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의 문학-‘창작’과 ‘이론’ 사이
‘빈 의자’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상상력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이영숙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처음 읽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다. 제목의 강렬함, 중복되는 등장인물들의 헷갈리는 이름,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히스클리프라는 주인공의 정체성, 빅토리아 시대 당시의 관습적인 도덕관념1)을 벗어난 등장인물들의 사유와 행위를 우리는 사랑과 증오, 과도한 집착과 잔혹한 복수 서사로 읽어내곤 했다.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파국을 향해 내닫는 비극적 영웅이자, 강렬한 감정의 소유자가 아닌가. 주인공들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광기와 진실을 관통하는 태풍의 눈이 되기도 하고, 찻잔처럼 고요한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치명적인 로맨스를 꿈꾸기도 했다. 전통적인 로맨스 독법에 기대어 인간 경험의 보편성 차원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공유한 셈이다.
느닷없이 『폭풍의 언덕』을 호출한 것은 먼저 소설을 통해 제임슨의 저서를 개괄하려는 수수한 전략에서다. 책을 요약하거나 그 이론적 흐름을 기술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개념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정치적 무의식
이 인물은 그의 모호한 본질(낭만적 주인공인가 아니면 폭군적인 악당인가?)로 인해 직관적이고 인상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재현적인’ 비평에서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는데 이러한 비평은 어떤 방식으론가(예컨대, ‘바이런적’ 주인공으로서의 히스클리프)
그 모호성을 해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행위항 환원의 방법에서 이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개인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나아가 세대와 그 운명의 연대기도 아닌 하나의 비개인적 과정, 즉 저택에 중심을 둔 의미소 변환으로 해석되거나 다시
쓰인다.2)
제임슨에 의하면, 텍스트가 생성되고 읽히던 브론테 시기의 비평 관습(직관적이고 인상주의적인, 본질적으로 ‘재현적인’)에서는 히스클리프의 ‘모호한 본질’이 그의 심리적 요소나 인물들과의 행위항을 중심으로 파악되었다. 행위항의 사전적 의미는 ‘심층 구조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역할’로, 그를 ‘바이런적’이라는 인물 유형으로 정형화하여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면서 제임슨은 ‘개인들’ 차원이나 ‘세대와 그 운명의 연대기’에 머물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따랐을 때 우리는 주인공이 떠난 아주 낯선 지점에 당도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어떤 의미로도 더 이상 주인공 또는 주동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악마로부터 온 것처럼 검은” 고아
소년이 갑자기 한 가족에게 소개되었던 첫 등장에서부터 재산을 회복하고 두 가문의 쇠약한 기질에 활력을 되찾게 하도록
고안된 중개자 또는 촉매와 같은 것이다. 이는 ‘히스클리프’가 이 서사 체계 내에서 모종의 복잡한 방법으로 시혜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즉 그는 주인공이라는 기능적 외양을 띠고 있으되 그것은 그와 아주 다른
행위항상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그리하여 선과 악, 사랑과 돈, ‘연인 역할 배우(jeune premier)’와 같은
가부장적 악당 역 사이에 복잡한 의미소의 혼돈이 발생하고, 이 혼돈이 이 ‘인물’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인물은 이 의미소들을 매개하는 매커니즘이다.3)
이것이 ‘행위항 환원의 방법에서’ ‘하나의 비개인적 과정’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에 의하면 서두의 나/우리의 19세기적인 낭만적 독서는 처참한 패배에 직면하게 된다. 히스클리프는 오히려 진짜 주인공을 위한 모종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인공이라는 기능적 외양을 띠고’ 활약하는 인물로 그 역할이 축소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히스클리프라는 기구한 운명과 냉혹한 집념의 사나이의 특이한 성격을 그리면서도, ‘워더링 하이츠’라는 야성의 세계와 ‘스러시크로시 저택’이라는 교양의 세계 사이의 대조와 결합과 몰락을 다뤘다.”4)는 점에서 ‘저택’의 기호와 의미의 이동이라는 ‘의미소’ 변환도 일어난다. 히스클리프가 사랑한 캐서린 언쇼 역시 이 자장 안에 있으므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으나 ‘진짜 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지면을 조금 더 할애해야 할 것 같다.
