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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지배기반 구축을 위한 무단통치와 3·1 독립운동
민족 분열을 위한 ‘문화정치’와 항일독립운동의 다양화
위기타개를 위한 농공병진 정책과 항일무장투쟁
전시동원을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과 독립국가 수립의 모색
지배기반 구축을 위한 무단통치와 3·1 독립운동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부터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의 식민지 지배를 흔히 ‘무단통치’라 부른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일종의 군사통치를 실시했다. 의병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일제는 현역 육군대장을 조선총독으로 파견하여 식민지 지배기반을 정비하려고 획책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에 준하는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핵심요직은 물론이고 지방의 말단관직에까지 일본인을 파견했다. 한국인 관리는 주로 하위직에 배치되었고, 진급과 월급 등에서 일본인보다 못한 차별대우를 받았다.한국에는 한국인의 의사를 반영할 만한 의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통치에 관한 각종 법률과 명령은 조선총독의 이름하에 일본인 관료의 의지대로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은 일제에 협력하는 한국인으로 구성되었는데, 1919년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따라서 같은 식민지라 해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지배는 영국의 인도에 대한 간접지배와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철저히 억압적이고 조직적이었다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유화적이었다.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을 통해 물샐 틈 없는 지배망을 구축했다. 헌병이 경찰을 지휘하여 일반인의 생활까지 통제하는 삼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헌병경찰은 일정한 범죄에 대해서는 재판 없이 한국인을 구금하거나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전근대사회에나 존재했던 태형제도까지 운용했다. 이른바 ‘무단통치’라 불리는 이런 강압적 지배는 일제가 무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한국을 점령할 수 없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주연을 담당한 것이 일본의 육군이었으므로, 역대 조선총독은 현역 육군대장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일제는 1910년대 한국에서 상공업의 발달을 억압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한국은 일본 본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광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인접한 한국에서 상공업이 발달하면 일본의 상품판매와 식량조달에 차질이 생기거나 일본 자본의 진출에 장애가 될까봐 우려했다. 또 한국의 민족자본이 성장하면 독립운동의 지원 세력이 그만큼 강화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회사령은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발포되었다. 회사령의 골자는 한국에서 회사를 설립할 경우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차별이 공공연한 상황에서 자본 규모가 영세한 한국인 자본이 불리한 대접을 받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일제가 실시한 경제 정책 중에서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이다. 일제는 통감부 시대에 이미 대한제국이 실시한 토지조사와 토지소유권 정비사업의 실적을 이용하여 각종 증명제도를 마련했다. 일본인이 벌써 개항장을 중심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롭게 토지를 사고팔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증명제도가 필요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의 모양과 용도(논·밭 등)를 파악하고 소유권을 확정해 등기하는 사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많은 땅을 국유지로 만들어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귀속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국책회사에 불하했다. 또 일본인이 자유롭게 토지를 매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본인은 급속히 지주로서 성장한 반면, 영세한 한국인은 쉽게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 현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지는 전체 경작면적의 4.2%였고, 일본인의 개인 소유지는 7.5%였다.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일본인이 대거 한국으로 유입되었고, 한국인은 만주나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촌 지배를 관철한 일제는 일본인의 구미에 맞는 식량과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농사개량사업을 추진했다. 일제는 일본식 농법과 품종을 보급하고 면화 재배와 누에고치 생산을 독려했다. 그리고 광업개발을 통해 석탄과 철광 등을 반출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점차 일본을 위한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로 재편되었다.일제의 금융 지배는 조선 경제의 혈관을 장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06년에 각지에 설치했던 농공은행을 1918년 조선식산은행으로 통합개편했다. 그리고 각지에 금융조합을 설치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하여금 금융업도 겸하도록 했다. 금융기관의 정상에는 조선은행이 있었다. 조선은행은 식민지 중앙은행으로서 발권업무와 국고취급을 겸했다. 일제는 이 금융기관을 통해 한국의 재정과 금융을 종합적으로 지배했다.일제는 토지조사업과 더불어 임야조사업도 실시하여 마을 공용의 임야 등을 조선총독부의 국유림으로 재편했다. 