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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미륵보살입상의 고혹미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6]
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불보살
1.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의 발견
국립중앙박물관 불상 전시실에 가보면 가장 크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석조 불입상과 석조 보살입상 한
쌍이 진열되어 있다.
이 석조 불· 보살입상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주 일대 고적(古蹟)을 조사하면 서 월성군(月城郡) 내동면
(內東面) 신계리(薪溪里)(현재 경주시 외 동읍 신계리)의 감산사(甘山寺) 터에서 발견해 당시 총독부
박물관 으로 옮겨 온 것이다.
옮겨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7월에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와서 그 해 8월29일 한일합병 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초대 총독으로
눌러앉아 가혹한 무단통치로 조선 8도를 얼어붙게 했던 사내정의(寺內正毅, 1852∼1919년)는 191 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 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할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었다.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 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 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 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조선문화에 대한 깊은 배려가 깃들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정책의 확실한 증거가 제출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경주 일대의 고적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도 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 두 불·보살입상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자, 총독부는 물산 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새로 지은 특설 (特設)미술관에 불·보살입상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월에 옮겨와 특설미술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좌우에 세워 놓은 후 이 해 8월에 조선물산
공진회를 개최하여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한다.
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보살상은 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로써 경복궁 탈취를 기정 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년 7 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 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 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거기에 동원된 첫 희생물 이 이 두 석조 불·보살입상이었다.
이 석조 불·보살입상의 광배 뒤에는 장문(長文)의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삼국유 사(三國遺事)’ 권3 남월산(南月山) 감산사(甘山寺) 조에서도 금당 (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광배) 후기(後記)를 인용하 여 이 양 불·보살입상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상기를 잘못 읽어 몇 군데 오자를 냈을 뿐만 아 니라 전체를 옮겨 적은 것도 아니었다.
이에 일인 학자들이 정밀하 게 그 탁본을 찍어 대조하며 바로잡는 작업을 편 결과 1919년 3월에 ‘조선금석
총람(朝鮮金石總覽)’ 2권을 편찬해 내면서 그 전문(全 文)을 수록하여 처음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 양대 석조 불·보살입 상을 조성한 지 1200년이 되는 기미년에 이루어진 일이고, 또 기미 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3월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참으 로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후 1920년에 발행된 ‘박물관진열품도감(博物館陳列品圖鑒)’ 제 2, 제3집에 이 조상기가 실리고, 1932년
12월에는 일본인 사학자 말 송보화(末松保和)가 ‘감산사 미륵존상 및 아미타불의 화광후기(火 光後記)’라는
논문을 써서 일반에 널리 알렸다.
뒤 이어 1935년 8 월에는 일본인 금석학자 갈성말치(葛城末治)가 ‘조선금석고(朝鮮金 石攷)’ 1책을 편찬
하면서 ‘18 경주 감산사 미륵보살조상기’, ‘1 9 경주 감산사 아미타조상기’의 2개 항목으로 나눠 조상기
내용을 소개하고 금석학적인 가치를 평가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 중길공(中吉功)과 우리나라의 문명대(文明大) , 김리나(金理那) 교수 등 국내외
미술사학자들이 이에 대한 논고를 다방면으로 전개해오고 있다.
이는 이렇게 분명한 조상기를 가진 완전한 불보살상을 다른 곳에서 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그 조상기
내용이 풍부하여 신라문화의 황 금기인 성덕왕대의 사상 경향과 정치 상황 및 생활 풍습 등을 유추 (類推)
할 수 있고, 서예와 문장의 수준을 확인하고, 불보살상 연구 의 양식사적 기준치를 마련할 수 있는 등
다양한 성과를 얻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2. 불보살 입상 광배 뒤에 새겨진 記文
그렇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할 터이니 우선 먼저 지어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
寺石造彌勒菩薩立像)>(도판 1)의 광배에 새겨진 기문(記文)인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부터 전문을 옮겨
보겠다.
“개원(開元) 7년(719) 기미 2월15일에 중아찬(17관등 중 제6위) 김 지성(金志誠, 652∼720년)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제7위 관등)과 돌아가신 어머니인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를 받들기 위해 삼가 감산사(甘山寺) 한 곳 에 돌 아미타상 1구와 돌 미륵상 1구를 만든다.
대체 듣자니 지극히 큰 도(道)는 아득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 며 능인(能仁, 석가모니라는 뜻)은 열반에
들어 가고오는 것이 없다 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현법(顯法;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는 법, 즉 대·소승 경전에 의한
가르침)이 이에 응하 여 3신[三身; 비로자나불과 같이 형상 없는 이념체인 법신(法身)과 아미타불과 같이
불멸의 형상을 가지고 영구히 존재하는 보신(報身) , 석가여래와 같이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의 몸으로 잠시
나타내 보 인 응신(應身)을 말한다.
법상종에서는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 用身), 변화신(變化身)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외에 법신, 응신, 화신(化身)으로 말하는 경전도 있다]으로 근기(根機, 타고난 바탕) 에 따라 (중생을)
건져내 (고해를) 건너게 하고 천사(天師, 도교의 지존)의 10호[十號; 천존(天尊)이 가지고 있는 십종 별호,
自然, 無 極, 大道, 至眞, 太上, 道君, 高皇, 天尊, 玉帝, 階下]를 드러내 소 원이 있으면 모두 이루게 한다.
제자인 지성은 성세(聖世, 좋은 세상)에 나서 영광스런 지위를 역임 하였는데 지략(智略)이 없는데도 시속
(時俗)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장 자(莊子)와 노자(老子)의 소요[逍遙; 자연 속을 거님. ‘장자(莊子) ’ 첫 편의
제목이 소요유(逍遙遊)다]를 좋아하고 뜻이 진종(眞宗, 참된 종교 즉 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着; 4세기경
간다라 폐샤왈 에서 태어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편찬한 대승논사] 의 심오한 깨달음을 희망
하였다.
나이 67세(718년)에 맑은 조정에서 임금 받드는 일을 버리고 드디어 한가한 시골 밭으로 돌아와 5천언
(五千言, 노자 ‘도덕경’의 글자 수가 5000자임)의 ‘도덕경’을 펼쳐 읽으니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도(玄道,
심오한 도)에 들어온 듯하고 17지(地)의 법문[法門; 무 착이 지은 ‘유가사지론’을 일컫는 말이다]을 연구
하니 색(色; 현 상)과 공(空; 근본)이 무너져서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어서 다시 정명(旌命,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임금의 명령)이 초가 집으로 떨어져서 왕도의 바쁜 임무를
맡게 되자(717년, 기미) 비록 벼슬에 있어 세속에 물들고 있으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버릴 수
없어 지성의 재산을 모두 기울여 감산(甘山)의 가람(伽藍) 을 건립하였다.
엎드려 원컨대 이 작은 정성으로 위로는 국주대왕(國主大王, 나라의 주인인 대왕 즉 성덕왕)이 1000년의
많은 수명을 누리고 만복(萬福) 의 큰 기쁨을 늘리는 밑천이 되며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 이찬공이
온전치 못해 시끄럽고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 으로 태어나지 않는 묘과(妙果, 신묘한 과보니
열반을 뜻함)를 얻는 밑천이 되게 하소서.
아우인 양성(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현도(玄度) 사(師) 누 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리(阿好里) 겸해서 서형(庶兄)인 급한(及漢) 일길찬 총경(聰敬) 대 사(大舍,
제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 및 가없는 법계(法界)의 일체 중생이 함께 6진[六塵; 눈, 귀,
코, 혀, 몸과 머 리 등 6종의 인식 기관으로 느끼는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이치 등 여섯 가지 대상물]에서
벗어나 모두 10호[十號; 원래 불타가 열 가지 별호를 가지고 있으니 如來, 應供, 正遍知, 明行足, 善逝, 世
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世尊이 그것이다. 이를 본떠 도 교 천존사에게도 10호를 붙인 것이다]에
이르게 하소서(불타의 경지 에 이르게 하라는 의미).
비록 성산(城山, 성을 쌓은 산)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원은 끝 이 없을 것이고 억겁의 돌이 사라진다
해도 존용(尊容, 존귀한 얼 굴)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구해서 성과 없는 것이 없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성취하리니 만약 이를 따라서 마음으로 원하는 이가 있 다면 모두 함께 그 선인(善因, 착한 인연)을 짓도록
합시다. 돌아가 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가에 이를 뿌렸다.”
3. 김지성과 김개원의 '특별한' 관계
다음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도판 2) 광배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도 그 내용이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조성 발원자가 김지성이 아니라 김지 전(金志全, 652∼720년)으로 되어 있어 잠시 혼란스럽게 하지만
내 용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친족관계에서 김지성, 김지전 두 인물이 일치하므로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두 인물의 전처와 후처 이름이 서로 일치하니 두 인물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지성이란 이름을 미륵보살입상의 광배를 새기고 난 직후 에 김지전으로 바꿔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왕명에 의한 개명인데, 김지성을 김지전 으로 왜
바꿔야 했는지는 차차 밝혀보기로 하고 먼저 조상기 끝부분 에 새겨진 내용부터 옮겨 놓아야 하겠다.
이 부분은 <감산사 석조미 륵보살입상>의 조상기에는 없고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조상 기에만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개원 7년(719) 기미 2월15일에 내마 총(聰)이 짓고 봉교[奉敎; 교 서(敎書)를 받듦, 즉 왕명을 받음]
사문(沙門, 승려) 석경융(釋京 融)과 대사(大舍, 제12관등) 김취원(金驟源)이 교서를 받들어 쓰다.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 해변에 뿌렸다. 후대에 추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 선조(善助, 도움)함이 있었다.
김지전 중아찬(重阿, 제6관등)은 삼 가 살아 생전에 이 선업(善業)을 지었다.
나이 69세인 경신년(720) 4월22일 돌아가서 이를 쓰게 되었다.”
이로 보면 김지성은 67세 나던 해인 성덕왕 17년(718) 무오년에 벼 슬을 버리고 감산장(甘山莊)으로 와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 년(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가면서 감산장을 절로
만들고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불사 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 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 조성했던 아미타불입상 조상기 말미에 그의 공적과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 첨가
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 김지성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상기 내용과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공식기록들을 연계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조상기를 제외하고 김지성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책부원귀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外臣部) 15
조공(朝貢) 3에 나오는 다음 기사뿐이다.
“신룡(神龍) 원년(705) 3월에 신라왕 김지성(金志誠)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다.
9월에 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 지방 특산물)을 바치다.”
당 중종 신룡 원년이면 신라 성덕왕 4년이다.
그러니 신라왕은 김지성이 아니라 김륭기(金隆基, 690∼762년)였다.
성덕왕 11년(712) 3 월에 당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 685∼762년)가 등극할 준비를 끝내고 노원민
(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요구하여 성덕왕이 김흥광(金興光)으로 개명한 사실
까지 있으니, 당 조정에서 성덕왕의 이름을 몰라서 김지성으로 기록해 놓았을 리 없 다.
따라서 일본인 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신 라왕이 김지성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옮겨 쓰는 과정에 글자가 빠져 신라왕 김지성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책부원귀’는 10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에 왕흠약(王若)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지은 책이니, 이렇게 방대한 편찬 사업을 하다보면 이런 실수는 얼 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덕왕 4년 3월에 김지성이 견당사(遣唐使)의 정사(正使) 가 되어 당나라에 갔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8 성덕왕 본기 성덕왕 4년조에는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 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 9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는 기록이 있으므로 ‘책부원귀’의 기사 내용이 사실
임을 확인해준 다.
다만 사신의 이름이 빠져 있을 뿐이니 김지성이 3월에 정사로 갔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 조상기에서 김지성은 자신의 부모형제는 돌아갔거나 살아 있거나 간에 모두 거명하면서 그들의
복을 비는데, 부모 형제 부인 이외에는 오직 국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의 복을 빌고
있을 뿐이다.
첫머리에 국왕의 복을 비는 것은 왕조 사회에 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다음에 이찬 김개원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 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김개원이란 인물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년)의 막내왕자 로 효조왕(孝照王, 687∼702년) 4년
(695)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밖에 안 된 고아였던 그 아우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는 이로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었다.
전 호에서 살펴본 대로 김개원은 그 누님들인 김흠운(金運, 631∼65 5년)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 ?)
와 김유신(金庾信, 595∼67 3년)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년∼712년 이후)과 함께 각각 3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었다.
3 가문 결속의 구심점은 태종무열왕의 적장손 혈통이었다. 이런 원칙 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13세밖에 안
된 고아인 성덕왕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김개원은 성덕왕의 종조부이자 상대등으로 거의 섭정 지위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개원은 세 집안의 결속을 위해, 이미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조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으므로 이제는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년(70 4)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다.
그리고 나서 다음 해인 성덕왕 4년(705) 3월에 김지성이 사신으로 갔으니 아마 왕비 책봉을 청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미타산(彌陀山)이 ‘무구정광대다 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번역
했으므로 김지성이 이를 구해 돌아와서 김개원과 성덕왕에게 보여 다음 해인 신룡 2년(706), 즉 성덕왕 5년
5월30일에 <황복사3층석탑>(15회 도판 6)을 보수하게 하 였던 듯하다.
