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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도키전에게 편지를 이렇게 계속하신다.
“또 가로되 ‘그 복이 또한 그보다 더함’ 묘락(妙樂) 가로되 ‘만약 뇌란(惱亂)하는 자는
머리가 칠분(七分)으로 깨어지고, 공양하는 일이 있는 자는 복이 십호(十號)보다 더함’
전교(傳敎)대사도 ‘찬자(讚者)는 복을 안명(安明)같이 쌓고, 방자(謗者)는
죄를 무간(無間)으로 연다’
등 운운.”(어서 978쪽)
또한 “(석존에게 일겁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무수한 언어로 칭찬하는 것보다도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을
칭찬하는) 그 복덕이 뛰어나다”라고. 묘락대사는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면 머리가 일곱으로 깨지고, 공양하는 자는
열가지 존칭을 갖는 부처의 몸을 공양하는 것보다도
커다란 복덕을 얻는다”라고. 전교대사도 “찬탄하는 자는 복덕을 수미산처럼
크게 쌓고, 비방하는 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죄를 짓는다”라고.
묘락대사의 말은 어본존 좌우의 상부(上部)에도 도현돼 있다.칭찬하는) 그 복덕이 뛰어나다”라고. 묘락대사는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면 머리가 일곱으로 깨지고, 공양하는 자는
열가지 존칭을 갖는 부처의 몸을 공양하는 것보다도
커다란 복덕을 얻는다”라고. 전교대사도 “찬탄하는 자는 복덕을 수미산처럼
크게 쌓고, 비방하는 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죄를 짓는다”라고.
묘락대사의 말은 어본존 좌우의 상부(上部)에도 도현돼 있다.묻건대, 당신의 제자(弟子)로서 일분(一分)의 해득(解得)도 없이 다만 한 마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그 위(位)는 어떠하오. 답(答)하되 이 사람은 다만 사미삼교(四味三敎)의 극위(極位)와 이전(爾前)의 원인(圓人)보다 초과(超過)할 뿐 아니라, 혹(或)은 또한 진언(眞言) 등(等)의 제종(諸宗)의 원조(元祖)·외(畏)·엄(嚴)·은(恩)·장(藏)·선(宣)·마(摩)·도(導) 등(等)보다 수승(殊勝)함이 백천만억배(百千萬億培)이니라. 청(請)컨대 국중(國中)의 제인(諸人)들이여, 나의 말제(末弟)들을 경시(輕視)하지 말지어다. 나아가서 과거(過去)를 살피건대 팔십만억겁(八十萬億劫)에 공양(供養)한 대보살(大菩薩)이니, 어찌 희련일항(熙連一恒)의 자(者)가 아니리오, 물러서서 미래(未來)를 논(論)하건대, 팔십년(八十年)의 보시(布施)를 초과(超過)하고 오십(五十)의 공덕(功德)을 갖춤이라, 천자(天子)가 강보(襁褓)에 싸여 있고, 대룡(大龍)이 처음 출생한 것과 같으니 멸여(蔑如)하지 말지어다, 멸여(蔑如)하지 말지어다. 묘락(妙樂)이 가로되 「만약(萬若) 뇌란(惱亂)하는 자(者)는 두칠분(頭七分)으로 깨지고 공양(供養)함이 있는 자(者)는 복십호(福十號)보다 더함」이라고. 우타연왕(優陀延王)은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를 멸여(蔑如)하여 칠년내(七年內)에 몸을 상실(喪失)하였고, 소슈(相州)는 니치렌(日蓮)을 유죄(流罪)하여 백일내(百日內)에 병란(兵亂)을 당하였느니라. 경(經)에 가로되 「만약(萬若) 또 이 경전(經典)을 수지(受持)한 자(者)를 보고 그 과악(過惡)을 들춰 내리라. 혹(或)은 사실(事實)이거나 혹(或)은 사실(事實)이 아니거나 이 사람은 현세(現世)에 백라병(白癩病)을 얻으리라, 내지(乃至) 여러 가지의 악중병(惡重病)이 있으리라」 또 가로되 「마땅히 세세(世世)에 눈이 없으리라」 등(等) 운운(云云). 묘신(明心)과 엔치(圓智)는 현실(現實)에 백라(白癩)를 얻었고, 도아미(道阿彌)는 무안(無眼)의 자(者)로 되었다. 국중(國中)의 역병(疫病)은 두파칠분(頭破七分)이니, 벌(罰)을 가지고 덕(德)을 짐작하건대, 나의 문인(門人)들은 복과십호(福過十號)는 의심(疑心)없는 것이니라.
