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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쓰레기 치우기
마태복음 23:23~36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마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제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여동생은 아이를 낳게 되자 자연스레 시부모를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시부모님의 성격은 너그러운 분으로 시집살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해치 못하는 문제가 시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실 때마다 반드시 손에 무언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부러진 상, 그리고 고장 난 선풍기 등 그 외에 아무 쓸모없어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주어다 지하 창고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주유소에서 쓰다 버린 바람개비를 주워 정원에 설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분의 지하창고는 옛날에 사용한 다이얼식 전화기부터 떨어진 문짝 등이 한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돈어른을 만나 왜 그렇게 쓸모없는 것을 주워 오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저것들이 말은 못하고 표현을 하지 않아 그렇지 버림을 받은 것이 얼마나 서글펐겠어요! 내가 주어다 고칠 것은 고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보관을 해주면 저들이 고마워하지 않겠어요?” 그러는 겁니다.
물건을 사람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집안에서 쓰다 버릴 것이 있어 버리면 난리를 치신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는데 그것을 왜 버리냐고 말입니다. 그 분이 세상을 떠나신 후 그것을 치우는데 5톤짜리 차로 두 트럭에 실어 버린 서글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내면에 쌓여 있는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아 인생을 어둡게 사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한 분은 40대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하고 두 딸과 함께 지내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에게 특이한 버릇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비련’ 이라는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면서 한없이 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고 있어요. 제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말입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런 슬픔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참 많아 있어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분은 비오는 날의 자기 모습을 객관화하여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의 수채화처럼, 또는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과 동일시하여 스스로 멋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담겨 있는 슬픔과 다양한 감상(感傷)들을 나름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고 떠나보내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도 그런 것을 품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럴 듯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쓰레기인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분의 생명이 내 안에 자라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스르고 방해하는 것이 내면에 숨겨진 쓰레기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치명적인 단점은 그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위선자’, ‘눈 먼 인도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에서 그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자처하는 부류입니다. 그들의 명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졌다는 의미의 ‘바리새’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는 일반 대중들에 대한 반감(反感)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세리나 창녀들이 스쳐 지나가거나 함께 자리를 했을 경우에는 그 더러움이 옮겨올지 모른다고 몸을 씻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을 향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주님은 책망하셨을까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저들의 내면에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상16:7절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내면에 담겨 있는 됨됨이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오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악하고 추한 쓰레기 같은 것을 보시고 역겨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분노하시면서 꾸짖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께 대하여 온전한 믿음을 거부하고 자기 의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2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꼼꼼히 장부를 기입하고 정확한 계산으로 동전 하나까지 세어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표현이 있습니다. 24절에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왜 십일조를 드리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십일조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과 그 분의 입에서 나온 율법임을 믿었기에 율법에 기록한대로 순종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에 따른 응답으로 나타나는 자비에 대하여는 전혀 기대하거나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신앙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거나 헌신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대하심에 대하여 전혀 기대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나름 cool한 신앙이라고 대견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내가 순종하여 행한 것에 하나님께서 주목(注目)하시고 상 주심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명령을 따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드린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 사람의 믿음은 반쪽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환경을 통하여 믿음의 결실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것이 더욱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면, 뿌린 것 보다 더 후히 되어 안기어 주는 것이 긍휼 아닙니까? 이것을 바라는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체험할 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온전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자기의 행함에 대하여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명령대로 십일조를 드렸다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행하였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 생활 속에 풍성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살지 않냐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모습을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합니까? 또한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짐을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 분으로부터 나의 모든 쓸 것을 공급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쌓을 것이 없도록 평생 쏟아 부어주시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행하였으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응답하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으로 행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응답하셨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의롭고 하나님을 불의하다는 의식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항상 병행해야 우리의 신앙이 복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의 헌신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내면과 외적인 부분이 일치가 되지 않아 외식을 하고 있다면 처리해야 할 부분입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영어로는 ‘saint’ 라고 하는데 이는 가톨릭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성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고결하고 삶이 덕스러울 뿐 아니라, 순교를 당하거나 또는 그를 통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인정될 때, 교황청의 심사를 거쳐 성인의 칭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헬라어로 ‘하기오스’ ‘하나님께 부름 받은 구별된 사람’이란 뜻인 성도를 사용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헌신되었다는 점에서 성도 즉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며 그 분을 믿는 믿음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볼까요? 