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R. 하우스의 『구약신학』은 신학의 모양을 한 설교나 성경 묵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출애굽기의 성막을 통해서 신약성경으로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식과 은혜를 나누고자 아래에 해당 내용을 올립니다.
성막 건립(출 35-40장)
출애굽기 35장은 출애굽기 25-31장의 성전 기구와 32장에서 착수되어야만 했던 성전 건립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지향하며 그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은 우상에서 돌이킨 회개의 결과로서, 언약을 향한 그들의 열망을 보여 준다. 그리고 순종을 향한 이러한 긍정적인 열망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의처소를 건립할 수 있도록 권능을 입혀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망과 연합된다. 또한 이러한 열망은 성막의 목적-성막의 목적은 백성들 가운데 임하실 여호와의 임재를 중보하는 것이다-이 성취되도록 인도해준다.
1. 순종하는 자에게 권능을 입혀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5-39장
출애굽기 35-39장과 출애굽기 25-31장 사이의 유사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2-34장 이후에 뒤따르는 35-39장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활약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세를 통해 중보된 회복된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안식일 규례와 하나님 임재가 체험될 수 있는 성막건립을 위해 예물을 바치게 된다(35:1-29). 이제 하나님은 출애굽기 25-31장에 소개된 모든 것들을 만들 수 있도록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권능을 입히신다(35:30-35). 분명 이들이 재능 있는 기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공예과 건축술과 같은 세상적인 재능조차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된 결과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된 이들은 오직 여호와께서 명하신 항목들만 만들 수 있다(39:42; 36:1-39:41 비교). 그 후 모세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한다(39:43).
2. 순종하는 자와 함께 거하는 하나님: 출애굽기 40장
마침내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려는 여호와의 목적이 성취된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은 대로 성막을 건립한다(40:1-33). 성막건립의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님의 "영광",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위엄"이 성막을 가득 메운다(40:34). 모세는 이러한 여호와 임재의 위엄이 가득한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40:35). 이 영광은 결국 가라앉지만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백성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구름의 강림이 이스라엘의 진군을 인도함으로써 계속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해준다(40:36-38). 그러므로 여호와는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실 것이며, 마침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33:14; 34:1-14 참조). 이스라엘의 새로운 언약의 순종은 그들에게 물리적 영적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다. 출애굽기 33:1-31 증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는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은택(恩澤)이다(33:14-17).
3. 정경적 종합: 성막
성막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는 성서본문은 몇 안 된다. 구약에서 성막을 논의하는 대부분의 본문들은 단지 성막의 위치나 혹은 일반적인 용도를 언급할 뿐이다.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장 직(히 4:14~8:13), 성막(히 9:1-10) 그리고 제사제도(히 10:1-18)를 논하면서 그리스도가 구약종교의 위대한 요소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신구약 신학을 서로 함께 결합시킨다(히 11장).
성막은 구약의 다른 제의(祭儀)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영속적인 죄 사함과 임재臨在)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의해 특출한 제의적 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만약 신약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의 성소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뜻하는 바를 잘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폴 R. 하우스, 장세훈 역, 『구약신학』, pp.219~221.
첫댓글 좋은 포스팅입니다. 구약신학이지만 묵상이나 설교의 느낌을 주네요. 은혜를 받습니다^^
공감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성막, 성전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그 깊은 의미들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 같네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 해도 아직은 육체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시각적이고 체험적인 것이 없이 바로 영적인 세계로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성막과 성전을 통해서 유대 민족이 지난한 세월을 지나면서 제사 제도를 이어왔던 것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이 인류를 대표하여 많은 수고를 해주었군요.
포스팅 내용에 깊이 공감합니다.