또 이미 부설된 경부선과 경의선에 이어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 등의 철도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서울과 대전을 기축으로 한반도의 사방으로 뻗어가는 간선철도망이 모습을 갖추었다. 이는 철도를 매개로 일제의 지배력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했다. 한국의 식량과 자원은 철도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일본의 상품과 자본은 철도를 통해 한국으로 반입되었다.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 아래서도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계승한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국외에서는 독립군 기지 건설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조직된 독립의군부, 대한광복회 등은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비밀결사운동이 어려워지자 학교, 야학, 종교시설 등을 거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만주, 연해주에는 신민회원 등이 망명하여 한인촌과 한인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미국에서도 대한인국민회 등이 결성되어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노력했다.국내외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으로 결집하여 폭발했다. 서울과 평양 등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은 철도연선과 장시 등을 따라 전국으로 퍼져 3월 말 4월 초에는 전국을 뒤덮었다. 일제의 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자행했다. 한국인이 거주하는 간도, 연해주,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을 뚫고 국내외에서 폭발한 3·1운동의 열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를 통합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의 정체를 표방하고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선출했다(1919. 9.). 일제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10년이 안 되어, 망명정부이기는 하지만 왕조국가의 정체를 극복한 주권재민의 민주국가가 새로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민족 분열을 위한 ‘문화정치’와 항일독립운동의 다양화
문화정치는 일제가 3·1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통치 정책으로서 1919년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까지를 포괄한다.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도 한국인은 비밀결사 등을 통해 민족운동의 역량을 축적했다. 3·1운동은 그것이 결집하여 폭발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는 3·1운동을 수습하는 방안으로서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그렇지만 문화정치의 본질은 한국인에게 어느 정도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신 한국인의 역량을 이간시키고 분열시키려는 데 있었다.조선총독부는 관료주의 타파를 통한 서정쇄신, 한국인의 관리 임용과 차별대우 개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인정을 통한 민의창달, 지방자치 실현을 통한 민풍의 진작, 한국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의 방침을 천명했다. 그리고 육해군대장을 임용해온 조선총독에 문관도 취임할 수 있도록 하고, 헌병이 지휘·감독하던 경찰도 군대와 경찰로 분리한다고 선언했다.그렇지만 일제는 식민지 지배가 끝날 때까지 조선총독을 문관 중에서 임용한 적이 없다. 또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면서 헌병과 경찰의 업무를 분리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군대와 경찰의 수를 증강해 더욱 조밀한 지배망을 구축했다. 경찰관서는 1918년에 751개였으나 1920년에는 2,716개소로 3배 이상 늘어났고, 경찰관도 5,400명에서 1만 8,400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리하여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제도가 확립되었다. 교육의 보급은 문화정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지표라고 볼 수 있는 1면 1교제가 겨우 확립된 것이 1930년대 후반이었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하면 문화통치의 본질은 문화창달이 아니라 지배망 구축의 엄밀화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25년에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시행한 것은 허울 좋은 문화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이 법은 반일민족운동과 반일사회주의운동 등을 탄압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서, 사상과 신조는 물론이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제약했다.일제의 문화정치는 그들의 통치에 협력하는 한국인, 곧 친일파(대일협력자, 더 심하게는 민족반역자)를 양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폐멸하는 과정에서도 일본 유학생, 정치적 망명자, 고급관료 등을 매수해 활용한 적이 있었다. 식민지화 이후에는 ‘조선은사령’ 등을 공포해 친일파에게 일제에 협력한 공로의 정도에 따라 현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작위나 관직을 수여하고 위원이나 고문 등에 임명해 지배의 동반자로 삼았다.일제가 구사한 친일파 양성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자를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귀족·양반·유생·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들게 한다. 타협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여 친일적 지식인으로 양성한다. 양반과 유생으로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만들어주고 이들을 선전과 정찰에 이용한다. 한국인 부호와 노동자·농민의 대립을 부추기고, 농민을 통제하기 위해 교풍회·진흥회 등을 만들어 이용한다.
