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문자들의 세계
ㅡ박성현
두 개의 농담
사서들은 카이로 람세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목적지는 알렉산드리아 동쪽 해안 샤트비*, 문자로 이뤄진 국가가 그곳에 있다 세계의 공백이자 꿈이다 문자의 기원이란 사물들이 서로 겹쳐지며 접혔던 곳이다,라고 누군가 말한다: ‘알려지지 않은 문자들의 세계’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발표할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
상아를 가른 주름을 봐,
바람과 땅을 갈랐던 그 묵직한 ‘겹침’, ‘난파’, ‘혼돈’을
아니면
늙은 거북이들이 지껄인 ‘농담’을
검은 히잡 몇 명이 이방인의 낯선 냄새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한없이 가벼워진 웃음들이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는 부드러운 햇빛 속에 정체모를 백과사전 풍의 밤과 낮
백과사전 안쪽
백과사전은 사실과 멀어질 때
오히려 ‘사실’에 가장 가깝습니다
행간에 코끼리가 뛰어다닌다는 말이군
단단한 상아를 갖고 싶다면
코끼리를 죽여 머리를 잘라내야 해요
그렇긴 해도 메타포를 쓸 때는 조심해야 하네
칼은 목을 관통하지만 쉽게 부러지지
그리고 백야
사서들은 샤트비에서 두 개의 화살을 본다: 바닥과 바닥 또한 그 바닥에 겹쳐진 바닥이 서로 어긋나고 이어지는 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낡은 타자기 커피포트의 공백 그러므로 행간은 코끼리의 춤이자 무덤이며 사물의 무한이자 꿈이다
꿈꾸는 자의 오래된 관습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태양이 폭발할 때 떨어져나갔던 흑점들이 코끼리의 기원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코끼리가 갈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꿈꾸는 자의 오래된 관습이다 사서가 말한다; 그 네 발의 거인이 동쪽의 사원에 도착했을 때 허리에 뱀의 띠를 두르고, 쥐를 타고 있었다 시바와 파르바티**는 이 형상에게 가네샤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백 년 후 가네샤***는 자신의 기원을 찾아서 서쪽으로 간다
세미나: 붉은 여우의 달 1
당신은 붉은 여우의 눈빛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붉은 여우의 달’이라 부르겠습니다:
폭풍이 부는 우기에, 붉은 여우는 지중해 연안에 도착한다 이것은 시간의 증식이다 산 채로 살을 찢어 피를 나눠 마실 때도, 당신의 손과 혀는 당신과 당신을 엮고 가장 먼 당신을 부른다 이것은 시간의 증식이다 마실 때마다 징표가 씨줄과 날줄로 얽히며 당신의 몸을 파고든다 당신은 대륙이 빙하로 덮였을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일만 년 동안 당신은 그 동토를 노래한다 이것은 시간의 끝없는 증식이다 당신은 코끼리의 살과 뼈를 해체한다 당신은 유카리투스에서 불을 해체한다 이것은 시간의 증식, 그 외의 것은 아니다 당신은 들소에서 선線을 해체한다 어금니가 튼튼한 짐승에서 공포와 분노를 해체한다 시간은 증식한다 마침내 당신은 ‘사물’에서 사물에서 해체한다
모든 처녀들의 무덤
그러니까 혓바닥이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어제 산 토끼가 두 줄로 찢어졌어요
토끼는 우리가 기르는 식물성 벌레죠
달이 지중해에 빠졌을 때, 왕궁의 서쪽이 잿더미로 변한다 젊은 샤리아는 왕비를 잔인하게 죽이면서 모든 처녀들의 무덤을 생각한다 잔인한 계획에 어울리는, 아주 밝은 주황이어야 한다 무거운 북소리를 누르는 경쾌한 클라리넷 혹은 부드러운 비단에 감춰진 반달칼 같은 그것은 번식을 멈춘 말의 죽음이며 또한 죽음을 감싼 거대한 ‘울음’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날, 처녀들의 무덤에서 셰에라자드는 지상의 모든 말을 달콤하게 만들어버리는 혀를 얻는다 천사는 밤의 지하에서 살고 까마귀는 달을 일으킨다 주문이 맹렬하다면 마법은 완벽해진다 목관악기가 처녀들의 무덤 속에서 우는, 고요하고 참혹한 주제를 연주자들은 지금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세미나: 붉은 여우의 달 2
동굴 내부에 새겨진 암각에서, 붉은 여우의 달은 짐승을 쫓는 꿈을 꾼다 이것은 시간이 증식하는 방향이다 허벅지에 패인 상처를 만지다가 상처에서 거대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상처가 자라고 상처가 엉키고 상처가 길게 웃는다 이것은 시간이 증식하는 방향,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식은땀이 흥건한 채로 그는 서재로 간다 그곳에 문자들의 무덤이 있다
*
셰에라자드 주인은 이야기를 멈추고 목소리에 빠져버린 사서들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뫼비우스처럼 반복되는 문장이지만,문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 열린다 그때마다 헤시시에 취한 코끼리가 붉은 여우의 달을 찾는다 알렉산드리아의 긴 눈썹은 타오르기 직전이 가장 뜨겁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는 도시
** 9~13세기에 번영한 인도의 왕조. 파라바티는 시바 왕의 아내
***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키리 얼굴에 긴 코, 이빨은 하나, 팔은 넷이다. 군중의 지배자라는 뜻이 있다
/계간<열린시학> 2016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