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 물리학을 전공학 양자 물리학을 전공학 미치오 카쿠의 신작. 옮긴이도 물리학 박사라서 번역의 질도 매우 우수한
책인다.
저자는 마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나아갈지 다양한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서 기술하고 있다.
저자 본인은 과학자로 영성을 믿지 않는 듯 하지만, 그가 밝혀낸 마음의 "비밀"은 영성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책의 대부분은 뇌에 관해 밝혀진 것과 미래에 펼쳐질 인공지능, 로봇 등에 관한 내용인데, 부록에 그의 전문 분야인
양자역학과 마음에 대한 최신 흐름을 짚어주는 부분은 꼭 봐야할 부분이다.
뇌에 관한 다양한 실험이라든지 영화에서 등장하는 미래의 모습등은 이미 많은 곳에서 접해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양자역학과 철학적 문제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준 부분은 너무나 값진 자료이다.
아이러니 한것은 그 중요한 부분인 "부록"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저자와 의견이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는 과학의 발전으로 개량된 뇌의 기능을 일반 사람도 쓰게 될 거
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다른 의견이 있다.
책에서도 나온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인 빌 조이가 말한 것처럼 발달한 과학기술보다 현재 인간의 탐욕으로
미래의 사회 시스템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해 그 과학기술은 '돈'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고, '돈'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학적 삶의 퇴행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저자가 말한대로 발전한 과학기술이 골고루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어렵고, 새로운
경제, 사회 시스템이 나온 후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다. 맺음말과 부록의 전문을 실는다.
1장-14장 내용
대중은 머릿속에 탐침을 영구적으로 삽입한다는 데 거부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 효용성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
시험관아기 시술이 처음 알려졌을 때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발이 일었다가 결국은 잠잠해진 것처럼, 나노튜브도 언젠가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헬멧이 파티용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헬멧에는 고양이 귀가 달려 있어서, 착용자가 정신을 집중하면 귀가 쫑긋 서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아래로 처진다.
그러므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 헬멧을 쓰고 있으면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수십억의 사람들은 브레인넷을 통해 생각만으로 접촉할 수 있게 된다.
이 거대한 ‘집단의식’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이 운영체제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실험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기계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일부 윤리학자들은 “가짜 기억이 너무 생생하면 실제 세계보다 가상세계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연습시간은 분야를 막론하고 거의 1만 시간으로 귀결된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이것은 점점 더 확고한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4]
《아웃라이어Outliers》의 작가인 말콤 글래드웰Malcom Gladwell은 이것을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불렀다.
이들은 한결같이 좌뇌를 다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서번트가 그와 같은
능력을 후천적으로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왼쪽 측두엽의 매우 중요한 부위가 손상된 환자”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다.
이 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을 주기적으로 지우는 일종의 ‘센서’ 역할을 하는데, 어쩌다가 좌뇌에 손상을 입으면
우뇌가 이 역할을 떠맡게 된다.
좌뇌는 때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거나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하지만, 우뇌는 이런 면에서 좌뇌보다 훨씬 정확하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정확한 우뇌가 평소보다 많은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서번트 수준의 능력이 발현된다”고 믿어왔다.
예를 들어 우뇌는 예술적인 면에서 좌뇌보다 뛰어나고, 좌뇌는 가능한 한 예술적 재능이 발휘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좌뇌에 손상을 입으면 전권을 장악한 우뇌가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서번트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경두개자기자극술(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TMS)을 이용하면 뇌 특정 부위의 활동을 둔화
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TMS를 좌전두측두엽과 안와전두피질에 쪼여서 서번트 같은 능력이 발현되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사진 같은 기억력’은 뇌의 어떤 기능이 뛰어나서 생긴 능력이 아니라, 어떤 기능이 ‘부족해서’ 나타난 결과다.
즉, ‘무언가를 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진다.
샌디에이고 근처에 있는 솔크연구소Salk Institute의 테렌스 세즈노프스키Terrence Sejnowski 박사는 말한다.
“미래를 예견하긴 어렵지만, 머지않아 데스크톱 컴퓨터는 ‘사회적 로봇’으로 진화할 것이다. 당신은 로봇과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고, 심지어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물론 로봇은 당신의 감정상태를 이해할 것이다.
정신질환은 대부분 뉴런 자체가 파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뉴런의 연결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발생한다.
세포가 나이를 먹으면 DNA에 오류가 쌓이고, 세포 조각이 축적되면서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포의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면 피부가 늘어지고 뼈가 약해지며, 머리카락이 빠지고 면역체계도 약해지다가
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신체기능이 완전히 정지한다.
간단히 말해서, 죽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세포는 자체적으로 오류수정 기능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여기에도 오류가 쌓여서 노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기존의 노화방지는 유전자요법이나 새로운 효소를 이용하여 세포의 자체 수리기능을 강화한다는 개념이었지만, 나노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면 ‘나노봇nanobot’을 이용한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주여행에는 위험요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우주로 진출한 외계인들은 앞장에서 말한 대로 생물학적 몸을
버리고 정신(의식)만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데이비스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생물학적 육체는 기나긴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중간단계에 불과하다.
우리가 외계인과 마주친다면, 아마도 그들은 생물학적 육체를 초월한 ‘후-생물학적post-biological 존재’일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 결론은 SETI의 연구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13]
또한 그는 과학자들이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경솔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전통적인 유토피아(이상향)는 좋은 사회와 좋은 삶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좋은 삶을 누리려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는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고, 시력이 좋아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이런 곳이 낙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나 기가 막혀 웃지도 못할 것이다.”
15장 맺음말
지난 2000년에 과학자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선컴퓨터Sun Computers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인 빌 조이Bill Joy가 잡지 〈와이어드Wired〉에 첨단기술이 인간의 도덕성을
위협한다는 취지로 다소 자극적인 글을 기고한 것이 논쟁의 발단이었다.[1]
그는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The Future Does Not Need Us”라는 제목으로 “로봇공학과 유전공학 그리고 나노
기술 등 21세기를 대표하는 첨단기술이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연구실에서 첨단기술개발에 전념
하는 수많은 과학자를 화나게 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류를 돕는다는 미명하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
또한 그는 “첨단기술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로 인해 초래된 위험은 모든 장점을 가리고도 남는다”고 주장했다.
빌 조이는 모든 첨단기술이 문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화하여, 결국 이 세상은 죽음의 반이상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지적한 세가지 위험요소는 다음과 같다.
