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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교회에 올 때 기대감을 가지고 옵니다. 최소한 세상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교회를 오게 됩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세상보다는 더 나은 것이 있지 않을까 세상에 없는 것이 교회에는 있지는 않을까 또 내가 원하는 것을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못 얻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어쩌면 그런 기대감으로 교회를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이미 믿던 사람들도 우리 교회에 등록할 때 목장 교회에 등록할 때 아무런 기대감이 없이 등록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대가 없는 사람은 교회가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기대가 없다는 것은 다 채워졌다는 의미거나 아니면 어떤 바램이 없으니까 이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확률은 거의 없을 거예요.
나는 막 너무 충만하고 나는 다 채워져서 하나님께 감사해서 도저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등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찾을 때 기대감을 가지고 찾습니다. 교회에 오면 그런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기대감으로 교회에 올까요?
먼저는 사람들은 교회에는 용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옵니다. 만약에 목장 교회에 용서가 없다는 것은 우리 교회에 십자가가 없다는 일이기 때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의 용서는 우리 교회의 용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에 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때에 베드로가 나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7번을 70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아멘 예수님은 7번씩 70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어요. 이게 교회 안에 있어야 될 용서의 모습인 거예요. 이 말은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의미예요. 횟수의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어떤 것도 용서하라는 의미가 이 말씀에 담겨져 있어요. 횟수의 제한도 없고 그리고 어떤 것도 다 교회는 용서가 일어나야 된다. 용서는 숫자와 규모에 있어서 제약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용서받기가 되게 어려워요. 우리 잘못을 용서받지 못해요. 사람들이 용서해 주지를 않습니다. 사과하라고 해놓고 사과하면 용서하지를 않아요. 사과해야 된다라고 말해서 사람들 앞에 사과를 해요. 많은 청중 앞에 사과를 해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용서해 줘야 되잖아요. 사과만 받고 용서해 주질 않아요. 리더들이 용서를 구해도 사과해도 용서해 주지 아니하고 같은 동료들이 용서를 구해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용서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다른 용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교회를 오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어야 하고 교회는 이해받지 못할 죄가 없어야 됩니다.
이걸 잘못 들으면 죄를 조장하는 것처럼 들려요. 죄를 방관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용서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어떤 죄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말이기 때문에 절대 이런 말은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 물론 성경은 한두 군도에서 예수 믿은 사람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한 죄에서 언급은 해요. 그렇지만 그 외에는 교회는 어떤 종류의 용서도 일어나야 하는 곳인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 받지 못했던 것에 용서받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교회는 용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거예요. 우리 자꾸 이렇게 생각해 용서를 내가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용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내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용서한 것을 나는 어떻게 해야 돼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전부예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용서하셨는데 자기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교회에 이런 분들이 되게 많아요. 나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 집사님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은 다 용서하셨는데 용서 못할 죄가 없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용서의 주체가 자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예요. 교회에 일하는 많은 용서의 주체는 여러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고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뭘까요? 교회의 역할은 뭘까요?
교회는 그들이 다시 죄를 짓지 못하도록 죄를 짓는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우리 역할인 거예요. 예수님이 용서해 주신 죄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그 사람이 그런 죄로 돌아가지 않도록 막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인 거예요.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이 용서하신 그 사람이 다시 동일한 죄를 짓지 않도록 못하도록 막는 것이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죄도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용서할 수 있는 죄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용서할 수 있는 것도 극소수예요.
여러분 돈 떼먹고 달아난 사람 용서할 수 있나요? 여러분에게 상처를 줘서 여러분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을 여러분이 용서할 수 있나요? 여러분의 가정을 품비박상 만들어 놓은 사람을 여러분이 용서할 수 있나요? 여러분 인생의 미래를 다 막아놓은 사람을 여러분이 용서할 수 있나요?
그래서 내가 용서의 근거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인 거예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용서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저도 제 아내 어떤 분을 용서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내 상처가 치료되고 나니까 내 아픔이 치료되고 나니까 용서가 일어나더라고요.
근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도대체 제가 제 인생을 살면서 몇 명을 용서해줄까 이런 식으로 용서한다면 몇 명 용서하지 못하고 인생이 끝나요. 그래서 용서의 주체는 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용서의 주체가 되고, 교회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도록 교회 공동체가 보호해 주고 변호해 주고 보살펴주고 막아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교회의 기능이 마비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숙제 사역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 속죄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용서받은 이들이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어떤 교회에서 용서가 일어날까요?
여러분 모든 교회에서 다 용서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어떤 교회는 끝까지 미워하고 끝까지 싸우고 끝까지 서럽게 힘들게 한 사람이 있어요. 죽기 직전까지도 반면에 용서가 일어나는 교회가 있어요. 예배드리고 나면 용서가 일어나고, 함께 모여서 모임을 하고 나면 용서가 일어나고, 함께 와서 기도하고 나면 용서가 일어나는 교회가 있어요.