부모인 신문왕과 신목태후 및 형왕인 효조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 을 보수한다 했지만 국왕 부부의 복리
증진과 수명 장구 및 왕자 생 산이 그 최종 목표였다.
이런 일을 주관한 것은 사실 16세밖에 안되 는 어린 소년 성덕왕이 아니라 환갑 나이에 접어든 상대등
김개원이 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무 총책은 성덕왕의 외숙부였으리라 추정되 는 김순원(金順元)이 맡았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밝혀 놓았다.
4. 김지성은 성정왕후를 내몬 장본인
이때 김지성(652∼720년)은 55세에 접어들어 노성한 시기였으니 아 마 현재 총무처에 해당하는 집사부
(執事部)의 차관 자리인 전대등 (典大等)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사실 김개원은 성덕왕 5년(706) 1 월에 상대등 자리를 김인품(金仁品)에게 넘기는데 이미 성덕왕이 17 세가
되어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을 할 수 있고 왕비 책봉이 이루어져 왕권이 반석 위에 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해에 성덕왕은 원자(元子)인 효상(孝)태자 중경(重慶, 706∼717 년)을 얻고 11년(712) 8월에는 김유신
처인 대고모 지소부인을 왕비 의 칭호에 해당하는 부인(夫人)에 봉하며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간 다.
성덕왕이 이렇게 처가인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가자 성덕왕의 외가인 요석공주 집안의 반발이 거세
지면서 김순원이 김개원을 움직여 김원태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게 하는 듯하니 이것이 성덕왕
15년(716) 3월의 일이다.
이 일이 벌어질 때 집사부의 중시(中侍, 장관)를 맡고 있던 사람은 이찬 김효정(金孝貞)이었는데,
그는 김순원계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 사실상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전대등은 김지성이었다. 그
러니 김지성은 자신이 책봉사로 당나라에 가서 책봉을 받아냈던 왕비를 자신의 손으로 출궁시키는 악역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실상 섭정의 지위에 있던 김개원의 허락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성덕왕은 이미 27세의 장년이 되었는데도 종조부 김개원과 외숙부 김순원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성정왕후를 궁 밖으로 내보내면서 비단 500 필, 밭 200 결, 벼 1만 석, 대저택 한 채를 하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6년(717) 6월에는 12세밖에 안 된 태자 중경 (重慶)을 시해하는 듯하다.
이런 대사건에 성덕왕은 격노하였을 것이고 그 책임을 물어 집사부 수뇌들을 파면했을 터이니 성덕왕 17년
(718) 정월에 중시 김효정(金 孝貞)이 사퇴했다는 ‘삼국사기’ 권8 성덕왕 본기 17년 정월의 기 사가 이를 말해
준다.
이때 전대등 김지성도 함께 문책, 파면당하는 듯하니 “시속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다”는 내용이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 은 성정왕후의 친정 집안이 성덕왕의 총애를 믿고 지나치게 발호하 여 여러
가지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이런 표현을 했을 것 같다.
어떻든 이래서 김지성은 67세에 벼슬을 내놓고 그의 별장인 감산장 에 내려와 ‘노자’와 ‘장자’ ‘유가사지론’을
읽으며 유유자적 (悠悠自適)하려 한다.
이때 이미 김지성은 권세의 허망함과 인생무 상을 절감하고 장차 이 감산장으로 절을 삼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를 진행했던 듯한데, 이 일을 미처 마무리짓기 전인 성덕왕 18년(719) 에 왕명으로 다시 전대등으로
입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감산장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감산사로 하고 이 미 조성이 끝나가던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각기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에 봉안하면서 개원 7년(719) 기미, 즉 성 덕왕 18년
2월15일 석가여래 열반재일을 기해 봉불식(奉佛式)을 겸 한 개산재(開山齋; 절을 창건하고 처음 올리는 재)
를 크게 베풀었던 듯하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왕은 당대 최고학자인 설총(薛聰)을 시켜 조상 기(造像記)를 짓게 하고 승려인 석경융
(釋京融)과 대사인 김취원에 게 각각 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와 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를 써 새기 게 하였다.
김지성이 이렇게 자신의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는 것을 본 성덕왕은 어느 자리에서 김지성의 이름을 김지전
(金志全)으로 하 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던 것 같다.
이제까지는 뜻이 정성스러웠는데 이제부터는 뜻이 온전하게 되었다 고 칭찬한 말로부터 비롯되었을 듯하다.
그래서 아직 각자(刻字, 글 자를 새김)에 들어가지 않았던 아미타불조상기에서는 김지전으로 이 름자를 바꿔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름자의 뜻대로 이렇게 자신 의 일생을 온전하게 마무리짓고 나서 김지전은 바로
다음 해인 성덕 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돌아가게 되었고 이 사실은 아미타불 입상조상기 말미에
추가로 새겨지게 되었다.
5. 관능적 비만성 드러낸 초당 불교조각 양식
서진(西晉)의 멸망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뉜 다음부터 수(隋)나라 가 진(陳)을 멸망시켜(589년) 남북조를
통일하기까지 273년의 세월 은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려 한 시대의 주도이념으로 군림하면서 그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워 내던 시기였다.
불교의 모든 경전을 한 문으로 번역하고 이를 토대로 불교를 중국화시켜 나아가게 되니 불 상 양식도 중국
화하여 석조(石趙) <건무(建武)4년(338) 명(銘) 선정 불좌상>(제3회 도판 8)에서는 용모가 중국화하고,
북위(北魏) 헌문 제(獻文帝) 황흥(皇興) 4년(470) 경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운 강석굴 제16동 본존
시무외포복불입상>(제5회 도판 10)에서는 의복까 지 중국 황제의 곤룡포 형식으로 바뀌어 중국화가 완성
된다.
이후 불교가 전 중국대륙을 휩쓸면서 한량없는 불보살상을 만들게 되는데, 불교가 황제권의 보호와 견제
속에서 건실하게 발전하던 5 세기 후반을 지나면 극성기의 난만한 발전을 거치면서 맹목적인 계 승과
무분별한 확산에 따른 문화말기적 타락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불보살상이라는 조형예술 쪽에서만 드러나는 일이 아니었다. 불교 사상과 교단에 먼저 나타난 현상
이었다. 중국식 종파 불교의 출현과 교단의 분열 현상이 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주(北周) 무제(武帝)는 건덕(建德) 3년(574) 5월17일 불교 와 도교를 함께 폐지하는데, 이때 경전과
불상을 모두 불태우고 깨 뜨렸으며 도사와 승려 200만 명을 환속시켰다 한다.
그리고 건덕 6 년(577) 봄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6월에 북제 지역에 폐 불령을 내리고 역시 승니
(僧尼, 비구승과 비구니) 300만 명을 환속 시키고 경전과 불상을 불지르고 파괴했다고 한다.
말폐 현상이 극에 다다랐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제는 이런 악업 으로 다음 해(578년) 6월에 악창(惡瘡, 피부암)에 걸려 모진 고생을 하다 죽었다
한다. 어떻든 환속시킨 승려가 북중국에서 줄잡아 400 만 명이었다 하니, 그 타락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 결과 당제국이 천하통일을 계승하여 새로운 기틀을 잡아가게 되 자 불교교단에서도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그 지위 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현장법사(玄, 602∼ 664년)는 당태종 정관(貞觀) 3년(629)에 서역(西域)으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다.
이때 나이 28세였는데 17년 동안 인도대륙 내의 130 여 국을 여행하며 대소승 경(經), 율(律), 논(論) 3장
(三藏) 520질 657부를 구해 가지고 정관 19년(645) 장안으로 돌아온다.
이때 불상 8구(軀)와 불사리 150알도 함께 모셔왔다 한다.
그런데 이때 인도 사정은 더욱 심각하여 다만 난해한 논소(論疏)가 학승(學僧)들의 연구과제로 제시될 뿐
쉽고 친근한 경전으로 일반 민중을 건전하게 이끄는 교단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 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주술적 민간신앙과 결합된 밀교에 기울게 되니 이는 힌두교의 강한 영향 탓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불상도 힌두신상의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조각 양식을 닮아 퇴폐의 극치를 보이게 되었는데(도판 3)
현장법사는 이런 불상을 8 구나 모시고 왔던 모양이다.
현장법사가 새로 구해온 삼장의 내용도 불교의 근간을 전해주는 중심 경전보다는 지엽 말단을 다투는 논장
(論藏) 중심이었다.
그래서 현장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것도 김지성이 읽었다는 ‘유 가사지론’ 100권 같은 논장이 위주가 되었
으니, 그가 번역해낸 75 부 1335권을 세상에서는 신역(新譯)경전이라 하였다.
구마라습(鳩摩 羅什, 344∼413년) 등이 남북조 불교 극성기에 번역한 경전과 구별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당연히 구마라습 등이 번역한 경전은 구 역(舊譯)이라 하였다.
그런데 구역은 불교의 근간을 전하기 위해 그 중심 경전들을 서역 출신 승려들이 한문을 배워 번역한 것이
므로 표현이 정확하고 내용이 간결하다.
그에 반해 신역은 쭉정이를 주워온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에다가 현장이 서역어를 배워 번역한 것이어서
표현이 부정확하 고 내용이 지루하고 산만하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이후 극도의 논리적 혼란에 빠져들어 결국 불립 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종(禪宗)의
출현을 재촉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불상 양식에도 현장이 봉안해 온 8구의 불상 양 식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그 8구의 불상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 당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관능적 퇴폐성으로 미루어 보면 이런 요소들이 현장이 모셔 온 8구의 불상이 가졌던 양식적 특성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조 시대 말기부터 둔중(鈍重)과 비만(肥滿)이라 는 문화 말기적 퇴영현상이 나타나서
초창기의 경쾌(輕快)하고 수려 (秀麗)하던 조각기법이 소멸해 가고 있었는데, 이런 퇴폐적인 관능성이 영향을
끼치자 관능적 비만성이 이 시대 불교 조각양식에 주류 를 이루게 되었다.
6. 고혹미 보여주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근본적으로 이런 초당(初唐, 618∼ 712년) 양식에 영향받은 보살 입상
이다. 한 눈으로 보아 관능성과 비만성이 모두 나타나 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살집에서 육감적인 관능미를 느낄 수 있는데, 가슴을 가로지르는 천의(天衣)도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비사실적인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자못 고혹(蠱惑)적
이다.
두 팔뚝을 휘감은 천의도 그렇고,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도 퇴폐성이
농후하며, 두 다리를 따라 층급 을 이루며 반타원 형태로 중첩되어 내려간 옷주름도 관능을 자극한다.
사타구니를 타고 내린 치마끈이 톱니바퀴 모양으로 허벅지 안쪽 을 따라 내려온다든지 천의 자락이 양쪽
바깥 허벅지를 따라 내려오 며 톱니 모양 굴곡을 보이는 것도 매우 자극적인 요소다.
구슬꿰미로 이루어진 두 벌의 목걸이가 화려하게 목둘레와 가슴을 장식한 것이나 손목과 위팔뚝의 관절
부근을 탄탄하게 휘감고 있는 팔찌들에서도 짜릿한 관능미를 느낄 수 있고, 왼쪽 가슴에서 나와 늘어져
있다가 오른쪽 무릎 근처를 휘돌아 허벅지를 타고 오른쪽 엉 덩이 뒤로 사라진 긴 구슬걸이도 매혹적이다.
오른손을 늘어뜨려 천의 자락을 살짝 쥐고 있으며 왼손은 젖가슴 근 처까지 들어올려 손짓해 부르는 형상을
짓고 있다.
정녕 뇌쇄(惱殺, 여자가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애타게 하여 괴롭힘)성 짙은 표현기법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귀는 귓밥이 길게 늘어지고 살집 좋은 얼 굴에는 만면에 엷은 미소가 은은히 퍼져 있다.
그러니 눈은 가늘게 뜨고 눈썹은 활짝 펴져서 눈두덩이 넓어져 있다. 눈웃음을 유도해내 는 표현 기법이다.
꽃장식이 화려한 보관 위로는 크고 높은 상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상투 정면에는 화불(化佛) 좌상이 표현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미륵보살상이라는 조상기가 없었으면 틀림없이 관세음보살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8회에서 언급하고 나왔듯이 ‘미륵상생경’에서 상생한 미륵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있다고
하였고, 이 경설의 내용대로 북 위시대 운강석굴에는 많은 교각좌(交脚坐)의 상생미륵보살 보관에 화불을
표현해 놓고 있다(제 5회 도판 8). 뿐만 아니라 운강 17동 남벽 2층 동측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는 <미륵
보살입상>(도판 4)도 있어 이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짝을 이루고 있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을 비교해 보면
자세도 같고 좌우 손의 위치도 각 각 바깥쪽을 들고 있어서 두 불·보살입상이 본래는 한 전각 안에 동서로
짝을 이루면서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오른손을 젖가슴 근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올려 설법인 비슷한 수인(手印,
손짓)을 지어 좌우 대칭 적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 뒤로 흘러내린 곱슬머리 형태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타고 뒤로 넘 어가 있다.