미래의 어느 날, 유전공학으로 탄생한 병균이 실험실을 탈출하여 온 세상을 폐허로 만들 것이다.
이 생명체는 수거할 수조차 없어서, 순식간에 퍼져나가 중세의 흑사병보다 훨씬 치명적인 전염병을 퍼뜨린다.
또한 생물공학은 "민주주의 기본인 동등성의 개념을 위협하는 변종"을 탄생시켜 진화의 방향을 바꿔놓을 것이다.[2]
미래의 나노봇은 그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점차 광포해지면서 지구 전체를 덮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 종말을 예견하는 '그레이 구(gray goo)' 시나리오다.
이 나노봇들은 일상적인 물질을 소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나노봇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지구의 상당 부분을 먹어 치울 것이다.
빌 조이는 자신의 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인류의 역사는 그레이 구에 의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은 불이나 얼음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끔찍한 종말이 실험실에서 저지른 하찮은 실수에서 초래된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로봇은 인간을 밀어내고 먹이사슬의 최고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이들은 인간보다 똑똑하고 힘도 세다. 로봇에 밀려난 인간은 진화노트의 한 페이지에 조그만 주석으로 남게 된다.
빌 조이는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로봇은 어느 모로 보나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아니다 ... 우리가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성은 장차 로봇에 의해
말살될 것이다."
빌 조이는 이 세가지 기술이 가져올 위협이 1940년대의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핵기술은 인류문명을 파괴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인간성을 앞서나가는 것 같다.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할 것이다."
그나마 핵폭탄은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극히 제한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위에 언급한 유전공학과 나노기술 그리고 로봇
공학은 개인기업이 주도하고 있어서 규제하기가 쉽지 않다.
빌 조이는 “첨단기술이 단기적으로는 일부 고통을 덜어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마겟돈(Armageddon: 지구의 종말)을 초래하여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과학자들이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경솔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전통적인 유토피아(이상향)는 좋은 사회와 좋은 삶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좋은 삶을 누리려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술에 기반을 둔 유토피아는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고, 시력이 좋아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이런 곳이 낙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나 기가 막혀 웃지도 못할 것이다.”[3]
빌 조이의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우리가 극단적인 악惡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이 악은 그동안 만들어온 대량살상무기보다 훨씬 강력하다.”
결론은 무엇인가?
그는 “인간의 멸종, 또는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경고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빌 조이의 글은 과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글이 <와이어드>에 실린 지 거의 14년이 지났다.
14년이면 첨단과학의 세대가 바뀌고 남을 정도로 긴 시간이니, 이제 빌 조이의 관점을 다시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
사실 그의 글은 많은 부분이 과장되었지만, 고학자들에게는 '항상 좋은 것'으로 당연시되던 과학연구가 과연 윤리적,
도덕적으로 타탕한 것인지, 그리고 미래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빌 조이의 글이 발표된 후, 많은 사람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두뇌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그것을 단순한 원자와 뉴런의 집합체로 간주하지는 않았는가?
뇌라는 밀림 속에서 개개의 나무에 집착한 나머지 숲의 존재를 아예 망각하지는 않았는가?
뇌의 뉴런 지도를 완성하고 신경전달경로를 완벽하게 알아낸다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가 자연스럽게
풀릴 것인가?
빌 조이의 글에 대한 각계의 반응
로봇공학과 나노기술이 인간을 위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빌 조이는 그 시기를 너무 빠르게 잡은 것 같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해둔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그가 걱정했던 일련의 사태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통제 불가능한 로봇이 만들어질 것 같은 연구는 법으로 금지하고, 로봇이 사람에게 위험한 행동을 할 때
전원을 차단하는 칩을 삽입하고, 비상시에는 모든 로봇을 일시에 무력화시키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식이다.
빌 조이가 예견했던 부작용은 로봇공학보다 생명공학에서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실험실에서 배양 중인 치명적 세균이 외부로 누출되면 대형참사를 피할 길이 없다.
실제로 레이 커즈와일과 빌 조이는 1918년에 창궐했던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완벽한 게놈을 밝혀낸 과학자를 신랄
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스페인 독감은 근대사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하나로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그 옛날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시체에서 피와 유전자를 채취하여 바이러스의 완벽한 유전자서열을 알아
내는 데 성공했고, 연구결과를 곧바로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위험한 바이러스의 공개범위를 제한하는 안전장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를 방지하려면 관련 법규를 강화하고 새로운 규정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외진 곳에서 새로운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에 대비하여, 과학자들은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고,
유전자서열을 밝히고, 백신을 제작하는 신속대응팀을 미리 꾸려둘 필요가 있다.
'미래정신'의 함축적 의미
빌 조이에 의해 촉발된 논쟁은 인간 정신의 미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재 신경과학은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분야의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 있는 뇌에서 진행되는 단순한 생각을 읽거나 촬영하고, 몇 개의 기억을
기록하고, 뇌를 기계 팔에 연결하고, 마비 환자가 주변기기를 제어할 수 있게 하고, 자기장을 이용하여 특정 뇌 부위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일부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뇌 부위를 알아내는 정도이다.
그러나 신경과학은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다양한 연구과제들은 엄청난 발견을 코앞에 두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생각만으로 주변 물체를 움직이고, 뇌에 인공기억을 주입하고, 정신질환을 치료하고, 지능을
향상하고, 뇌를 뉴런 단위로 이해하고, 뇌의 복사본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주로 신체적 능력에 의존하며 살았던 과거와 달리, 미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정신의 세계'가 될 것이다.
빌 조이는 고통경감이라는 신경과학의 긍정적 측면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의 능력을 인공적으로 향상시킨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양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경과학의 도움을 받아 육체와 정신 능력을 향상시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하고 가난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인류는 두 부류로 양분되거나, 인간이라는 종이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첨단기술은 처음 도입된 시기에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기 마련이다.
과거에 라디오와 유선전화가 그랬고, 자동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러나 제아무리 비싼 물건도 시간이 흘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값이 내려간다.
사진기, TV, 개인용 컴퓨터,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휴대전화 등은 한결같이 이런 절차를 밟아왔다.
과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은 인류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인 번영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역사이래 인류가 사용해온 모든 도구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파급효과가 컸던 것은 단연 '과학'이었다.
과학은 위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부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은 계층간 격차를 조장하지 않고 오히려 완화해왔다.
1900년 무렵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해보라.
당시 미국인의 평균기대수명은 49살이었고, 수많은 아이가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웃과 대화하려면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수밖에 없었으며, 우편물은 말이 배달하던 시절이었다.
