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 두보의 「남정(南征)」을 본떠 짓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거제도 유배문학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 ‘두보의 「남쪽으로 가며(南征)」 시를 본떠 짓다’는 제목 그대로 당나라의 시성 두보(子美 712~770)의 명작 「남정(南征)」을 모방(擬)하여 지은 작품이다. 두 시인이 처했던 역사적·개인적 비극의 접점에서 탄생한 두 작품은 문학적 구성과 심리적 양상에서 깊은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다.
○ 먼저 문학적 공통점을 살펴보겠다. 두 시인의 「남정(南征)」은 각각 전란(안사의 난)과 정쟁(기사환국)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폭력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하며 겪은 고난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내용적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로 ①김진규 자신이 처한 상황(意境)과 오언율시의 형식을 두보의 「남정(南征)」 내용을 차용했다. 김진규는 두보가 완성한 오언율시의 엄격한 격조와 대구(對句)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두보 시 특유의 침울함과 비장함(沉鬱孤洞)의 미학을 자신의 시조에 능숙하게 투영했다. 둘째로 ②두보가 촉(蜀) 땅을 떠나 형초(荊楚) 지역으로 남하하며 본 풍경을 시에 녹여냈듯, 김진규 역시 한양을 떠나 천 리 먼 남쪽의 유배지인 거제도로 향하는 여정과 섬의 척박한 풍경을 객관적이면서도 처연하게 묘사했다. 셋째로 ③두 시인 모두 거대한 강과 바다, 험난한 산골짜기라는 자연적 장벽을 마주하며, 조정(정치적 중심지)으로부터 물리적·정신적으로 철저히 격리되었다는 시공간의 소외감을 핵심 동기로 삼았다.
○ 다음으론, 두보의 한시에 대해 김진규의 문학적인 변용(變容)에 대해 알아보겠다. 유배객 김진규는 단순히 두보의 시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사대부로서의 유배 체험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문학적 변용을 이뤄냈다. 두보의 「남정(南征)」에서, 안사의 난으로 인한 노년의 방랑과 전쟁의 참상이 창작 배경이며, 전란 속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 그리고 방랑의 지속을 뜻하는 끝없는 강물과 협곡으로 시선을 확장했다. 김진규는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에서, 기사환국(1689)으로 인한 거제도 유배의 형벌이 배경이며, 정쟁에 휩쓸린 가족의 해체와 비극, 그리고 억압과 고립을 상징하는 거친 남쪽 바다와 섬으로 시선이 확장되었다.
이에 두보의 시가 국가적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응시하는 '우국(憂國)'에 무게가 실려 있다면, 김진규의 시는 유배로 인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슬픔과 집안의 몰락이라는 현실적 고통을 보다 내밀하게 고백했다. 김진규는 '두보를 모방한다(擬古)'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유배 고통을 역사 속 대시인의 보편적인 비극의 층위로 격상시켰다. 이는 유배객의 절망을 단순한 원망에 머물지 않게 하는 고도의 문학적 장치다.
○ 세 번째로, 두 시의 이면에 흐르는 심리적 동기는 '현실적 절망감의 통제'와 '정신적 승화'로 요약할 수 있다. 김진규는 낯설고 두려운 유배지에서 자신보다 수백 년 앞서 유사한 고독을 겪었던 두보의 유산에 의지(同病相憐)했다. 위대한 성현(두보) 역시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절망감에 빠진 김진규에게 강력한 심리적 위안과 버팀목이 되었다. 또한 김진규는 유배지의 극한 고독, 병고, 그리고 억울함을 감정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표출하면 자칫 격정이나 나약함으로 비칠 수 있음을 경계했다. 따라서 엄격한 격률을 가진 두보의 오언율시라는 틀 속에 자신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가두고 정제하는 일종의 '지적 방어기제'를 사용했다. 슬픔을 억제하면서 정서를 내면화하려는 노력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보가 방랑 속에서도 당나라 조정을 향한 충절을 잃지 않았듯, 김진규 역시 시의 종결부에서 자신의 지조(대나무의 속성)를 내세우며 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충심(戀君)을 다짐한다. 이는 정치적 패배자로 전락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도덕적 우위를 증명하려는 사대부 특유의 정신 승화 과정이었다.
결국 김진규의 「의두자미남정」은 두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유배 현실을 반추하고, 문학적 격조를 통해 심리적 붕괴를 극복해 낸 조선 후기 의고시(擬古詩, 옛 시 형식을 모방하여 지은 시)의 정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어 김진규(金鎭圭)의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과 두보(杜甫)의 「남정(南征)」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5-1) 다음 ‘先’ 운목의 오언율시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 ‘두보의 「남쪽으로 가며(南征)」 시를 본떠 짓다’는 조선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이 거제도 유배 중(謫中)에 지은 작품으로, 『죽천집(竹泉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시성(詩聖) 두보(子美)가 인생 말년에 남쪽으로 떠돌며 지은 「남정(南征)」의 시풍을 본떠(擬) 지은 오언율시다. 숙종 시절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남쪽 바다 멀리 유배를 떠나야 했던 김진규 자신의 비극적인 처지를 두보의 방랑과 고난에 투영하여, 고단한 나그네 삶 속에서도 변치 않는 충심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담담한 심경을 노래한 걸작이다.