광배는 보통 주형광배(舟形光背, 배 모양의 광배)라고 부르는 연꽃잎 모양(혹은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
(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형태인데 눈 높이 근처에서 약간 굴곡을 보여 2단 처 리를 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굵은 돋을무늬 테로 3겹을 돌려 이를 상 징했는데, 두광은 동심원이고 신광은
연꽃잎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 하다.
두광 신광 할 것 없이 가운데 테에만 각각 셋 씩 비운문(飛雲 文, 나르는 구름무늬)을 휘감아 놓았다.
테 밖의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를 어지럽게 장식하여 불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하 였다.
대좌는 8각으로 하대에는 각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대 에는 연화가 새겨져 있다.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위에 씨방을 두고 그 위에 보살상이 맨발로 서 있는데 씨방 둘레에도 연꽃잎이
둘려 있다. 연꽃잎 위에는 활짝 핀 모란 꽃 같은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 있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우리나라에 처음 나타난 불상 양식이 다. 옷주름이 두 다리를 따라 갈라져서
각기 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 나가는 형식의 불상은 아직까지 만들어 진 예가 없기 때문이다.
7.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입상
일찍이 중국에서는 서진(西秦) 건홍(建弘) 5년(424)에 병령사(炳靈 寺) 석굴을 만들면서 169동 제7감실
주불로 이런 형식의 입불상들을 조성해 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화평 (和平) 원년(460)부터 조영(造營)을 시작한 대동(大同) 운강(雲岡)
석굴에서는 가장 거대한 석불입상인 <운강18동 본존노사나화불인중 상(雲岡十八洞本尊盧舍那化佛人中像)>
(제 5회 도판 7)에서부터 이런 옷주름 형식을 취하기 시작하여 18동의 좌우협시불입상(도판 5)과 2 0동
본존 좌우협시불입상에서 모두 이와 같은 형식을 계승하여 불의 (佛衣) 표현의 중국적 양식으로 기틀을 잡아
간다.
특히 18동 좌우협시불입상이나 19동 좌우협시불입상은 18동 본존노 사나화불인중상의 편단우견(偏袒右肩)
과 다르게 통견(通肩) 형식으로 불의를 입고 있어 <병령사불입상>(제4회 도판 8) 양식을 그대로 잇고
있는데, 이런 양식은 제19동 남벽 서측 상부의 <나후라인연상 (羅羅因緣像)>(도판 6)으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이런 양식은 작은 금동불입상으로까지 확산되니 북위 연흥(延興) 5년(475)에 조성했다 는 명문이
새겨진 <연흥5년명 미륵불입상>(도판 7)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의 표현 양식은 북위 문성제의 초상조각으로 만들어 진 <운강 제16동 본존시무외포복불
입상>(제 5회 도판 10)이 출현하 여 중국 황제의 곤룡포와 같은 형식의 중국식 불의가 나타나면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고 정면 앞자락에서 단일의 큰 포물선 호가 발 목까지 중첩되는 형식으로 단순해진다.
우리도 이를 선호하여 <연가7년명 불입상>(제 8회 도판 8)이나 <서 산마애삼존불>(제 8회 도판 14)에서
부터 <황복사지 3층석탑출현 금 제여래입상>(제 15회 도판 14)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양식을 보이 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서 이와 같이 옷주름이 두 다리를 타고 두 가닥으로 갈라져
내리는 표현을 하였으니 이를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새로운 불상 양식의 출현은 현장의 신역경전을 따라 들어온 초 당 불상 양식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이 불상 양식의 선구를 중국에 남아 있는 초당시대 불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서안(西安) 비림
(碑 林)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안출토 석조불입상>(도판 8)이 그것 이다.
8. 서안 불상과 비교
이 불입상은 <사르나드출토 석조불입상>(도판 3) 계열의 굽타 말기 불상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니 현장이 인도에서 모시 고 온 8구의 불상 중에 이런 불상의 범본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불입상도 본래는 뒤에 광배가 붙어 있었던 흔적이 머리 뒷부분에 있 다 하니 <사르나드출토 석조불입상>
이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처럼 거신광을 짊어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이 <서안출토석조불입상>은 서안 교외에서 출토된 것으로 7세기 전 반 초당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온 정관 19년(645) 이후 제작일 터이므로 7세기 중반 내지
후반에 걸치는 시기에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과 비교해 보면 우선 크기가 비슷하다. 감산사상이 총높이 174cm이고, 서안상은
현재 높이 169cm라서 거의 사람 키와 같은 등신대(等身大, 실제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깨가 두툼하게 벌어지고 살집이 넉넉한 것이 같다. 더욱 같은 것은 통견으로 입은 불의의 옷주름이
가슴에서 배까지 타원형 호를 중첩시키며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서안상은 일어난 옷주름이 반드시 두 줄로 겹쳐 있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한 줄씩 일어나 있고, 서안
상은 옷주름 숫자가 적고 길게 늘어져 있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옷주름 숫자가 많고 팽팽하여 더욱 육감적이다.
감산사상에서 불두덩 근처에 따로 잔주름 몇 개를 더 보태 배로 흘 러내린 옷주름을 마감하였는데 이는
충동적인 궁금증을 자극한 것이 다. 그 곁의 두 허벅지 위에 날개 깃을 양쪽으로 한껏 펼친 듯 세로 곡선을 중
첩시켜 옷주름을 나타낸 것은 팽만감을 있는 대로 고조시 키려는 기법이다.
이처럼 차원 높은 관능미의 표출은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에 비하면 서안상의 무의미한 옷주름 표현이
얼마나 싱거운지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서안상의 두 손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본적인 손 자세 는 서로 비슷한 듯하다.
다만 감산사상이 왼손을 더 내려 옷자락을 잡았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는 자세로 겨드랑이 근처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펼치고 식지와 무명지를 꼬부려 자연스럽게 설법인을 지었다. 그런데 팔꿈치를 밖
으로 더 빼내 상체가 더욱 장 대해 보이는데 왼쪽 어깨를 이에 상응할 만큼 넉넉하게 표현하여 서 안상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느낌이 든다.
얼굴과 목의 살집은 서안상이 더 좋은데 어깨가 빈약하니 허약한 비만체질인 듯 보이는데 반해 감산사상은
얼굴이 모지고 단단하며 목 도 짧고 굳세니 건강미 넘치는 씩씩한 기상이 전신에서 배어난다.
얼굴 표정도 서안상은 맺힌 데 없이 너그럽기만한 태평한 모습인데 감산사상은 총명이 넘치는 생기발랄한 모
습이다. 육계도 서안상은 머리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밋밋하게 솟아 있는데 감산사상은 크지 만 머리와
분명하게 구별될 만큼 뚜렷하다.
서안상은 연화대좌의 씨방 아래가 없어져서 8각대좌의 각면에 안상 (眼象)을 장식하고 그위에 엎어놓은
연꽃잎을 장식한 연화대좌를 가지고 있는 감산사상과 비교할 수 없지만, 본래는 서안상도 이런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아 있는 씨방을 서로 비교 하면 씨방 둘레에 연꽃잎을 두른 것은 서로
같은데, 서안상은 겹잎 이고 감산사상은 홑잎이다. 감산사상이 훨씬 더 격조 높아 보인다.
재질이 보여주는 질감의 차이도 이 두 상의 느낌을 크게 다르게 하 는데 감산사상은 돌 중에서 가장 굳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서안 상은 훨씬 부드러운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감산사상의 광배는 거신광으로 주형광배인데, <감산사 석조미륵보살 입상>의 광배 모양처럼 굴곡도 없어
연꽃잎 한 잎을 떼어 세워 놓은 듯도 하고, 촛불꽃이 길게 타오르는 모양 같기도 하며, 거룻배 한 척을 세워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주형(舟形)광배니 촉염(燭 炎)광배니 연판(蓮瓣)광배니 하는 이름을 얻게 된
듯하다.
짝을 이루고 있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광배와 기본적으로 같은 형태인데, 다만 신광의 이중테
안에 꽃무늬와 구름무늬가 더 첨가되고 두광의 동심원 중 바깥테 부분에 비운문(飛雲文)이 있는 것이
다르다. 이 두광의 구름무늬는 미륵보살 두광에서 가운데 테선 을 감고 있던 것이 밖으로 풀려나온 것이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서 보인 이런 새로운 불상 양식은 곧 이후 불상 조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곧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한 유파로 정착된다.
<국보 182호 선산출토금동불입상>(도판 9)과 같은 것이 이 양식 계열의 대표적인 유례다.
감산사는 그 터 대부분이 논으로 변해 1915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 입상>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을 옮겨올 때도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 그대로 수습해 왔다 한다.
그런데 그 터에 3층석탑 하나 가 무너져 있었다. 이를 1965년 신라오악조사단이 복원해 놓았다.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7]
소덕(昭德)왕후의 등장
1.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의 발견
성덕왕(690년경∼737년)의 외숙부인 이찬 김순원(金順元, 651년경∼730년경)은 그의 외숙부이자 성덕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개원(金愷元, 645년경∼720년경)을 움직여 성덕왕 15년(716) 1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고 그 소생인 태자 중경(重慶, 706∼717년)을 시해하고 나서 3년 후인
성덕왕 19년(720) 3월에 자신의 딸을 왕비로 입궁시킨다.
이 사람이 소덕(昭德)왕후 김씨(700년경∼724년)이다.
이때 성덕왕의 나이가 31세 경이었으니 소덕왕후와 나이 차이는 10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러니 성덕왕은 10세 정도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은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강제 이혼시킨 외숙부 김순원에 대한 감정 때문에 선뜻 이 정략결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
지만, 3세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에 모후인 신목(神穆)왕후가 돌아간 바람에 천애고아가 된 그를
국왕으로 옹립해준 외숙부이고 보면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인 효조왕이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갔을 때 성덕왕은 13세 정도의 나이에 외숙부의 지원으로 왕위
에 올랐던 것이다.
성덕왕 19년 6월에 책비례(冊妃禮; 왕비를 책봉하는 예식)를 치르게 된다.
3월에 입궁하여 석 달 만에 치른 혼인 예식이었다. 그 사이 이 혼인을 앞장서 주선했을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감산사 석조아미타입불상>
(제16회 도판 2)의 광배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진 것은 이 어름의 일이었다.
성덕왕은 결혼하고 나자 어린 소덕왕후에게 깊이 빠져들었던 듯한데, 혼인식 다음해인 성덕왕 20년(721)
에 낳은 왕자 승경(承慶, 721∼742년)이 겨우 3세를 넘기자마자 23년(724) 봄에 태자로 책봉하고 나서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 곧바로 황룡사 9층탑을 중수한다.
성정왕후와 결혼한 뒤에 황복사지 3층석탑을 중수하여 고태자 중경(重慶)을 얻었던 옛일을 거울 삼은 것이다.
성덕왕은 왕자 승경을 얻자 아들을 위해 더욱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의욕을 과시한다.
20년 7월에는 하슬라(何瑟羅, 강릉)도에서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안변 근처에 장성을 축조하여 발해의
남진을 대비하고, 다음해인 성덕왕 21년(722) 10월에는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모화(毛火, 毛伐)
에 각간 김원진(金元眞)으로 하여금 관문성(關門城)을 쌓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게 한다.
그 사이 21년 8월에는 정전제(丁田制)를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혁신적인 경제정책을 단행
하기도 하였다.
2. 여난 겪은 신라 성덕왕과 당 현종
그리고 우연히 융기(隆基)라는 이름이 같고 나이도 비슷하여 서로 친밀감이 깊었던 당 현종과는 더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어서, 매년 두 차례 이상 사신을 정례적으로 교환하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신을
증파할 정도로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어갔다.
성덕왕 김융기(金隆基)와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는 각기 자기 나라의 국운을 극성
으로 끌어올려 태평성세를 이룩한 성군(聖君)들이었다. 문예(文藝)에도 정통하여 자국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다정다감한 문예군주들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권력과 애정 사이에 끼어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기도 한다.
당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게 현혹되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유발하고(755년) 나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게 할 뻔했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성덕왕도 여인들로부터 받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주변의 친위세력들에 의해서 별리(別離)를 강요당해 첫째왕비 성정왕후를 출궁
시키고 엄청난 상처를 받았는데, 이후 계비 소덕왕후와도 사별(死別)해야 하는 더 큰 고통이 성덕왕을 기다
리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세나 어린 외사촌 여동생을 계비로 맞아들여 왕자 둘을 연거푸 생산하고 막 신정(新情)이 깊어져서
23년(724) 봄에 불과 4세밖에 안 된 큰왕자 승경을 태자로 책봉하여 가정의 행복을 되찾으려 하던 차에,
이해 12월 뜻밖에 소덕왕후가 4세와 2세의 젖먹이 왕자들을 남겨 놓은 채 불과 20여 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성덕왕은 자신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했다는 슬픔보다는
어린 왕자들이 모후를 잃은 슬픔을 너무 안타까워했던 듯하다.
그래서 이후에는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고 어린 왕자 형제를 유모에게 맡겨 양육한다.