의학도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실제로 효고가 있는 처방이라곤 감염부위를 잘라내는 잘단수술과 고통을 덜어주는
모르핀뿐이었다.
저장시설이 없어 음식은 며칠만에 부패했고, 상하수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항상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의 부자와
그보다 수가 조금 많은 중산층뿐이었다.
과학기술이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지금 우리는 음식을 얻기 위해 창을 들고 숲 속에서 헤맬 필요가 없다.
그냥 가까운 슈퍼마켓에 가면 된다.
무거운 짐이 있으면 등에 질 필요 없이 차에 실으면 된다(사실, 기술의 발달로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위험은 살인자
로봇이나 미쳐 날뛰는 나노봇이 아니라 나태해진 생활습관이다.
음식은 과할 정도로 많이 먹으면서 운동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당뇨병과 비만, 심장병, 암 등이 마치 유행병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이것은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초한 결과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역사 깊은 가난에서 벗어난 사람은 수억 명이나 된다.
일시적인 변화로 소규모 집단이 가난을 극복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의 삶의 질이 단기간에 향상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인류의 상당수가 오직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다가 중산층으로 진입했다.
서양의 여러 국가는 산업화를 이루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그러나 첨단기술이 보급되면서 중국과 인도는 이 과정을 수십 년 만에 이루어냈다.
무선통신과 인터넷 덕분에 정보교환이 쉽고 빨라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선진국은 낡은 도시기반시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반면, 개발도상국은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도시 전체를
새로 건설하고 있다
(내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무렵, 중국과 인도의 박사과정 학생들은 학술지에 논문을 보내고 답장을 받기까지
몇 달, 또는 거의 1년이 걸렸다. 게다가 이들은 서양의 과학자나 공학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경제적 여건이 열악하여 외국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술개발의 발목을 잡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요즘 과학자들은 인터넷 덕분에 다른 사람의 논문을 거의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으며, 굳이 외국으로 나가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할 수 있다.
정보를 교환하는 속도가 엄처안게 빨라진 것이다. 이 기술 덕분에 우리는 진보와 번영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인공적으로 지능을 향상시키면 인류가 두계급으로 양분된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많이 벌거나, 남들에게 존경받거나,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그
런데 복잡한 수학방정식을 잘 풀거나 기억력이 탁월하다고 해서 이런 것을 이룬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뇌의 기능이 좋아져도 동굴인간원리는 여전히 적용된다.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 박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건드리는 것은 매우 번잡한 일이다.
지능을 높여서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가? 어려운 문제를 풀고 싶은가? 아니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더 많이 받고 싶은가…?”[4] 5장에서 말한 대로,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실업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빨리 익혀서 재취업이 쉬워지고, 실업문제가 줄어들면서 세계경제가 활성화된다.
한 개인이 얻는 이득만 생각하면 부정적인 면이 주로 드러나지만, 큰 범위에서 보면 효율이 높아지고 변화에 빠르게 대처
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지혜와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
일부 비평가들은 빌 조이가 일으킨 논쟁이 과학과 자연의 2파전이 아니라, 과학과 자연 그리고 사회가 연루된 3파전이
라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컴퓨터 과학자인 존 브라운John Brown과 폴 두기드Paul Duguid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화약과 인쇄기, 철도, 전보, 인터넷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과학기술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사회는 새 기술이 나타나 자신을 바꿔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정부와 법원, 공식 또는 비공식적 조직들, 각종 사회단체, 전문가 네트워크, 지역사회, 시장조합 등으로 구성된 사회는
새로운 기술의 형태와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발전속도를 조절한다.”[5]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속성을 분석할 때 사회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최선의 아이디어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기술을 지혜롭게 사용하려면 민주적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머지않아 민감한 과학적 이슈를 투표로 결정하는 날이 올것이다. 기술의 앞날을 밀실회담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철학적 질문들
비평가 중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은 정신세계의 비밀을 지나치게 드러내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다.
과학자들 말대로라면 신경전달물질을 뇌에 주입하여 신경회로 몇 개만 활성화시키면 되는데, 무엇하러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 기술을 배우고, 휴가여행을 가려 애쓴다는 말인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던 인간이 천문학 때문에 우주의 먼지로 전락한 것처럼, 신경과학이 인간을 신경회로에 흐르는
전기신호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우리의 여정은 이 책의 서두에서 두 개의 가장 큰 미스터리를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정신’과 ‘우주’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난 세월 동안 비슷한 역사를 거쳐왔고, 철학적 배경도 비슷하다(앞으로
닥칠 운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학은 블랙홀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멀리 떨어진 행성을 탐사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원리Copernican Principle’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라는 두 가지 철학을 탄생시켰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거의 모든 과학분야에 적용되면서도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400여 년 전에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면서 탄생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에서 조금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한때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지구는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변방으로 밀려나, 지금은 거의 한 줌 먼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오던 온갖 신화와 철학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몰래 따먹었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인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신분이 ‘강등’되는
굴욕을 당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다가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약 300년 후, 천문학자들은 우리의 태양계가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라는 거대한 회전은하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알고 보니 태양계는 은하수의 중심으로부터 무려 3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별 볼 일 없는 조연'이었다.
그러나 강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20년에 에드위 허블은 우주에 은하의 무리가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지구가 은하수 변방에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그 은하수마저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십 년 전에 허블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관측 가능한 우주 안에는 약 1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은하마저 방대한 우주의 한 점에 불과했다.
최근 대두된 우주론은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또 한 번 강등시켰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에 의하면, 약 1천억 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우리 우주는 이보다 훨씬 큰 '팽창하는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다.
원래의 우주는 너무 방대하여, 빛 대부분은 아직 지구에 도달하지도 않았다.
즉, 우주 대부분은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없으며, 빛보다 빠른 이동수단이 발명되지 않는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곳을
방문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끈 이론이 옳다면 (나의 전문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는 3차원이 아닌 11차원 초공간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는 여러 개의
우주가 공존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물리적 현상이 일어나는 배경은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거품우주로 가득 차 있는 '멀티버스(MULTI-verse: 다중우주)였다.