소설의 중심축은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 저택에 사는 언쇼 집안과 이웃의 ‘스러시크로스 저택’에 사는 린튼 집안, 그리고 언쇼가 고아 소년을 데려와 자신의 죽은 아들 이름을 붙여준 히스클리프이다. 언쇼는 힌들리와 캐서린 남매를, 린튼은 에드거와 이사벨라 남매를 자녀로 두었다. (예전의 독법대로 가계도를 그려야 할까)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캐서린이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게 되자 충격을 받고 그곳을 떠난다. 2년 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축적한 인물로 돌아온 그는 언쇼 사망 이후, 자신을 하인처럼 부리던 힌들리의 도박 빚을 인수하고 워더링 하이츠의 실질적 주인이 된다. 이어 린튼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하고, 자신의 아들과 캐서린 린튼을 강제 결혼시켜 결국 스러시크로스 저택까지 손에 넣는다. 표면상으로 그의 복수는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복수담인가. 그러나 캐서린 언쇼의 죽음 이후 쇠약해진 그는 전 재산을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에게 남기고 세상을 뜬다. 헤어튼과 캐서린 린튼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이들의 결혼을 앞두고 소설은 끝난다.
제3세대인 이 주인공들을 위해서, 또한 “구원적이고 소망 성취적인 유토피아적 결말”5)을 위해서, 히스클리프는 ‘중개자 또는 촉매’, ‘시혜자’로서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게 제임슨의 견해이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부재’함으로써 도시에서 자본가로 약호화된 히스클리프는 돌아와 캐서린 언쇼에 대한 사랑으로 ‘재약호화’된다. 이 관점에서 캐서린 역시 헤어튼 언쇼와 캐서린 린튼이 히스클리프의 유산을 상속하게 되는 동기로서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그녀는 헤어튼 언쇼의 고모이고, 캐서린 린튼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유산이라는 형식으로 성취된다. 제임슨은 이러한 ‘매커니즘’을 파악하는 행위를 “‘강력한’ 다시 쓰기”(72쪽)로 규정하면서 이를 해석(15쪽), 매개(46쪽), 비평가의 임무(68쪽)와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텍스트 읽기에 의하면,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공시적 영역에서 통시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사적 감정 차원의 해소가 아니라 체제로서의 전통적 귀족 질서가 부르주아 자본에 의해 무너지는 역사적 전환기를 은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정치적 무의식’의 구현체로서 히스클리프는 상실된 공동체 혹은 새로운 계급 질서를 ‘유토피아적’ 보상 체계로 열어놓는 작가의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6) 제임슨에 의하면, 물론 “에밀리 브론테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비평하고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 브론테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문학적 원천, 즉 브론테가 사용하는 소설과 로망스의 양식, 넌지시 차용하는 문학적 전례들, 그리고 작가 개인의 사회적ㆍ문화적 결정 요소들이 이미 브론테 시대의 사회적ㆍ경제적 조건이라는, 일종의 무의식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7)
한 가지 상징적인 것은, 1847년에 소설책을 출간한 브론테는 다음 해인 1848년에 사망했고, 같은 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펴냈다는 사실이다. 브론테와 마르크스가 1818년,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의 동시대성을 상상하게 해준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지주 계급 중심의 전근대적 사회에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이 균열을 내던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동년배로서, 단 한 권의 저작이지만 브론테는 당시 영국의 변화 양상을 소설로 창작하였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사회ㆍ경제적으로 이론화하였다. 표현과 사유 방식은 달랐으나, 이들이 각각 미국과 아시아에 살았다는 것과는 달리 유럽이라는 지붕 아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시대 감각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1847년과 1848년이 어떤 임계점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폭풍의 언덕』 속에 내장된 ‘정치적 무의식’은 제임슨도 모르는 사이 그의 마르크스적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혹은 제임슨의 ‘사회적 총체성’이 브론테적 상상력을 뛰어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브론테와 제임슨의 텍스트가 감성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을 요동치게 만드는 이유이다. “기호학적 모델을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재전용함으로써 우리는 고전적 로맨스를 19세기 상황들(이는 특히 리얼리즘 소설에서 보이는, 발생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사회적 내용 및 새로운 형식들을 포함한다.)에 역사적으로 적용”(163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