나의 말과 행실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 안의 속사람은 여전히 ‘탐욕과 방탕’으로 쌓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사람 앞에서 거룩한 척 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하나는 영어는 혀를 굴리면서 해야 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어수업 시간에 그 친구가 영어를 읽는데 웃음을 참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You are a girl, I am a boy’라고 읽는데 억지로 혀를 말려 읽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영어에 ‘preten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 …인 체하다, …같이 꾸미다, 가장하다’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 위선의 모습을 꾸미면서까지 거룩한 척 하지 마세요. 그런데 우리 내면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목사답게, 장로답게, 집사답게 라는 명칭에 걸맞게 내면과는 달리 겉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내면에 담겨 있는 것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식할 이유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꾸미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처리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 번째는 더럽고 추한 사망의 잔재를 꾸짖으셨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하나님을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의 해석과 가르침은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율법에는 정죄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을 순종하고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게 되면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의인 인체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죽음의 형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편적으로 신앙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적당한 신앙을 가지려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부담 없는 헌금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봉사도 하면서 이정도 하면 구원받아 천국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합니다. 믿음의 진보에 대하여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나를 향한 결론을 어떻게 내리실지에 대하여는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또 하나의 모습은 교회가 정한 법도를 잘 지키고 목회자의 말에 순응하는 것을 귀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상처를 받거나 불쾌한 감정을 지닌 것에 대하여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그 안에 독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33절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했습니다. 내 안에 악한 독성이 있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자극을 주고 무시를 하게 되면 내 안에서 불끈거리며 올라오는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교인 중에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고, 여전도회 회장을 맡아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남편이 젊어서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하여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억력이 뛰어나셨던 그 분이 가만히 앉아 한숨을 쉬시는 것은 상처받았던 그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마음이 몹시 상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그대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정의는 상대의 불의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처가 버려야 할 내면의 쓰레기라는 사실과 이것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에 대하여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안고 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이런 감정의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고 하늘의 속한 거룩한 성도로 변화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까요?
사람의 힘으로는 내 안에 담겨 있는 더럽고 추한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보증으로 우리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하셨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을 때 하나님의 속사정까지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성령의 조명으로 내 안에 쓰레기들을 깨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줄곧 리더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 저는 명예와 전혀 상관없는 낮은 자가 되었습니다. 제 내면에 높고자 하는 마음이 지배적으로 있었는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랜 세월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 기도하다 성령의 터치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이 내게 다가 온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런 사소한 섭섭한 마음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심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를 사로잡으니 길을 걸어가도 앉아도 수없이 저의 교만을 회개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내 안에 냄새를 풍기며 깃들여 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워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낮아진 자리에서 섭섭하고, 처량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게 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이것이 큰 죄처럼 여겨져 이런 마음이 떠나갈 때까지 회개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안에 깃들여 있는 쓰레기를 불태워 없애주는 소각장 역할을 합니다.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상상하고 그 밑에 나의 쓰레기를 내려 놓아보십시오! 소멸하는 성령의 불이 임하여 불태워지게 하고 그 자리에 성령의 거룩함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쓸모없는 쓰레기를 점검하여 보십시오! 온전한 믿음을 쫓는 것이 아닌 나의 의를 앞세우고 있습니까? 또한 속사람의 거룩함 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할지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겨 위선적이 모습을 가지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는 나의 마음이 정당하다고 여겨 사망의 권세를 인정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처리해야 될 쓰레기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앞에서 내놓고 회개하여 정함을 받으셔서 내 안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하늘의 속한 생명체가 누리는 무한한 축복의 세계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첫댓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쓰레기,
그리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본문내용에 십일조에 관련한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십일조를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번 한달도 별탈없이 지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라고 여기며 월급이 들어오면 십일조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다른 지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십일조가 아쉽게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임을 알면서도요.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바로 제가 겉은 꾸미려는 욕심과 이 세상에서 예쁘다고 하는 것들을 치장하려는 욕심이 들어올때입니다.