따라서 왕자들의 외조부이자 자신의 외숙부인 김순정(김순원의 아우로 추정)과 그 추종세력들이 성덕왕
일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출궁당한 성정왕후의 친가 쪽에서도 성덕왕이 다시 계비를 맞아들이지 않은 것을 성정왕후에 대한 예우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김개원과 요석(瑤石)공주, 지소(智炤)공주의 세 자매 후손들은 성정왕후 출궁을 둘러싼 그간의 갈등을
풀고 성덕왕을 중심으로 재결속하는 듯하다.
다음 해인 성덕왕 24년(725) 4월에 김유신의 손자라고 생각되는 이찬 김윤충(金允忠)이 중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일본기(續日本記)’ 권9에 의하면 이해 6월30일에 이찬 김순정(金順貞, ?∼725년)이 돌아갔다고
하였다. 김순정은 강릉태수와 재상을 지낸 인물로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水路夫人)조에 의하면 천하절색인
수로부인을 아내로 두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딸과 손녀딸이 장차 경덕왕의 초비와 계비가 되어 실권 있는 외척으로 부상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김순정은 김순원의 아우인 듯하다.
소덕왕후와 김순정을 잇따라 잃은 김순원 집안은 이 당시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터인데, 이런 상황
에서 성덕왕이 재혼하지 않았으니 집권 외척으로 우선 안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뒷날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이 되는 승경(承慶)과
헌영(憲英) 두 어린 왕자들을 적극 보호하여 자기 가문의 집권 연장에 이용하려 했을 듯하다.
어떻든 35세경의 한창 나이에 상처한 성덕왕이 끝내 재혼하지 않은 이유에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세력
균형 관계가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겠다.
성덕왕은 이 상황을 재혼 거부라는 적절한 방법을 통해 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화합과 단결을 도모해내 통일
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佛國)시대를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3. 바다 용에게 납치당한 수로부인 사건
그런데 김순정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알기 위해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의 내용을 옮겨보자.
“성덕왕대 순정(純貞)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면서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게 되었다.
곁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바다에 병풍을 두른 듯하고 높이가 천길이나 되며 철쭉꽃이 한창 피어나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보고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그 누구일까’ 하고 옆사람에게 말하였다.
시종하던 사람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 하며 모두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데 암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왔으며 또한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이틀 길을 지나다가 또 바닷가에 정자가 있어 점심을 먹던 차에 바다 용이 갑자기 부인을 채어 가지고
바다로 들어간다. 공이 엎어지며 땅을 굴렀으나 내놓을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있어 이렇게 고하였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이제 바닷속에 사는 짐승이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경계 안의 백성들을 나오게 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고 몽둥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으리
이다.’
공이 이를 좇으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를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 일을 묻자 이렇게 말하
였다. 칠보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세상에서 익혀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이 부인의 옷에 밴 이상한 향기도 인간세상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로부인은 잘생긴 용모가 한 시대에 제일이라서 깊은 산과 큰 물가를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
신령스런 물건)에게 약탈당했었다. 뭇 사람이 바다에 대고 불렀다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약탈하면 죄가 얼마나 지극하냐. 네가 만약 거역하고 아니
내다 바치면, 그물 넣어 잡아다가 구워 먹겠다.’
노인의 헌화가는 이렇다.
‘붉은 바윗가에서, 잡은 손 어미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리시어든, 꽃을 꺾어 드리오리다.’
여기서 김순정 부인이 당대에 비교할 수 없는 일등미인이었다는 사실과 김순정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어 바다로 끌려갔다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이라고 표현한 것은 해적이라고 보아야 하니 왜구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는 이후 김순정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김순정이 죽은 다음해인 성덕왕 25년(726) 6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김조근(金造近)이 김순정의 죽음을
알리자 일본 천황이 그 편에 이를 애도하는 국서와 황색 명주 및 무명을 부의로 보냈다는 사실이 ‘속일본기’
권9 신구(神龜) 3년 9월 무자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김순정은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신라 조정의 전체 분위기는 통일전쟁 시기에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던 일본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었는데, 김순정이 집권가문의 일원으로 이와 같이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것은 수로부인 약탈사건으로 맺어진 어떤 사적인 친분관계에서 기인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일본이 이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당대 집권 외척의 실권자 중 한 사람인 김순정에게서 그 부인을 납치해 갔을
수도 있다.
어떻든 수로부인이 이렇게 절세 미인이었으니 그 자녀들이 미남미녀일 수밖에 없었을 터라서 자연
김순원의 자녀들과 함께 성덕왕의 자녀들 사이에는 특별한 친분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4.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재 오대산 월정사의 산내 암자인 상원사(上院寺)에는 국보 36호인 <상원사
동종>(도판 1)이 있다.
이 동종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용뉴(龍; 용 모양을 하고 있는 종의 꼭지, 걸쇠로 사용됨)의 양 옆에 새겨져
있다.
‘개원(開元) 13년(725) 을축 3월8일 종이 이루어져서 이를 기록한다. 도합 놋쇠가 3300정(鋌)이다.
원컨대 널리 모든 중생에게 들리게 하소서. 도유내(都唯乃) 효○(孝○), 한 해 동안 일을 맡은 여러 승려
충칠(忠七) 충안(安) 정응(貞應), 단월 유휴(有休) 대사(大舍; 제12관등)댁 부인 휴도리(休道里), 덕향(德香)
사(舍; 제13관등), 상안(上安)사, 조남(照南)댁 장인, 사○(仕○)대사.’
개원 13년은 성덕왕 24년으로 소덕왕후가 돌아간 바로 다음해이다. 통일신라문화가 황금기로 접어드는
불국시대 초반이라 자못 건실한 창조정신이 신라 고유색을 발현해 나가던 시기로, 의상대사의 직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신라화한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종지를 활발하게 펼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미술양식에서도 신라 고유색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었으니 불보살상에서는 제16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제16회 도판 2)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제16회 도판 1) 같은
신양식의 출현이 이를 대변한다.
초당양식을 수용하면서 북위 극성기에 이루어지는 운강석굴의 고전적 불보살상 양식을 근간으로 하여 신라
고유색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상원사 동종>을 보면 동종에서도 이런 맥락으로 여러 선구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여 신라 고유양식을
창안해내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불교 교단은 대중의 집단 수행생활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교조인 석가모니 시절부터
비구의 소집을 알리기 위해 건치( 稚)와 북, 소라 등 법구(法具)로 소집신호를 보내게 했다는 내용이
‘오분율(五分律)’ 권18에 실려 있다.
이중에서 건치는 나무 속을 파내 종처럼 만들고 나무토막으로 이를 쳐서 소리를 내는 기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이를 동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인도에서도 초기 불교시대부터 동종과 비슷한 건치라는 법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건치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동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중국 범종(梵鐘)으로 탈바꿈하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화되어 주도이념으로 부상하던 남북조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사실은 일본 내량(奈良)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남조 진(陳) 선제(宣帝) 태건(太建) 7년(575)명이 새겨진
<진태건7년명 동종>(도판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동종은 높이 39.1cm, 입지름 21cm밖에 안 되는 소형 동종이지만 몸체가 원통형(圓筒形)으로 생기고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쌍룡형 용뉴가 달려 있으며 표면에 십자형(十字形)의 줄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그
교차점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 종 치는 망치, 즉 종채를 맞는 자리)가 돋을무늬로 새겨
지는 등 이후 중국 범종의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원 8년(720)명이 있는 절강성박물관 소장의 당나라 범종도 이와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은(殷, 서기전 1401∼서기전 1121년)·주(周, 서기전 1122∼서기전 780년)시대에 벌써
동종을 악기로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암키와 두 장을 서로 맞붙여놓은 것 같은 납작원통형(扁圓
筒形)으로 주둥이가 복숭아씨처럼 생겼다.
이를 춘추(春秋)시대(서기전 781∼서기전 404년)에 만들어진 <자범화종(子犯和鍾)>(도판 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손잡이인 용(甬)이 달려 있다.
걸쇠인 용뉴나 죽절뉴(竹節紐; 대나무마디처럼 생긴 고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으니 춘추시대 후기에 만들
어진 <번훼문박(蟠文)>(도판 4)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중국 동종의 외형장식과 순수 원통형의 인도식 건치가 합쳐져서 원통형의 종신(鐘身; 종의 몸체)에
용뉴와 당좌, 십자무늬띠 장식을 갖춘 중국범종 형식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범종 안에서도 남북이 양식적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진태건7년명 종>과 <당개원8년명 종>
과 같은 계열은 양자강 이남의 남방종이고 <섬서성부현보실사 동종(陝西省富縣寶實寺銅鐘)>이나 측천
무후(則天武后, 684∼704년)시기에 만들어진 감숙성 무위(武威) 종루에 걸려 있는 <대운사 동종(大雲寺銅鐘)>
등은 북방종에 해당한다.
남·북방종이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나 남방종은 <진태건7년명 동종>과 같이 주둥이가 수평으로 되어 있는
평구(平口) 형식이고 북방종은 <북송(北宋)소성(紹聖)4년명 회주(懷州) 숭명사(崇明寺) 동종>(도판 5)처럼
주둥이가 물결치듯 곡선이 반복되는 파구(波口) 형식이다.
그리고 남방종보다 북방종의 주둥이가 넓어서 우람한 맛은 있으나 단단한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서로 다르다.
5. 중국 종과 다른 신라 고유의 종
이런 중국 종과 별도로 신라에서는 신라 고유 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상원사 동종>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상원사 동종>은 조형에서 중국의 남·북방 어느 쪽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주시대 이래 중국에서 만들어져 온 중국 동종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인도에서 전래해
온 건치의 용도를 철저히 이해한 위에서 이 양대 동종의 기능을 종합하여 전혀 다른 제3의 동종형식을 창안
해낸 것이다.
우선 종의 몸통을 원통형으로 한 것은 인도의 건치를 본받은 것인데, 이는 주둥이가 배 모양으로 생긴
납작원통형의 중국 종으로는 긴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음색을 맑게 하여 소리를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중국 종의 표면에 부착했던 젖꼭지 형태의 매(枚; 요즘은 이를 乳頭, 즉 젖꼭지라 부른다)를
부착하였는데, 어깨 아래에 네 군데로 나누어 네모진 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9개씩을 배치한 모양이다
(도판 6).
젖꼭지는 둥근 연꽃잎 받침 위에 앵두 모양의 꼭지를 올려놓고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로 끝을 마무리한
형식인데 가로 세로 각각 셋씩 배치하여 아홉을 만들어 놓고 있다.
9는 10진법에서 홀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숫자로 하늘과 남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두를 가둬놓은 네모난 틀은 종신의 윗부분을 죄어 마무리지은 상대(上帶)를 일변으로 삼아 3변의 띠를
보태어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네모난 틀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마름모꼴이다.
따라서 좌우 양쪽 띠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상태이며 아랫변은 또 직선이 아니라 약간 둥근 맛이 나는
호선(弧線)이다.
넓은 띠는 이중의 구슬무늬 장식띠와 은행잎 장식띠로 안팎을 마무리짓고,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인동
무늬를 늘씬하게 돋을새김해 채워놓았다. 그 가운데로는 두 줄의 매화무늬띠와 박쥐무늬띠가 타원형
호(弧)를 이루어 놓았는데 그 안에 젓대를 불거나 가야금을 타는 등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소리가 가장 크게 울리게 하기 위해 원통형의 몸체를 항아리 모양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하되,
당목(撞木; 치는 나무)을 맞아 소리를 내는 부위는 가장 불룩하게 솟구치도록 하였다.
그 솟구친 부위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을 돋을새김해 놓았으니 이것이 당목을 맞아 종이 소리내는 당좌(撞座)
이다.
당좌는 허리 아래에서 그 중심보다 약간 위로 치우쳐 있는데 연꽃은 씨방과 꽃술을 두루 갖춘 겹꽃이고,
그 둘레에는 2중 구슬무늬띠 안에서 힘차게 덩굴을 뻗어나가며 휘감고 돌아간 인동무늬 장식이 돋을새김되어
있다(도판 7).
이 당좌는 춘추시대 동종인 <번훼문박>(도판 4)에서 그 의장을 따온 것이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공간
에는 한 쌍의 주악천이 마주보고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돋을새김해 놓았다(도판 8).
생황(笙簧)을 불고 공후()를 타는 모습인데 구름을 타고 허공을 헤엄쳐 날아오는 동작이 음악의 선율을
따르는 듯 자못 율동적이다.
허공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자니 옷자락은 모두 하늘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닥가닥의 천의(天衣)자락과 구슬띠는 바람을 머금고 위로 솟구쳐 오르게 되니 옷자락이 겨드랑이
에서도 나오고 허리 뒤에서도 나오며 두 무릎 근처에서도 나와 힘차게 나부껴 오른다.
가늘고 날카로운 옷주름선이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자아내어 바람 타고 내리는 구름 위의 하늘 세계를
실감나게 하는데 웃음 띤 얼굴에서 6년 전에 이루어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제16회 도판 1)의
표정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 치마의 옷주름선이 두 다리를 따라 매미날개처럼 겹쳐 내리는 것도 비슷하다.