사신오품초 四信五品抄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 341~2쪽 별칭 : 本代法華行者 位並操心事부처가 기록(記錄)하여 가로되 「나의 멸후(滅後)·정상二천년(正像二千年)이 지나서 말법(末法)의 초(初)에 이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인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만을 홍통(弘通)하는 자(者)가 출래(出來)하리라, 법화경(法華經) 제팔(第八)·다라니품(陀羅尼品)에 가로되 「그대들 단지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 문(文)의 의(意)는 부처가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함을 칭찬하여 그대들이 법화(法華)의 수제(首題)를 갖는 사람을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하는 그 공덕(功德)은 삼세요달(三世了達)의 부처의 지혜(智慧)도 역시 미치기 어렵다고 설(說)하셨느니라. 불지(佛智)가 미치지 않는 일이 무엇이 있으리요마는 법화(法華)의 제명(題名)을 수지(受持)하는 공덕(功德)만은 이를 모른다고 말했느니라. 법화일부(法華一部)의 공덕(功德)은 오직 묘법(妙法) 등(等)의 오자(五字)속에 들어 있느니라.제목 : 십악(十惡)과 십선(十善)
대성인께서는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에 「십악(十惡)이란 신(身)에 삼(三), 구(口)에 사(四), 의(意)에 삼(三)이니라. 신(身)에 삼(三)이란, 살(殺) · 도(盜) · 음(淫), 구(口)에 사(四)란 망어(妄語) · 기어(綺語) · 악구(惡口) · 양설(兩舌), 의(意)에 삼(三)이란 탐(貪) · 진(瞋) · 치(癡), 이를 십악(十惡)이라 하느니라」(어서 447쪽)라고 십악(十惡)을 교시하셨으며, 이 십악(十惡)을 범하지 않는 것을 십선(十善)이라고 합니다.
대성인께서는 어서의 많은 곳에서 문하에게 십악(十惡)을 말씀하시며 훈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성인님의 대백법(大白法)을 신행하는 우리들도 이 십악(十惡)으로 악업을 쌓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대성인께서 교시하시는 십악(十惡)의 본질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자신을 잘못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정직(正直)히 잘못된 가르침, 방법(謗法)을 버리고 오직 대어본존(大御本尊)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러 가면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 지배당한 생명이 妙法蓮華經의 역용으로 부처님과 똑같은 훌륭한 생명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성인님의 가르침을 믿고 제목을 부르며 자행화타(自行化他)의 신심에 면려해나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최선이자 최고의 방도가 됨을 깨닫고, 한층 더 정진해 나아갑시다.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구할 수 있는 비법과 비책과 힘을 가진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경지명합 함개상응 감응도교로 하나되어 본인묘의 즉신성불의 남묘호렌게쿄 창제근본으로 여여래공숙하면서 시시로 성도하고 시시로 현본하면서 24시간 내내 환희 중의 대환희의 위대한 불계의 생명상태를 유지하면서 어유명대로의 입정안국의 세계광선유포를 말법만년진미래제에 걸쳐서 실현해나갈 인류의 구원자들이자 지용보살들이자 본불들임을 확신하고 보무도 당당히 정진해나가십시다.
감사합니다.등우법우지사(等雨法雨之事) 말씀에 가로되, 이 때는 묘법실상(妙法實相)의 법우(法雨)는 십계삼천(十界三千)·하(下)는 지옥(地獄)·상(上)은 비상(非想) 비비상(非非想)까지 횡(橫)으로 시방(十方)·종(縱)으로 삼세(三世)에 걸쳐서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을 내린다는 것을 등(等)이라고 하느니라. 그런데 내린다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색심(色心)·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삼세상주(三世常住) 내리느니라 운운(云云). 일의(一義)에 가로되, 이 묘법(妙法)의 비는 구식본법(九識本法)의 법체(法體)이니라. 그런데 일불현전(一佛現前)하여 설(說)하시는 바의 묘법(妙法)이므로 법(法)의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내리게 한다고 함은 상(上)으로부터 하(下)로 내리는 것을 말하느니라. 따라서 종과향인(從果向因)의 의(義)이니라. 부처의 입장에선 제십(第十)의 불과(佛果)로부터 구계(九界)에 내리게 하고 법체(法體)로서는 내리는 곳도 내리게 하는 곳도 진여(眞如)의 일리(一理)요, 식분(識分)으로는 팔식(八識)에 내려 아래로 흘러간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제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정상(頂上)에 내리게 하는 것을 법(法)의 비를 내리게 한다 라고 말하느니라 운운(云云).