이런 관점은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SF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에 등장하는 ‘모든 관점 보텍스Total Perspective Vortex’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멀쩡한 사람을 거의 미치게 하는 심리적 고문기계인데, 이 안에 들어가면 방대한 우주지도가 눈앞에 나타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뼛속 깊이 느끼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우리가 우주공간을 목적 없이 떠도는 한 조각 티끌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최근 얻은
천문관측 데이터는 이와 정반대 관점인 인류원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류원리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주는 생명체에 호의적이다.” 언뜻 듣기에는 별 내용 아닌 것 같지만, 그 저변에는 매우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신기하게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생명이 탄생하고 살아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세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우주는 우리가 이 세상에 등장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핵력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태양은 이미 수십 억 년 전에 다 타서 사라지고, DNA는 전혀 생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는 핵력이 지금보다 조금 약해다면 태양이 타오르지 못하여 생명체가 있다 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강했다면 우주는 수십 억 년전에 작은 점으로 똘똘 뭉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고(이것을 빅
크런치Big Crunch라 한다), 반대로 조금 약했다면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여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다(이것을 빅
프리즈Big Freeze라 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죽은 별의 잔해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원자는 먼 옛날 용광로 같은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후손인 셈이다.
그러나 수소 원자를 더 무거운 원자로 변환하는 핵융합반응은 극도로 복잡한 과정이어서,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 몸을 이루는 무거운 원자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DNA와 생명체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
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기적 같은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값진 존재라는 이야기다.
생명이 탄생하고 번성하려면 이 밖에도 여러 변수가 세밀하게 세팅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학계에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인류원리는 약원리와 강원리로 나뉘는데, 약원리는 생명체의 존재 자체가 우주의 물리적 변수들을 정교하게 결정했다는
것이고, 강원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초에 창조주가 생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철학과 신경과학
코페르니쿠스 원리와 인류원리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면서, 그 불똥이 신경과학 쪽으로 튀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자와 분자 그리고 뉴런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인간은 우주에서 조금도 유별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데이비드 이글먼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당신의 뇌에 트랜지스터와 나사가 제 위치에 있지 않다면,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경과 병원에 가보라.
머리를 다친 환자는 손상 부위가 아무리 작아도 많은 능력을 상실한다.
이런 사람들은 동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음악을 듣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거나, 별다른 생각 없이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개중에는 아주 사소한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6]
이런 점에서 보면 뇌는 ‘트랜지스터와 나사’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이글먼은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생물학적 지식에 의해 좌우된다'고 결론지었다.[7]
인간이라는 존재가 로봇처럼 (생물학적) 볼트와 너트에 불과하다면 우주에서의 지위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고 있는 웨트웨어(wetware: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매체, 즉 ‘인간의 두뇌’를 뜻함-옮긴이)에 불과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욕망, 희망 등은 전전두엽에 흐르는 전기신호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사람의 마음에 적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인류원리를 마음에 적용하면 정반대의 결과가 얻어진다.
이 원리에 의하면, 우주의 환경은 의식이 있는 생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맞춰져 있다.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마음이 탄생할 확률은 엄청나게 낮지만, 어쨌거나 우주는 이런 기적이 가능하도록 설계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는 이렇게 말했다.
“조급하고 쉽게 흥분하는 생체조직(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알라딘이 램프를 문질러 요정을 불러내는 것보다 훨씬 더 신기하다."[8]
게다가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장차 외계행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수십억 년 전에 지구의 바다에서 번성
했던 미생물과 비슷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거대한 도시나 제국이 아니라, 미생물들이 떠다니는 바다가 발견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자였던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지금 우리가 45억 년 전의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 행성을 만든다면, 앞으로 45억 년 후에 지금의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9]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곳에서 DNA와 원시 생명체가 탄생할 확률은 지극히 낮고, 의식이 있는 지적생명체가 늪에서 출현할 확률은 훨씬 더
낮다.”
굴드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호모 사피엔스(인간)는 진화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가지는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생물의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건-옮긴이) 후로 다세포생물 역사상 가장 탁월한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햄릿에서 히로시마에 이르기까지, 온갖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의식意識’이라는 보물을 개발한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지적생명체가 거의 멸종 직전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500만 년 전에 지구에 대형운석이 충돌하여 공룡을 비롯한 상당수 생명체가 대량으로 멸종했던 사건 외에, 인간도 거의
멸종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비슷한 정도는 다른 종種의 개체 간 유사성보다 훨씬 가깝다. 겉으로 보면 인종 간 차이가 매우 큰 것 같지만, 우리의 유전자와 화학적 구조를 분석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전 세계 인구 중 무작위로 두 사람을 골라 유전자를 비교해봐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여, ‘유전적 이브genetic Eve’와
‘유전적 아담’이 출현한 시기까지 계산할 수 있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다간 인간의 머릿수까지 계산할 수 있다.
유전학적 계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7만~10만 년 전 지구에는 겨우 수백 수천 명의 인간만이 생존해 있었다
(그 원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약 7만 년 전에 인도네시아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하여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갔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이 소수의 인류가 전 세계를 탐험하면서 다른 동물을 압도하고 지구 전체를 장악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멸종위기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살아남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한다 해도, 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극히 일부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 매우 값진 존재이다.
아마도 이것은 우주에서 가장 복잡하고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때때로 스스로 자멸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화산폭발이나 지진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핵전쟁이나 인공세균의 확산 등 인간 스스로
불러온 종말일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니, (아마도) 우리 은하에서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생명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라, 범우주적인 비극이다.
우리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생명체가 겪어온 길고 험난한 생물학적 사건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심리학자 스티븐 핀커Steven Pinker는 이렇게 말했다.
“의식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은 말할 수 없이 값지면서 깨지기 쉬운 선물과 같다.
이 사실을 안다면 삶의 목적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커다란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의식의 기적
과학이 무언가를 알아낼 때마다 신비함이 사라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숨어 있는 비밀이 밝혀지면 고귀하게 여겨왔던 인간의 정신이 별것 아닌 일상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뇌에 관하여 많이 알게 될수록 더욱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한 뇌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복잡한 물체이다.
데이비드 이글먼 박사는 말한다.
“뇌는 자연이 창조한 경이로운 걸작이다.
그리고 두뇌분석 기술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면서 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는 정말로 운 좋은 사람들이다.
뇌는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것 중 가장 경이로운 구조물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12]
뇌를 많이 알수록 신비감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져간다.
2천여 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부록
양자적 의식
두뇌스캔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인간의 의식은 과학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므로,
과학자들은 의식의 비밀을 영원히 밝히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의식은 원자와 분자 그리고 원자핵보다 근본적인 존재로서, 의식으로부터 실체의 특성이 결정된다.