종의 주둥이 부분도 다시 주악천과 인동무늬로 장식한 넓은 띠로 장식하였는데 당좌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좁혀 들다가 다시 바짝 죄어 조붓하게 마무리지음으로써 소리가 갑자기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입으로 한꺼번에 다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는 종 안을 맴돌아 위로 오르게 될 터이니, 이를 위해 종
머리는 용통(甬筒)을 마련해서 위로 오른 소리가 빠져 하늘로 오르도록 하였다.
용통은 춘추시대 <자범화종>(도판 3)과 같은 용종(甬鐘; 자루 달린 종)의 자루에서 생각을 얻어낸 것이다.
중국 용종의 용(甬)이 다만 손잡이 구실을 하는 단순한 종자루에 불과하여 속이 막혀 있었던 것을, 속을 뚫어
소리가 이곳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르게 하였다. 대담한 변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종을 거는 걸쇠꼭지는 역시 <번훼문박>의 포뢰(浦牢)형 걸쇠꼭지에서 그 형상을 빌려다가 고유화
시켰다. <
번훼문박>에서는 두 마리의 포뢰가 꼬리를 마주 대고 머리를 양쪽 밖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인데 <상원사
동종>에서는 한 마리의 포뢰가 등에 용통을 짊어진 채 종머리 천판(天板; 천장반자) 위에서 네 발로 힘주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통을 짊어진 포뢰의 등줄기는 휘어 오르게 마련이니 이 휘어오른 포뢰의 등줄기가 바로 종을
거는 걸쇠가 되었다. 용통은 고사리 무늬가 장식된 연꽃잎을 둘러 붙여 꾸몄는데 아랫단은 장구통처럼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대며 구슬무늬띠로 나눠 놓았고 윗단은 위로 솟은 연꽃잎만 표현하였다.
포뢰는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힘겹게 소리치는 모습이다(도판 9).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삼국 오나라 때 사람인 설종(薛終)이 ‘서경부(西京賦)’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닷속에 큰 물고기가 있으니 고래라 하고 또 큰 짐승이 있어 포뢰라 한다. 포뢰는 본디 고래를 두려워
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문득 크게 운다. 무릇 종으로 하여금 소리를 크게 내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까닭으로 포뢰를 위에 만들고 치는 것은 고래로 만든다.”
그러니 고래 형태로 만든 경목(鯨木)으로 맞은 포뢰는 고통과 두려움에 못이겨 크게 울부짖을 터이니
<상원사 동종>의 포뢰가 이와 같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포뢰는 용왕의 아홉 자식 중에 울기를 좋아하는 용이라 한다.
이 <상원사 동종>은 조선왕조 전기에 억불정책에 따라 각처에서 절을 허물 때 경상도 안동부로 옮겨와
안동부의 정문 문루인 관풍루(觀風樓)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화(成化) 5년(1469) 기축, 즉 예종
원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멀리 들리는 종을 구해 오라는 왕명에 따라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졌다 한다.
이 내용은 만력 36년(1608) 무신, 즉 선조 41년에 권기(勸紀, 1546∼1624년)가 편찬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권6 고적(古蹟) 누문고종(樓門古鍾; 누문에 걸린 옛 종)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무게 3379근이며 이를 치면 소리가 크고 맑아서 멀리 1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상원사는 곧 (세조의) 내원당이라, 멀리 들리는 종을 두고자 하여 8도에서 구하였는데 본부의 종이
가장 으뜸이었다. 성화(成化) 기축(1469)에 나라의 명령으로 장차 옮겨가려고 죽령을 넘는데 종이 슬피
울면서 지극히 무거워져서 넘을 수가 없다.
종의 젖을 떼어 본부(안동부)에 보낸 후에야 운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원사에 있다
(重三千三百七十九斤, 撞之則聲音雄亮, 遠可聞百里. 江原道上院寺, 乃內願堂也. 欲置遠聞之鍾, 求八道,
本府之鍾爲最. 成化己丑, 以國命, 將移運踰竹嶺, 鍾幽吼極重, 難越. 折鍾乳, 送本府後, 可運, 至今在上院寺).”
이때 강원도 보안도(保安道) 찰방(察訪, 종6품) 김종(金鍾)이란 사람이 이 <상원사 동종>을 옮겨오는
일을 주관한 승려인 학열(學悅)이 역말을 함부로 쓰고 길을 마음대로 돌아와 인마(人馬)를 피로하게 했다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사실이 거짓으로 밝혀진다. 그러자 당시 20세로 왕위에 올랐던 예종은 어린 왕을 깔보는
처사라고 대로하여 김종을 참수하고 3일 동안이나 그 목을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걸어두게 하였다.
경상도 금종이 강원도로 옮겨지면서 강원도의 김종(金鍾)을 잡은 희한한 일이라 하겠다.
6. 성덕왕과 당 현종의 ‘별난’ 우의
성덕왕은 소덕왕후가 돌아간 후에 어린 두 왕자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국기를 굳건하게 다지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더욱 성군(聖君)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직 당으로부터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옛 삼국 영토에 대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과 외교 관계를 원만히 지속해 나가야 했다.
더욱이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북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발해의 위협이 점점 커지면서
발해와 일본의 밀착 관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당과 동맹관계를 철저하게 다져나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위에 당은 현종의 밝은 정치를 만나 이른바 개원의 다스림(開元之治)이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성덕왕은 정성을 다해 특산물을 선물로 보내니 당 현종도 성덕왕 25년(726)에 사신으로 온 왕제
김흠질(金質)에게 낭장의 벼슬을 주어 돌려보내는 예우를 베푼다. 이미 성덕왕은 13년(714) 2월에 대당
외교담당관인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치고 왕자(문무왕이나 신문왕의 서왕자이거나
종실 중에 가왕자로 봉한 사람일 것이다) 김수충을 사신으로 보내 숙위(宿衛; 제왕의 측근에 머물면서
호위함)하도록 하여 김인문(金仁問, 629∼694년) 사후에 일시 단절되었던 숙위의 맥을 다시 이어놓았었다.
이에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수충에게 집과 비단을 하사하고 조당(朝堂; 조회를 베푸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특전을 내린다.
이로부터 신라 사신들은 가기만 하면 벼슬과 선물을 받고 궁전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대접을 받았다.
숙위 왕자 김수충이 성덕왕 16년(717) 9월에 돌아오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인 10철(哲) 72제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는데, 이는 당나라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해당)에 모셔져 있던 것을 모사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신라에서도 국학체제를 당나라식으로 수용해 나갔을 듯하다.
드디어 성덕왕 27년(728) 7월에는 왕제 김사종(金嗣宗)을 보내 당나라 국학에 신라 자제들을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데, 당 현종은 이를 쾌히 허락하여 신라 자제들의 당나라 유학길이 트이게 된다.
당 현종은 왕제 김사종이 마음에 들었던지 과의(果毅) 벼슬을 주고 숙위 왕자로 자신의 측근에 남아서
시중 들게 하였다.
이에 성덕왕은 29년(730) 2월에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사신으로 보내 작은 말 5필, 개 한 마리, 황금
2000냥, 두발 80량, 바다표범가죽 10장을 선물한다.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
벼슬을 주고 비단 100필과 자줏빛 겉옷과 비단띠를 하사하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는 한편, 성덕왕을 한번
만나보기를 청한다. 이융기가 김융기를 만나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덕왕은 병을 핑계대어 당 현종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다음해인 성덕왕 30년(731) 2월에 왕족
김지량(金志良)을 사신으로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때 우황(牛黃)과 금 은 등 선물을 보내었던 듯 당 현종은 김지량에게 태복소경의 벼슬과 비단 60필의
하사품을 내려주고 돌려보내면서 성덕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낸다.
“보내준 우황 및 금 은 등의 물건은 표문(表文)에 갖추어 쓰여 있어 잘 살펴보았다.
경은 두 아들을 둔 경사스런 복이 있고 삼한(三韓)은 좋은 이웃이 되었다. 지금은 인의(仁義)가 있는 나라
라고 일컬을 만하고 대대로 공훈을 세우는 어진 일을 해왔다. 문장과 예악(禮樂)에서 군자(君子)의 기풍을
드러냈으며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보내 왕을 위해 힘쓰는 절개를 다하였으니 진실로 번방(藩邦; 울타리로
삼는 땅)의 요새이며 참으로 충의(忠義)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색다른 지방의 먼 풍속과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해서 정의(正義)를 그리워함에 더욱
부지런하고 직무를 말함에 더욱 삼가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는데도 험하고 먼 길에 게으름없이 폐백을
드리기를 항상 해의 첫머리에 하였다.
우리 왕법(王法)을 지켜 나라의 법전을 세워 놓았으니 이에 그 간절한 정성을 돌아봄에 심히 가상하다고
하겠다.
짐이 매양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고 밤에 의복을 입은 채로 자며 어진 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마음을 터놓고자 해서였다. 경을 기다렸다 만나서 품은 마음을 펼치려 했더니 이제 사신이
이르렀고 질병에 걸려서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말과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어 근심만 더할 뿐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화창하므로 나아서 회복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경에게 물들인 비단 500필과 흰비단 2500필을 보내니 꼭 받아주기 바란다.”
당 현종은 성덕왕을 친구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 태종과 신라 태종의 극적인 만남을 재현하고 싶었
겠지만 신라 태종 때처럼 급박한 처지가 아닌 신라에서 국왕의 당나라 방문 같은 위험을 무릅쓸 리 없어
이융기와 김융기의 극적인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 현종이 신라 성덕왕을 만나서 우의를 다지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7. 당 현종이 패수 이남의 영유권 인정하다
일찍이 신라와 당의 연합세력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일본의 연합세력이 무너져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이 당과 신라에 의해 분할되었었다.
그런데 그 동안 고구려 옛 땅에서 발해가 일어나 그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고 나서 당나라를 넘보게 되고,
일본은 고구려와 백제의 피란민들을 상당히 흡수하여 국력이 강대해지자 수군세력을 재정비하여 신라
침공을 준비하니 국제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당 현종은 신라와 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성덕왕을 초청하였을
것이다. 성덕왕도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기에 더욱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여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우려는 적중하여 이해 4월에 일본은 병선(兵船) 300척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신라의 동쪽
해변으로 대거 침공해 들어왔다.
이에 성덕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격퇴시켰다. 그만큼 신라는 국력이 튼튼하였다.
그리고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31년(732) 12월에는 각간 김사공(金思恭)과 이찬 김정종(金貞宗), 김윤충
(金允忠), 김사인(金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이렇게 외침에 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발해는 당나라를 침공하였다. 성덕왕 32년(733) 7월의
일이었다. 발해가 수군을 발동하여 산동반도 등주를 함락한 것이다.
이에 당 현종은 마침 숙위하러 와 있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급히 신라로 돌려보내
성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師)의 직위를 보태주면서 발해 남쪽을 공격해 달라고
부탁한다.
신라는 가을걷이가 끝난 다음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북쪽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히고 병사들이 추위
때문에 많이 얼어죽었다는 핑계로 곧 회군하고 만다. 신라는 적극적으로 발해 공격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배후를 공격해올 일본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신뢰를 외면해서도 안 되므로 성덕왕은 조카 김지렴(金志廉)을 숙위왕자로 보내면서
작은 말 4필, 개 3마리, 금 500냥, 은 2000냥, 베 60필, 우황 20량, 인삼 200근, 두발 100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선물로 보낸다.
그러자 당 현종은 김지렴에게 홍려소경(鴻少卿)의 벼슬을 내린다. 이때 교대해 돌아가는 숙위왕자
김충신(金忠信)은 좌령군위원외장군(左令軍衛員外將軍)의 자격으로 당 현종에게 표문을 올려 전해에 현종이
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직함을 내려 제해권을 위임하였으니 자신에게 그 부사(副使)의
직함을 내려주면 발해를 제압하겠노라고 큰소리친다.
이에 현종은 그의 청을 들어주니 이때부터 신라는 당으로부터 제해권 장악을 공식 인정받게 된다.
그러자 당 현종은 발해와의 관계에서 신라의 지위를 분명히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듯 성덕왕 34년
(735) 1월에 사신으로 온 김의충(金義忠)이 2월에 돌아가게 되자 그 편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내려준다는 칙서를 들려 보낸다.
이미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진덕여왕 2년(648)에 당 태종을 만나 받아낸 약속이었는데 이제야 그 약속
이행을 공식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신라는 문무왕 8년(668)에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당에게 바로 이 약속의 이행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영토확장의 야심이 컸던 당 고종은 도리어 신라까지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야욕을 보여 문무왕은
재위기간 내내 당군을 물리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끝내 당군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 옛 땅의 신라 점유를 끝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 현종이 자진해서 공식 인정해 주었으니 신라로서는 67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숙원을 해결한 셈
이었다.
발해의 성장으로 인한 국제적인 이해관계의 변화가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성덕왕의 통치 능력과 외교 수완이 거둬들인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이 사건은 성덕왕의 치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이었다.
이에 성덕왕은 다음해인 35년(736) 6월에 사신을 보내 당 현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패강 일대의 점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이찬 김윤충, 김사인, 김영술(金英述) 등으로 하여금 평양과 우두주(牛頭州, 춘천) 2주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게 한다.
