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자 밀대 걸레 사건 이후 어울리지 않는 ‘가오’을 잡는 건 지속할 수 없겠다 싶어, 이내 포기했지만, 공부는 차치하고 딱 두 개만 하지 말자고 학급의 규칙을 단순화시켰다. 지각과 교내흡연 금지였다.
우리 반은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는 반이었다. 3학년 때 나가는 교육실습에서부터 졸업 후의 직장이 대부분 기계를 다루는 제조업체일 것이다. 당장 2년 후부터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무리 없이 살아가려면 시간을 지키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당장 담배를 끊게 할 여력은 없지만,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 흡연 욕구를 참게 하는 것도 내가 길러줘야 할 사회성이다. 이 녀석들이 말로는 잘 안 들으니까 다행히도 아직은 내가 더 큰 덩치를 앞세워 헤드록도 걸고 팔뚝을 주먹으로 후려치기도 하고 윽박도 막 질렀다. 적절하지 못한 방법이었지만 적어도 우리 반 아이들만큼은 지각하지 않으려고 아침에 버스에서 내려서 교실까지 뛰어왔다. 다른 반 아이들이나 일부 상급생들이 등교 시간이 지났어도 학교 앞 매점에서 느긋하게 라면도 먹고 텁텁해진 입안을 담배 연기로 헹군 후 여유 있게 등교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후일담을 들어보면 그렇게 본인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고, 때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무섭게 윽박지르는, 그런 선생님은 처음이었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때의 그들은 대부분 학급에서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이거나, 시험 성적 반 평균 점수를 까먹는 존재이거나, 가끔 수틀리면 사고를 쳐서 학교의 위신을 까먹는 존재이거나, 선생님의 눈 밖에 난 존재였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자기정체감을 찾을 길이 없으니, 인생 삼분의 일은 없이 사는 셈이었다. 이 학교에 왔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의 학생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증받았다는 근거로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담임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피시방에 있다가 잠들어서 못 올 것 같으면 아예 밤을 새고 오고, 제 시간 동안 수업 시간에 꾸준히 앉아 있게끔 된 그 시간들이, 자신이 학교에서 내놓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충분히 학교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조금씩 심어준 듯하다. 물론, 그때의 나는 내가 담임 노릇을 너무 잘해서 아이들이 이나마 하고 있는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개중에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영수라는 아이였는데 이 녀석이 국어 시간에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 이런 애가 왜 여기엘 왔지?’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래서 학기 초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영수야, 선생님이 보기에는 네가 하기만 하면 공부를 되게 잘할 것 같은데……”
하고 나서 서술어를 무엇으로 할지 잠깐 고민했다. ‘해보는 게 어때?’라고 하면 내 말에 확신이 부족하게 느껴질 것 같아 마침 책상에 꽂혀 있던 국어 문제집을 하나 주면서
‘한 번 해봐.’로 골랐다.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대답이 없던 녀석이 고개를 꾸벅하더니 돌아갔다. 사실 그 상담 시간은 내게 금방 잊혔지만, 어려운 학생에게 내가 사비로 문제집을 사 주면서 격려해 주었다는 미담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혼자 엉큼하게 웃었다. 나중에 퇴임할 때쯤 되면 초임 교사 시절의 요런 에피소드를 어디다 자랑할 일이 있겠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치른 1학기 중간고사에서 이 녀석이 반에서 평균 점수 2등을 했다.
“거봐, 영수야. 하면 되잖아. 잘했어!”
성적표를 나눠주며 이렇게 칭찬했지만, 속으론 ‘역시 내 눈을 틀리지 않았어!’라는 생각과 자뻑에 취했다. 몇 주 후 찾아온 스승의 날에 영수가 써 온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생님. 스승의 날이라 편지를 씁니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땐 공부는커녕 그냥 졸업장이 따자, 생각했어요. 중학교 땐 하도 말썽을 많이 피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우리를 되는대로 살라고 포기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저희랑 친해지려고 단합대회도 하시고 놀아주기도 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셨어요. 솔직히 공부하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중학교 때 선생님들도 포기하시고 해서 그냥 놀기만 했거든요. 사실 선생님도 다른 선생님들처럼 저러다 금방 포기하시겠지, 싶었는데 변함이 없으시더라고요.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실까 싶기도 했지만, 나도 저런 근성이 있을까 확인해 보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해 봤어요. 물론 시험 전에 힌트를 많이 주시긴 했어도 제가 받아 본 점수 중에 제일 높은 점수였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뿌듯했어요. 집에서 욕먹을 일도 없고, 그때 시험을 보고 난 후 집에 가서 점수를 얘기했는데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아빠가 엄마랑 헤어진 후 그렇게 기뻐하시는 건 아주 오랜만에 봤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근성을 가지면 시험 점수도 오르고 가족도 화기애애해지겠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타지에서 일하시던 아빠가 소식을 듣고 당장 집으로 달려와 가족들이 다 같이 고기 파티를 했다는 말에,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걸까 싶어, 사실 좀 무서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사람이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반드시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러나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나’라는 사람에게 영수가 쉽게 마음을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담임 교사’가 자신을 믿는다고 한 말을 믿고, 자신도 스스로를 진심으로 믿어버렸던 게 아닐까. 교사의 말엔 아이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있다.
이후 그 친구는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그림의 영역에서 찾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디자인학교에 입학해 그림을 배웠고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에게는 이탈리아에서 구두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 영수의 삶이 나날이 발전해 나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자기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고 살아가는 것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