또한 이들은 의식이 물질계를 창조한 근본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 역사상 가장 지독한 미스터리이자 실체의 정의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던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을 예로 들었다.
이 역설은 역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조차 의견이 제각각일 정도로 엄청나게 난해하여,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 답은 고양이 역설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양자역학의 기본개념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원래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 적용하는 물리학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레이저와 MRI, 라디오, TV, 현대 전자공학, GPS,
원격통신 등 다양한 기술에 적용되면서 세계경제를 떠받치는 주춧돌이 되었다.
양자역학으로 예견된 물리량은 실험을 통해 측정한 값과 거의 1천억 분의 1 이하의 오차범위 안에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로 지금까지 해온 연구는 한결같이 양자역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완벽한 양자역학에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내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온 내용이 역설에 기초한 이론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심란해진다.
이 역설을 만들어낸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양자이론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였다.
당시 그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진 전자의 희한한 거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점입자로 알려진 전자가 어떻게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가진다는 말인가?
전자는 어떤 경우에는 입자처럼 행동하면서 안개상자(입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장치-옮긴이)에 뚜렷한 궤적을 남기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처럼 행동하면서 작은 구멍을 통과한 후 연못에 퍼져나가는 물결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
1925년에 슈뢰딩거는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유도하여 양자역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수소 원자에 적용하면 전자의 파동적 거동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방정식은 수소뿐만 아니라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 대부분의 물리적 특성을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화학과 생물학이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解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일부 물리학자들은 별과 행성 그리고 인간까지 포함한 우주 전체를 이 방정식의 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물리학자들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난해한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전자의 거동이 파동함수로 서술된다면, 그 파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1927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물리학계를 양분하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른바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알려진 이 원리에 의하면,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
하게’ 측정할 수 없다.
이것은 측정장비가 불완전하거나 사용자의 손놀림이 부정확해서 생긴 오차가 아니라, 물리학 자체에 내재하는 불확정
성이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라 해도,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는 없다.
알고 보니 슈뢰딩거 방정식에 등장하는 파동함수는 특정 시간, 특정 위치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나타내는 함수였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과학자들은 자신의 논리에서 확률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애써왔는데, 하이젠베르크가 뒷문을 통해 확률의 도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자는 점입자이지만, 그것이 발견될 확률은 파동으로 서술된다.
불확정성원리는 바로 이 파동에서 기인한 결과이며, 모든 확률파동은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따른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물리학계는 두 파벌로 양분되었다.
한쪽 진영은 새로운 물리학체계(양자역학)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닐스 보어Niels Bohr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원자물리학자 대부분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매일같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면서 한동안 노벨 물리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당시 양자역학은 젊은 물리학자들에게 일종의 ‘가이드북’이었으므로, 커다란 업적을 남기기 위해 물리학의 석학이 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조리법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나 양자역학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반대쪽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은 양자역학에 철학적 이의를 제기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에르빈 슈뢰딩거, 그리고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였다.
특히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기본방정식을 유도한 장본인이었지만, “내 방정식 때문에 물리학에 확률이 도입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결코 그것을 유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했을 만큼 확률의 개념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때 촉발된 논쟁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물리학에 확률이 도입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고,
닐스 보어는 “신의 의도를 함부로 예측하지 말라”며 개인적 신념에 기초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일축해버렸다.
1935년 슈뢰딩거는 물리학의 주류로 떠오른 양자물리학자들을 일거에 날려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고양이 역설’을 제안했다.
가이거 계수기(Geiger counter: 입자 검출장치)를 설치한 상자 안에 건강한 고양이 한 마리와 독가스를 채운 유리병,
그리고 우라늄 한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우라늄은 불안정한 원자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입자를 방출하고, 이 입자가 가이거 계수기에 도달하면 망치가 작동
하여 유리병을 깨뜨린다.
이런 식으로 상자 안에 독가스가 유출되면 고양이는 죽게 된다.
이 고양이의 상태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양자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라늄 원자는 붕괴될 수도 있고, 붕괴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우라늄 원자의 상태는 ‘붕괴될 수도 있고 붕괴되지
않을 수도 있는 파동’으로 서술된다.
따라서 우라늄 원자의 정확한 상태를 얻으려면 두 파동을 더해야 한다.”
우라늄이 붕괴되어 고양이가 죽은 상태는 하나의 파동으로 서술되고, 붕괴되지 않아서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 역시
하나의 파동으로 서술된다. 그러므로 고양이의 상태를 정확하게 서술하려면 ‘살아 있는 고양이 파동’과 ‘죽은 고양이
파동’을 더해야 한다.
이는 곧 고양이가 살아 있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고양이는 죽은 고양이를 서술하는 파동과 살아 있는 고양이를 서술하는 파동의 합, 즉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쯤에
존재한다.
물론 고양이가 ‘반쯤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양이는 완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멀쩡하게 살아 있거나, 독가스를 마시고 완전히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내부상태를 확인하지 않는 한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세계에 존재한다.
바로 이 부분이 역설의 핵심이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고양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물리학의 전당에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로
군림해왔다.
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지금까지 알려진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이들을 조금 변형한 설명까지 고려하면 수백 가지에 달한다). 첫 번째 방법은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이끌었던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양자역학 교과서에는 이 해석을 정설로 다루고 있는데
(나도 양자역학을 처음 가르칠 때 코펜하겐 해석을 따랐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양이의 상태를 하나로 결정하려면 누군가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관측measurement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양이의 파동(죽은 고양이 파동과 살아 있는 고양이 파동의 합)이 ‘붕괴되면서’ 하나의 파동만 살아남고,
고양이의 생사가 하나로 결정된다.
즉, 고양이의 존재와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관측행위’이다.
양자계에 관측행위가 개입되면 두 개(또는 여러 개)의 파동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단 하나의 파동만 남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해석을 몹시 싫어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물체를 직접 관측하지 않는 한, 그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
또는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이 철학 사조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이며, 물질세계는 마음속에 투영된 관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조지 버클리 주교(Bishop George Berkeley: 18세기 아일랜드 성공회 주교이자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
자-옮긴이) 같은 유아론자들은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져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다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이 모든 것을 난센스로 치부했던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실체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다.
즉, 이 우주는 인간의 관측행위와 상관없이 단 하나의 유일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독자들 대부분은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관점에 마음이 더 끌릴 것이다.
객관적 실체의 기원은 아이작 뉴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원자와 소립자는 작은 쇠 구슬과 비슷하여, 4차원 시공간 상에서 명확한 하나의 점을 점유한다.