그런데 이런 경사를 하늘이 시기하는 듯 다음해인 성덕왕 36년(737) 2월에 성덕왕이 불과 48세 정도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8. 왕실 내외척의 권력 다툼과 모반
성덕왕이 돌아가자 불과 17세밖에 안 된 태자 승경(承慶, 721년경∼742년)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효성왕
(孝成王, 재위 737∼742년)이다. 효성왕이 즉위하자 이찬 김정종(金貞宗)이 상대등(上大等, 국무총리)이
되고, 이찬 김의충(金義忠)이 중시(中侍, 총무처 장관)가 되는데 김의충은 김순정의 아들로 효성왕에게는
외가의 당숙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가 모후 소덕왕후와 사촌형제간이기 때문이다.
성덕왕 생존시에는 성덕왕이 중심을 잡고 집권 내·외척 가문을 모두 왕실에 충성하도록 유도하였지만,
어린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집권가문들 사이에서는 다시 세력다툼이 일기 시작했던 듯하다.
분명히 효소왕 즉위시에 이미 왕비가 있어서 2년(738) 2월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할 때
왕비 박(朴)씨도 함께 책봉하고 있는데, 3년(739) 3월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인 혜명(惠明)을 맞아
들여 왕비로 삼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원의 딸이라면 효성왕의 친이모이다. 그렇다면 왕비 박씨를 출궁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외가인 김순원 집안에서 저지른 일일 것이다.
이해 정월에 중시 김의충이 죽어서 김신충(金信忠)이 대신했다 했으니 이 둘은 형제간이거나 4촌형제간일
듯하고, 김의충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효성왕의 재혼과 관련된 비명횡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나서 두 달이 지난 5월에는 이제 17세가 된 효성왕의 한배 동생인 김헌영(金憲英, 723∼765년)을
태자로 삼는다. 이제 겨우 19세가 된 청년왕이 재혼했는데 불과 2개월 후에 그 17세 된 아우를 태자로 삼았
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이해 2월에 김헌영에게 파진찬(波珍, 제4관등)의
중책을 맡겨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집권 귀족들이 효성왕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사실은 그 다음 효성왕 4년(746) 3월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비 김씨를 책봉했다는 기록과, 7월에
비단옷 입은 여자가 예교(隸橋) 밑에서 나와 조정을 비방했다는 내용, 8월에 일어난 파진찬 김영종(金永宗)의
모반복주(謀叛伏誅; 반란을 꾀하려다 잡혀 죽음) 사건으로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김영종의 모반복주 사건을 ‘삼국사기(三國史記)’ 권9 효성왕 본기 4년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영종의 따님이 후궁으로 들어왔는데 왕이 몹시 그를 사랑하여 은혜 깊어감이 날로 심해졌다.
왕비가 질투하여 친족들과 함께 모의하고 이를 죽이니, 영종이 왕비의 종당(宗黨; 종족과 그 당여)을 원망
하여 이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외척들간의 세력다툼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효성왕의 외가 집안에서 외척으로서 실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왕비 박씨를 출궁시키고 후궁 김씨까지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효성왕이 국왕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아우인 김헌영을 바로 태자로 책봉하여 외척으로서의
대권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으려 했던 듯하다. 이런 상황이니 효성왕이 왕위를 오래 부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효성왕 6년(742) 5월에 효성왕은 22세 정도의 나이로 돌아가고 마는데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크다. 당연히 왕제인 태자 김헌영이 즉위하니 이가 경덕왕(재위 742∼765년)이다.
그런데 경덕왕은 이미 김순원의 아우인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곧 절세미인이었던 수로부인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순원, 김순정 형제 가문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상식 밖의 상황에서 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덕왕은 효성왕과 달리 상당히 과단성 있고 총명한 인물이었던 듯 2년(743) 4월에 서불한(舒弗邯,
제1관등, 이벌찬 또는 각간이라고도 함) 김의충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이고 김순정의 딸인 삼모(三毛)부인
을 출궁시키는 과감성을 보여 집권세력들의 기를 꺾어놓는다.
감히 외가인 김순원, 김순정 집안을 정면 공격하여 왕권의 절대성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명하게 전왕비인 삼모부인의 조카딸에 해당하는 김의충의 딸을 계비로 선택하였으니
김순정 집안에서 결사적으로 대항할 리는 없었다. 여기서 경덕왕은 오히려 김순원, 김순정 형제의 혈손
들과 그 종당으로 이루어진 집권세력들을 친위세력으로 끌어들여 성덕왕대에 다져놓은 튼튼한 기반을
이용해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불국시대의 화려한 꽃을 피워내게 된다.
9.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우리는 그 현상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도판 10)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상원사 동종>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신라 범종
양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항아리 모양의 원통형 종신(鐘身)에 종 머리와 종 주둥이를 휘감아 죄는 국모란(菊牡丹) 덩굴
무늬띠(종래 寶相唐草文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를 썼으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명칭이 좋을 듯함)가
새겨져 있다. 그
리고 종신의 어깨에는 유곽(乳廓)이라 부르는 4개의 네모진 구역을 만들었고, 그 안에 매(枚)라고 부르던
젖꼭지를 연꽃 9송이로 상징하여 각기 돋을새김해 놓았다(도판 11).
또 <상원사 동종>이 종신의 좌우 측면에 4명의 주악천상(奏樂天像)을 새긴 것에 반해 <성덕대왕신종>
은 4명의 헌향천인상(獻香天人像)(도판 12)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종명(鐘銘)과 종기(鐘記)를 향해 좌우에서 향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다.
이 역시 하늘에서 꽃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으로 천의자락이 모두 허공을 향해 나부껴 오르고 있다.
국모란 덩굴무늬 형태의 꽃구름은 크고 작은 세 줄기로 천인을 감싸 허공에 떠오르게 하였다.
천인은 큰 줄기의 꽃구름에서 피어난 모란꽃같이 생긴 연꽃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명문을 바라본
채 두 손으로 연화향로를 받쳐들고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물크러져서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으나 향 공양을 올리는 간절한 마음이 전신에서
배어 나온다.
종신의 앞뒤 허리 아래쪽에 당좌(撞座)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는데 연꽃을 모란꽃처럼 변형시킨 것이다.
꽃잎은 모란꽃과 같은데 씨방에는 9개의 연밥이 표현되어 있다.
꽃잎은 8개이다. <상원사 동종>의 당좌는 꽃술과 씨방을 갖춘 겹연꽃 한 송이가 구슬무늬띠로 안팎을
두른 인동무늬띠로 둘러져 있는 모습인데, <성덕대왕신종>에서는 인동무늬띠가 사라진 대신 꽃잎 장식이
훨씬 복잡해져 있다(도판 13).
고사리 머리장식이 켜켜로 쌓아 올려져 겹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역시 <상원사 동종>처럼 종신에서 가장 배부른 부위에 새겨져 있다.
입 가장자리를 두른 국모란 덩굴무늬 장식띠는 8모를 이루는 곡선에 의해 8등분되어 있는데 모서리마다 홑잎
연꽃이 새겨져 구획을 분명히 나눠 놓고 있으며 아래위는 구슬무늬띠로 마감하였다(도판 14).
종머리를 두른 띠 역시 국모란 덩굴무늬를 가득 새겨 넣었고 꽃 장식이 더욱 풍부하고 화려하여 겹모란
꽃을 보는 듯하다. 아래는 구슬무늬띠로 마감하였으나 위로 천판(天板)과 연결되는 부위는 다만 두 줄의
선만을 둘러놓고 있다.
용통(甬筒)과 용뉴(도판 15)는 <상원사 동종>의 의장(意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 붙여 한 마디를 이루게 한 표면장식이 근본적으로 같은 의장인데, <상원사 동종>의
연꽃잎 마디 사이가 벌어져 장구통을 연상시키는 것에 반해 <성덕대왕신종>의 연꽃잎 마디는 아래위 꽃잎이
서로 밑바닥을 마주대고 있다.
연꽃잎 표면 장식도 <성덕대왕신종> 쪽이 훨씬 복잡해져서 꽃술이 구슬처럼 튀어나온 들국화꽃 한 송이를
국화 잎새가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것과 같은 복잡한 구조이다.
<상원사 동종>의 경우는 다만 꽃잎 중앙에 고사리 무늬가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마디 사이는 <성덕대왕신종>이 훨씬 짧아졌다. <상원사 동종>이 한 마디 반으로 용통 전체를 꾸민 데 반해
<성덕대왕신종>은 세 마디 반으로 꾸며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원사 동종>에서는 마디 사이에 인동무늬와 대형 국화꽃 무늬를 널찍널찍하게 배치했는데
<성덕대왕신종>에서는 꽃잎이 짧고 꽃술이 큰 국화꽃 무늬만을 좁은 띠 사이에 꽉 차게 돌려 꾸미고 있다.
용뉴는 역시 포뢰 한 마리가 천판 위에 달라붙어 머리를 땅에 박고 뒷발로 힘을 주면서 용통을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휘어져 올라간 등줄기가 걸쇠로 되었는데 종신이 커져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그랬는지 머리와 배 부분의 밀착 부위가 더욱 넓고 몸통의 살집도 더 좋다. 그리고 용통 앞 굽은 등
줄기 위에는 여의주(如意珠)라고 생각되는 구슬 하나가 불꽃에 휩싸여 올려져 있다.
천판에 머리를 박고, 있는 대로 입을 벌린 포뢰의 사실적인 표현은 고래의 공격을 받고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는 모습 그대로이다. 천판의 바깥 둘레에는 연꽃잎을 둘러 꾸몄는데, 연꽃잎 표면에는 역시 국화꽃
잎으로 둘러싸인 들국화 무늬를 매장 새겨 꾸몄다.
<성덕대왕신종>의 종신 좌우에는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이 기(記) 부분과 사(詞) 부분 둘로
나뉘어 각각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는 헌향천인이 향로를 들고 헌향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한림랑(翰林郞) 김필오(金弼奧)가 짓고 한림대(翰林臺) 서생(書生) 김백환(金)이 쓴 것이다.
그중 한 부분만 옮겨 성덕왕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밝혀보자.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은 덕이 산하(山河)와 같아서 그와 같이 높고 이름은 해와 달과 가지런할
만큼 높이 걸려 있다.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세속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습을 바로잡으니,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풍속은 금과 옥을 싫어했고 대대로 문재
(文才; 글 잘하는 재주)를 숭상하였다.
내 자신이 신령스럽다 생각하지 않았고 마음에는 노인의 경계함이 있었다.
40여 년 나라에 임하여 정치에 힘썼으나 한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고 어지럽게 한 적이 없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만리 밖에서 손님으로 찾아와 오직 교화를 흠모하여 바라다보았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리려고 엿보지는 않았었다.
연(燕)나라(昭王)와 진(秦)나라(穆公)가 사람을 쓴 것이나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패권을 번갈아
차지한 것과 어찌 바퀴를 나란히 하고 고삐를 쌍으로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라쌍수에 눕는 시기(석가모니불은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음)는 헤아릴 수
없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운지라 돌아가신 이래 이미 34년이 되었다.
그 전에 아드님인 경덕대왕이 살아 있던 날 대업(大業)을 이어 지키며 모든 일을 살피고 어루만졌었다.
그런데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해가 지날수록 그리움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대궐의 전각에 임하면 슬픔이 더하였다. 추모하는 정(情)이 더욱 처절해지고 혼령을 이익 되게 하려는
마음이 다시 간절해져서 삼가 동 12만근을 시주하여 한 길쯤 되는 종 하나를 주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세워 성취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성덕왕이 어떤 임금이고 경덕왕이 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려 했는지를 밝혀주는 대목이다.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8]
1. 전륜성왕 자처한 진흥왕 직계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
같은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일단 불교를 공식 수용하게 되자, 마치 백지에 물들듯이 불교가 모든 신라 사람
에게 삽시간에 전파돼 나갔다.
이는 신라가 이때까지 어떤 외래문화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고립된 지역으로 문화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최초로 불교로부터 외래문화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漢) 사군(四郡) 설치(서기전 108년) 이후 이미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았던 고구려나 백제 지역이 불교가
들어와도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 열띤 호응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벌써 불교 이념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다음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불교를 공인한 지 4년 뒤인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를 굴복시켜
합병해 들인 것이 그 첫 사업이었다.
중국과 직접 교역을 트기 위해서는 좋은 항구와 물길에 익숙한 해양세력이 필요한데, 낙동강 하구를 차지
하여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금관가야가 합병의 첫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眞興王, 534∼576년)은 스스로 혈통이
석가족(釋迦族)과 같은 ‘크샤트리아(刹帝利) 종(種)’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 분쟁으로 편할 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돕는 척하면서 끼어들어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엄청나게 빼앗아 들인다.
한강 유역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개마고원 이남의 함경남도 일대까지 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 이외에 나머지 5가야도 모두 정복하여 자국 영토로 삼았다.
이에 진흥왕 22년(561) 경의 신라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와 함경남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이때 진흥왕은 불과 29세밖에 안 된 청년왕이었으니 이런 긴 국경선을 순행(巡幸)하면서 스스로 전륜성왕
이란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들 이름도 동륜(銅輪)이나 금륜(金輪)으로 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들이 모두 전륜성왕으로
태어난 것을 천하에 공표한다.