항상 역사화하라! 유일하게 절대적이며, 모든 변증법적 사유에서 ‘초역사적(transhistorical)’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슬로건이야말로 『정치적 무의식』의 윤리라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8)
“항상 역사화하라!”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명료하다. ‘역사화된 역사’만이 해석의 ‘윤리’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사유의 배경이나 사건의 전개로 인식했던 과거의 문학 이론에 대한 비판이면서, 문학 이론의 방향성에 대한 비전 제시이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명제를 역사 그 자체가 증언하고 있듯, “이 중단 없는 서사의 흔적들” 속에서 어떤 오류도 왜곡도 없이 “이 근본적인 역사의 억압되고 묻혀진 현실을 텍스트의 표면 위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도외시할 경우, 우리는 너무도 쉽사리 21세기의 보편적 현상이 되어버린 “삶의 사물화(reification) 및 사유화(privatization)”(21쪽)를 강화하는 일에 복무하게 될 것이므로, 제임슨은 역사의 경계 바깥에서도 불변의 명제로 살아남을 ‘윤리’를 ‘모든 변증법적 사유’에 아로새기기 위해 ‘초역사적 명령’이라는 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제임슨의 지적 오만이 아니라 간절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제임슨이 만든 조어이다. ‘정치적’이라는 의미가 계급이나 생산 관계, 이데올로기의 외부적 조건을 가리키는 마르크스적 용어라면, ‘무의식’은 인간의 심연에 자리해서 꿈을 통해서만 그 억압과 욕망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내부적 조건에 연결되는 프로이트적 용어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역사적 모순들을 집단의식으로 억누르는 특수한 메커니즘을 서사”9)로 가시화할 수 있는 장치로서, 제임슨은 이를 “인간 정신의 중심적인 기능이거나 심급(instance)”(14쪽)으로 명료하게 정리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는 다시 날렵하게 요약된다. “‘정치적’이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계급적ㆍ집단적ㆍ역사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무의식’이란 (…) 모순적인 현실과 역사를 ‘살아 내기’ 위한 무의식적이고도 필사적인 반응을 말한다. 만일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과 같은 사회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정치적 무의식은 작동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397쪽) 실제로 “표층에 드러나는 표면적 서사는 역사와 상호관련을 맺으며 텍스트의 무의식적 실재를 매개한다.10) ”저 『폭풍의 언덕』에 내재된 다양한 의미소들이 그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역사”를 해석의 지평으로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변증법적 사유에서의 “항상 역사화하라!”는 명제인 것은 그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우리의 전제는 오직 진정한 역사철학만이 사회적ㆍ문화적 과거의 특수성 및 근본적인 차이를 존중하는 한편 그 과거의
쟁점과 열정들, 형식과 구조들, 경험과 투쟁들이 오늘날의 그것들과 갖는 연대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여기에서
나의 입장은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앞서 환기한 역사주의의 딜레마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문화적 과거의 근본적인 신비에 대하여 적절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고, (…) 마르크스주의를 통해서만 (…) 사멸된 지 오래된 문제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긴요한 사항임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11)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생산 양식을 사회의 토대 또는 하부 구조로 삼고, 문화ㆍ정치ㆍ법ㆍ예술 등을 상부 구조로 본다. 이때 예술, 특히 리얼리즘 문학12)은 “문화적 텍스트를 전체 사회에 대한 본질적으로 알레고리적인 모델로 생각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는 “전형화”나 “비유 형상들”로 나타났다.13) 사회를 구성하는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대리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등장인물의 역할은 “소설가의 역사적 현실 인식”(210)을 반영하며, 이 적극적인 매개를 통해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역시 알레고리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이때 이념적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은 계급의식, 모순과 갈등(‘인식적인’)을 재현하거나 은폐하면서(‘구도 짓는’) 현실에 기반한 법칙성이나 인과관계(‘‘과학적’인 전망’)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퇴색”되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4)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실패는 제임슨도 인정하는 바이고, 문화 텍스트를 분석할 때 그것이 문화의 도구화라는 유혹이나 경향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 또한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이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소력이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반합의 변증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문명의 모든 기록은 야만의 기록이다.” 