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야광운」은 화자 “나”가 “여름”에게 쓴 답장이다.(「둘레석」을 참고하면, “여름”은 “나”의 친구의 이름으로 봐도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이 편지의 끝에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라고 쓴다. 「반건조 살구」의 화자인 살구는 “살구의 색감은 살구만이 낼 수 있습니다/식탁보로 속이지 않는 식탁을 원해요”라고 말한다. 「파랑」의 화자도 “가만히 가만히/내가 나를 들으면 돼요”, “서둘지 않아요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까”, “내가 나를 일으켜 걸어요 숨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당근밭 걷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안희연의 시적 자아가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인 시의 화자들을 통해 자신을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는 마음을 표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특징과 그 주변에 관해 더 얘기해 보자.
2. 삶과 죽음, 나
자신을 현재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는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근밭 걷기』에만 국한해 말하자면, 안희연의 시적 자아에게 삶은 무언가를 쉼 없이 겪고 견디는 것이다. 즉 무언가의 끊임 없는 자극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희연의 시적 자아에게 자신을 현재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는 마음은 살기 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터트리기」에서는 온갖 것들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날아든다. “그들”이 “야구공”, “돌”, “신발”, “못”, “유리병, 화분, 흰 벽을 쓰다듬던 장갑에서부터 먹다 만 사과” 등등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나”는 던지기가 “이곳의 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파괴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들”은, 놀랍게도, 수십 명으로 분열된 “나”이다. “그들”이 온갖 것을 계속 던지는 이유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인데, 그 기억이란 “여름”의 기억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왜 던져야 하는지 물을 수 없고, 그 기억은 뭔가를 던진다고 해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래도 “그들”은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던질 수밖에 없음’을 견디는 것이다. 당연히 “나”도 ‘투척 당함’을 견딘다. “오직 견딜 것./그것이 이곳의 룰.”
「썰물」의 “나”가 쉼 없이 겪고 견뎌야 하는 것은 일상이다. 일상은 바닷물이다. 그것은 밀물처럼 밀려든다. 그런데 일상은 그것을 겪는 “나”를 조금씩 쓸려나가게 하고, “나”로부터 “나”를 조금씩 빠져나가게 하므로 썰물과도 같다. “나”는 쉼 없이 일상을 겪고 견디는 것을 물가에, 물속에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상이라는 바닷물은 “나”가 자기만의 공간인 지하실로 가는 계단도 허물어뜨렸다. “나”는 일상이라는 바닷물 속에 너무 오래 있으면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손과 발이 쭈글쭈글해져 가지처럼 되리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내 안에서/내가 다 빠져나간 뒤에도/끝끝내 남아 있는 내가 있다면//가지라고 불러 볼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이렇게도 바꾼다. “내 안에서 내가 다 끓어넘친 뒤에도/끝까지 끓고 있는 내가 있다면/타락죽이라고 불러볼까” 집요하고 막강하게 계속되는 일상을 겪고 견디되 끝까지 자기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라 여겨진다.
