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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방(자유게시판) 스크랩 여기자의 십자가목걸이를 보며, 왜 아쇼카선언문이 굴욕적인가
대륜 추천 0 조회 186 12.01.04 22: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기자의 십자가목걸이를 보며, 왜 아쇼카선언문이 굴욕적인가

 

 

 

KBS 11시 뉴스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9시 뉴스는 빼놓지 않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대의 뉴스시청률이 가장 높다고 하는데, 9시 뉴스 못지 않게 또 많이 보는 것이 밤11시 뉴스일 것이다. 특히 KBS 11시 뉴스가 그렇다.

 

KBS 11시 뉴스는 심층보도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9시 뉴스와 같이 백화점식 보도가 아니라 하나의 사안을 놓고 여러각도에서 취재한 기사를 기자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형식이다. 그런 11시 뉴스에서 사람들의 가장 관심을 끄는 가장 첫 꼭지에 방송하는 뉴스일 것이다.

 

11시 뉴스에서 가장 먼저 방송하는 심층보도형태의 소식은 꽤 오래 진행한다. 여당과 야당 이야기, 그리고 대권주자 등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보면 약 10( [취재현장]) 이상 진행된다. 이와 같은 소식은 많은 국민들이 지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자의 십자가 목걸이

 

그런데 이 정치 뉴스에 대하여 취재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는 미모의 여기자라는 것이다.

 

미모의 여기자는 호감형이다. 누구 보아도 부담이 없고 말솜씨 또한 뛰어나다. 그런 여기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얼굴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그런데 얼굴 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이다.

 

여기자가 차고 있는 목걸이는 한눈에 보아도 십자가형상이다. 동그랗게 빛나는 하얀보석 여섯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배열해 놓으니 십자가가 된 것이다.

 

 

 

 

 

 

 

여기자의 십자가 목걸이

사진 : http://news.kbs.co.kr/tvnews/newsline/2012/01/02/2413570.html

 

 

 

뉴스해설을 하는 여기자는 뉴스에 나올 때 마다 매번 같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처음 십자가 목걸이를 보았을 때 그러려니 하였으나 매번 나올 때 마다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공중파방송을 이용한 선교전략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교인임을 알리기에 매우 열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연예인들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장면을 지난 12 31일 방송된 연기인 시상식에서도 볼 수 있었다.

 

상을 탄 탤런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가장 먼저 날리고 이어서 감사 해야 될 사람을 죽 열거하는 것이었다. 이는 연말이면 방송시상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자신의 종교알리기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감사표시는 연예인들 뿐만 아니라 유명스포츠 스타, 아나운서, 기자등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보고 있는 불자들은 매우 불편하다. 왜냐하면 꼼짝없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십자가의 물결로 넘쳐 나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TV의 경우 시선이 고정될 수 밖에 없다. 뉴스에서 여기자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나와 뉴스 해설을 하였을 때 귀로는 전하는 이야기를 듣지만 눈길은 십자가에 꼽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선교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미모의 호감형 아나운서에게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뉴스를 첫 꼭지에 전하면서 그것도 10분 이상 시선을 붙들어 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하여 친숙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온 국민이 관심을 갖는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고 난 다음 기도세레모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꼼짝없이 그 상황을 보지 않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유명인들을 동원하여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중파방송을 이용하여 노골적으로 선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교행위는 공중파방송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안티가 극성을 부리는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미션스쿨이라 불리우는 종교학교가 있다.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를 말한다. 그런 미션스쿨은 고등학교의 경우 우리나라 전체 고등학교 숫자의 약 7%에 달한다.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7%안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미션스쿨에서 종교교육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한번 들어가면 꼼짝없이 예배와 찬송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를 신앙으로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지옥이나 다름 없다.

 

강제종교교육으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겪어 본사람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종교가 불교이거나 반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더 견디기 힘들다. 이는 곧바로 안티로 발전하게 된다.

 

미션스쿨에서 강제종교교육을 시킴으로 인하여 기독교인을 많이 만들어 낸다는 이점도 있지만 그 반대로 안티를 양산해 내는 반작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왜 안티가 극성을 부리는지에 대한 일종의 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불자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이렇게 우리나라 국민들은 특히 불자들은 기독교의 일방적인 선교행위로 인하여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매우 불편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기독교로 변한하는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 끔찍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산속에서만 사는 스님의 경우 이런 불편함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어려서 동진출가한 스님의 경우 이 세상이 온통 불교만 있는 것인 줄 알고 있으나 불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매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사람사는 곳에 불교는 없고 온통 기독교세상이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감수 해야 한다. 취업에서 불자라는 이유로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고, 직장이나 사회에서 불자라고 대놓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이 아니면 출세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불교세력이 약해서이다.