여행을 가고, 더 맛있는것을 먹고,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자 할때 그 금액이 커보이는 겁니다
(물론 빠른 회개를...)
세상속에 물질을 이용해 살아가기에, 우리는 완전히 그것들을 끊어낼수는 없다는걸 압니다.
대신 끊임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잡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르고, 이 세상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만들어주신 이 만물들을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며, 언제나 그 위대함과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과정이 우리의 삶속에 있어야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 세상의 모든것을 등지는 삶은 어리석은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축복과 같은 삶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었고,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중심에 두고 겉을 치장하는데 힘쓰는 것이 제 마음속 내면의 쓰레기였던것도 깨닫게 됩니다.
목사님이 하신 말씀처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는 자녀가 되었다면 나의 말과 행실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야하는데, 여전히 탐욕과 방탕이 내속에 차있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십일조를 하며 은혜받은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구와 그 욕구를 느끼는 의미를 고민하게 된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전과 다르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저 욕구에 충실하여 먹고 싶으면 먹고, 사고 싶으면 사고,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며 받은 은혜이고 사랑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가지다보면 그런 소비욕구가 들지 않게 되기도 하고, 충동적인 소비를 막아주시니 제 삶에 눈에 보이는 풍성함을 주십니다.더 적은 소비를 하고도, 더 행복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저는 3교대근무를 하면서 몸의 리듬이 바뀌고, 늘 피곤하고, 그러면서 감정기복이 참 심했습니다. 제 직업군중에는 수면제를 복용하거나, 우울증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몸에 정해주신 리듬을 거슬러 살기때문에, 그런일도 생기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일도 있습니다.
쉬는날이 불규칙하여 많은 사람들과 만날수는 없었으나, 휴가가 아니어도 쉬는날을 몰아서 3~4일정도 여행도 다녀오고 그 여행에서 자연속에서 위안을 얻었지요.
지금 신앙적인 생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제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끔 항상 위안을 주셨던것 같습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조금 여유로운 날도 주셔서 이 일을 할만하게 하시고, 여행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신것도, 또 그여행에서 힐링하고, 또 다시 일할 에너지를 얻은 것도요. 하나님을 믿고 되돌아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으니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고, 그것 또한 저에 대한 사랑이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 또 달라진 점은, 감정기복이 이전처럼 심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가라앉을때는 한없이 가라앉고, 신날때는 한없이 신나는 그런 리듬이 아니라, 조금 잔잔해진 감정리듬을 유지하게 된것이지요. 말씀의 힘으로, 제게 닥치는 힘듦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신것이지요.
아직 미숙하여 갈길이 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제 중심에 거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온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묵상하며 좋은 시간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과 현재의 나와 견주어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그 말씀이 내 안에 정착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adoption 이라고 하지요.
두 단어의 개념이 비슷한 것 같지만 쉽게 표현하자면 적용이 외적인 부분에 대하여 일컫는 것이라면 정착은 내면에 말씀이 와 닿아 그 말씀의 능력을 실제화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영자매의 댓글에서 이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사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수없는 갈등을 겪으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겠지요.
그런데 말씀을 정착하여 내 생활의 규모를 살피고 겉으로 나타는 것을 절제하며 내면의 세계를 아름답게 하는데 치중한다는 고백이 신선하게 와 닿았습니다.
또한 감정기복의 내면을 “말씀의 힘으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신 것이지요.”라는 표현은 참 멋지게 와 닿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