「발광체」는 안희연의 시적 자아가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뭔가를 쉼 없이 겪고 견디는 삶을 통과하며 자기를 넘어서겠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주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는 돌들이 “나”를 향해 끊임없이 굴러온다. 돌들은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돌들이 “나”를 향해 계속 굴러온다는 것은 “나”의 내면에서 발화의 욕망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발화의 욕망이 왜 계속 생겨날까? 발화의 실패 때문이다. “종이와 펜은 넘쳐나는데/마음이 도착하지 않아서”(「야광운」) 겪는 발화의 실패. 그런데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발화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다는 뜻이다. 쉼 없이 말하겠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걸고 쓰느라 부서진 마음”(「긍휼의 뜻」)을 지닌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뭔가를 쉼 없이 겪고 견디는 삶을 통과하며 자기를 넘어서려는 존재의 모습은 「독 안에」에서는 갇혀 있지만 갇힘을 견뎌 극복하려는 존재의 모습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독 안에」의 “나”는 독(화분)에 심어진 고무나무이다. 고무나무 독을 집안에 들인 주인은 그것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하며 여기저기로 여러 번 옮겼다. 고무나무는 독 안에서 사계절을 보냈다. 독은 약하다. 고무나무가 뿌리에 불끈 힘을 준다면 깨질 수도 있다. 그런데 고무나무는 독을 깨지 않는다. 다만, 무성해진다. 연두를 밀어 올리기 위해서이다.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시집의 3부에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기록기」의 “나”는 “심전도 그래프의 바늘”인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깨어나라고 말한다. 「단차」와 「본섬」의 화자는 망자를 잊지 못해 찾으러 나선 자들이다. 「본섬」의 화자는 망자의 세계에 상상으로 도달하나 그곳에선 손가락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다. 「단차」의 화자는 살아서는 내려갈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단이 있어서 죽음의 세계에 가 닿지 못한다. 「북극진동」의 “나”는 할아버지가 죽던 순간을 회상한다. 「북 치는 소년」에서 죽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나”는 누군가에게 “작은북”이라 불리며 그와 대화한다. 「진앙」의 “나”는 죽은 너를 그리워하며 견디는데, 견디는 것을 걷는 것에 비유한다. 「망각은 산책한다」의 “당신”은 사별한 누군가를 망각하려 애쓰며 일상을 회복해 나간다. 「확대경」의 “나”는 “덜 굳은 시멘트 위”에 죽은 자처럼 누워, 이미 죽은 “너희”를 추모한다. 이런 시들도 좋지만 당근밭 걷기에 실린 죽음에 대한 시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2부의 「나의 시드볼트」와 4부의 「둘레석」이다. 이 두 편은 ‘메멘토모리(memento mori)’의 속뜻, 즉 죽음은 늘 의식됨으로써 삶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시드볼트」의 “나”는 금고 속 씨앗처럼 웅크린 “그”로 인해 늘 죽음을 의식한다. “그가 다녀간 후엔/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방안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개들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시름시름 앓고/온 벽은 이끼로 뒤덮이지만” “나”는 그가 죽음을 말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게 너의 영원이야.” “그”는 “나”의 영원이 한 방울씩 새고 있다는 것, 그 끝은 영원의 고갈, 죽음이라는 사실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영원의 누수를 멈추고 싶지 않다.
「둘레석」의 “나”는 친구 “여름”이 앞니를 뽑은 일을 계기로 하여 삶이 죽음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말한다. “둘레석은 무덤을 에워싼 돌을 말한다/둥글 수도 있고 각질 수도 있으나 무덤보다 높을 수는 없다/무덤보다 낮은 돌은 무덤보다 낮은 돌의 일을 한다/흩어지더라도 천천히 흩어지도록 둘레의 일을 한다” 둘레석은 무덤이 있기에 존재한다. 둘레석은 무덤, 즉 죽음을 늘 의식하며 삶의 자세나 방식을 갖추어 가는 존재의 비유이다. 죽음은 흩어짐이다. 둘레석은 그 흩어짐을 막을 순 없어도 “천천히” 이루어지게 한다. “천천히”는 ‘느리게’이자 ‘헛되지 않게’이다.
이처럼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당근밭 걷기의 죽음에 대한 시들에서 자신의 페르소나인 화자들을 통해 죽음을 늘 의식하며 살고자 하는 ‘메멘토모리’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 마음이 있기에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자신의 지금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미래가 중요하다는 판단,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자신을 미래를 위한 도구로 쓰거나 좀먹지 말고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미래도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도중에 거치는 시간이므로. 죽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고민하고 뭔가를 남기기 위해 분투하는 삶은 뜻깊지만 메멘토모리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삶은 죽어서도 영원히 기억되고 살려는 불멸의 욕망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3. 너와 나
자기 자신을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이 생겨난다.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자신을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하듯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 나아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때 다시 자기 자신을 깊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청귤」을 보자.