댓글로 잘 설명하고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성막(출애굽기 26:1-6) - <매튜 헨리 주석>
Ⅰ. 하나님의 집은 요즈음에 와서는 군인들이 야영할 때 사용하는 그런 "천막" 이나 "장막" 임에 틀림없으며, 그것도 보잘 것 없고 이동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의 법궤는 이후 480년이지나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까지는 (왕상 6:1) 더 좋은 집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장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나타내심은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장막은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의 저들의 형편에 적합하므로, 저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한다는 생각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번영하거나 어려움 중에 있거나 정착해 있거나 방황할 때에 있거나 간에, 그들의 형편에 따라 자비를 알맞게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와 은혜의 선물이 그의 백성의 욕구와 필요에 부합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내가 함께 할 것이니라" (사 43:2).
2.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가 "장막" 의 상태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시 15:1). 영속적인 도성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더 좋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객이므로, 천국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특전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는 동산(動産)이다. 복음은 어떠한 장소에라도 얽매이지 아니한다.
촛대는 장막 안에 있으므로 쉽사리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다(계 2:5). 만약 우리가 장막을 소중히 여기고 그 특전을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장막은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하고 욕되게 한다면, 우리가 어디에 머물든 장막은 우리를 버릴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집에서 무엇을 행하였는고?" (렘 11:15).
Ⅱ. 장막의 막은 하나님이 주신 양식(樣式)에 맞아야 했다.
1. 그 막은 아주 비싸고 최상품으로 해야 했다. 즉 "가늘게 꼰 아마포" 라고 했다. 또 색깔도 보기에 매우 유쾌한 청색, 자색, 주홍색의 것이었다.
2. 막에는 그룹을 수놓아야 했다(1절).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교회 둘레에 장막을 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시 34:7). 속죄소 위에 그룹들이 있듯이 장막 주위에도 그룹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뿐만 아니라
장로들까지도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계 5:11 참조).
3. 늘어뜨려진 두 막을 만들되, 각 막은 5폭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서로 꿰매어져 있어, 늘어뜨려진 두 막은 금고리들로 연결되어 전체가 한 성막이 되게 해야 했다(6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교회들도 비록 수는 많지만 하나인 것이다. 성도들은 거룩한 사랑과 "성령의 하나됨" 에 의하여 "알맞게 서로 연결되어서 주 안에서 거룩한 한 성전" 으로 장성하기 때문이다(엡 2:21, 22; 4:16). 이 장막은 대단히 협소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교회가 그의 "장막터를 넓히며 그의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펄치라" 고 명령이 떨어진다(사 54:2).
성막의 덮개(출애굽기 26:7-14) - <매튜 헨리 주석>
모세는 성막에 이중 덮개를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비가 세거나 그 훌륭한 성막의 미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 성막 덮개는 털로 만들어야 했다. 이 덮개 내면의 막보다 사방을 약간 더 크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은 내면의 막을 둘러막고 또 거기서 좀 떨어져서 쳐질 것이기 때문이다(7절 이하). 이 덮개들은 놋쇠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덮개의 재료는 값이 좀 싼 것이므로 그 갈고리도 놋쇠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놋 갈고리도 황금 갈고리만큼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염소털로 된 덮개 사이의 결속은 자색과 주홍색의 막 사이만큼 튼튼했을 것이다.
2. 이 위에 또 하나의 덮개가 있었다. 그것도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14절). 하나는 "붉은 물 들인 수양 가죽" 으로 된 것인데, 아마 양털로 장식하였을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수달피의 가죽" 으로 된 것이었다. 그 재료를 우리는 이렇게 부르지만, 그것은 아마 질긴 종류의 가죽이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이 최상급품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겔 16:10).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1) 장막의 외부는 세련되지 않고 허술했으나 그 내부의 막은 아름다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외모보다도 내부가 더욱 아름답게 고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위선자는 그 가장 좋은 면을 밖으로 드러낸다. 곧 "회칠한 무덤" 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린다" (시 45:13). 세상 사람의 눈에는 계달의 장막같이 검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솔로몬의 휘장같이 아름답다(아 1:5).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우리의 심령 속사람을 단장하자(벧전 3:4).