상과 같은 정책을 통해 형성된 대일협력자들은 친일여론의 조성, 친일단체의 조직, 민족운동가들의 적발과 포섭, 설득, 정보수집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일제는 한국인의 분열을 촉진하고 민족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으로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줄 것처럼 선전했다. 이에 조응하여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포기하고 먼저 독립역량부터 축적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실력양성운동이 그것이다. 또 일제와 타협하여 일정한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개량주의운동도 일어났다. 그렇지만 일제는 패망할 때까지 한국인의 자치나 참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면·군·도 단위에서 지방협의회 등에 한국인이 참가하는 것을 유산자 등에게 부분적으로 허용했을 뿐이다.일제는 한국에서 쌀을 증산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산미증식계획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전국 규모로 식량요구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쌀 부족이 심각했다. 마침 한국의 쌀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데다 값이 싼 편이어서 수요가 많았다. 일제는 한국에서 쌀을 증산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저수지를 축조하고 제언을 쌓는 수리사업을 추진했다. 농사법을 개량하는 방편으로 일본의 품종을 보급하고, 논을 깊게 갈고 비료를 많이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1920년부터 시행된 산미증식계획은 계획의 50%도 달성하지 못한 채 1934년에 일단 종결되었다. 그렇지만 쌀의 증산은 미미한 반면 일본으로의 이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한국인의 1인당 쌀 소비는 1920년의 0.63섬에서 1930년에는 0.45섬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본으로의 쌀의 이출 증대는 쌀 생산을 장악하고 있던 대지주와 그 유통을 담당하고 있던 미곡상 등이 부를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에 토지를 갖지 못한 영세농이나 도시 노동자 등은 비싼 쌀을 사 먹어야 했으므로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산미증식계획의 추진으로 농촌에서 대지주와 영세농이 아울러 증가하는 양극분화 현상이 심화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일제는 한반도의 동북 해안선을 따라 종관하는 함경선(원산-회령, 1914. 10.~1928. 11.)을 부설했다. 이 철도는 연선의 무진장한 지하자원, 산림, 해산물을 개발하고 만주의 중앙과 동북 지역으로 군사수송을 강화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이로써 1920년대 말까지 한국의 5대 간선철도라 불리는 경부선·경의선·호남선·경원선·함경선이 모두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을 결절지점으로 한반도의 사방 구석구석까지 방사선으로 뻗어가는 철도망이 구축되었다. 이는 곧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신경조직을 완성했다는 의미였다.
한국인의 저항 속에 불안정하게나마 일제의 식민통치가 뿌리를 내려가면서 근대문명도 널리 수용되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도시가 형성되고, 신식교육이 보급되어 의식주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도시에는 백화점, 영화관, 카페 등이 들어서고 서양식 옷차림이나 단발머리 등이 유행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도시의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벽돌로 골격을 갖추고 집안에 현관과 화장실을 들여놓은 개량한옥도 등장했다. 반면 도시의 변두리에는 빈민들의 토막집이 들어섰다.3·1운동은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한곳으로 모았다가 다시 여러 갈래로 분출시킨 호수였다. 192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는 ‘민족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국인 기업이 생산한 물자를 사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 아래 추진된 한글보급운동 등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농민운동도 활발했다. 순종 황제의 국장일을 기점으로 서울에서는 6·10 만세운동(1926.)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은 물론이고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한글로 발행된 신문과 잡지 등의 언론은 민족정신의 고취는 물론이고 근대문화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 민족운동 세력 일부에서 일제와 타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좌우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창립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했다(1927.~1931.). 청년운동, 어린이 보호운동, 여성 권익 신장운동, 백정 차별 철폐운동 등 대중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광주에서 발생하여 전국으로 번져간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3·1운동의 맥을 이은 대규모 독립운동이었다(1929.). 같은 해 원산에서 일어난 노동자 총파업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3·1운동 직후 만주에서는 5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수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로 진입했다. 독립군은 그들을 맞아 봉오동과 청산리 등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920.).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 지역 한국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일본군에 쫓긴 독립군은 러시아 영내로 피신했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이른바 자유시참변).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한국인사회를 바탕으로 민정과 군정을 아우르는 자치기구를 설립하여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상하이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고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서울과 도쿄에까지 잠입하여 경찰서와 궁성 등에 폭탄을 던졌다.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군사학교에 들어가 간부훈련을 받으며 역량을 강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기타개를 위한 농공병진 정책과 항일무장투쟁
