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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례가 끝난후 묘소 앞에서 선생의 뜻을 기려 모두 새로운 세상을 위해 분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동학·천도교의 개벽 사상은 ‘유토피아 - 형이상학 - 종교’이라는 구도를 벗어나 ‘개벽’은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다시 정위(定位)’되어야 한다는 목표로 진행된다. 사진 권오철
포덕 165(2024)년 5월 19일(일요일) 오전 11시 부터 제102주기 의암성사 환원일 묘소 참례식이 의암성사 묘소 앞(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107-12,국가관리묘역)에서 윤석산 교령과 내외 인사, 그리고 유족들이 모인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大神師)의 시천주(侍天主) 신앙에서 창시 되어,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대선사의 사인여천(事人如天),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이후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니 전봉준 장군이 내세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이후 제3대 의암 손병희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정립된다. 오늘 의식에서 교령의 인사말과 심고(心告)의 말에서도 강조 된바 있다.
‘환원일(還元日)’이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별세(別世)’를 의미하고 참례(參禮)는 의식에 참여하는데 보통 그 지역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그 의미를 더하는 것이다.
의식의 순서는 개식,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헌화,심고.폐식으로 진행되었고 후에 약력소개 및 봉황각 유래설명이 있었다.
의식의 특징은 청수봉전(淸水奉殿)은 대신사가 대구장대에서 처형당할 때 청수를 봉전하고 순도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시행한 것인데 매우 전통적이고 소박하며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이 신새벽에 일어나 이슬 머금은 맑은 물을 장독대에 놓고 소망을 말하던 그 원초적이며 진실한 종교의식이니 이것이 바로 한류의 원천의 하나이기도 하다.
심고(心告)는 일종의 기도인데 시작과 끝에 항상 그 마음을 다잡는 생각을 말로써 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새기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좋은 의식의 하나이다. 마지막에 ‘심고’라고 말로써 하며 맺는다. 그리고 앞선 사람이 말을 하기전 모두에게 인사하면 모두가 같이 고개를 숙임은 인간존중의 예법을 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상생상경(相生相敬)이니 한류의 표징이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 계승사업회는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의암 손 선생의 서거 102주년 추모 행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의암 손 선생 유허지 영당에서 진행됐으며 오택균 공동대표, 계승사업회 임원. 회원 등이 참석해 손 선생을 추모했고 이번 행사는 계승사업회에서 주관하는 1회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주관의 일환이라고 한다.
봉황각은 종교 지도자 양성뿐만 아니라 독립정신 교육이 이뤄져 민족대표 33인 중 15인을 배출했으며, 483명의 독립운동가를 수련 시킨 역사적 산실이다. 이제 봉황각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이다. 사진 권오철
한류정신의 핵심인 저항과 투쟁의 정신은 국난에 항상 조건 없는 희생을 한 의병,민병으로 니타나고 이것이 이 땅을 지킨 원동력이다. 이후 3.1운동으로 인한 사실상 강점기 탈출, 이어진 4.19등 항쟁이 이 땅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또 코리언의 민족종교들은 대부분 이 동학천도교에서 파생되고 오늘날 기독교 일파도 다 이 영향 아래서 성장한 것이다.
따라서 이 동학(東學)천도교의 선진적이며 소박한 생각, 사람이 하늘인 인권과 대오의 사상, 여성존중, 어린이 보호, 위생수칙등은 가히 세계적으로 이제 퍼져나가고 재평가될 시점이 올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동학천도교는 그 원시반본의 정신으로 돌아가 민중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종교로서, 사상으로서, 규범으로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 하나되는 일에 삼통(三通)을 실현하여 그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글 권오철 기자)
의암 대성사(義菴聖師)의 약력(略歷)
포덕 2년(1861)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탄생/포덕 23년(1882) 東學에 입도/포덕 35년(1894) 해월신사(천도교 제2세 교조)의 명에 따라 전봉준 장군과 함께 동학혁명을 영도/포덕 37년(1896) 해월신사로부터 의암(義菴) 도호를 받음/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道統 전수 (천도교 제3세 교조 되시다)/포덕 42년(1901) 일본에 계시면서 국내 청년 64명을 선발 일본에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포덕 45년(1904) 국내개혁을 목적으로 동학교도로써 진보회를 조직 '단발흑의'의 갑진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포덕 46년(1905)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고 천도교 대헌 및 궁을기 제정/포덕 47년(1906) 일본에서 귀국, 천도교중앙총부를 설립함과 동시에 72개 대교구를 설치 9월에 일진회에 가담한 친일두목 62인을 출교/포덕 51년(1910) 보성학원(보성전문, 중학, 소학) 인수, 「천도교회월보 간행/포덕 53년(1912) 우이동에 鳳凰閣을 건축, 지방두목 483명을 7회에 걸쳐 수련/포덕 60년(1919)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을 영도, 독립운동을 전개/포덕 63년(1922) 5월 19일 옥고로 순도순국 하시니 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