어강문서(御講聞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828~9쪽
여종기국래(如從飢國來) 홀우대왕선지사(忽遇大王饍之事) 말씀에 가로되, 이 문(文)은 중근(中根)의 사대성문(四大聲聞)이 법화(法華)에 내지(來至)한 것. 비유(譬喩)컨대, 굶주린 나라로부터 와서 대왕(大王)의 수라상을 만남과 같은 환희(歡喜)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文)과 같다면 법화이전(法華已前)의 사람은 아귀계(餓鬼界)의 중생(衆生)이라, 이미 기국래(飢國來)라고 설(說)했으며 대왕선(大王饍)이란 제호미(醍醐味)이니라, 중근(中根)의 성문(聲聞)·법화(法華)에 내지(來至)하여 일승제호(一乘醍醐)의 법미(法味)를 얻어 홀연(忽然)히 법왕(法王)의 위(位)를 갖추었다. 홀(忽)의 자(字)는 이전(爾前)의 우회도(迂廻道)의 기(機)에 상대(相對)하여 홀(忽)이라고 하며, 속질돈성(速疾頓成)의 의(義)를 홀(忽)이라고 말하느니라.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가 있어도·금신(今身)으로부터 불신(佛身)에 이르기까지의 수지(受持)를 받지 않는다면 성불(成佛)은 있을 수 없느니라. 교(敎)란 이전무득도(爾前無得道)·법화성불(法華成佛)을 말하느니라. 이 교(敎)를 받지 않는다면 법화경(法華經)을 독송(讀誦)한다 해도 결코 대왕(大王)의 위(位)에 올라갈 수 없는 것이며, 제호(醍醐)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니라 운운(云云).
어강문서(御講聞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829쪽본과묘(本果妙)는 연아실성불이래(然我實成佛已來) 역시 적문(迹門)이며, 적(迹)의 본(本)은 본(本)이 아니니라. 본인묘(本因妙)는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 진실(眞實)의 본문(本門)이며, 본(本)의 적(迹)은 적(迹)이 아니로다 운운(云云), 나의 내증(內證)의 수량품(壽量品)은 적화(迹化)도 모른다 운운(云云), 중위비장(重位秘藏)의 의(義)이며 본적(本迹)으로 분별(分別)하는 이상은 승렬(勝劣)은 치정(治定)이라 해도 말대(末代)에는 알기 어려운 고(故)로 운운(云云).
구원(久遠) 종과향인(從果向因)의 본적(本迹) 본과묘(本果妙)는 석가불(釋迦佛)·본인묘(本因妙)는 상행보살(上行菩薩)·구원(久遠)의 묘법(妙法)은 과(果)·금일(今日)의 수량품(壽量品)은 화(花)인 고(故)로 종과향인(從果向因)의 본적(本迹)이라고 하느니라.
본인(本因)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본적(本迹) 전(全)혀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은 묘법(妙法)은 본(本)·부르는 니치렌(日蓮)은 적(迹)이니라, 본보기로는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이십사자(二十四字) 이것이니라, 또 그 행의(行儀)가 이것이니라 운운(云云).
말법(末法) 시각(時刻)의 홍통(弘通)의 본적(本迹) 본인묘(本因妙)를 본(本)으로 하고 금일(今日) 수량(壽量)의 탈익(脫益)을 적(迹)으로 하느니라, 구원(久遠)의 석존(釋尊)의 수행(修行)과 지금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과는 개자(芥子)만큼도 다르지 않은 승렬(勝劣)이니라 운운(云云).
본문(本門) 수행(修行)의 본적(本迹) 정상이천년(正像二千年)의 수행(修行)은 적문(迹門)이며, 말법(末法)의 수행(修行)은 본문(本門)이니라, 또 중간(中間) 금일(今日)의 부처의 수행(修行)보다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은 뛰어난 것이니라.본문(本門) 수행(修行)의 본적(本迹) 정상이천년(正像二千年)의 수행(修行)은 적문(迹門)이며, 말법(末法)의 수행(修行)은 본문(本門)이니라, 또 중간(中間) 금일(今日)의 부처의 수행(修行)보다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은 뛰어난 것이니라.