「청귤」의 화자인 “나”는 “당신”이 오늘 청귤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청귤(“당신”)의 말과 표정을 다음과 같이 현재형으로 생생히 옮긴다. “설익은 것처럼 보이지만/제법 달다고/그 푸르뎅뎅함이 바로 나라고//청귤은 내게 일렁이는 무늬로 말하네요/당신은 나를 제단 위에 올릴 수 있고/구둣발로 짓이길 수도 있지만/나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공평하다고//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이라고/물이면 물, 불이면 불이라는 표정을 짓는군요” 청귤(“당신”)은 자신은 자신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라는 표현은 인상적이다. “나”가 당신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당신”이 지옥이어서 아니라 “나”가 지옥이기 때문이라는 뜻, “나”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상대와의 관계에서 고통을 느낀다면 그 원인은 상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른데, 상대의 자극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심리에 의한, 우리 자신의 반응 양상이다.
“나”는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일 뿐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청귤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흰 천으로 잠시 청귤을 덮어둔다. 그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밤을 “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밤은 자기성찰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바라보기/조각내지 않기//보여줘도 모르는 사람 되지 않게”. 이것이 성찰의 결과이다. 즉 “나”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고 성찰하며 “당신”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나”는 흰 천을 걷어 “당신”을 본다.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이제 “당신”은 청귤이 아니라 “사랑”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이 “당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어린 나를 물고 한 발 한 발 오고 있어요/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무슨 뜻일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할 때, 스멀스멀 등장하여 결핍을 채워 달라고, 상처를 아물게 해달라고 보채는 ‘어린 나’, 그 ‘미성숙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힌다. 그 사람의 가슴에 화살을 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어린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청귤」의 “당신”이 사랑하며 동행해 온 존재도 “어린 나”이다. “어린 나”에게 상처받은 “당신”은 이제 “어린 나”를 물고 와 “나”에게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청귤」은 “나”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자신과 “당신”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미성숙, 결핍과 상처를 응시하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자신을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는 안희연의 시적 자아는 자신과 타인의 단절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상대의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의 소중함을 자주 표현한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율마」, 「청혼」, 「긍휼의 뜻」, 「자귀」를 보자.
「율마」의 화자 율마는 자신을 데려와 키우는 “그”의 슬픔을 감지하며 “그”의 “갈퀴”, “주머니 속 조약돌”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슬픔이 작동하는 회로를 아는 사이”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청혼」의 화자인 “나”는 “당신”에게 “오세요, 나의 집으로”, “우리 함께 산을 옮겨요”, “우리의 슬픔을 지켜요”라고 말한다. 시간의 힘으로 식탁보는 더러워지고 꽃병 속 꽃은 시들고 창문 밖 산은 천천히 깎이겠지만 그로 인한 슬픔을 함께 느끼고 극복하며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긍휼의 뜻」의 화자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은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라고, 이제 자신은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고 담대한 척 고백했지만 조금은 슬펐다. 동시에 “나”는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드러냈던 순간들을 후회했다. (“나”는 그 슬픔을 “철가루”에, 그 슬픔을 드러냈던 순간들을 후회한 일을 ‘자석으로 철가루를 찾아 끌어모으는 일’에 비유한다.) 그러다 “나”는 “너”를 만났다. “너”도 “나”와 같은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다. 둘은 모두 “(모든 것을) 걸고 쓰느라 부서진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긍휼의 뜻」은 매우 긴 시이다. “나”와 “너”가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고 서로를 북돋는 사귐의 깊이가 “나”의 발화의 양으로, 시의 길이로 구현된 것이다.