문명의 기록은 강자에 의해 씌어지며,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억압과 착취가 선행된다는 역사유물론적 인식이 그 바탕이다. 문명의 거죽이 매혹적인 것은 과거의 폭력이 그 속에 은폐되었거나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적 사유를 인유하며 제임슨은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또한 동시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적이기도 하다.”는 명제로 전환한다. 특히 예술에서 그 왜곡된 형식 속에 유토피아적 충동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 결말은 히스클리프라는 야생적 인간이 캐서린의 유령을 통해서든 심신의 노쇠 등을 통해서든 간에 계급 질서의 재정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봉합하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일찍이 제임슨은 “해석학적 작업 내지 해석 작업이 오늘날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주의에서 기본적인 논쟁 표적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면서, 니체의 권위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는 후기 구조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해석학적 작업 내지 해석 작업’을 “변증법 및 부재(absence)와 부정적인 것(tghe negative)에 대한 변증법의 가치 부여(valorization), 총체적 사고의 필요성과 우위성에 대한 변증법의 주장”(23쪽)과 동일시하였다. 이는 시뮬라시옹의 현실 속 온갖 ‘가짜’(이미지)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적 징후를 해결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이 세계에서 실현하려다 실패했던 역사적 사례에서도 보았듯, 그것은 완전한 세계에 대한 설계도가 아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이며, 예술적 해결 노력의 흔적이다. “현실적인 것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적인) ‘꿈’의 형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므로 (…) 삶을 살아 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는 면에서 상징적인 측면을 갖게 된다.”15)
빈 의자
본격 모더니즘은 (…) 마치 본격 리얼리즘의 완성된 서사 장치가 채 중심화되지 않은 주체의 불규칙한 이질성을 성공적으로
억압한 것처럼, 역사를 성공적으로 억압한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 부르주아 삶의 일상적 외양의 세계에서
더 이상 가시적이지 않은 것처럼 본격 모더니즘의 텍스트들에게도 더 이상 가시적이지 않은 그리고 축적된 사물화 과정에
의해 사정없이 지하로 내몰린 정치적인 것은 결국 진정한 무의식이 되었다.16)
시대적 전환기를 의미하는 리얼리즘ㆍ모더니즘ㆍ포스트모더니즘은 앞의 그림자를 밟고 뒤가 반향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리얼리즘이 ‘본격’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모더니즘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리얼리즘의 모순이 발견되기 시작할 때 이미 모더니즘의 맹아는 싹트는 방식으로서다. 그러나 그 무엇이 ‘본격’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어 성숙해지면 중심화된 주체가 ‘중심화되지 않은 주체’를 억압하는 것은 리얼리즘에서나 모더니즘에서나, 인간 세계에서나 동물 세계에서나 매한가지다. ‘본격 리얼리즘’에서 완성된 서사 장치가 이질적인 주체를 억압하여 중심 주체로 통합해 버리듯, 같은 방식으로 ‘본격 모더니즘’은 역사 곧 ‘정치적인 것’을 ‘부르주아 삶’의 표면에서 제거해 버렸다. 마치 “이음새 없는 그물망(seamless web)”(31쪽)처럼 그 억압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봉합된다. 그러나 이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물화 과정’을 거치며 인간의 심연에 ‘진정한 무의식’ 곧 ‘정치적 무의식’으로 기입된다.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우리 자신의 세계 너머에 있는 집단적 사유와 집단적 문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구상할 때 예견해야만
하는 몇몇 도전들은 이 책의 잠정적 결론에서 언급될 것이다. 거기에서 독자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동시에 넘어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집단적이고 탈중심화된 미래의 문화적 생산을 위해 남겨진 빈 의자를 발견할 것이다.
