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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Homer Hulbert)
중국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있던 작은 나라, 조선을 향한 선교의 여정은 길고 길었습니다.
유럽 본토에서 종교개혁을 거쳐 영국에서 힘겹게 믿음을 이어가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땅, 신대륙에 처음 발을 디뎠습니다. (1492년)
그후로 400 여년이 흘렀고 신대륙에서 신앙의 자유와 청교도적인 절제로 훈련된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가슴에 품고 온 세계를 향한 선교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 선교의 물결로 인하여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처음 소개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수한 대학을 막 졸업한 엘리트였고 신실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한 사람, 일반인은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도 잘 몰랐던 사람,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비록 당시에 우리가 헐벗고 가난했지만 그는 유구한 역사와 훌륭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조선 민족의
뛰어난 재능을 찾아내었고 놀라와 했으며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미구에 잠에서 깨어 세계 가운데
우뚝 설 것을, 놀라울 만큼 정확히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이었던 미국보다 대한제국을 더 사랑하였으며 거짓 외교로 가득 찬 일제의 흉계에
강력히 항거하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과 아름다운 문화를 세계 만방에 알리려고 자기의 평생을
바쳤으며 결국 한국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 (Homer Hulbert) 입니다.
1. 출생과 조선으로의 여정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버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정부 자금부족 등으로 지원이 약해지자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사역하다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처음에는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1893년에는 정식 선교사로 입국함)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하거나,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재입국 후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밤마다 권총을 들고 불침번을 섰으며 고종을 위한 식사는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서 만들어 날랐다고 한다. 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2.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3. 한글 연구에 기여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였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애리조나 주에 사는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또한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해외 학술지에 활발히 기고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재미있게도 헐버트는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이러한 한글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
(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세계를 알고 세계를 향하여 꿈을 키우며 나갈 수 있도록 당시 각국에 대한
위치, 지리, 특징 등을 지도 그림 9장과 함께 한글로만 설명한 세계지리서인데 학생들이 세계지리
공부와 동시에 한글을 깨우치도록 고안하여 만들었다.
4.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로 추방된 후, 미국에서의 40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입국거절 및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되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편을 든 추축국이 패전하면서 한국의 광복소식을 살아서 듣게 되었고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어 40여년만에 해방된 한국 땅을
밟게 되지만 86세 노구에 장기간 여독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되면서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작은 추모 비석을 헌정하였다.
이후 여전히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1999년 8월 4일 동아일보 13면 기사)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독일은 러시아를 비롯해 대한제국을 지지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5. 어록 및 주요 업적
1)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서문에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12]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