이 구슬의 물리적 상태는 운동방정식에 의해 결정되며, 여기에는 어떤 확률도, 모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실체의 개념은 행성과 별, 은하와 같이 규모가 큰 천체의 운동을 매우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성이론도 객관적 실체에 기초하여 블랙홀과 팽창하는 우주까지 정확하게 설명해냈다.
그러나 뉴턴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참담하게 실패한 영역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원자 내부의 세계였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추종하는 고전물리학자들은 객관적 실체가 주관적 관념론을 물리학에서 영원히 추방했다고
생각했다.
칼럼니스트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자신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현대과학은 ‘별과 원자를 움직이는 힘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믿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물리학에 새로운 형태의 유아론을 도입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관측되지 않은 한 묘목, 숯, 톱밥, 이쑤시개 등 어떤 상태로든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바라보는 순간, 나무의 파동이 갑자기 붕괴되면서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
원래 유아론자들은 ‘쓰러지거나 쓰러지지 않은 나무’를 문제 삼았던 반면, 새로 등장한 양자적 유아론자들은 나무의
‘모든 가능한 상태’를 도입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이 볼 때, 이것은 지나치게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생각해보세요. 쥐 한 마리가 쳐다봤기 때문에 저 달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양자물리학자에게 물었다면 “yes”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보어에게 질문을 던졌다.
“양자적 미시세계(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공존하는 세계)와 우리 주변의 상식적인 세계는 완전히 다른데, 이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보어에게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적 세계와 원자세계를 구분하는 ‘벽’이 존재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쪽 영역에는 상식의 법칙이 적용되고, 다른 한쪽에는 양자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벽의 위치를 옮길 수 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양자물리학자들은 지난 80년 동안 이렇게 가르쳐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코펜하겐 해석에 약간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요즘 나노기술은 개개의 원자를 다루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주사형 터널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STM)을 통해 보면 원자가 희미한 테니스공처럼 보인다(나는 BBC
TV의 촬영팀과 함께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있는 IBM 알마덴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초소형 탐침으로 개개의
원자를 직접 옮겨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원자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앞서 말한 대로 실리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머지않아 분자 트랜지스터가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대신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모든 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역설에 기초하여 만들어지고, 세계경제도 이 역설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주적 의식과 다중우주
코펜하겐 해석 외에 고양이 역설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더 있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신神’과 ‘다중우주’
라는 낯선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양자역학의 기초를 확립한 노벨상 수상자이자 원자폭탄 개발에도 참여했던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1967년 고양이
역설에 관한 두 번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오직 의식이 있는 인간만이 관측을 통해 파동함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관측자와 관측대상을 분리할 수 없으니, 그 관측자도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관측자와 고양이를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파동함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관측자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면 두 번째 관측자가 첫 번째 관측자를 관측해야 한다.
흔히 ‘위그너의 친구’라 불리는 두 번째 관측자가 첫 번째 관측자를 바라보는 순간, 첫 번째 관측자와 고양이를 포함하는
파동함수가 붕괴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 관측자는 살아 있는가?
이것을 확인하려면 세 번째 관측자가 있어야 하고, 이런 식의 연결고리는 끝없이 계속된다.
이전의 파동함수를 붕괴시켜서 관측자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면 무한히 많은 ‘친구’가 있어야 하므로, 결국 우리는
‘우주적 의식’ 또는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위그너는 “의식을 도입하지 않으면 타당한 양자법칙 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말년에 힌두교의 베단타Vedanta 철학에 심취하여 과학과 종교의 합일을 추구했다고 전해진다.
위그너의 해석에 의하면, 신 또는 영원한 의식이 우리 모두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파동함수를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과 물리적 결과가 동일하기 때문에 반증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만물의 근원이 원자가 아닌 의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철학적 뉘앙스를 풍긴다. 물
질계는 왔다가 가는 한시적 세계이지만, 의식은 원소를 정의하는 영원한 존재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의식은 실체를 창조하는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원자의 존재는 그들을 보고 만지는 우리의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일각에서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은 의식이 존재를 제어한다는
뜻이며, 이를 실현하는 것이 명상冥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체를 창조할 수 있다.
누구나 마술사가 될 수 있다니 상당히 매력적인 생각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양자역학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양자역학에서 의식은 관측을 실행하여 실체의 상태를 결정하지만, 어떤 상태가 실제로 존재할지 미리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임의의 상태가 선택될 확률을 예측할 수 있을 뿐, 관측자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도박할 때 로열 플러시가 뜰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지만, 로열 플러시가 손에 들어오도록 카드를
조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미리 알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입맛에 맞는 우주를 선택할 수 없다).
다중우주
1957년에 휴 에버렛Hugh Everett은 고양이 역설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 이른바 ‘다중세계 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
을 제안했다(이 책에서 세 가지 방법을 나열한 순서는 시대적 순서와 무관하다-옮긴이).
이 해석에 따르면 우주는 끊임없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다중우주(평행우주)의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의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살아 있고, 다른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죽어 있는 식이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동함수는 붕괴되지 않고 여러 개로 갈라진다.”
에버렛의 다중우주이론이 코펜하겐 해석과 다른 점은 파동함수의 붕괴와 관련된 마지막 가정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다중우주는 양자역학의 가장 단순한 형식이라 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기도 하다.
다중우주 접근법은 매우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았다.
제아무리 희한하고 불가능해 보인다 해도, 이론적으로 가능한 우주는 모두 존재한다(단, 희한할수록 존재확률은 낮아진다). 그러므로 우리 우주에서 죽은 사람이 다른 우주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는 우주가 진정한 우주이며, 우리가 사는 우주(자신이 죽은 우주)는 가짜라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른 우주에서 살아 있다면, 우리는 왜 그들을 만날 수 없는가? 우리는 왜 평행우주를 만질 수 없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평행우주 중 어딘가에는 엘비스가 살아 있다.
물론 개중에는 엘비스가 배관공으로 일하는 우주도 존재한다.)
평행우주 중에는 생명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우주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우리 우주와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우주선cosmic ray이 지상에 있는 물체와 충돌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양자적 사건에 불과
하다.
그런데 이 우주선이 아돌프 히틀러를 임신한 어머니의 배에 충돌하여 유산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소한 양자적 사건 때문에 우주가 반으로 나뉠 것이다.
한 우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다른 우주에서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6천만 명이 죽는다.
두 개의 우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아주 사소한 양자적 사건 하나 때문에 갈라져 나온 우주이다.