○ 내용인즉, 두보는 평생 안사의 난과 당나라의 혼란 속에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란하며 고단한 방랑을 이어갔다. 김진규는 거제도로 남행(南行) 유배를 떠나야 했던 자신의 운명이 당나라 대기근과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던 두보(杜甫, 杜子美)의 「남정(南征)」의 슬픔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여 이 시를 지었다.
[5~6구]에선, 몸은 남쪽 귀양길에 있고, 강물마저 나를 등지고 저 멀리 동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외롭고 고립된 상황(暮道東流遠)이다. 그러나 마음만은 임금이 계신 한양(북쪽)의 '북두칠성'을 향해 높이 걸려 있다(微誠北斗懸)고 고백하며, 유배객으로서의 변함없는 지조와 충의를 감각적으로 시각화했다. [7~8구]에선, 치열한 붕당정치(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속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쫓겨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던 김진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나아가고 멈추는 모든 운명(行與止)을 인간의 음모나 원망 대신 '창천(蒼天)'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절망을 철학적 달관으로 승화시켰다.
**「의두자미남정(擬杜子美南征)」** ‘두보의 「남쪽으로 가며」 시를 본떠 짓다’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複峽朝雲夢 겹겹의 협곡에는 아침 구름 피어올라 꿈결 같고
高江春水船 불어난 강물 위 봄철 강물에 배를 띄우네.
卜居頻問俗 살 곳을 정하느라 자주 풍속을 묻고
作客又經年 나그네 신세로 또 한 해를 보내는구나.
暮道東流遠 저무는 길에 강물은 동쪽으로 멀리 흘러가고
微誠北斗懸 나의 보잘것없는 충성은 북두칠성에 매달려 있네.
平生行與止 평생 동안 나아가고 멈추었던 일들,
久已付蒼天 이미 오래전에 푸른 하늘에 맡겼네.
5-2) 다음 ‘侵’ 운목(운통)의 오언율시 「남정(南征)」 ‘남쪽으로 가며’는 중국 당나라 대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인생 말년에 지은 시로, 화려한 봄날의 풍경과 대비되는 시인 자신의 쓸쓸한 처지, 그리고 변함없는 충심을 노래한 명작이다.
○ 내용인즉, 이 시는 두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대력(大曆) 4년~5년(769~770년) 경,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사천성(촉나라 땅)을 떠나 호남성 일대의 상강(湘江)을 타고 남하할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평생을 가난과 전란에 시달리며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배 한 척에 의지해 가던 처절한 인생 마지막 유랑의 기록이다. 앞부분[수련]에선, 눈앞에 펼쳐진 봄날의 강가는 복숭아꽃 물이 흐르고 푸른 단풍 숲 사이로 배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매우 아름답고 화사한 풍경이다. 뒷부분 [함련]에선, 하지만 시인 자신의 처지는 '늙고 병들었으며(老病)',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偸生)' 있다. 이처럼 화려한 자연(봄)과 초라한 인간(두보)의 극명한 대조가 시의 슬픔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경련]에선, 변함없는 충군(忠君)의 마음을 드러냈다. 몸은 비록 고향과 조정에서 멀어져 남쪽 끝으로 밀려 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늘 임금이 계신 북녘의 장안(또는 낙양)을 바라보고 있다는 절절한 충성심이 돋보인다. 마지막 [미련]에서는 평생 시를 쓰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본다. 내 노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지음(知音)'이 없다는 탄식은 깊은 고독감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시가 지닌 가치를 알아줄 미래의 독자를 기다리는 은근한 자부심과 애달픈 독백이 교차한다.
**「남정(南征)」** 남쪽으로 가며 / 두보(杜甫 712~770)
春岸桃花水 봄 언덕에는 복숭아꽃 흐르는 물 넘실대고
雲帆楓樹林 구름 같은 돛 달고 단풍나무 숲 사이를 지나네.
偸生長避地 구차히 살려고 오랫동안 난리를 피해 다녔는데
適遠更霑襟 먼 곳으로 떠나려니 다시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老病南征日 늙고 병들어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날에도
君恩北望心 임금의 은혜 생각하며 북녘 하늘을 바라보네.
百年歌自苦 평생 동안 지은 내 시(노래)는 스스로의 고통일 뿐,
未見有知音 나를 알아줄 참된 知音은 아직 만나지 못했구나.
[주1] 도화수(桃花水) : 봄철 복숭아꽃이 피어날 무렵에 눈이 녹아 흐르는 불어난 강물을 뜻한다. 아름다운 봄 경치를 대변함.
[주2] 운범(雲帆) : 구름처럼 하얗고 높게 달린 배의 돛을 의미함.
[주3] 투생(偸生) : 구차하게 삶을 도모한다는 뜻, 전란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주4] 남정(南征) : '남쪽으로 정벌하러 간다'는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남' 혹은 '남행(南行)'을 의미한다.
[주5] 지음(知音) :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속마음을 알아주었던 백아와 종기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 '자신의 시와 진심을 깊이 이해해 주는 참된 친구'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