먼저 ‘빈 의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동시에 넘어’선다 했으니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싶다가도, 바로 뒤따라오는 문장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을 보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닌가 보다 싶다가도, 첫 문장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 구상’하는 것이라 했으니 그게 뭔지 가늠할 수 없어 우리는 빈손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단서가 될 만한 글이 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철저히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조건에 접근하는 제임슨의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전의 이론가들이 포스트모던한 시나 예술 혹은 건축물을 하나의 또는 일련의 스타일로 보았다면, 제임슨은 처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정치적인 환경, 즉 역사에 결부시켰다. 문학 형식을 지칭하는 용어인 리얼리즘이 19세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모더니즘이 20세기 초 후기 산업자본주의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제임슨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후기 자본주의’가 지닌 동력을 미적이고 텍스트적인 층위에서 표현한 것이다.”17) 인용문이 가리키듯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보다 ‘후기 자본주의’란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그것을 현재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어떤 입장들보다 훨씬 우호적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마르크스주의’ 논의에서 기술했듯 제임슨은 자신의 ‘해석학적 작업 내지 해석 작업’과 ‘후기 구조주의의 변증법의 주장’을 동일시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다시 한번 말한다. “나는 이런 동일시에 대하여 해석적 또는 해석학적 행위의 이상(理想)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친화성 및 함축된 의미에 대한 이러한 서술에 대하여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 비판들은 표적을 빗나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23쪽) 그러므로 저 ‘빈 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리가 아니다.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의 결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힘주어 말했듯, 그것은 “예술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유토피아적 기능을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일을 치르고서야 마르크스주의 문화 연구가 정치적 실천에서 그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랄 수 있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존재 이유”를 상기시키는 것과 관련 있다.
제임슨이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한 후기 구조주의의 핵심 내용은 중심이나 주체, 기표로부터의 탈중심화로 모아진다. 즉 (이글에서 자주 언급한)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 기능’과 (후기 자본주의)‘예술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유비적이다. 인용문에서도 밝혔던 ‘빈 의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아직 상상되지 않은’ 그 무엇의 자리이다. 이를 위해서 마르크스주의 역시 ‘탈중심화된 미래의 문화적 생산을 위해’ 꿈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 의자’에는 아마도 문학, 정치적 무의식을 변증법으로 구현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문학이 앉게 될 것이다.
