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 26.
1980년대 미국에서 PC 운동이 일어났다. PC는 ‘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표현된다. 정치에서 사용하는 언어 중 일부는 ‘편견적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이런 언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가치 중립적 단어 사용’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운동이다. 인종이나 특정 성(性)과 성적 지향, 종교 혹은 직업 등을 표현함에 있어 차별이 느껴지게 하지 말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치에서 흔히 발견되는 ‘언어의 유희’를 통한 현상 왜곡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일례로 외국을 침략하고, ‘해방’시키려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 등이다. ‘긍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를 자기 행위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하는 셈이다.
요새 부쩍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 정치판에 난무한다. 민주당은 한일 정상회담 관련 윤석열 대통령을 공격할 때 ‘이완용’이라는 고유명사를 즐겨 사용한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 ‘간접살인’ 용어를 동원하며 공격한다. 이는 상대방의 ‘약한 고리’를 가장 상징적으로 공격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칫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완용’ ‘숭일(崇日)’ 등의 용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지나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오히려 반감을 자아내거나 민주당의 ‘과거 지향성’을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미래 지향적 대안 정당’ 이미지를 얻는 데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국민의힘 역시 ‘간접살인’ 등 과한 용어를 남발할 경우, 민주당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중도층에게 ‘너무 한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당 주장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질서’다.
국민의힘은 ‘질서 있는 다양성’을,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질서 있는 퇴진’을 강조한다. 양당 모두 상대를 공격할 때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 표현을 쓰고 있지만, 당내 문제에 대한 표현에서는 ‘질서’라는 ‘품격 있고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질서의 사전적 정의는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뤄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다. 이런 긍정적 의미의 단어를 우리나라 정치권은 궁지에 몰린 처지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다.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질서 있는 다양성’을 살펴보자. 현재 국민의힘이 비판받는 가장 큰 부분은 ‘친윤 일색 지도부’다.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 방일 이후 불거진 강제동원 해법이 문제라는 주장을 펴지만, 이는 당장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번 윤 대통령 방일은 꼬여 있는 한일 관계 정상화의 시작이다. 시작 지점에서 결과가 없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또한 윤 대통령의 강제동원 해법과 방일은 한미 관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세계적 차원의 신(新)블록화가 진행되는 지금, 한미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번 강제동원 해법 제안과 방일은 국제 관계 재편 과정 속에서 평가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69시간 노동 문제도 있다. 최대 69시간제 노동에 대해 ‘재검토’를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보완’을 하겠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60시간 노동은 지나치다”는 대통령 입장 표명도, 이게 대통령의 진짜 의지인지 잘 모르겠다. 정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 지대한 문제점을 노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민의힘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친윤 일색 지도부’ 문제다. ‘친윤 일색’이라는 비판은, 영남에 치중된 지도부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대부분 국민의힘 지도부와 당직자는 이런 비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해석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팩트에 관한 문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민의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은 ‘질서 있는 다양성’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질서 있는 다양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정도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친윤 일색’ ‘영남 일색’ 비판을 최대한 피해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월 초 원내대표 선거가 예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원내대표 선거는 친윤 일색 혹은 영남 일색이라는 비판을 완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당대표와 원내대표 호흡이 맞아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또다시 친윤 인사를 원내대표로 선출해야 한다고 하면, 중도층과 영남 이외 지역 유권자 호응을 얻기 힘들 수 있다. 이들의 지지는 총선 승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뿐 아니라 민주당의 단일대오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다양성’ 확보는 필요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전략적 판단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민주당이 ‘질서 있는 퇴진’을 외치는 것 역시, 국민의힘의 ‘질서 있는 다양성’ 주장과 근본적 맥락은 같다. 이 대표 퇴진을 둘러싼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적’ 성격의 주장이다. 현재 비명 의원들은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이재명 대표가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 지도부는, 비명 의원 공천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3월 14일 첫 회의를 개최한 ‘2024 총선 공천 제도 TF(태스크포스)’를, 비명계 의원 위주로 채운 것을 봐도 그렇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천 문제가 걸려 있으면, 사생결단의 각오를 갖고 싸우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판의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표에 대한 사퇴 요구가 비명계 의원의 공천 탈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TF를 비명계 의원 중심으로 꾸렸다는 정도로 해소될 수는 없다. 해당 TF는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재명 대표가 진짜 비명계 의원 우려를 해소하려 한다면, 당직 개편을 해야 한다. 사무총장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주요 당직을 바꾸는 개편은 별 의미가 없다. 사무총장은 선거와 공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사무총장을 교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이유다. 결국 ‘질서 있는 퇴진’을 해석하자면, 지금은 퇴진하지 않고, 상황 봐서 연말쯤 퇴진하겠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 속에는 본인이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가 읽혀진다. 반면 마무리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는 자신을 대신해 사무총장이 공천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할 테다. 이런 상황도 대비해야 하는 이재명 대표 입장에서, 사무총장은 이 대표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무총장을 ‘제외’한 당직 개편은 비명계 의원 불신을 오히려 깊게 만들 수 있다. 이때 ‘질서 있는 퇴진’이 아닌, 즉각적인 퇴진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현란한 단어의 난무가 국민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진정성 있는 행위와 주장만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 임시방편적 주장은 변명에 불과하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2호 (2023.03.29~2023.04.0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