(2)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두시는 곳에 보호책을 만드실 것이다. 의인의 거처에는 은신처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사 6:5, 6). 섭리자 하나님의 보호가 거룩한 아름다움 위에 항상 계실 것이며, 하나님의 천막은 누각이 될 것이다(시 27:5).
성막의 널판(출애굽기 26:15-30) - <매튜 헨리 주석>
장막의 널판에 대하여 아주 자세한 지시가 주어져 있다. 그 판은 성막을 지탱하는 것이며, 천막 지주처럼 아주 튼튼해야 된다고 했다(사 54:2). 이 널판에는 장부가 있었고, 그 장부는 은받침에 만들어진 장부 구멍이 끼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장막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는 물론 튼튼하게 하도록 배려하셨다. 널판이 없다면 성막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세워진 심령을 가진다는 것은 선한 일이다. 은혜란 신앙 고백이라는 막을 지탱시켜 주는 널판과 같은 것이다. 이것없다면 신앙 고백은 오래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널판은 꼭대기와 밑바닥이 모두 금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26절). 그리고 널판들과 빗살들은 모두 금으로 도금되었다(29절).
이리하여 유아기의 교회상과 마찬가지로, 장막 안에 있던 모든 것은 장려하였다. 유아기 때는 그러한 성구(聖具)들이 매우 알맞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하며,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 고 말한 그 군왕의 위대함에 감동하게 하였던 것이다.
새 예루살멜이 "순금으로" 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것을 비유하여 한 말일 것이다(계 21:18). 그러나 복음의 교회를 세운 건설자들은 "우리에게 금과 은은 없노라" 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은 건축물들의 영화로움은 장막의 영화로움을 훨씬 능가했다. "지혜가 황금보다 훨씬 낫지 아니하냐!" (고후 3:10, 11).
장막의 바닥에 대하여는 아무런 명령이 내려지지 아니하였다. 아마도 바닥에도 널판을 깔았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런 아름다운 막으로 둘려쳐진 속에서 사람들이 차갑고 축축한 땅바닥을 딛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상태로 버려두었었다면, 그것은 "너는 내게 토단을 쌓으라" 고 하신 20장 24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성막의 휘장(출애굽기 26:31-37) - <매튜 헨리 주석>
두 휘장을 만들라는 명령이 있다.
1. 하나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간막이를 위한 것이다. 지성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금하였기 때문이다(31,32절).
구약의 율법 하에서는 지성소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자유로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후 3:18). 바울 사도는 이 휘장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히 9:8-9). 즉 그것은 의식적 율법이 "그리로 나아오는 자를 온전한 자로 만들 수 없으며," 그 율법을 지키는 것도 사람을 천국에 이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처음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생명과 영생은 복음에 의하여 밝히 드러나기까지는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마 27:51).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모든 우리의 신앙적 행위를 통하여 "담대히 지성소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거룩한 정의감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깨닫는 겸손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2. 다른 또 하나의 휘장은 장막의 바깥문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36,37절). 제사장들은 매일 이 첫째 휘장을 통해 성서로 들어가 저들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히 9:6).
휘장이 도둑과 강도를 막는 그 장막의 유일한 방비책이었다. 거기에는 자물쇠나 빗장이 없었으므로, 휘장이 종종 뚫렸을지도 모른다. 또 장막 내에는 많은 재화가 있어서 유혹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놓아두었던 것이다.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것을 철저히 지키고자 의무를 더욱 잘 이행했을 것이다.
(2) 비록 지상의 교회가 약하고 무방비 상태로 계속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교회에 대한 당신의 배려를 나타내시고자 했을 것이다. 하나의 휘장이라도(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집에서는 놋쇠로 된 대문의 쇠빗장처럼 강한 방벽이 될 것이다.
@장코뱅 잘 알겠습니다.
본문과 댓글을 통하여 성막의 복음적 의미에 대해 풍성히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