서사
내 생각에 서사란 (철학적 관념론의 손쉬운 표현을 빌리면) 인간 정신의 중심적인 기능이거나 심금(instance)이다. 이런
관점은 전통적인 변증법적 약호에 의해 Darstellung18)이라는 번역 불가능한 명칭에 대한 연구로 다시 공식화될 수 있는데,
이 제시야말로 재현(representation)에 관한 오늘날의 문제들이 전혀 다른 성격의 현시(presentation)에 관한 문제들,
혹은 본질적으로 서사적이고 수사학적인, 언어 및 글쓰기의 시간상의 운동에 관한 문제들과 생산적으로 교차하게 되는
지점이다.19)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제임슨은 기존 서사 개념을 뛰어넘는 포괄적 범위로서의 서사를 생각하고 있다. (…) 제임슨은
부재원인으로서의 역사를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매개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서사는
일종의 문학적 형식이나 구조라기보다 인식론적 범주의 하나로 자리잡게되며 세계를 파악하는 양식 내지 역사를 재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제임슨이 미래의 어떠한 사회형태로 나아가는 운동을 역사라고 한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 그(헤이든 화이트: 필자 주)에 의하면 문화적 산물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복원하고 그 과정 속에서
“유토피아적 계기의 정당화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것이 서사이다. (…) 전통적 개념의 오류를 피하면서 서사가 모든 종류의
행동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총체화 할 수 있는 틀로 보았던 것이다.20)
위의 글은 제임슨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데올로기, 무의식과 욕망, 재현, 역사, 문화적 생산 등의 문제틀(problematic)을 서사라는 모든 것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는(all-informing) 과정과 관련하여 재구조화”(14쪽) 하고자 했다. 서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 즉 노드롭 프라이, 그레마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 루카치 등의 다양한 관점들을 『정치적 무의식』의 특수한 비평적, 해석적 과제의 관점에서 조사하고 평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아래는 도울링의 책을 번역한 곽원석의 ‘서사’에 관한 용어 해설이다. 장문을 인용한 것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수고를 덜기 위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글에 제임슨적 서사 개념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6장으로 구성된 책의 4개 장을 서사에 할애하였다. 서사가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책의 주제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받고 두 문장을 덧붙여야겠다. “서사는 리얼리티를 창조해냄과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며 세계를 들어냄과 동시에 그것을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서사는 해석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21)
제임슨은 인간 정신의 고유한 형식으로서의 서사를 강조한다. 창작자보다는 주로 비평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서사를 중심에 두고 글쓰기의 윤리와 해석의 전략을 동시에 수립하였다. 인간 경험을 시간 속에서 형식화하는 소설가와 역사화된 서사 속의 구조적 긴장과 이데올로기적 진동을 알레고리적으로 추적하는 비평가는 제임슨의 ‘강력한 다시 쓰기’를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총체성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이 책의 3장 「리얼리즘과 욕망」은 제임슨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발자크에 거의 ‘헌정’되었다. 리얼리즘, 특히 소시민적 일상과 사회 계급의 구조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 발자크의 다양한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제임슨은 이를 도식화하였다. ‘계급 알레고리ㆍ사회적인 것’은 ‘판타즘(가족 텍스트)’을 거쳐 ‘소망―성취 또는 백일몽(상상적 텍스트)’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재현(상징적 텍스트)’과 ‘이데올로기(상상적인 것의 공리)’는 “자본주의의 타락한 세계”에 정치적 무의식이 은닉된 공간이면서 한편 ‘소망―성취 또는 백일몽’이 유토피아적 미래의 지평을 여는 공간이기도 하다.22)「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라는 이 책의 부제는 이 연장선에 있다.
다만, 시를 쓰고 있고 가끔이나마 시에 대한 평론을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서 『정치적 무의식』에 시에 대한 논의가 빠진 것은 못내 서운하다. 시대가 복잡하고 처절할수록 시라는 형식에 내재한 정치적 무의식은 상대적으로 시인의 내면에서 역사적 뇌관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총체성보다는 파편화된 감각과 실험적 언어, 이미지 중시 등을 지향하는 찰나의 미학이다. 압축ㆍ상징ㆍ은유 중심의 세계을 제임슨의 구조 중심적 비평 틀에 입력하기는 역부족이었을 듯싶다. 하지만 시적 형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시에는 시인이 의식하지 못한 정치적 무의식이 세계의 총체성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여지가 서사에 못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시를 ‘매개’하기 위한 해석틀을 제임슨에게 요청할 수 없게 되었다. 제임슨은 1934년 4월 14일에 태어나 2024년 9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릴 즈음이면 그의 사후 1주기가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애도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옮긴이의 말」23)에 의하면, ‘정치적 무의식’은 언제부턴가 책 제목이면서 하나의 비평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프레드릭 제임슨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정치적 무의식』(1981)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1984)라는 긴 논문 때문이었다. 아마도 앞의 ‘빈 의자’의 구상은 여기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다. ‘옮긴이’는 미국이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그리고 매카시즘의 나라였다면서, 그런 와중에 제임슨이 사르트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마르크스주의 연구로 선회한 독특한 생의 여정을 짚어준다. 그가 다수의 이론가 그룹을 자양분으로 삼아 출간한 이 책은 우리에게서는 2015년에 번역되어 처음 소개되었다. 원문을 읽을 수 없던 많은 우리에게는 ‘정치적 무의식’ 개념이 아직 낯설 수밖에 없다. 자크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처음 소개되던 2008년 무렵에서 꽤 많은 시간이 흘러 그의 이론적 영향력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것처럼, 아마도 제임슨도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텍스트를 좇느라 평론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여건이 허락되어 뒤늦게라도 시 속의 ‘정치적 무의식’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계간《학산문학》 2025년 가을호
---------------
1) 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초기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너무 야만적이고 구성이 허술하다고 혹평했으나 이후에는 영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다.”(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는 구절이 있다. 브론테가 ‘엘리스 벨’이란 필명으로 이 책을 출간한 것은, ‘야만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란 세평에 대한 두려움을 단적으로 보여 주지만, 이는 역으로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 어땠는가를 상징적으로 반사한다.
