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마곡추갑사' 공주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어봤던 구절이다. '봄에는 마곡사의 봄 풍경이 좋고 가을에는 갑사의 가을 풍경이 좋다'라는 의미로 공주의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공주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 구절을 듣고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우면 저런 구절이 남겨져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겨났고 공주에 도착한 첫날부터 마곡사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의 흥미를 돋궈주는 조미료의 역할부터 호기심에 이르기까지 그 묘하게 흐르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만들어 줬다.
초파일 아침부터 일찍 준비를 마친 후 마곡사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공주는 공산성 그리고 무령왕릉 등 주요 관광지들이 중심지에 몰려 있어 점심 즈음부터 사람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흐르는 금강의 물소리와 가끔 지나다니는 택시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질 만큼 도심은 적막감만 맴돌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지 않는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마곡사에 도착했지만 혹시 나는 역시나 였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해 부처님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몰린 인파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듯해 보였고 자연스레 나도 마곡사 본당 구역으로 들어가고자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1) 눈에 들어온 다른 사찰들과의 특이점
인파에 몸을 맡긴 채 본당 쪽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때마침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라 무료입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막간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산길 쪽으로 빠져 자연이 선사하는 피톤치드를 한껏 만끽한 채 자연스레 눈과 생각에 잡힌 특이점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공주에 자리한 마곡사는 과거 고대 삼국 시절 백제의 영토였지만 사찰의 창건주는 신라의 선덕여왕과 함께 전국에 사찰을 만들고 다녔던 자장율사로부터 비롯된다. 한반도에 자리했던 국가들 모두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별 지장이 없었던 걸까 당시 국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 바로 전인 '무왕'으로 신라와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이질감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해탈문에 사람들이 만든 장사진을 뚫고 간단한 절차를 마친 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해탈문을 뚫고 들어와 보니 영역이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마곡천을 중심으로 위쪽은 대웅전이 자리한 영역 그 아래론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통 사찰들의 양식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주변을 아우르고 있는 형태였지만 자유로운 배치와 차별이 아닌 뭔가 구분 지어진 듯한 형태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앞서 언급한 대웅전의 위치 또한 같은 듯 조금은 다른 특이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찰 중앙에 위치해 주변을 아우르는 듯한 형태가 아닌 마곡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밑에서 위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경외감과 석가의 권위 더불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 사찰 전반을 아우름과 동시에 전해지는 부처의 자애로움 까지 위치 하나를 놓고 의도된 연출인 건지 혹은 스스로가 이 순간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건지, 특이점과 더불어 느껴지는 독특한 구조들이 점점 마곡사에 흠뻑 빠지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2) 부처님 생신을 축하드리러 몰린 인파
마곡사 초입 부분부터 시작해 대웅보전 권역까지 전체를 살펴보기 위해 크게 한 바퀴를 돈 후 본격적으로 영산전 권역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해탈문 앞으론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짧았던 대기줄이 저 멀리 다리 너머까지 형성된 진풍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동시에 대광보전 앞에 준비된 '아기부처의 관욕' 행사를 위한 줄 또한 덩달아 늘어나며 평소 사찰은 고즈넉하다 라는 고정관념은 온데간데없이 시끌벅적한 잔치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곡사 템플스테이 당시 활용되는 공간과 더불어 영산전을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주변에 소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웅전 권역과 좀 떨어져 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없기도 했지만 바로 아래 위치한 해탈문과 대웅전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는데 낮은 돌담 주변으로 영산전 권역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나무들이 훌륭히 흡음재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아 오롯이 공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산전 바로 옆으론 삶과 죽음의 냉혹한 현실 그리고 불교의 윤회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었다. 직접 불공을 드리고 계신 분을 피해 양쪽으로 갈라진 나무 틈바구니 사이로 명부전을 바라볼 때 주변에 낮게 깔린 적막감이 바로 앞에 보이는 당우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얼핏 보면 냉혹한 현실의 이치에 대해 말하는 듯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아울러 불교에서 다루는 철학을 잘 담아낸 듯 해 대웅전 권역보다 이곳이 개인적으로 더 매력 있게 다가왔다.