진흥왕의 혈손들이 모두 진(眞)자 왕호를 계승하면서 진골(眞骨)을 자처(自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자부심은 결국 그의 증손자인 태종무열왕(604∼661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멸망시키고(660년), 그의
고손자인 문무왕(626∼681년)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멸망시켜(668년) 끝내 삼국을 통일하는 결실로 나타
난다.
그러나 이 삼국통일이 자력(自力)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것이었으므로, 통일 이후에
당의 영토 야욕에 부딪혀 신라 자체가 멸망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니 당군 격퇴가 눈앞의 현안이 되었던 문무왕으로서는 삼국을 통일했다 하더라도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천하를 호령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재위기간(661∼681년) 내내 죽을 힘을 다해 겨우 당군을 한반도 밖으로 내모는 일에 성공하였을 뿐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신문왕(645∼692년) 역시 통일전쟁 시기에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을 휘어잡는
일에 진을 빼다가 재위(681∼691년) 11년 만에 돌아가는 바람에 전륜성왕으로 군림할 겨를이 없었다.
2. 전륜성왕릉 모방한 성덕왕릉
그러나 신문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나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난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이
등극하여 재위(702∼737년) 3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신라의 국운을 절정
에 올려놓자, 비로소 신라왕은 전륜성왕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성덕왕 30년(731) 4월에 일본이 병선(兵船) 300척으로 신라의 동해안을 침략하다가 일거에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고, 성덕왕 32년(733) 7월에는 당이 발해의 침공을 받자 신라에 배후에서 발해를
공략해 달라는 군사지원 요청까지 하게 되었으니, 신라의 국세는 그 당시 천하무적임을 자랑할 만큼 강성
함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이에 성덕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하여 성덕왕 34년(735) 2월에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국서(國書)에
왕성국(王城國)이라 자칭한다.
왕 중 왕인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였다.
일본이 이런 국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해 1월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김의충(金義忠)이 당 현종으로부터 패수(浿水;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와 백제 옛땅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으로 인정받고 돌아온다.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지 67년 만에 이루어낸 외교적인 성과였다.
이렇게 되자 성덕왕은 명실상부한 전륜성왕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러나 성덕왕은 전륜성왕의 자리를 겨우 2년밖에 누리지 못하고 성덕왕 36년(737) 2월에 48세쯤 장년의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보위에 오른 효성왕(721년경∼742년)이 짧은 기간(737∼742년) 재위하고
단명하자, 그 동생인 경덕왕(725년경∼765년)이 뒤를 이어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절대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절정기인 불국시대 문화를 난만한 지경으로 끌어올려 놓는 일을 감행한다.
경덕왕은 자신이 전륜성왕이 되려면 우선 부왕인 성덕왕과 조부왕인 신문왕을 전륜성왕으로 추존하여
그에 알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성덕왕의 능을 전륜성왕의 능제에 맞게 개수하였다.
전륜성왕의 능이라면 곧 부처님의 능인 스투파(Stupa, 塔婆)와 같은 것이라야 한다.
이에 경덕왕은 그 13년(754)에 <성덕왕릉>을 인도의 <산치탑> 모양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전륜성왕의 능답게 애초 둘러놓은 봉분 주변에 판석(板石)으로 된 호석(護石)을 세워 난간을 더 두르고,
난간과 봉분 사이에 박석(薄石)으로 지면석(地面石)을 깔아 회랑(廻廊) 형태의 요도(褥)를 만들어 <산치탑의
난간과 요도>를 방불케 한 것이다.
그리고 호석 외부 받침 기둥 사이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조각으로 조성하여
왕릉을 12방향에서 호위하게 하였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은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무장 모양으로 만들었다.
현존한 이 십이지신상들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그 원형을 잃었다.
오직 신신상(申神像), 즉 원숭이 신상과 <유신상(酉神像)>, 즉 정서(正西) 방향을 맡은 닭신의 형상만 머리
부분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십이지신상의 모양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능의 정남쪽 난간 앞에는 상석(床石)이 놓여 있고 상석 앞에는 <문인석> 한 쌍과 무인석(武人石) 한 쌍이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오직 <문인석> 하나만 온전하다.
왕릉 후면과 전면은 각각 한 쌍씩 모두 4마리의 <석사자(石獅子)>가 지키고 있다.
석사자는 인도 스투파에서 연유한 것이고, 문인석은 당의 황제릉에서 영향을 받은 의제(儀制)일 것이다.
왕릉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성덕대왕릉비를 지고 있던 <성덕대왕릉비귀부(聖德大王陵碑龜趺)>
가 이수(首)와 비신(碑身)을 잃은 채 남아 있는데, 그조차 목이 달아나고 신체 일부가 파손된 형편이다.
조각기법은 <태종무열왕릉비>와 비교하면, <삼화령미륵삼존상>과 <석굴암불보살상>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 <성덕대왕릉비귀부>가 <태종무열왕릉비>에 비해 더욱 풍만하고 비대해졌지만 그에
반비례해 기운 찬 생동감은 많이 감소하였다. 살집이 너무 좋아서 둔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당(盛唐)시대(713∼765년) 중국 문화권 전체를 휩쓸던 미술양식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서예(書藝) 분야에서조차 안진경(顔眞卿, 708∼784년)체와 같이 비후장중(肥厚莊重; 살이 쪄서
두툼하고 큼직하며 무거움)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초당시대(618∼712년)의 구양순(歐陽詢, 557∼641년)
체와 저수량(遂良, 596∼658년)체가 힘차고 바르며 굳세고 날렵한 특징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런 대조적인 현상이 그대로 비석 양식에도 반영되었으니 <태종무열왕릉비>의 조각기법과 <성덕대왕
릉비귀부>의 조각기법이 이와 상응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3. 김유신묘의 비밀
‘삼국사기’ 권9 성덕왕본기 13년(754) 5월조에 “성덕왕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성덕왕릉을 산치탑
모양의 스투파 형태로 개수하여 전륜성왕릉 형태를 갖춘 것은 경덕왕 13년경이었을 것이다.
불국사 창건이 경덕왕 10년(751)부터라 하였으니 성덕왕의 추복사찰 건립도 이와 때를 같이한 것이라 해야
하겠다.
경덕왕은 내친 김에 조부왕인 신문왕릉도 스투파 형태로 호석과 난간을 둘러 전륜성왕의 능제에 충실하도록
하였으니, 황복사지의 십이지신상 조각 판석이 그 유물이라 한다.
이 사실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교수가 ‘통일신라 십이지신상의 양식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그 내용은 제15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강교수는 이 신문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이야말로 십이지신상 호석 양식의 완성된 형태라고 극찬하고 있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인 이 십이지신상은 갑옷이 아닌 도포를 입고 있어 문사차림인데 모두 병장기를 들고
있어, 문사들이 각 방위를 맡아 왕릉을 호위하는 듯하다.
혹시 무장(武將)들이 평복 차림으로 왕릉을 수호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도포차림이 갑옷차림
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이 갑옷차림으로 무장의 모습을 보인 것은, 십이지신이 방위신(方位神)이니 사천왕
[四天王;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라는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그 주변을 7산 8바다가
둘러 있으며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는 수미산 남쪽의 8해 속에 섬처럼 고립돼 있다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수미산 사방 하늘을 각기 한쪽씩 맡아 다스리니 동방천왕은 지국천(持國天)
이고 서방천왕은 광목천(廣目天)이며 남방천왕은 증장천(增長天)이고 북방천왕은 다문천(多聞天)이다]의
권속이어야 하므로 사천왕과 같은 무장 차림을 해야 한다는 불교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현상이었을 듯하다.
전륜성왕의 스투파 건립이라는 의례 감각으로 성덕왕릉을 개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십이지신상이 한결같이 문사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신문왕릉에서는
갑옷을 도포로 바꾸면서 호석을 이루는 판석 위에 이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
이다. 신문왕릉은 아예 호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덕왕릉은 이미 호석이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십이지신상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 앞에 덧장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미 강우방 교수가 밝혀놓은 대로다.
그런데 이런 도포차림의 십이지신상이 한결 세련되게 정리되어 양식 진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 <전 김유신묘>이다.
그렇다면 이런 호석과 난간이 둘린 왕릉제도가 전륜성왕의 스투파에만 해당하리라는 학설과, ‘삼국사기’
권9 경덕왕 24년(765) 6월조에 경덕왕이 돌아가자 모지사(毛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을 연계
시켜 볼 때 현재 김유신묘라고 전해지는 완벽한 스투파식 왕릉이 경덕왕의 능일 수도 있다는 주장에 미술
사적 당위성(當爲性)을 완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제35 경덕왕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경지사(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
뒤에 양장곡(楊長谷, 성덕왕릉이 있는 곳)으로 이장하였다.”
경지사는 모지사의 오자(誤字)라고 보아야 한다.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는 기록이 경덕왕릉에만 나오니
산치대탑과 같은 인도식 석탑 형태의 스투파형 능묘 의제를 처음부터 왕릉에 시공한 것은 경덕왕릉부터라고
보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4.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 상봉 동쪽 기슭에 있다.
고위산 상봉에는 원래 봉수대가 있어 이 골짜기를 봉화골로 불러 왔는데, 행정구역은 경주시 남산동에 속
한다.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고 으슥한데 그 막바지에 이 절이
있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이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지던 신라시대에 절 이름을 무엇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서 문경 사불산 대승사 얘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령 동쪽 100여리에(사실 사불산 대승사의 위치는 조령 동남쪽이고 죽령 서남쪽이니 죽령은 조령의
오자인 듯함) 산이 있어 높은 언덕으로 우뚝 솟아났는데 진평왕 9년(587) 갑신(진평왕 9년은 갑신년이
아니고 정미년이다. 갑신년은 진평왕 46년으로 서기 624년에 해당한다. 착오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평왕 46년으로 바로잡아야 할 듯하다)에 갑자기 큰 바위 하나가 그 위에 나타났다.
사면이 한 길쯤 되고 네모 반듯한데 사면에 사방여래를 새겼다. 모든 면을 붉은 비단으로 가린 채 하늘에서
그 산 정상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우러러 뵌 다음 드디어 바위 곁에
절을 새로 짓고 대승사(大乘寺)라 이름하였다.
‘묘법연화경’을 외는 사람인 비구 망명(亡名)을 청해다가 절을 맡기고 청소하며 바윗돌을 공양하게 하여
향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름지어 부르기를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했다. 비구가 죽어서 장사지내고 나니 그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동륜(銅輪)태자의 장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왕과 같은 이름인 정반왕이란 이름을 받아 전륜성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진평왕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조부왕인 진흥왕이 확장해놓은 방대한 국토를 지키느라 힘겨워하던 당시에 사방불의 가피력(加被力; 보살
핌을 더해주는 힘)으로 천하 사방을 무난히 평정하여 정법으로 다스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이런 사방불을
조성했던 듯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책이었다고 이해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재위 702∼737년) 말년경이나 경덕왕(재위 742∼765년) 초년경에 이와 같은 사방불을 경주의
안산(案山)인 남산 동쪽 상봉에 조성하여 천하 사방의 평정을 기원하는 일을 되풀이하였으니, 보물 200호인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바로 그것이다.
진평왕 때 문경 사불산 대승사에 사방불을 조성한 것은 고(古) 신라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던 이곳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렇다면 이제 성덕왕이나 경덕왕이 경주의 안산인 남산 상봉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듯 사방불을 조성해
냈다는 것은, 이미 사방을 평정하여 명실상부한 사주(四洲)의 주인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표방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 사방불의 조성은 당 현종이 성덕왕에게 패수 이남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덕왕 34년
(735) 2월 이후에 진행된 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유권 인정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을 수도 있다.
5.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조각 양식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이 사방불이 보여주는 조각양식이 이 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방불과 함께 조성되었을 뒷벽의 석가여래 마애삼존상 조각양식은 성덕왕 18년(719)에 조성된 것이
분명한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양식을 바로 뒤잇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우선 불상에서 비교해보면 두 불상이 비록 앉고 선 차이가 있고 통견과 편단우견의 옷 입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육계의 크기와 형태가 넓고 나지막한 것이 비슷하고 네모 반듯한 얼굴에 미소 띤 근엄한 표정
이 서로 형제인 듯 닮았으며 부풀려 올린 옷주름 표현법이 거의 한솜씨인 듯 닮았다.
다만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주불이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 비해 조금 거칠고 굳은 느낌이 있어서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의식하며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항마촉지인을 지은 손의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하며 나발 표현을 생략한 두발에서 육계에 상투끈을
나타낸 듯한 것도 자못 어색하다.
이런 차이는 협시보살입상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비교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두 보살
입상의 형식적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니 화려한 보관을 쓴 것이나, 천의를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로
넘겨 입은 것,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 치마가 양쪽 다리를 따라 내려
오며 반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내리듯 서로 다른 옷주름을 만들어내는 것, 천의 자락이 두 팔뚝을 휘감아
내리는 것 등이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보관에서도, 구슬꿰미로 만든 목걸이에서도, 천의나 치마의 옷주름에서도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협시보살입상 쪽이 거칠고 투박하다. 두 팔뚝을 타고 내린 천의 자락 표현을 비교해보면 두 보살입상의
기법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천의 자락은 산들바람이 흔들어놓은 듯 나부끼며 물결쳐 내려오는데,
<칠불암 마애삼존불 협시보살입상>은 둘 다 뻣뻣한 철사줄이 아래로 뻗어내린 듯 수직으로 내리 그어지고
있다.