어떤 교회가 용서가 일어날까 교회가 십자가의 대속을 말할 때 그 교회에서 영서가 일어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이 사실이 강단에서 끊임없이 선포되어져가고, 그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유의 피가 이 강단에서 흘러내릴 때 우리 그 교회 안에서 수많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대속이 교회 안에 있어야 돼요. 그래야 끊임없이 용서받는 이들로 교회가 채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용서받지 못하면 예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해요. 왜 우리가 회개를 해야 되느냐? 여러분 예배 잘 드리고 싶잖아요. 용서받아야 예배를 잘 드려요. 묶인 것이 풀려야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어요. 내 양심을 내 삶을 묻고 있는 죄로부터 내가 해방을 받아야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설 수 있어요. 영원히 위로되는 예배, 마음이 위로되는 예배, 삶이 고쳐진 예배를 그때 드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려면 그 교회 안에 우리 교회 안에 끊임없이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용서가 일어나는 교회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속의 사역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전하는 교회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대속의 역사도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인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내 죄를 십자가의 피로 정결케 하셨다는 것을 믿고 이걸 믿어야 끊임없는 대속의 역사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고 그 교회가 용서받는 교회, 용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능력을,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공동체 안에서 용서가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 교회에 복음이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돼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서 자리 잡게 되는 거예요. 예수의 삶을 말하지 않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지 않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교회에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어요.
지금 교회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우리 영혼이 정말 듣고 싶은 스토리가 어떤 걸까요?
감동되는 것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정말 듣고 싶은 것은 복음 이야기예요. 왜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 갈망하고 우리의 영이 소망하고 우리의 영이 그리워하는 것은 복음인 거예요.
교회는 복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영원히 만족이 일어나고 영혼을 만족 경험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영원히 회복이 되고 복음을 들어야 영원히 살아납니다. 복음은 있어요.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이 우리 안에 없으면 전할 수 없어요. 그 교회 안에 복음이 없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거예요. 내 안에 복음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몰라요. 교회를 아는데 복음은 몰라요. 목사는 아는데 복음을 몰라요.
교회의 사역은 동참하고 아는데 복음을 몰라요. 왜 그럴까요?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십자가와 부활이 전해지고 그것을 믿고 따르겠다고 작정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고, 예수의 삶을 살려고 살면서 부단히 노력하는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복음인데 우리 교회 안에 예수가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없는 거 못 줘요.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없기 때문인 거예요.
세상에 교회는 많지만 복음은 없는 거예요. 세상에 성도는 많지만 복음은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게 예수님 믿으라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다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고 여러분 전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교회에 가자고 했지 복음은 말하지 않은 거예요. 물론 전도 교회에 대한 소개도 필요하죠. 우리 교회 참 좋다. 예배 좋다. 이런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교회는 복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들이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야 그들이 있는 곳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 청문회 할 때 계속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냐고 묻는 국회의원이 있더라고요.
왜요?
그걸 인정하지 못하게 하려고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소리를 싫어해요. 그래야 자기가 주인공 되거든요. 세상은 진화했다고 말해야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돼요. 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죄인들은 주인으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합니다. 거절하고 못 들은 척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자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다고 예수에게 구원이 있다고, 예수님에게 새로운 창조가 있다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전해야 됩니다.
왜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까요?
먼저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복음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봐야 사람들이 그 복음 앞으로 나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복음을 취사 선택으로 여기지 않아요. 복음을 위해서 삶을 삶 전체를 내걸고 사는 사람들을 봐야 사람들이 복음 앞으로 나와요.
왜 베드로 앞에 왜 사도바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을까요?
복음을 위해서 온 생애를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온 거예요. 교회는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야 부흥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부탁드렸죠. 당분간은 모든 기도 제목에 교회 부흥을 넣으라고 대표 기도든 개인 기도든 무조건 앞에 넣으라고
목장 교회가 부흥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있어야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불신자들도 자기 살 길은 알아요. 마귀가 그 살 길을 막고 있어서 온전히 깨닫지 못하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본질적으로 자기 살 길은 알아요. 말하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지만 예수를 믿어야 살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복음이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못 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복음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목장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으려면 복음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예수님 만나고 얼마큼 변화되셨어요?
말투 하나도 못 바꾸셨잖아요. 말투 하나도 표독스러운 말투를 못 바꿨어요.
도대체 복음이 할 수 있는 게 여러분에게 뭘 했나요?
복음이 여러분의 삶에 뭘 하셨어요? 말투 하나 못 바꾼다면 저도 부끄러운 게 하나 있어요. 표정이 안 바뀌어요. 저는 엄청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웃지 말래요. 더 나쁘다고 그게 웃는 표정이 더 안 좋대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가 복음이 복음을 생명이라고 여기고 그 복음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 복음으로 인한 변화가 우리의 삶에 있어야 돼요. 그래야 사람들이 교회에 와요. 저기 교회 가면 살 줄 알고 교회를 향해 달려와요. 저는 좀 그렇지만 이런 상상을 좀 해봤어요. 막 자리가 없어서 먼저 자리에 앉으려고 막 성도들이 쫓아오는 상상.