 

어느 산중승이

 

불교세가 약하다보니 고통받는 것은 불자들이다. 삶의 현장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꼼짝없이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세가 약하다보니 불이익도 감수 해야 되고 방송에서 십자가목걸이, 기도세레모니, 연말시상식 소감 등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불자들은 불교세가 강해져서 마음놓고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램을 깔아 뭉개기라도 하듯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산다는 어느 스님은 불교관련 인터넷신문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종교평화선언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양 세력을 등에 업고 들어온 기독교 세력에 눌려 어렵게 생존해오면서 스스로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형성된기독교에 대한 콤플렉스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그들을함께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가는 동료이자 도반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자신감에서 출발하여 점점 심각해져가는 이 땅의 종교 갈등과 분쟁 상황을 앞장서서 종식시키겠다는 원을 세웠으며, 그 원을 담아 세상에 종교평화선언초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뒤늦게 이 종교평화선언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어서 선언문 발표가 유보되기는 하였지만, 이 선언문 초안의 발표는 이 땅의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래서 대다수 국민들에게서 박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언의 공식 발표가 유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여기까지 이른 것만 갖고도 우리 불교 집안의 힘을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智異山人 澄潭, 성도절로 시작한 임진년, 불교계에 거는 기대, 불교포커스 2012-01-01)

 

 

지리산에 산다는 산중승의 글이다. 지난해 추진되었던 종교평화선언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산중에서 홀로 살아가는 도인과 저자거리에서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불자들과의 괴리감일 것이다.

 

세상을 등진 사람이

 

대체적으로 수행자들은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출가공동체를 구성하여 세속을 떠나 깊은 산중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을 승가라 하는데, 이 때 승가의 원래 의미는 화합중이라고 한다. 비록 출신성분이 다른 출가자일지라도 서로 화합하여 사는 것이 출가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출가공동체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세상을 등지고 출가공동체에서도 생활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사는 산중승이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종단에 대하여 쓴소리를 마다 하지 않지만, 이는 불자가 보기에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산중에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사는 곳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법포기선언문인가

 

불교세가 미약한 현실세계에서 불자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불교세가 커져서 불자들도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바램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다.

 

지난해 발표된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을 보면 더 이상 불교세가 확산되는 것을 포기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언문의 전법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전법과 전교의 원칙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조계종화쟁위 2011-0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이것이 조계종 화쟁위(위원장 도법)에서 발표한 전법의 원칙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멋지 말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이 선언문을 보면 전법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타종교인을 개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가려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한 하는 것은 전법의 포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고?

 

선언문의 초안을 보완한 것이 수정본이다. 하지만 수정본은 공표되지 않았다. 조계종 종정스님이 더 검토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정본에서 전법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셋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웃 종교를 비방하지 않겠습니다.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웃 종교를 존중하면서 실천하는 모범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줘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최선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에, 가장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주장이 아니라 참된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21세기 아쇼카 선언-수정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pdf

 

 

수정본의 내용을 보면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고 하였다. 교세의 확장은 생명의 평화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문구로만 보아서는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어 가며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도인들이나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단 하루도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불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불교를 종교로 한 것 때문에 사회에서 갖가지 차별을 받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불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세는 늘려야 한다. 왜냐하면 불자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21세기 아쇼카선언문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

 

아쇼카선언과 사회통합위원회

 

아쇼카선언문 초안이 발표 되었을 때 마성스님은 기고한 글에서 뜬금없이 발표 되었다하고 표현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선언문이 나온 것이다. 이는 조계종 화쟁위에서 전 매스컴을 불러 놓고 어느 날 전격적으로 세상에 발표 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사전에 토론이나 논의 과정이 없었다. 선언문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불자들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는데, 이땅의 전불자들이 실천해야 될 덕목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불자들의 바램과 정반대의 선언문이 나오게 되었을까.

 

산중승의 기고문에 대한 댓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어느 정도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구요? 종교평화 선언이 불교 자신감의 표현이라구요? 정말 개가 풀뜯어 먹는 소리입니다. 대통령 직속 사회평화위원회에서 권유해서 한 일이 종교평화선언이라면서요? 권력과 거리를 뒀다는 종단이 대통령직속위원회에서 권유한 일을 종정과 불협화음을 내면서까지 선언하겠다고 하는 일 자체가 두 가지 다 아닌 걸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왜 자구 헛소리 합니까?

 

(어느 불자, 아닌 맞다고 하십니까?)

 

 

놀라운 이야기는 종교평화선언이 대통령직속의 사회평화위원회 권유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비록 댓글이 떠도는 소문이나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여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경향이 있으나 때로는 댓글을 통하여 중요한 단서를 보기도 한다. 그런 사회통합위원회란 어떤 것일까.

 

이명박 정권의 주관으로

 

사회통합위원회를 키워드로 검색하여 보았다. 검색결과 법응스님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사회통합위원회는 대통령 직속기구로서 조계종에 종교평화선언을 주선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기화로 조계종이종교평화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을 했다면 이는 정부가 종교계에 직접 지시 및 간섭한 것으로써 헌법 제20조의 위반이며, 사회통합위원회가 의무 없는 행위를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통령 직속기구를 통한, 정치인인 대통령이 종교에 간섭한 것이라는 결론적 판단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요구합니다.

