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관객들의 마음을 훔치다
크리스토퍼 놀란(40) 감독의 신작 '인셉션(2010)'은 영화 속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의 대사처럼 "완전한 창조(Pure Creation)" 그 자체다.
'당신의 마음이 범죄 현장이 된다(Your mind is the scene of the crime)'는 태그라인을 표방한 이 영화는 남의 꿈속에 침입해 생각(idea)을 훔치는 자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추출자(extractor)라고 불린다.
규 정 된 세 계 를 의 심 하 는 감 독
놀란 감독은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왔다. 상업 영화 데뷔작인 '메멘토(2000)'에서 그는 개인의 기억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이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는가를 탐구했고, '인썸니아(2002)'에서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몽롱한 의식 흐름을 추적했으며, '프레스티지(2006)'에서는 마술과 트릭의 비유를 들어 환상과 실재를 묘사했다. 그는 또 배트맨 부활 프로젝트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나이트(2008)'를 통해 혼돈과 질서에 대해 사유했고, 나아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철학적 논제까지 제시했다. 그는 '인셉션'에 이르러 자신이 줄곧 다뤄왔던 모든 주제들을 하나로 묶는다. 기억, 꿈, 무의식의 세계를 부유하던 주인공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종국에 자식들과 해후하는 장면은 마치 규정된 세계를 초월해 맞는 해탈(nirvana)을 연상시킨다.
놀 란 식 꿈 의 해 석
꿈과 무의식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자연스레 프로이트와 융을 언급하게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는 설정된 시간 동안만 꿈을 꾸게 했다가 알람이 울리면 자연히 깨어나게 하는 장치다. 깨어나지 못할 경우, 물에 빠뜨리거나 음악을 들려주는 등 수면자의 신체에 자극을 가하는 '킥'을 이용한다. 현실의 킥은 꿈속에 반영된다. 가령, 수면자를 물에 빠뜨리면 꿈속에서 홍수가 나는 식이다. 프로이트는 꿈 연구가 몰리 볼드의 실험을 예로 들며 꿈을 이루는 신체자극에 관한 이론을 설명했다. "꿈속에서 손발의 위치는 대충 현실의 위치와 같다. (……) 꿈속에서 손발을 움직일 때는 언제나 현실의 손발 위치에 조응한다(『꿈의 해석』, 홍신문화사)." 놀란 감독은 이 이론을 오락적으로 재해석해 스크린에 쾌감 넘치는 '무중력 액션 장면'을 펼쳐 보인다.
또 드림머신에 연결된 코브 일당이 동시에 잠드는(꿈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융의 최면술과 닮았다. "(……) 그녀는 눈을 감고 무아지경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 그녀는 쉬지 않고 떠벌렸으며 특이한 꿈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꿈은 상당히 깊은 무의식의 체험을 나타낸 것이었다. (……) 그녀는 깨어나서 현기증을 일으키고 어리둥절해했다(『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요컨대 '인셉션'에 나타난 상상 체계는 철저히 지성(知性)에 근거하되, 놀란 감독은 거기에 오락성까지 이어 붙였다. 완벽한 지적 오락물(intellectual entertainment)의 탄생이다.
무 의 식 세 계 의 명 징 한 시 각 화
몰 아 의 경 지 로 몰 고 가 는 꿈 속 의 꿈 속 의 꿈 속…
꿈속에서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자신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한다. 맨 아래층 버튼을 눌러 내려간 곳에, 사별한 아내 멜(마리옹 코티야르)이 철창에 갇혀 있다. 그가 아직 죽은 아내를 잊지 못했음을 묘사한 장면이다.
피셔(킬리안 머피)의 무의식 세계는 설산이다. 우뚝 선 요새 깊숙이 '마음의 금고'가 있다. 그곳에 닿기까지 수많은 보초병들과 격전을 벌여야 한다. 차가운 부정(父情)에 상처받은 아들의 폐쇄적 내면을 그린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설계한 가상의 꿈속에서 사물들은 생각대로 축조된다. 강 위로 다리가 놓여지고, 도시 전체가 종이처럼 접힌다. 오름만이 반복되는 펜로즈 계단(penrose stairs)은 그야말로 비몽사몽이다. 반드시 스크린으로 확인해야 할 장면들이다.
단순하지만 명징한 비유로 제시된 무의식 세계를 배경으로 코브 일당은 꿈속의 꿈속의 꿈속을 관통한다. 꿈이 거듭될 때, 관객들은 현실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집중하게 된다. 2단계, 3단계, 4단계 꿈속을 헤매는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과 함께 거칠게 호흡한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림보(limbo)' 상태에 빠진다. 림보란 가톨릭 용어로 지옥과 천국의 중간 지점을 가리킨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고, 현실의 관객들은 영화가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환상과 실재의 뫼비우스띠가 상영시간 내내 좌석 밑에서 꿈틀댄다.
관 객 들 의 두 뇌 를 넘 어, 마 음 을 훔 치 다
놀란 감독은 수수께끼들로 직조한 이야기 속에 늘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관객들과 벌이는 두뇌 싸움은 그만의 소통 방식이다. 관객들은 단기 기억 상실증인 주인공을 좇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았고('메멘토'), 불면증인 형사 대신 사건의 실마리를 추리했으며('인썸니아'), 마술사들의 마술 같은 트릭을 풀려고 애썼다('프레스티지'). 때로는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정의(正義)의 정의(定義)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인셉션'은 놀란 감독의 거대한 드림머신이다. "우리가 이 남자의 마음속에 심은 씨앗이 생각으로 자라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The seed that we planted in this man's mind may change everything)"라는 코브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마음은 생각을, 생각은 행동을, 행동은 변화를 부른다. 코브 일당은 피셔의 무의식 속 마음의 금고를 열어젖힘으로써 그의 인성을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피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놀란 감독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듯이. 그는 이제 관객들의 두뇌를 넘어 마음을 훔치는 경지에 도달했다.
글=임재훈 jet_l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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