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는 기계 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들이다. 제주 선사유물에 전복껍질을 가공한 칼, 화살촉 등이 발굴되고 있어 해녀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꾸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획득한 지혜를 세대에 걸쳐 전승해왔다. 또한 해녀들은 바다 생태환경에 적응하여 물질 기술과 해양 지식을 축적하였고, 수산물의 채취를 통하여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한 여성생태주의자(Eco-Feminist)들이라 할 수 있다. 반농반어의 전통생업과 강력한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남성과 더불어 사회경제와 가정경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성평등’의 한 모범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진출하여 제주경제영역을 확대한 개척자이다.
호흡장치 없이 바닷속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테왁망사리와 작살을 들고 물질을 나서는 해녀
일출과 함께 바다로 작업을 나서는 해녀들
제주의 해녀
제주의 해녀는 바다에 의지하여 전복이나 소라, 해삼, 천초, 톳 등을 채취하여 생업을 이끌어 가는 여성으로서 제주에서는 그녀들을 수, 녜, 잠수(潛嫂)라고 한다. 이들은 아마 제주사람들의 삶과 역사와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하는 일을 ‘물질’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들이 전복을 채취해 진상해 온 것으로 나와 있으며 1629년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해녀들이 전복을 채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이익태의 『지영록』, 위백규의 『존재전서』등의 여러 문헌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제주의 부녀자들은 남성 못지않게 부지런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여자아이들은 7~8세가 되면 물헤엄을 배우고 18세가 되면 물질 기량이 아주 뛰어나게 되고, 35세 정도가 되면 아주 능숙한 상군 해녀가 된다.
지금의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 [이형상, 『탐라순력도』, 병담범주, 1702.]
해녀는 15세 즈음 물질을 시작하여 70~80세가 넘어도 물질을 계속한다.
물질을 마치고 망사리 가득 해산물을 지고 나오는 해녀들
물질기술
물질기술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로 보통 8살부터 마을의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15세 무렵에 애기해녀가 된다. 신체적 조건으로 폐활량, 수압에 견디는 눈과 귀, 찬물에서 견딜 수 있는 능력 등이 필요하며 커다란 바다생물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는 담대함도 필요하다. 제주해녀들은 불턱에서 바다에서의 효과적인 체력 운용과 바다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선배 해녀들로부터 전수받으며 기량과 지혜를 확장해갔다.
오른손에 ‘빗창’을 쥐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해녀
테왁에 잠시 기대어 쉬던 해녀는 다시 깊은 바닷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숨비소리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잠수한 후 물 위로 나와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로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약 1분에서 2분가량 잠수하며 생긴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에서 ‘호오이 호오이’ 하는 소리가 난다. 해녀들은 ‘숨비소리’를 통해 빠른 시간 내에 신선한 공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짧은 휴식으로도 물질을 지속할 수 있다.
물 위로 나와 끝까지 참았던 숨을 내쉬는 해녀
자연에 대한 지식
자연에 대한 지식은 물때, 바람, 여, 채취물 등에 관해 습득하고 있는 해양 지식과 경험 등을 말한다. 해녀들은 마을 바닷속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흐름과 해양생물의 서식처를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계절에 따른 해양생물의 생육과정과 채취시기를 구별할 수 있다. 우뭇가사리의 경우 최상품을 채취하는 시기가 해마다 다르며 전복, 소라 등 패류를 캐는 시기도 산란기를 피하여 작업하고 있다. 이러한 해양 생태계에 대한 지식은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이 제주해녀들에게 꾸준히 전승되고 있다.
바다는 변화무쌍하여 바닷속을 가늠할 수 없다. 따라서 몸으로 체득된 바다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다.
해녀의 전통작업복
해녀의 전통작업복은 <물옷>이라 하는데 하의에 해당하는 <물소중이>와 상의에 해당하는 <물적삼>,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물수건>으로 이루어져있다. 물소중이는 면으로 제작되며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여 물속에서 활동하기 좋게 디자인 되었다. 그리고 옆트임이 있어 체형의 변화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신체를 드러내지 않고 갈아입을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속칭 <고무옷>이라고 하는 잠수복이 들어왔는데, 장시간의 작업과 능률 향상에 따른 소득 증대로 고무옷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해녀의 전통 작업복인 물소중이는 옆트임이 있어 임신을 하는 등 체형 변화에도 입을 수 있다.
해녀박물관 소장
전통 제주해녀의 물옷과 1970년대 보급된 고무옷
물질도구
물질도구로는 물안경, 테왁망사리, 빗창, 까꾸리 등이 있다. 물안경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보급되었으며 테왁은 부력을 이용한 작업도구로서 해녀들이 그 위에 가슴을 얹고 작업장으로 이동할 때 사용한다. 테왁에는 망사리가 부착되어 있어 채취한 수산물을 넣어둔다. 빗창은 전복을 떼어내는 데 쓰이는 철제 도구이며 까꾸리는 바위틈의 해산물을 채취할 때나 물속에서 돌멩이를 뒤집을 때, 물밑을 헤집고 다닐 때, 바위에 걸고 몸을 앞으로 당길 때 등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물질도구이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2008년,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15점을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하였다.
현대의 제주해녀들은 재질이 바뀌었을 뿐 예전 해녀들이 쓰는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빗창’은 바위에 붙은 전복을 떼어낼 때 쓰는 중요한 도구이다.
