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의 인간학적 원리＞/김미옥 서평.

[레몬타임]

* 김 미옥 작가 페북글입니다.

- 또 하나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군에서 의문사한 한 청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46년 전에 쓴 글이 책이 되어 내게로 왔다.
문득 폴란드의 장교였던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떠올린다.
소련군 수용소에서 매일 죽어나가던 폴란드 군인들은 저녁이면 모여서 재능기부 강의를 했다.

유제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밤이면 공부하고 낮이면 동료들이 시체로 실려나가는 상황에서 그들은 지식에 전념했다.
영하 45도의 어떤 온기도 없는 지하 감옥이었다.
처음 4천명이었다가 마지막 생존자는 79명이었고 유제프는 살아서 돌아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은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이라는 철학서다.
저자 현승효는 1950년에 태어나 1977년 28세의 나이로 군대에서 의문사했다.
경북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유신독재철폐운동을 하다 경북 대공 분실에서 심문을 받고
1974년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듬해 강제 징집되어 28세 제대를 4개월 앞두고 사망했다.

이 책은 그가 군대 복무기간 중 76년 4월에 시작하여 77년 5월까지 쓴 글이다.
책의 본문 첫 장부터 프로이트의 ‘투쟁적 존재’로서의 인간관과 칸트의 자유개념이 나와서 젊은 날의 지적 치기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계의 완전성이 나오면서 약간 심각해졌다.
예술사와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을 넘나드는 엄청난 독서의 편린들이 보였다.
처음에 나는 이 책에 없는 ‘한 청년의 독서기’로 참고문헌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곧 번득거리는 광기와 천재성이 뒤섞이며 사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극한상황에서 나오는 고도의 집중력에 덩달아 나도 날카로워졌다.
‘투쟁’하듯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단편적인 편린들이 자기만의 사유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헤겔의 변증법과 바이블의 자유의지와 마르크스, 불교 사상까지 망라되면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결론을 도출했다. 인류가 만들어야 하는 미래의 세상이었다.

천하무불핍출래적문장 (天下無不逼出來的文章)
하늘 아래 쫓기어 나오지 않은 명문이란 없다고 했던가!
그는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읽고 썼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의 제목을 쓰다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독서란 책을 읽고 사유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편집의 힘’을 느낀다.
청년은 자신이 읽은 책, 생각의 흐름, 사유의 과정 등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편집과정에서 가능한 초고를 건드리지 않으려 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중언부언으로 보였을 그 광기의 글을 정리한 것은 분명 편집의 힘이다.

저자 현승효가 사망하고 10권의 대학노트는 그의 연인이었던 여인에게 맡겨졌다.
이 여인은 애인의 죽음을 이해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노트를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여러 출판사를 두드렸다.
난해하고 산만한 노트를 보고 모두 난색을 표했다.

아무도 맡지 않으려 한 이 철학노트를 맡은 이가 대학 교수로 퇴직한 1인 출판사 대표 ‘도서출판 모임’의 홍승용이다.
44년 만에 출판사에 첫사랑의 원고를 맡긴 여인은 감동의 글을 수록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일기를 몇 편 공개했다.

그가 책을 보면 부대 동료들이 심한 욕설을 했다.
발이 시려 뛰면서 식기를 닦고 돌아오면 왕따에 모두의 머슴이었다.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은 정신 개조라는 명목 하에 구타 등 험한 대접을 받았다.
유신시대 무려 1만1000명 이상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977년 한해만 군인들이 1,471명 죽었으니 그는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한겨울 막사 모포를 널고 그 사이에서 그는 뱃속의 책을 꺼내어 7시간을 떨며 읽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모욕의 극한상황에 몰리면 어떤 이는 자신의 영혼에 집중한다.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의 글 속에 상황이 언뜻 언뜻 보여서 숨이 막혔다.

그의 연인이 쓴 글이다.
늘 꿈속에서 그는 눈도 뜨지 못하고 만신창이 몸에 입 속이 너덜너덜 헤어져 그녀가 떠주는 흰죽만 먹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출판 소식을 듣고 생전의 활달한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철학 전공자들의 수많은 거절을 받으면서도 한국에 나올 때마다 출판사를 두드린 그녀.
그녀의 첫사랑을 이해하고 늙어가는 아내에게 그의 책을 출판하라고 권유한 남편.
거절하다 결국 받아들이고 2년 동안 윤문하고 편집해서 책으로 낸 홍승용 대표

이런 이들이 있어 살만한 세상이다.
오늘 밤 꿈속에 청년 현승효가 나타날지 모르겠다.
그 곳에선 편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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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점에 없다.
나도 소문을 듣고 출판사에 전화해서 책을 구입했다.
<도서출판 모임> sala94@hanmail.net 010-8250-6033

연애시절 청년 현승효가 그의 연인을 위해 연주했다는 로망스
Romance
https://youtu.be/EFHNhnWWmnY

Romance 로망스 (가을동화 OST) 기타리스트 김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