필립 딕Philip K. Dick의 공상과학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는 하나의 사소한 사건 때문에
평행우주가 탄생한다는 이야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존 가너가 고립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의 군사력을
축소한다.
그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두 나라가 미국을 양분하여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루스벨트를 향해 겨눈 총이 제대로 발사되었는지 또는 불발되었는지는 탄환에 든 화약의 점화 여부에 달려 있고,
이것은 또 전자의 운동을 포함한 분자의 반응 여부에 달려 있다.
즉, 화약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요동이 총의 발사 여부를 결정하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양자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구분하는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이론의 희한한 특성이 상식적인 세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동함수는 붕괴되지 않고 계속 갈라지기만 하면서 수많은 평행우주를 만들어내고, 이 과정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미시세계의 역설(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의 공존, 같은 시간에 두 장소에 존재하기, 한 장소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기 등)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파동이 정말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왜 그 우주를 방문할 수
없는 것일까?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것을 ‘거실에서 라디오 듣기’에 비유했다.
거실 안에는 전 세계에서 송출한 수많은 라디오파가 혼재하고 있지만, 당신의 라디오는 그중 단 하나의 주파수에 맞춰져
있다.
즉, 다른 주파수와는 ‘결어긋남 상태decohered state’에 있는 것이다(레이저빔처럼 모든 파동이 동일한 위상으로 똑같이
진동하는 상태를 ‘결맞음 상태cohered state’라 하고, 각 파동의 위상이 어긋난 채 진동하는 상태를 ‘결어긋남 상태’라 한다). 다른 주파수의 라디오파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당신의 라디오는 그들과 주파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수신할 수 없다.
즉, 그들은 우리와 결어긋남 상태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의 파동함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어긋남 상태로 갈라진다.
거실에 편히 앉아 라디오를 듣는 당신은 공룡과 해적, 외계인 그리고 온갖 괴물의 파동과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당신의 몸을 이루는 원자는 그들의 원자와 진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모른다.
평행우주는 머나먼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당신 옆에 공존하고 있다.
다른 평행우주로 진입하는 것을 ‘양자도약quantum jump’, 또는 ‘슬라이딩sliding’이라 하는데, 이것은 공상과학소설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평행우주로 들어가려면 그곳을 향해 양자도약을 해야 한다(TV 드라마 〈슬라이더Sliders〉에서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우주로 이동한다.
이 드라마는 한 소년이 책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하필이면 그 책이 내가 집필한 《초공간Hyperspace》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드라마에서 도입된 물리학 원리들은 나의 책임소관이 아님을 밝혀두는 바이다).
실제로 다중우주 사이의 왕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당신이 벽을 관통하여 반대쪽에서 나타날 확률을 계산하라”는 문제를 종종 내주는데,
정답은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우주의 나이보다 더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거울에 비친 영상
거울에 비친 모습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첫째, 빛이 내 얼굴을 때리고 거울을 향해 날아갔다가 다시 반사되어 내 눈에 도달할 때까지는 약 10억 분의 1초가 걸린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10억 분의 1초 전 모습이다.
둘째, 거울 속 영상은 수십억×수십억 개의 파동함수들이 만들어낸 영상의 평균값이다.
물론 이 평균은 나의 실제 모습과 거의 비슷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는다.
내 주변에는 나를 닮은 여러 개의 영상이 모든 방향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다.
즉, 수많은 평행우주가 나를 에워싼 채 끊임없이 가지를 쳐나간다.
그러나 내가 다른 우주로 진입할 확률이 너무 낮아서, 뉴턴의 고전역학이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 묻는 사람도 있다.
“어떤 해석이 맞는지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지 않은가? 과학자들은 왜 검증을 시도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가?”
그 속사정은 이렇다. 전자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수행해도 세 가지 해석이 모두 동일한 결과를 낳으므로,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가 없다.
즉, 어떤 해석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실험의 한계를 넘어선 문제다. 앞으로 수백 년이 흘러도 물리학자와 철학자
들은 이 문제를 놓고 여전히 논쟁을 벌일 것이다.
실험결과만으로는 세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으므로, 결론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탁상공론 같은 논쟁에 자유의지free will를 도입하면 내용이 좀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원초적 권리이자, 도덕의 갈 길을 정하는 지침이기도 하다.
자유의지
모든 문명은 자유의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보상과 처벌, 그리고 개인적 책임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원리에 어긋나지만 사회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입한 가상의 개념일까?
이 논쟁은 양자역학의 핵심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신경과학자가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해두는 편이 안전하다.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러도 과학적으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병원이나 기타 보호시설에 감금해둬야 한다.
그러나 뇌에 종양이 있거나 뇌졸중에 걸린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다.
이들은 의학이나 심리학적 치료가 필요한 환자일 뿐이다.
뇌의 손상 부위를 치료하면 그는 사회의 건설적인 일원이 될 수 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심리학자 사이먼 배런-코헨Simon Baron-Cohen은 나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병적인 살인자 중
상당수(전부는 아님)는 비정상적인 두뇌를 갖고 있다”고 했다.[1]
이들의 뇌를 스캔했더니,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
다고 한다(이런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고통받는 장면을 보여주면 편도체와 신경핵 그리고 쾌락중추가 활성화된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마땅하지만, 잔인한 행동에 궁극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들은 두뇌 자체가 비정상이므로 처벌보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다.
1985년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 박사는 일련의 실험을 실행한 후 자유의지의 존재에 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피험자들에게 “시계를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신호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자.
EEG 스캐너를 사용하면 두뇌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시간(피험자가 신호를 보낸 시간과 EEG 스캐너로 측정한 시간)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두뇌가 결정을 내린 시간은 피험자가 마음먹은 시간보다 0.3초 정도 빠르다.
이는 곧 자유의지가 가짜임을 의미한다.
뇌는 의식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 직후에 마치 의식이 결정한 것처럼 전후 상황을 무마한다.
마이클 스위니는 리벳 박사의 실험결과를 접하고 “뇌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무엇을 결정할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2]
사회의 주춧돌로 여겨졌던 자유의지는 좌뇌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실행된 실험은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삶의 주인인가, 아니면 두뇌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인가?
몇 가지 방법으로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자.
사실 자유의지는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철학 사조에 어긋난다.