스펀지 형태의 고무옷은 부력이 있어 납덩이(연철)를 몸에 매달아야 물에 들어갈 수 있다.
불턱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 휴식하는 장소이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싼 형태로 가운데 불을 피워 몸을 덥혔다. 이 곳에서 물질에 대한 지식, 물질 요령, 바다밭의 위치 파악 등 물질 작업에 대한 정보 및 기술을 전수하고 습득하며 해녀 간 상호협조를 재확인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해안에는 마을마다 3~4개씩의 불턱이 있었으며 현재도 70여개의 불턱이 남아있다. 1985년을 전후하여 해녀보호 차원에서 마을마다 현대식 탈의장을 설치하였는데 개량 잠수복인 고무옷의 보급에 따라 온수목욕시설이 갖추어진 탈의장은 필수 시설이 되었으며 불턱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탈의장에 모여앉아 몸을 녹이는 해녀들
출가해녀
출가해녀는 19세기 말부터 제주를 떠나 국내의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와 해외로 출가물질을 나간 해녀를 일컫는다. 제주해녀들이 섬이나 먼 바다 어장으로 이동할 때 노를 저으며 불렀던 ‘노 젓는 소리’를 총칭하여 해녀노래라 한다. 해녀들은 바다 작업장을 오갈 때 직접 노를 저었는데 흥을 돋우기 위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을 즉흥 사설로 엮어 노래하였다. 해녀집단 공동체의 정서와 인식이 잘 표출되고 있어 구비 전승되고 있다. 해녀노래는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 출가해녀 진출지와 해녀의 수 (1937 기준)
한반도
전라
남도
전라
북도
경상
남도
경상
북도
충청
남도
강원도
함경
남도
함경
북도
황해도
합계
493
18
1869
473
110
54
32
5
50
2301
일본
쓰시마
고치
가고
시마
도쿄
나가
사키
시즈
오카
지바
에히메
도쿠
시마
합계
750
190
55
215
65
295
51
19
50
1891
해녀공동체
바다밭의 관리와 마을어장 규약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로 정해놓고 운영하고 있다.제주도에는 수산업협동조합에 소속된 마을 단위의 어촌계가 100개 있는데 해녀들은 어장을 ‘바다밭’이라고 한다. 각 어촌계는 어장의 경계, 해산물의 채취자격, 해산물 종류에 따른 채취방법과 채취기간 및 금채기간 등 제주해녀의 물질관행을 마을, 어촌계, 해녀회 단위의 규약으로 정해놓고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다.
물질작업은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다. 함부로 바다에 뛰어들어 혼자서 물질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정해 놓은 규약과 법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 또 물질할 때는 역시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동으로 위험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해녀들은 그 집단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미 구한말부터 '계'의 형태로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출가해녀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어업공동체가 조직되었다.
해녀들은 끈끈한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녀고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해녀들의 작업은 공동으로 이루어지며 같이 준비하여 바다로 나선다.
신앙
해신당은 해녀들이 물질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장소로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잠수굿과 요왕굿은 해녀들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위해 치러지는 굿이다. 그 중 음력 3월 8일에 동김녕리에서 진행되는 잠수굿은 해녀공동체를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의례이며 축제이다. 해녀들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제물을 준비하고 굿을 하는, 생업과 의례가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준다. 의례과정에서 <요왕맞이>는 바다를 관장하는 요왕(龍王)을 맞아들여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는 제차이며, <씨드림>은 해녀들의 채취물인 전복, 소라, 우뭇가사리, 톳 등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좁씨를 바닷가에 뿌리는 의례이다.
해녀와 어부들이 풍어와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돈짓당
배방선
해녀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김녕리 잠수굿에서 심방(무당)이 쌀을 던져 점을 보는 모습
사회 공익에 대한 헌신과 참여
제주해녀들은 예전부터 물질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안길을 정비하거나 학교건물을 신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바다의 한 구역을 정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 전액을 마을일에 수고하는 이장에게 주는 ‘이장바당’,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육성회비를 충당해주는 ‘학교바당’ 등도 있었다.
1950년 화재로 전 교실이 소실된 성산읍 온평리 해녀들은 마을의 한쪽 바다를 ‘학교바당’으로 삼아 미역을 채취한 수입금 전부를 학교건립자금을 헌납하여 1951~1958년에 걸쳐 학교를 재건하였다.
이후 학교 기성회에서는 1961년 온평초등학교에 공로비를 세워 해녀들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해녀들이 ‘학교바당’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재건한 온평초등학교 건물(1957년)
해녀전설
모슬포에 한 해녀가 있었는데 아직 마마를 겪지 않은 사람이었다. 금로포를 지나가다가 바다거북 하나를 발견했다. 물이 말라있는 곳에 있어 이를 불쌍히 여기고 그것을 바닷물에다 놓아주었다. 거북은 유연하게 헤엄쳐가면서 마치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양을 했다.
후에 용두암에서 전복을 따는데 빛이 반짝거려 고개를 들자 보석 빛이 찬란한 가운데 한 노파가 있었다. 나를 반가이 맞으며 고맙다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아들을 살려주어서 그 은혜에 감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꽃 한 송이를 꺾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마마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물에서 나와 그것을 보았더니 바로 산호꽃이었다. 이후 늙어죽을 때까지 마마에 걸리지 않고 효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