이런 양식적인 차이 때문에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를 성덕왕 말년이나 경덕왕 초년
으로 추정하게 되는데, 이 두 임금이 당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6. 사방불의 우리식 표현
사방불의 성격은 백제의 <예산사면석불> 이래 이 땅에 정착한 대로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석가불, 북방 미륵불일 것인데 동향한 동방불이 실제로 약호를 들고 있어 약사불임을 과시한다.
이미 제9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사방불의 성격을 우리식으로 도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구명하고 나왔다.
동진(東晉)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
度經)’, 즉 ‘관정경(灌頂經)’ 권12(317∼322년 번역)에서 동방약사유리광여래를 도출해내고, 구마라습
(鳩滅什)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402년 번역)에서 서방 아미타를 이끌어낸 다음, 석가불은
남방 인도에서 출현했으므로 남방에 위치시키고, 미륵의 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북방에
배치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사방불도 이 성격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도 대판(大阪)의 사천왕사(四天
王寺, 593년 건립)와 내량(奈良)의 원흥사(元興寺, 593년 건립)의 5중탑 안에 모셔진 사방불이 동방 약사,
서방 미타, 남방 석가, 북방 미륵으로 되어 있고 내량 흥복사(興福寺) 5중탑(730년 건립) 안의 사방불 역시
이와 같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백제의 장인이 만든 것이었다.
사방불은 모두 활짝 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형태인데, 동방 약사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에 약호를 들고 있는 손짓을 보임으로써 나머지 3방불도 모두 이와 같은 손짓을 짓고 있다. 다
만 약호를 들지 않았으므로 왼손의 수인(手印)은 마치 항마인과 같이 되었다. 즉 시무외항마인이 된 것이다.
이는 전륜성왕이 사방의 마왕에게서 항복받고 그곳 백성들에게 정법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손짓으로 보아야 하니, 전륜성왕임을 자처하기 위해 조성해낸 사방불의 손짓 표현으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이 뜻밖에 편단우견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흔히 보지 못하던 상 형식이다.
삼국시대 이래 포복식 불의 양식을 선호하여 그로 말미암아 <예산사면석불>, <태안마애삼존불>, <연가7
년명 불입상>, <서산마애삼존불> 등이 한결같이 포복식 불의 계통의 통견불의 양식이었다.
신라에 와서도 <삼화령미륵불삼존상>, <배리미륵불삼존상>,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 등이 모두 포복식 불의로 통견 양식을 보여왔다.
그런데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전반부터 수나라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편단우견의 불입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에서는 이미 개황 4년(584)이라는 기년명이 있는 <개황4년명 아미타오존상>은 주불에서부터 반단
(半袒)형식을 청산한 순수한 편단우견 형식을 보이고 있다.
경쟁적으로 수나라 문화를 수용해 들이고 있던 삼국에서도 곧바로 이를 모방함으로써 7세기 전기부터 일각
에서는 이런 편단우견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백제지역에서 만들어낸 편단우견상으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읍신천리석불병립상(井邑新川里石佛
立像)>이고,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편단우견금동불입상>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편단우견이라는 관습에 생소했던 우리는 이런 형식의 불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통일기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초당(初唐)시대에 유행하던 굽타불상의 통견불의 양식을 수용하여
<황복사지삼층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이나 <황복사지삼층석탑출현 금제여래좌상> 및 <감산사지 아미
타불입상>과 같은 통견불의 양식 계열의 불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좌상에서 갑자기 순수한 편단우견 좌상이 만들어졌으니 통일신라
조각사에서 가히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편단우견상
양식을 수용해 들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성덕왕의 빈번한 대당교섭과 유학생 파견(728)과 같은 문화
교류의 부산물이었다.
당나라에서는 초당시대에 현장(玄, 602∼664년) 삼장이 인도를 17년(629~645)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당시 인도에서 만들어지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마왕에게 항복받은 표시로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아 손바닥을 위로 가게 펴 대고, 오른손은 지신을 불러내어 이를 증명하게 한 표시로 오른쪽
무릎 아래로 엎어 대서 손가락들이 땅을 가리키게 한 손짓)의 편단우견상(도판 13) 양식을 새로 들여와
이전의 반단식을 청산하고 순수한 편단우견상을 활발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실물을 장안(長安) 3년(703)에 만든 <보경사전래불삼존좌상(寶慶寺傳來佛三尊坐像)>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 양식이 전래되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불좌상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은 통일신라 불좌상 양식에 주류가 되어가는데 <석굴암 주불좌상>
에서 그 상 형식이 완성된다. 그러니 이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주존상은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의 효시로
<석굴암 주불좌상> 양식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7. 굴불사(掘佛寺) 사방불(四方佛)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나들이를 가다가 산 아래에 이르러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땅을 파보게 하니 큰 바위가 나왔다. 사면에 사방불을 새기게 하고 이로 인해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
(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굴석(掘石)이라 한다.”
잘못 전해져서 굴석이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를 파내 그곳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인 굴불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위를 파냈다는 의미인 굴석이라는 이름이 더 타당하기에 사람들이 그
렇게 불렀다고 보아야 한다.
경덕왕은 동남산 상봉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사방불을 새긴 다음 이제는 땅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사방불을
경주의 진산(鎭山)인 북악(北岳) 금강산(金剛山) 초입에 새겨놓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백률사로 올라가는 계곡 초입에서 땅속에 묻힌 거대한
바위를 찾아낸 다음 거기에다 사방불을 새기게 하였다. 염불소리가 이 바위를 찾아내도록 인도하였다면
이곳에 땅으로부터 솟아난 사방불을 조성하겠다는 경덕왕의 간절한 서원(誓願)이 사무쳐서 그와 같은
기적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다.
이 일은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을 조성하고 난 뒤에 이루어진 듯하다.
보물 121호인 <굴불사 사방불>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김리나(金理那)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양식
편년상 <굴불사 사방불>의 조각기법이 <칠불암 마애삼존상>보다 진전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남쪽으로 터진 계곡의 중앙에 놓여 있는데 정면인 남쪽보다 서쪽면이 더 높고 넓다.
그래서 경덕왕은 <굴불사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서방 아미타불상을 사방불의 중심불로 힘들여 조성했던
듯하다.
이는 <칠불암 사방불>에서 동쪽으로 터진 계곡 상봉에 얹힌 바위의 동쪽 정면이 가장 넓었기 때문에 그
곳에 동방 약사를 조성하면서 이를 중심불로 삼았던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구성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 <굴불사 사방불>은 서쪽 면에 새긴 서방 아미타삼존불이 중심을 이루는데 주불인 아미타불입상은
높이가 351cm에 이르고, 관세음보살입상은 292cm, 대세지보살입상은 249cm나 된다.
아미타불입상은 바위에 붙여 몸통을 입체상에 가깝게 조각한 다음 얼굴만 따로 만들어서 목 위에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여 사방불의 주체로 삼았으며,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주불의 크기에
알맞은 비례로 딴 돌을 다듬어 완전 입체상을 만들어다 주불 좌우에 기대 세워놓았다.
선도산 상봉의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과 같이 좌우 협시보살을 따로 만들어다 주불 양쪽 곁에 기대
세워놓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미타불입상의 의복 표현도 <선도산 아미타마애
삼존대불>의 주불 의복 표현과 비슷하여 포복식 불의에 옷주름이 정면에서 통째로 물결쳐 내려온 듯 표현
되어 있다.
이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에서는 허벅지에서부터 옷주름이 양분되어 내려오는 신양식을 보이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선도산 아미타삼존대불>의 주불에서 보인 옛 법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모본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시대양식을 외면하지 못해 겉옷의 옷깃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를
맨 허리띠 표현까지 노출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초당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겉옷을 두 벌 겹쳐 입는 법)에 의해 속가사는
통견법으로 입고 겉가사는 편단우견법으로 입어 속가사 자락이 오른쪽 소매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다.
이것은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에서부터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당풍(唐風)의 새로운 의복표현법으로,
당나라에서는 <정관13년(639)명 불좌상>(제13회 도판 12)에서부터 그런 형식이 확인되고 성당시대
(713∼765)에 널리 유행하던 의복표현법이다.
인계(印契), 즉 손짓도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주불 손짓을 의식한 듯 시무외인을 지은 오른손
이 같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왼손마저 허리 근처까지 올려 마치 무슨 지물(持物)이라도 받쳐든 듯한 모
양을 하고 있는데 빈손이다.
소원하는 대로 모두 주겠다는 의미의 손짓인 여원인(與願印)을 실감나게 표현한 자세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아무래도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주불이 어깨 높이로 왼손을 들어 옷자락을 잡은 모양을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은 보관에 화불 표현이 분명하여 관세음보살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좌협시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여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더 많이 참조한 듯하다.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들었는데 몸은 약간 뒤틀어
선정성(煽情性)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석굴암 조각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보이는 난만성의 표출이다.
대세지보살은 얼굴이 반 이상 파손되어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비교적 단정하게
똑바로 서 있다. 옷주름 표현은 관세음보살입상과 대동소이하여 매우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8. 석굴암 조각과 흡사한 석가삼존입상
그 다음 남쪽 면이 넓어서 이곳에 <석가삼존입상>을 조성하였던 듯하나 현재는 우협시보살상이 흔적
없이 파괴되고 주불의 두상도 떨어져 나간 상태다. 그러나 조각 기법은 사방불 중 가장 우수하여 마치
석굴암 조각을 보는 것과 같으니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장(彫刻匠)이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팽만감이 넘치도록 탄력 있는 육신의 표현과 위엄이 깃들인 넉넉하고 자비로운 표정 등이 석굴암의 주불
이나 십일면보살을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드러나는 양식적 특색과 매우 흡사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 10년(751)에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하니 이 <굴불사 사방불 남면 석가삼존입상>
도 이 어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것이 석굴암 조각을 위한 시험 조각일 수도 있다.
석가여래입상은 의복 표현이 마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그것과 같이 굽타식 통견불의에 양다리
에서 옷주름이 매미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형태다. 그러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의복보다 더 얇게
표현하고 있어 그 세련도가 극에 이르렀음을 과시한다. 연화대좌는 딴 돌로 만들어 밑에서 받치게 하였다.
문수보살이라고 생각되는 좌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마치 석굴암 본존 좌상 같다.
그런데 하체가 풍만하여 꼭 인도의 마투라시대 야차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구슬장식을 더하지 않고 다만 천의(天衣)로만 몸을 감싸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오히려 이것이 풍만
함을 더욱 강조하여 자애로운 모성상을 표출시키는 의외의 효과를 냈다.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주불과 협시보살의 크기를 거의 같게 조성하였던 듯 파손된 주불의 현재 높이는
136cm이고 문수보살입상 높이는 145cm에 이르러 오히려 협시보살상이 주불보다 더 큰, 역조현상을 보이고
있다.
<굴불사 사방불>의 동면에는 역시 약사불이 표현되었다. 높이 206cm의 <약사불좌상>인데, 석벽 면이 위
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들며 갈라져 나간 형태여서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가 작업할 공간이 없어 그랬
는지 몸체는 얕은 돋을새김과 줄무늬로 대충 처리하고 얼굴만 입체감이 날 만큼 두드러지게 새겨놓았다.
광배 역시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고, 약호도 주변을 파내는 방법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북벽도 역시 석벽 면이 고르지 않아 두 면으로 나뉠 수밖에 없자 북면 동쪽에는 <미륵보살상>을 높은 돋을
새김으로 새기고, 북면 서쪽에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도판 19)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다. 이것이 혹시 백률사에 모셔져 있었다는 대비상(大悲像)을 본떠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삼국유사’ 권4 백률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계림(鷄林,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는 대비상
(大悲像; 관세음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를 알지 못하나 신령스럽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리고 이 대비상이 효소왕 2년(693)에 동해 북변 금강산 일대로 놀러 나갔다가 북적(北狄;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었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과 그의 낭도인 안상랑(安常郞)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장황하게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신기(神器)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거문고(玄琴)를 가지고 가서 만파식적을 쪼개
두 화랑이 타게 하고 관세음보살은 거문고를 타고 하늘을 날아 백률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떻든 효소왕 시대(692년)에 이미 백률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던 모양이니,
경덕왕이 백률사 초입에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적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포로로 잡힌 신라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 대비상을 그대로 옮겨 사방불에 덧붙여 조각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연계(連繫) 과정은 결국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도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을 주불좌상
뒷벽에 새겨지게 하는 촉매 구실을 하였다고도 보게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입상>의 선구적인 시험조각이었다고 하겠다.
<십일면육비관세음보살입상>의 높이는 179cm이고 <미륵보살입상>의 높이는 161cm로 거의 등신대(等身大;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에 해당한다.
<미륵보살입상>의 조각기법도 남벽의 문수보살입상의 그것과 방불하니, 석굴암 조성 직전인 경덕왕 10년
(751)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출처] :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8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