「율마」, 「청혼」, 「긍휼의 뜻」의 화자가 슬픔에 공감하는 일, 슬픔을 함께 견디거나 극복하는 일에 관해 말한다면, 「자귀」의 화자는 아픔에 공감하는 일에 관해 말한다. 이 시의 화자 “나”는 자귀가 잎을 떨구어낼 때 느끼는 아픔을 함께 느낀다. “멀리서 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겪고 있다/잎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귀가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자귀와 서로 바라보고 “죽지마 살아 있어줘”라는 말을 건네며 사계절을 함께했다.
4. 다시, 삶
「립살리스 레인」과 「가는잎향유」는 안희연의 시적 자아가 자신의 지금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신과 타인을 단절시키지 않고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며 지향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들이다. 그 삶은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다.
「립살리스 레인」의 화자 “나”는 자신이 립살리스 레인을 그것 자체로 보지 않고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를 맞을 땐 비를 맞아야지, 왜 자꾸 거울을 찾아요?”라는 립살리스 레인의 말은 사실 “나”가 자신을 성찰하는 말이기도 하다. 립살리스 레인을 그것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것이 미래를 자연스럽게 열어 가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 생각은 다음 부분에 함축되어 있다. “키 작은 아이가 찬장 속 곶감 단지를 발견한다면/높이를 계산하기 전에 일단 손부터 뻗을 것이다//아이는 튀어오른다/곶감을 먹을 땐 곶감을 먹는다/그것도 아주 맛있게 남김없이/이미 한 손은 미래의 꿀단지 속에 집어넣고”
「립살리스 레인」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는 마음과 현재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면 「가는잎향유」에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서 나아가 사랑하려 하며,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려 하고,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가는잎향유」는 당근밭 걷기의 시 중 가장 아름답다. 당근밭 걷기의 다른 시들은 모두 「가는잎향유」를 향하고 있다.
화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선 비슷한 냄새가 나요. 무언가를 태울 때 나는 냄새. 옷에 스며든 불과 재의 기운. 그런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은밀하게 부풀어요.//당신은 자주 멈춰 서는 사람이군요. 당신은 나에게서 안개 숲을 보고 있네요. 강물 위를 떠가야 할 쪽배가 왜 거기 멈춰 있나요. 그 위로는 무성하게 잡풀이 자랐고요. 당신은 그 풍경을 좌초라 부르는군요. 정박은 불가능한 단어라 여기는군요. 시간은 벌을 내리는 존재인가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그래도 당신의 장면이 마음에 듭니다.//길가에 쪼그려 앉아/눌어붙은 초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당신이.//너는 납작해도 알록달록하구나./언제나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들에만 말을 거는 당신이.//나는 당신의 불안을 감추기에 적당한 얼굴을 하고 있나요. 내가 보랏빛 꽃을 피워올린다면 그건 당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테지만.//다시 나를 말하겠습니다./나는 광대나물과의 한해살이풀입니다./생풀을 짓이겨 환부에 붙이거나 말려서 약재로 씁니다./주로 열을 내리거나 땀을 내는 일을 돕습니다./그리고 어쩌면//*//그가 나를 데려가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저는 다만 살아 있었을 뿐이에요.//물빛은 물과 빛의 포개짐이지만/물은 물에게로, 빛은 빛에게로 돌아갈 뿐이죠. - 「가는잎향유」 전문
미래에도 생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기능과 속도를 갖추기에 골몰하며 ‘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너도, 나도 AI가 아닌 인간’이라고만 답하려 하는 우리에게 당근밭 걷기는 조용히 묻는다. 지금 너는 어떤 모습인가? 너에게 현재는 어떤 시간인가? 네 곁에는 누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나와 너와 그는 서로 존중하며 귀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이 물음들이 깊은 위로로 느껴진다.
<끝>
필자 : 현순영
약력 : 문학평론가, 전주대 강사.
2010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받음.
2013년 서정시학 신인상 평론 부문 수상, 등단.
2021년 제14회 서정시학상 수상.
저서로 구인회의 안과 밖(소명출판, 2017), 응시와 열림의 시 읽기(서정시학, 2018)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