결정론에 의하면 미래는 물리법칙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
뉴턴은 우주를 “태초에 태엽이 감긴 후 방치된 시계”로 생각했다. 조물주가 시계의 태엽을 다 감아놓고 물리법칙을 부과
한 후 혼자 돌아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미래는 처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모든 사건은 예측 가능하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그 시계의 일부인가?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
이것은 철학 및 종교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결정론과 운명(또는 천명)에 긍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전지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은 미래를 모두 알고 있으므로, 그의 뜻에 따라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신은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이 천국으로 갈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지 다 알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겪는 동안 이 문제 때문에 두 파로 양분되었다.
당시 가톨릭교리에 의하면 모든 신도는 헌신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특히 교회에 돈을 헌납하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했다(당시 성직자들은 신도에게 돈을 받고
천국 입장권, 즉 면죄부를 팔기까지 했다).
간단히 말해서, 지갑의 두께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금전만능에 빠진 가톨릭교회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1517년에 95조항을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종교개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 인해 교회는 두 파로 양분되었고, 이후 100여 년 동안 수백만 신도들과 유럽 전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25년에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가 알려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불확실해졌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능한 미래의 확률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하게 어떤 미래가 닥쳐올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에 의하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양자역학이 자유의지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양자적 효과는 너무나 미미해서, 거시적 존재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지금은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한 점이 많다.
DNA가 발견된 후로 삶에 관한 질문은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이런 질문은 굳이 철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답할 수 있고, 사람마다 답도 제각각이다.
이 점에서는 자유의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자유의지”라는 말은 개념부터가 모호하다.
자유의지를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의 행동이 예측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영화는 스토리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모든 장면이 예측 가능하다.
이런 곳에서는 자유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두 가지 면에서 영화와 완전 딴판이다.
첫째, 현실 세계는 양자역학에 의해 모든 가능한 미래가 중첩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오직 하나의 시나리오만 존재한다.
둘째, 현실 세계는 혼돈이론의 지배를 받는다.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원자의 모든 운동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원자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나의 원자에 조금만 힘을 가해도 그 효과가 일파만파로 번져서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다. 날씨를 예로 들어보자. 대기를 이루는 모든 원자의 움직임을 알 수만 있다면, 대형 컴퓨터를 동원하여 100년 후 날씨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날씨가 화창했다가도 몇 시간만 지나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너무 복잡하게 변하기 때문에, 100년은커녕 며칠 후의 날씨
조차 예측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대기에 작은 진동을 일으키고, 이것이 점점 증폭되면 초대형 폭풍으로 자랄 수 있다.
폭풍의 원인이 나비의 날갯짓이라면, 정확한 일기예보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잠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사고실험으로 되돌아가보자.
45억 년 전의 지구와 똑같은 행성을 만들어서 45억 년 동안 진화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지금과 똑같은 지구가 만들어질
것인가?
혼돈으로 가득 찬 대기와 바다, 그리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양자적 효과를 고려하면 생명체가 탄생한다 해도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인간은 우리와 전혀 다른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불확정성과 혼돈이 함께 존재하는 세상에 결정론을 적용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양자두뇌
이 논쟁의 향방은 뇌의 역설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역설계를 통하여 트랜지스터 두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이는 곧 두뇌가 결정론적 물체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두뇌에 질문을 던지면 똑같은 답을 반복할 것이다.
컴퓨터도 동일한 질문에는 항상 같은 답을 출력하므로, 결정론적 기계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우주는 양자역학과 혼돈이론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트랜지스터로 만든 역설계 두뇌는 정의에 의해 예측 가능하고, 이것은 이론적으로 사람의 뇌와 완전히 동일하므로 사람의 뇌 또한 예측 가능하고,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다.
일부 과학자들은 “양자이론에 의해 주어진 한계 때문에, 역설계 두뇌나 생각하는 기계는 결코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트랜지스터의 집합체가 아닌 양자적 기계이기 때문에, 유럽연합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옥스퍼드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자 상대성이론의 권위자로 알려진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 박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양자적 과정의 결과라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
heorems’를 인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갔다.
괴델은 1931년에 대수학이 불완전하다는 충격적 사실을 증명했다.
즉, 모든 대수학체계에는 공리만으로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런데 펜로즈의 주장에 의하면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학도 불완전하다.
그는 기계와 뇌의 차이점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뇌는 양자역학적 기계장치이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어떤 기계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존재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수수께끼를 직관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역설계 두뇌가 제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결국은 트랜지스터와 전선의 집합체이므로 결정론을 따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계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결정론적 운동방정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자적 체계는 불확정성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러 가지 가능한 미래 중 어느 하나가 나타날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이다.
역설계 두뇌가 인간의 행동을 재현할 수 없다면, 과학자들은 예측할 수 없는 힘(뇌 안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효과 등)이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펜로즈 박사는 뇌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는 곳으로 뉴런 내부의 ‘미세소관(微細小管, microtubules)’을 지목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펜로즈의 접근법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다수가 반대한다고 해서 부결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은 검증 가능하고 재현 가능하면서 반증도 가능한 이론을 통해 결정된다.
나는 디지털 및 아날로그 계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뉴런의 거동을 트랜지스터로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뉴런은 정보를 흘리거나 간간이 오작동할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매우 민감하며, 나이를 먹을수록 기능이 떨어지는 등
기계장치로 재현하기에는 너무 번잡하다.
내가 보기에 트랜지스터로 구현한 뇌는 대략적인 모형에 불과할 것 같다.
6장에서 말한 대로 뉴런의 축삭돌기가 가늘어지면 정보가 밖으로 새기 때문에, 화학반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정보누수와 오작동은 양자적 효과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다.
뉴런을 가늘고 빽빽하게 만들면 정보전달 속도는 빨라지겠지만, 그럴수록 양자적 효과가 크게 나타난다.
이는 곧 정상적인 뉴런도 정보가 새거나 불안정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런 문제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에 모두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설계로 만든 로봇은 인간의 뇌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없다.
펜로즈의 주장과 달리, 나는 트랜지스터를 이용하여 결정론적인 로봇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로봇은 인간과 비슷한 의식이 있지만 자유의지는 없다.
또한 이 로봇은 튜링테스트를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적 효과 때문에 로봇과 인간은 결코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의지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지는 완고한 개인주의자들이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우리는 모든 선택을 자신의 뜻대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이미 결정된 수천 가지 요인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는 영화 속 배우라는 뜻은 아니다.
영화의 결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적 효과와 혼돈의 미묘한 조합이 결정론적 요소를 붕괴시킨다.
결국 우리는 언제까지나 운명의 주인으로 남을 것이다.
미치오 카쿠 저, 박병철 옮김,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