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희망#돌아봄
불가능한 결말과 절망의 패배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늘의 저주는 내일의 축복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지만, 뒤돌아보아야만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일련의 무작위 한 사건, 형태나 내적 논리가 없는 일련의 사고와 우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통 체증으로 인해 중요한 회의에 늦습니다. 우리가 하는 엉뚱한 발언으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를 화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직장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은 때때로 "바람에 날려 열린 무작위 한 우연의 쓰레기 봉지(a trashbag of random coincidences blown open in a wind)"라는 조셉 헬러가 역사에 대해 정의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놓친 기회는 거기서 더 좋은 기회로 이어졌습니다. 의도치 않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느낀 부끄러움은 우리가 미래에 하는 말에 대해 더 조심하게 만듭니다. 수년 후에 회고해 보면, 우리의 실패는 우리의 가장 깊은 학습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바라봄은 항상 우리의 미래를 바라봄 보다 더 통찰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마주하며 삶을 살지만, 삶이 과거가 되었을 때만 삶을 이해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토라의 요셉 이야기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된 곳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모든 아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려하게 수놓은 옷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야아콥의 그 사랑과 선물은 요셉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꿈을 그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꿈은 그의 아버지조차 불쾌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양 떼를 치는 형들을 보러 갔을 때, 그들은 먼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고 결국 그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처음에, 포티파르의 집에서 그는 행운을 만난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려 했고 그가 그녀의 구애를 거부하자 그녀는 그를 고발했고 그는 무죄를 증명할 방법도 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한 듯했습니다. 그가 더 아래로 떨어질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희망의 빛이 왔습니다. 그는 한때 파라오의 측근이었던, 동료 죄수의 꿈을 해석하면서, 그가 풀려나서 이전의 높은 직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보답으로 한 가지만 요청했습니다. "당신에게 잘될 때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 파라오에게 내 말을 전하고, 이곳에서 나를 꺼내 주십시오. 나는 히브리인의 땅에서 강제로 끌려왔고, 여기서도 이곳에 갇힐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토라에서는 그다음 요셉에게 가장 잔인한 운명의 일격 중 하나를 전합니다.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를 잊었습니다." 요셉의 자유를 향한 유일한 탈출 기회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희망을 잃은 죄수 요셉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토라가 그리스 비극에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요셉의 오만함이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적에게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은 새롭고 예상치 못한 불행의 서곡일 뿐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요셉의 최고 승격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파라오는 그를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인 이집트의 총독으로 만듭니다. 그는 그에게 자신의 인장 반지를 주고, 왕의 예복과 금 사슬을 입히고, 군중의 환호 속에 전차를 타고 행진하게 합니다. 불과 30세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의 두 번째로 강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죽음의 구덩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이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는 토라가 보여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의 구현을 나타냅니다.
유대교는 아테네가 아닙니다. 토라는 소포클레스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지 않습니다. 영웅은 몰락할 운명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입니다.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고대 이스라엘과 고대 그리스는 시간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달랐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모이라나 아난케(moira or ananke), 즉 맹목적인 운명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인류에게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명이 그렇게 정했다면 비극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간을 여행할 때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길을 잃은 것처럼 느끼지만, 요셉처럼 그분이 항상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요셉은 성격에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모에 대해 허영심이 강했고, 아버지에게 형제들에 대한 나쁜 소문을 전했고, 우월한 외모는 포티파르의 아내의 구애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이 요셉의 죽음으로 끝날 무렵, 그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를 용서하고, 유대교 전통에서 "짜딕"(tzaddik)이라고 부르는 기근과 굶주림으로부터 온 지역을 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인생 이야기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요셉의 교훈입니다. 29세의 나이에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했을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아버지에게 비난을 받고, 노예로 팔리고, 거짓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자유의 유일한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는 요셉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삶은 정치적,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도 전례 없는 성공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록된 역사상 처음으로 용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을 기근으로부터 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3).
그의 삶의 전환점은 예측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유대인 역사의 궁극적인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요셉이 만난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살지만, 우리는 뒤돌아볼 때만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그것이 모쉐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너는 내 뒤를 볼 것이다." (출 33:23), "너는 뒤돌아볼 때만 나를 볼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의 서사 구조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라이오스와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가 신탁이 선포한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실제로 운명의 결정에 더 가깝게 만드는 반면, 요셉의 이야기에서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에피소드는 돌아보면, 생명을 구하고 요셉의 꿈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단계임이 드러납니다.
유대적 가르침은 비극의 반대입니다. 그것은 모든 나쁜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우리는 "회개, 기도, 자선은 사악한 법령을 피할 수 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한 모든 긍정적인 약속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에 대한 거부
따라서 인생을 바꾸는 생각이 있습니다. 절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불행으로 인해 인생이 상처를 입고, 고통으로 찢어지고, 행복할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인생의 다음 장은 축복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양국 시인 워즈워스의 아름다운 표현처럼 "기쁨에 깜짝 놀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당신이 그 고통으로 강해지고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곧 일어날 좋은 일의 필요한 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부터 오늘날 홀로코스트 생존자에 이르기까지 인내심의 영웅들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는, 계속 나아가고, 믿음을 갖고, 절망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책에 새롭고 다른 장을 쓸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축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을 바꿀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이 글은 Rabbi Lord Jonathan Sack의 “A Word of Torah: Improbable Endings and the Defeat of Despair”중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월간샤밧>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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