한참 동안 영산전 권역을 돌아본 뒤 대웅전 권역을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마곡천을 건너기 직전 눈앞에 그동안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판타지가 마곡천 전반에 펼쳐져 있었다. 물론 실제 연꽃은 아니었지만 연꽃의 형태를 띤 연등이 마곡천을 아름답게 수놓아줘서 순간 부처님의 불법에 따라 형성된 불국(佛國)에서 한창 자애로움이 넘치는 파티가 벌어지는 듯해 보였다. 잠시 다리를 건너기 전 한쪽으로 빠져 순간에 몰입해 사진을 담고 있던 와중에 그 모습을 보던 한 분 께서 잘 나오냐 는 질문과 함께 내가 나왔던 자리에 들어가 스마트 폰을 활용해 그 모습을 담으셨는데 왠지 모를 뿌듯함과 신기한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3) 백범의 발자취
막간의 벅찬 감동을 뒤로한 채 다리를 건너 왼쪽을 돌아보니 예상 못했던 백범 김구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주막에서 일본 장교를 살해한 뒤 살인범으로 잡혀 들어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하게 된다. 그러던 중 1898년 탈옥을 감행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백범은 마곡사에서 은신하던 중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원종'이라는 법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하던 와중에 가까스로 죽을 위기를 넘기게 되는데 1896년 당시 서울 인천 간 개통된 시외 전화를 활용해 덕수궁에서 백범의 형 집행을 멈추라는 어명을 인천 감리소로 전달, 그의 목숨을 살리게 된다. 을미사변 그리고 인천교도소에서의 백범과 관련된 내용은 영화 '대장 김창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0년 후, 이곳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다시 찾은 백범은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이곳에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바로 그 옆에 백범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친필 휘호가 있었다. 백범의 좌우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의 면모와 함께 그의 친필 휘호를 함께 보니 시대를 관통하는 듯 한 그의 생각과 발자취가 매우 아프게 다가왔다. 어수선하게만 느껴졌던 마곡사 경내가 더불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4) 마곡사에 깃든 설화, 그리고 소소했던 사찰음식
마곡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보전, 건물 안에 있는 싸리나무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듣게 된다. "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 해당 질문의 목적은 싸리나무 기둥 주변을 많이 돌면 돌 수록 극락으로 가는 길이 짧기 때문이라고 전해 지는데, 만약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 지만 대웅보전 건물 안으로 들어가 그 기둥을 살펴보면 실제 그 이야기를 믿었던 사람들의 흔적이 매끈한 싸리나무 기둥으로 보란 듯이 남아 있어 순간을 참으로 흥미롭게 만들어 줬다. 괜히 나도 믿는 셈 치고 몇 바퀴 주변을 돌아봤다.
한창 '아기부처의 관욕'이 진행되던 '대광보전' 에도 앉은뱅이와 관련된 설화가 내려오고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앉은뱅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며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관두고 걸을 수만 있다면 이생을 넘어 평생을 헌신하며 살겠다 다짐한다. 그렇게 100일이 되던 날 본인이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큰 소원을 품었다며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와중에 바깥으로 걸어 나왔는데 그의 정성이 부처님께 닫기라도 한 걸까, 걸어 나오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여주며 감복하고 있을 때 마곡천을 바라보며 본인이 대광보전에서 삿자리를 짜며 했던 다짐을 곱씹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에 언급한 이야기와 관련해 사람들의 판타지를 자극해 줄 만한 삿자리가 깔려 있었다곤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어 좀 아쉬웠지만, 앞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아기부처의 관욕'을 바라보며 괜히 한번 더 마곡사 주변을 돌아봤다.
이렇게 곳곳에 깃든 이야기와 사찰에서 경건하게 벌어지고 있는 축제 분위기를 즐기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오랜만에 사찰에서 제공하는 절밥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 세계에 역병이 창궐한 이 시점에 가능할까? 싶었지만 다행히 지정된 공간에서 사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보통 쌈 채소와 함께 즐기는 채식 식단이 아닌 삼삼한 매력이 있었던 국수와 더불어 제공된 바나나가 전부였지만 마치 인도를 여행하면서 암리차르 황금사원에서 시크교의 교리에 따라 제공된 무료 음식을 즐기듯 매우 행복한 마음으로 음식을 즐겼다. 누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던 음식이 불가의 법도를 따르는 듯했다.
사찰 음식을 마지막으로 마곡사에서 풍성했던 순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부처님의 자애로움이 가득 담긴 사찰 음식은 정신을 한껏 풍성하게 만들어 줬고 그렇게 사찰 특유의 분위기에 취한 채 주변을 돌다 보니 오후 2시 즈음해서 사람들이 초파일 행사를 위해 그늘에 미리 자리를 잡아 앉아 있었고 식순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곡사 경내를 크게 돌며 생각했던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버스 시간에 맞춰 공주로 되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성인 기준 입장료 3,000원을 지불하고 들어가지 않고 넘어갔던 순간들부터 마곡사 여행은 유서 깊은 이야기들과 함께 소소한 즐거움으로 날 한껏 만족시켜줬다. 물론 날이 날인만큼 흘러넘치는 사람들로 인해 사진을 원하는 만큼 담아낼 순 없었지만 한편으론 석가탄신일에 에 대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한 것 같아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공주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곯아떨어졌다. '춘마곡추갑사' 문득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갑사가 연이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