2) 프레드릭 제임슨, 이경덕ㆍ서강목 옮김, 『정치적 무의식』, 민음사, 2015, 161쪽. 이 책에서 인용되는 글의 쪽수는 문장형의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문장 끝 괄호 안에 표기한다.
3)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61~162쪽.
4) 김종길, 「사라지지 않는 야성의 초상」, 『폭풍의 언덕』 작품 해설, 182쪽.
5)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62쪽. ‘유토피아’란 용어는 이 글에 여러 군데 나온다. 유토피아적 결말, 유토피아적 보상 체계, 유토피아적 충동, 유토피아적 징후, 유토피아적 미래의 지평 등. 변증법적 서사 구도에서 이데올로기의 봉합, 혹은 (프로이트적인) ‘꿈’의 형식으로의 해결과 관련된 제임슨적 의미이다.
6)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5~16쪽 요약.
7)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79쪽.
8)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9쪽.
9) 윌리엄 C. 도울링, 곽원석 옮김,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제임슨, 알튀세르, 마르크스』, 월인, 144쪽.
10) 애덤 로버츠, 곽상순 옮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앨피, 161쪽.
11)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20쪽.
12) 리얼리즘 문학은 “인식적인, 구도 짓는, 또는 거의 ‘과학적’인 전망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결합하는 서사 담론으로서, 전통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중심 모델이 되어 왔다.”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30쪽.
13) “문학상의 ‘등장인물’과 같은 전체 사회의 징표들과 요소들은 다른 층위에 있는 요소들의 ‘전형화’로, 특히 다양한 사회적 계급들과 계급 분파들에 대한 비유 형상들(figures)로 읽힌다. 그러나 철학적 입장이나 법적 기준에 대한 정통적인 ‘이데올로기 분석’이나 계급 측면에서의 국가 구조의 탈신비화와 같은 다른 종류의 분석에서도 알레고리적 독해가 일어나며, 여기에서는 계급 이해(class interest)의 개념이 상부 구조적 징후 또는 범주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토대의 현실 사이의 함수 또는 연결 고리를 제공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38~39쪽.
14) 카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진우 옮김, 『공산당 선언』, 책세상, 8쪽. 이 문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보편적 인식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말로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확증적이다.
15)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397쪽.
16)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367쪽.
17) 애덤 로버츠, 위의 책, 226쪽.
18) 제임슨은 알퀴세르 등을 따라 독일어 그대로 사용한다. 여기에서는 ‘제시’로 번역하되, 무대 위에 ‘상연’한다는 뜻을 살려 ‘제시/거기 세움’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원문의 각주 내용)
19)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14~15쪽.
20) 윌리엄 C. 도울링, 위의 책에서 용어 해설 부분임, 199쪽.
21) 윌리엄 C. 도울링, 199쪽.
22)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236쪽.
23) 프레드릭 제임슨, 위의 책, 395~396쪽 요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