 

(사회통합원회에 종교평화선언 질의서 발송, 불교와 정책 2011-11-11)

 

  사회통합원회에 종교평화선언 질의서 발송.docx  사회통합원회에 종교평화선언 질의서 발송.pdf

 

 

이글을 읽어 보면 우리나라 불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깨고도 남는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되고 불자들의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아 엉뚱해하기 까지 한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이 이명박 정권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서 불교TV뉴스를 전하고 있다.

 

 

<btn news>는 지난 11 8일 도법 스님이 제118차 중앙종회에 출석해서 범종교 평화선언에 대해서불교를 비롯해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 등 7대 종단이 불교계의 선언 발표를 계기로 공동의 종교평화선언을 마련하고 있다면서대통력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사통위)의 주선으로 이 작업이 시작됐으며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에 범종교 차원의 평화 선언이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통합원회에 종교평화선언 질의서 발송, 불교와 정책 2011-11-11)

 

 

불교TV <btn news> 11 8일자에 따르면 화쟁위원장 도법스님이 이명박 정권의 사통위 주선으로 21세기 아쇼카선언문을 만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과연 이런 사실을 불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선언문의 미사여구에 현혹되어 불교계의 쾌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알고 보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선언문이라면 거기에 모종의 거래가 없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선언문은 지난해 8월 뜬금없이 발표 되었다. 그것도 불교계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이다. 뜬금없이 창조론 등으로 대표되는 유일신교의 교리를 인정하자든가, 모든 진리는 같은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 타종교인을 개종시키지 않겠다든가, 교세확장을 위한 포교는 하지 않겠다고 하여 사실상 전법을 포기하는 듯한 내용이 그것이다. 그리고 더욱 더 가관인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조계종화쟁위 2011-08-23)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는 내용이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선생님에게 제출한 반성문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반성문을 만들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을 쓰자면

 

소설을 쓰자면 여러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길게는 2010 12월에 있었던 국회에서 불교관련 예산을 대폭삭감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사대강사업 날치기 통과로 인하여 템플스테이등 불교계 관련 예산이 전년에 비하여 대폭 삭감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정치권의 불교계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5대 결사를 추진 하였다.

 

하지만 6개월 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정치인들 출입규제는 모두 풀렸다. 그런 후 지난 해 8월 문제의 아쇼카선언이 전격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국회 예산이 2010년에 비하여 거의 두배로 증액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아쇼카선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하나 의문스러운 것은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의 개인적인 행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성호스님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성호스님은 현재 일인 시위 중에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반면 성호 스님은 “승랍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조계종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은 종단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참으로 크나 큰 불행이다”며 “더구나 총무원내에 속가 조카인 덕문 스님을 호법부장의 소임을 맡기는 것은 승려법 제51조 제2항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브레이크뉴스, 자승스님 승랍·학위 조작설 어디까지 진실인가? 2010/3/15)

 

 

자승스님이 승랍을 위조하고, 속가의 조카인 덕문스님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사유화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장로정권의 검찰은 자승스님을 두차례 조사하였다. 하지만 모두 무혐의 처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로부터 두 번째 무혐의 처리를 받고 난후 아쇼카선언이 8월에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련의 사건들이 21세기 아쇼카선언과 엮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 현재의 정권과 정치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따라서 순수한 마음으로 아쇼카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인적 약점과 구조적 약점

 

이는 불교계의 약점을 현 장로정권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약점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승스님의 개인적인 약점이고 또 하나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불교계의 구조적인 약점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템플스테이예산등 정부의 지원을 받는 불교계의 입장에서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정부예산으로 지어진 총무원 청사와 신정동 국제선센터의 경우 정부에서 방빼!”하면 꼼짝없이 내 주어야 할 판이다.

 

이렇게 총무원장 개인의 약점과 불교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합쳐져서 정부주관의 사회통합위원회로부터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권유를 받은 것은 아닐까. 

 

비굴하고 굴욕적인 선언문

 

그런데 선언문의 내용이 불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굴욕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의 반성문을 보는 것처럼 반성과 참회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용을 보면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유일신교의 교리를 인정하자고 말하고 모든 진리는 같은 것이라 하는 가 하면, 교세확장을 위한 전법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렇게 비굴하고 굴욕적인 선언문이 나오게 된 것은 불교의 교세가 약해서 그렇다. 그래서 불자들이 불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불교의 교세를 키워야한다. 그래서 불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불교계의 힘부터 길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재영법사가 현대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은 매우 의미 있다. 김재영법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소까선언을 아무리 외쳐 봐도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저들이 경청이나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아소까선언이 진실로 평화선언이 되러면, 먼저 우리 불교계의 힘부터 길러야 한다.

 

(김재영 청보리회법사,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 현대불교신문 2011-11-30)

 

 

  평화는 힘 있을 때 가능하다-김재영.pdf

 

 

2012-01-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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