만주사변 이후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1930년대 초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은 인접한 한국의 상공업에 새 시장을 제공했다. 일본인 자본은 한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노리고 맹렬하게 침투해 들어왔다. 당시 한국은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또 수력발전소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고, 중요산업통제법이나 공장법 같은 규제가 없어서, 최대의 이윤을 얻고자 하는 기업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투자 지역이었다. 더구나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1.~1936. 재임)는 일본인 자본의 유치를 촉진하기 위해 금융·세금·관세·공장부지의 수용 등에서 여러 특혜를 베풀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인의 기업활동도 무척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는 식품·시멘트·비료·섬유 등의 대규모 기업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전기·화학 등의 중화학공업도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종래의 기조 위에서 다른 차원의 공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흥남 등은 급속히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서울 등에는 인구가 밀집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의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화학공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본인 자본이었다. 대다수 한국인 자본은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일제는 금광·철광·석탄 등을 증산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세계 경제가 블록화됨에 따라 일본도 만주와 한국 등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원료를 조달해야 할 처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화학공업과 광물 증산 등은 한국 시장보다는 일본 시장에 직접 연결되어 한국인의 생활향상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일제는 세계대공황(1929.) 등의 여파로 심각하게 피폐해진 한국의 농촌을 되살린다는 명목 아래 농촌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농촌진흥운동이 그것이다.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영세농민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농촌은 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운동의 온상이 되어갔다. 일제는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지주의 소작료 수탈을 제한하는 ‘농지령’을 발포하고 ‘모범부락’을 선정하여 갱생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지만 농촌진흥운동은 자금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데다 정신운동적인 경향이 강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일제는 한국에서 식량과 자원을 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이민과 상품의 이입을 장려하기 위해 구석구석까지 철도망을 건설할 필요를 느꼈다. 또 세계 경제가 제국주의 세력권에 따라 블록화되는 경향이 강화되자 대륙으로 침투할 교통로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일제는 이를 위해 ‘조선철도 12년계획’을 수립, 철도망의 확장을 추진했다. 1927년에 시작되어 1938년에 종료된 이 계획에 따라 5대 간선철도에서 각 요충지로 분기하는 주요 철도가 속속 건설되었다. 도문선(회령-도문), 혜산선(길주-혜산), 만포선(순천-만포진), 경전선(진주-전주, 원촌-담양), 동해선(원산-포항, 울산-부산) 등이 그것이다. 일제는 또 만주와 일본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간선철도망으로 ‘북선삼항(北鮮三港)’(나진·청진·웅기)-‘북선철도’(청진-남양, 나진-남양)-경도선(신경-도문)을 개통했다. 이와 더불어 주요 사설철도를 국유화해 조선총독부가 관할하도록 했다. 1930년대 말까지 한반도의 주요 광산지대와 공업지대, 그리고 국경도시와 항구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대거 확충됨에 따라 한국 철도는 군사와 산업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1930년대 들어 경제공황의 여파 등으로 노동자·농민의 계급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사회주의 세력은 이를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혁명운동을 벌여 나갔다. 적색농민조합이나 적색노동조합 등의 지하활동이 그것이다. 반면 좌우협동전선기관인 신간회가 해체됨으로써 민족운동의 역량은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에서는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하려는 운동이 활발해졌다. 한국인의 처지를 보도한 한글신문 등은 일제의 검열로 기사 삭제와 정간을 되풀이했다. 일각에서는 식민사관에 맞서 주체적인 한국사 연구가 추진되었다.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운동도 일어났다. 종교계에서도 민족주의 색채를 띤 교단이 활약했다.국외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조선혁명군은 남만주 지역에서, 한국독립군은 북만주 지역에서 활약했다. 소련과 인접한 만주는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인들은 유격대를 결성하여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함께 동북인민혁명군(나중에는 동북항일연군)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함경도 일대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소규모나마 국내진입작전을 펴기도 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金九)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벌였다. 이봉창(李奉昌)은 도쿄에서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1932. 1.).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일본군 장성과 고관을 처단했다(1932. 4.).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은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고, 여기 참여하지 않은 민족주의 세력은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국외 독립운동 세력은 다양한 활동을 벌이면서 좌우연합과 중국과의 연대를 모색해 나갔다.