예전에 우리 은퇴 목사님이 하실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자리가 부족해서 막 쫓아와서 먼저 앉으려고 난리였던 적이 있었대요. 제가 오고 15년 동안 아직은 없었습니다. 오늘 좀 많이 오셔서 많은 자리가 채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없었어요. 행사 때 외에는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된 사람은 복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복음의 한 사람을 어떻게 바꿨는지, 복음의 한 가정을 어떻게 바꿨는지, 복음의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복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 안에 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할 거야. 니가 믿는 예수님, 나도 좀 알려줘. 왜 너만 교회에 다녀? 니가 믿는 예수님 나의 좀 알려줘
라고 하게 될 겁니다.
성도의 지금은 성도의 오늘은 복음의 가치입니다. 교회의 지금은 복음의 가치이고, 성도들의 삶은 곧 복음의 가치입니다. 세상이 복음을 무시하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통해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교회에 꼭 있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특별히 교회에는 탕자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어야 돼요. 누가복음 15장 20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이에 일어나서
교회는 탕자를 품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못해요. 사랑은 말하는데 아무것도 품지 못해요. 여러분 못 품으면 안 담겨요. 우리가 성도들을 품어야, 새 가족들을 품어야 이 사람들이 목장교 공동체에 담겨요. 못 품은 건 안 담기더라고요. 내 그릇에는 내가 품는 것만 담겨요. 우리의 그릇이 텅 비어 있다는 건 내가 아무것도 못 품었다는 의미예요. 내 그릇이 가득 찼다는 것은 내가 많이 품었다는 거예요. 품은 것만 내 것이 되는 거예요. 청소년들을 못 품으니까 청소년들이 교회에 없어요. 청년들을 못 품으니까 청년들이 교회 공동체에 담기지 않아요.
여러분 성도들은 착합니다. 자랑은 자랑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목장 교회 성도들은 정말 착해요. 착한데 더 착해요. 다음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주셔야 돼요.
그런데 무능해요. 착한데 무능해요. 어디에서 세상은 다 유능하죠. 사랑하는 데 무능한 거죠. 사랑이 무능한 거예요. 목사들이 되게 착합니다. 그러나 무능해요. 왠 줄 아세요?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 착한데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이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할 줄도 알고 받아줄 능력이 있었어요. 죽기 전에 재산을 나눠달라고 요구하는 아들을 받아줄 능력이 있었어요.
어떻게 받아줘요?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허비하는 아들의 삶을 받아줄 능력이 있었어요. 뻔뻔하게 돌아와서 종이 되겠다고 하는 아들을 받아줄 능력이 탕자의 아버지에게는 있었어요. 돌아 너들에게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줄 능력이 있었어요.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어줄 능력이 있었어요.
교회는 이 능력이 있어야 돼요. 종을 하고 살겠다고 했지만 아들로 받아줄 능력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능력이 없었으면 이 둘째 아들을 이 탕자를 이렇게 품을 수 있었을까요?
문제는 사랑의 능력이 없는 첫째 아들입니다. 교회는 이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로 꽉 차 있어요. 첫째 아들은 탕자의 삶을 산 둘째 아들을 사랑할 능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분노했어요. 물려받은 재산을 허비하고 거짓골로 돌아온 동생을 사랑할 능력이 없었어요.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차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첫째 아들들이 교회에 있어요. 많아요. 기분 나쁘지만 수두룩한 거죠. 사랑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교회 오자마자 죄를 짓는 성도들을 사랑할 능력이 없고, 교회에 와서 불평하는 성도들을 사랑할 능력이 없고, 교회에 와서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사랑을 기도하고 교회에 왔는데 조금만 흠이 있다고, 조금만 잘못이 있다고 조그만 문제가 있다고 교회가 흉을 보는 거예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저일 수도 있고 우리 교회 안에는 많습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목회자도 잘 이해가 안 돼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성도도 잘 이해가 안 돼요. 자기가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하는 건 내버려 둬야 되잖아요. 근데 그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첫째 아들이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많이 떠났습니다. 교회가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거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사랑하는 것을 문제를 삼습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무가 열매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상징해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기대했어요. 그만큼 사랑했거든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기대했어요.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아들을 줬잖아요. 선인으로 삼아줬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줬잖아요. 그래서 열매를 기대했어요.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아가 나무를 저주할 정도로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게 화가 난 실은 무화과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게 화가 나신 거예요.
예수님이 기대하는 것이 우리 교회에는 있을까요?
예수님이 기대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우리 교회에는 있을까요?
그들이 기대하는 용서와 그들이 기대하는 사랑과 그들이 기대하는 복음이 우리 가운데는 있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목장 교회 가운데 세상 사람이 기다는 용서와 그리고 사랑과 복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장 교회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용서와 사랑과 복음이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