전시동원을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과 독립국가 수립의 모색
중일전쟁 시작(1937.)부터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의 상황을 살펴보자. 일제는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총력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다. 전쟁 수행의 명목으로 물적 자원의 생산과 인적 자원의 능력을 양과 질의 면에서 최대한 확충·개발하여 강제로 동원·배치한 것이다. ‘국가총동원법’은 이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적 장치였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은 이를 추진하기 위한 관민 운동단체 또는 동원조직이었다.일제는 한국인을 징병·징용·정신대·위안부 등으로 동원하기 위해 종래 억압과 착취 및 차별의 대상이었던 한국인을 철두철미한 일본인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내선일체화 정책과 황국신민의 연성이 그것이다. 일제는 이 사업을 강행하기 위해 경제·노무·사상 등의 면에서 각종 통제법령을 발포했다. 또 조선총독부의 기구를 간편화·집중화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조선연맹·국민총력운동조선연맹·조선국민의용대 등을 만들어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학생·청년·노동자·농민·여성·관공리 등을 수련도량에 수용하여 특별연성을 실시하기도 했다.황국신민화 정책은 한국어 사용 금지, 한글신문 폐간, 한국인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것들을 철저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한국인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재탄생시키는 ‘연성(鍊成)’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연성이라는 말은 원래 일본에서 교학쇄신평의회가 교학쇄신을 총괄하는 용어로 만든 것이다(1936. 11.). 그런데 이 개념은 나중에 무한대로 확대되어 국가총력전에 적합한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교학사상으로 확립되고, 마침내 국가 정책과 국민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연성은 한국인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한국인으로 연마 육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일본인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물자는 물론이고 신체와 마음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일본인, 곧 ‘황국신민’으로 개조한다는 의미였다.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한국인은 가정·학교·부락·단체·직장·공장·군대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총력전 자질을 끊임없이 연마 육성해야 했다. 이를 강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의 연성’을 지상목표로 내걸었다.한편 일제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중화학공업을 유치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우가키 가즈시게에 이어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1936.~1942. 재임)는 군사적 대륙 정책의 일환으로 공업화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블록화되는 추세 속에서 만주·한국·일본이 일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자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일본은 몸통, 한국은 팔뚝, 만주는 주먹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강건한 팔뚝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공업화하여 대륙에 있는 일본군에게 보급기지의 기능을 수행해야만 한다. 미나미 총독의 구상에 따라 일제는 한국을 전진병참기지로 설정하고, 경금속(알미늄, 마그네슘), 석유 및 대용석유, 유안, 화약, 기계기구, 자동차, 철도차량, 선박, 피혁, 광산기계, 항공기 등의 군수공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민수공업 부문도 1941년까지는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1930년대 후반의 공업발전은 한국의 경제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한국의 공업생산액이 전체 산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21년 15%에 불과했지만 1938년경에는 40% 정도로 높아졌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전체인구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은 여전히 80%를 상회했다. 그리고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의 소득은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따라서 한국에서 공업이 발흥하고 경제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 위주였을 뿐 한국인은 거기에 부수하는 위치에 있었다.일제는 병참수송 등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새 철도를 건설했다. 평원선(평양-원산, 1926.~1941.)은 한국 북부의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 철도였다. 이 철도는 서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공산물과 중부의 광물 및 동부의 수산물·공산물을 수송하고, 또 동해를 건너 일본과 연결하는 노선으로 중시되었다. 일제는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는 1930년대 후반부터 또 하나의 한반도 종관철도인 중앙선을 부설했다(경주-청량리, 1936.~1942.). 중앙선은 태백산맥 인근의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반출하고 오지(奧地)를 개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철도는 1937년 이후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함포사격에 노출되기 쉬운 경부선의 약점을 보완해 대륙으로 안전하게 병참을 수송할 수 있는 노선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국 철도의 군사적 색채는 한층 더 짙어졌다.중일전쟁이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일제의 전시동원체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국내의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염원을 담은 문학이나 예술이 등장했지만, 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국내의 민족운동은 지하로 숨거나 은밀해졌다. 일제가 막다른 골목으로 밀리는 기색이 나타나자 여운형(呂運亨) 등은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에 대비했다.
반면 국외의 독립운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 목표와 방향도 독립국가 건설을 직접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결성하고(1940. 9.),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의 대일전쟁에 참여했으며,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국제적으로 민족·국가의 평등을 지향하는 ‘건국강령’을 공포했다. 화북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을 편성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들도 민주정부 수립과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건국방략’을 제시했다. 그 밖에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외교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소련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짐에 따라 독립운동은 구체적으로 건국을 준비하는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렇지만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이념과 정파로 나뉘어 한곳으로 역량을 집중하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인의 항일독립운동은 패전과 해방 이후 한일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본은 ‘한국병합’이 합법인 데다 한국 통치에서 좋은 일도 많이 했기 때문에 사죄와 반성이 필요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또 한국이 일본과 공식적으로 교전한 적이 없고, 독립운동 세력이 국제사회의 정식 승인을 받은 바도 없기 때문에 강화조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일본은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병합’ 당시부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은 미약하나마 연합군과 합세하여 독립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서도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런 입장 차이가 결국 오늘날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일본의 이러한 정신적, 육체적, 물리적 수탈을 젊은 세대가 알고 있어야 미래의 한국을 지키는데 소홀함이 없을 터인데, 많이 알려져야 할 좋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