본문(本門) 오대존(五大尊)의 본적(本迹) 구원본과(久遠本果)의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는 본(本)이며, 상행(上行) 등(等)의 사보살(四菩薩)은 적(迹)이니라.
니치렌(日蓮) 본문홍통(本門弘通)의 본적(本迹) 본인묘(本因妙)는 본(本)이고,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는 적(迹)이니라 운운(云云).
백육개초 百六箇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863~4쪽 별칭 : 血脈抄.본과묘(本果妙)는 연아실성불이래(然我實成佛已來) 역시 적문(迹門)이며, 적(迹)의 본(本)은 본(本)이 아니니라. 본인묘(本因妙)는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 진실(眞實)의 본문(本門)이며, 본(本)의 적(迹)은 적(迹)이 아니로다 운운(云云), 나의 내증(內證)의 수량품(壽量品)은 적화(迹化)도 모른다 운운(云云), 중위비장(重位秘藏)의 의(義)이며 본적(本迹)으로 분별(分別)하는 이상은 승렬(勝劣)은 치정(治定)이라 해도 말대(末代)에는 알기 어려운 고(故)로 운운(云云).
구원(久遠) 종과향인(從果向因)의 본적(本迹) 본과묘(本果妙)는 석가불(釋迦佛)·본인묘(本因妙)는 상행보살(上行菩薩)·구원(久遠)의 묘법(妙法)은 과(果)·금일(今日)의 수량품(壽量品)은 화(花)인 고(故)로 종과향인(從果向因)의 본적(本迹)이라고 하느니라.
본인(本因)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본적(本迹) 전(全)혀 여행(餘行)에 걸치지 않은 묘법(妙法)은 본(本)·부르는 니치렌(日蓮)은 적(迹)이니라, 본보기로는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이십사자(二十四字) 이것이니라, 또 그 행의(行儀)가 이것이니라 운운(云云).
부도여행(不渡餘行) 법화경(法華經)의 본적(本迹) 의리(義理) 상(上)과 같음·직달(直達)의 법화(法華)는 본문(本門)·부르는 석가(釋迦)는 적(迹)이니라, 지금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은 구원명자(久遠名字)의 행위(行爲)에 개자(芥子)만큼도 어긋나지 않느니라.
하종(下種)의 법화경(法華經) 교주(敎主)의 본적(本迹) 자수용신(自受用身)은 본(本)·상행(上行) 니치렌(日蓮)은 적(迹)이니라. 우리들의 내증(內證)의 수량품(壽量品)이란 탈익(脫益) 수량(壽量)의 문저(文底)의 본인묘(本因妙)의 일이며, 그 교주(敎主)는 본인이니라.
하종(下種)의 금차삼계(今此三界)의 주(主)의 본적(本迹) 구원원시(久遠元始)의 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尊)은 니치렌(日蓮)이니라, 구원(久遠)은 본(本)·금일(今日)은 적(迹)이니라, 삼세상주(三世常住)의 니치렌(日蓮)은 명자(名字)의 이생(利生)이니라.
하종(下種) 득법관심(得法觀心)의 본적(本迹) 구원하종(久遠下種)의 득법(得法)은 본(本)이니라. 금일(今日) 중간(中間) 등(等)의 득법관심(得法觀心)은 적(迹)이니라,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의 명자(名字) 초수희(初隨喜)의 문(文)과 같다 운운(云云).
하종(下種) 자해불승(自解佛乘)의 본적(本迹) 명자(名字)의 묘법(妙法)을 상행(上行) 소전(所傳)이라 들을 수 있는 쪽은 자해불승(自解佛乘)의 본(本)이며, 듣게 된 후(後)에 수지(受持)하는 우리들은 적(迹)이니라. 고(故)로 전교(傳敎)보다 니치렌(日蓮)은 뛰어났느니라 운운(云云).
말법(末法) 시각(時刻)의 홍통(弘通)의 본적(本迹) 본인묘(本因妙)를 본(本)으로 하고 금일(今日) 수량(壽量)의 탈익(脫益)을 적(迹)으로 하느니라, 구원(久遠)의 석존(釋尊)의 수행(修行)과 지금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과는 개자(芥子)만큼도 다르지 않은 승렬(勝劣)이니라 운운(云云).
본문(本門) 수행(修行)의 본적(本迹) 정상이천년(正像二千年)의 수행(修行)은 적문(迹門)이며, 말법(末法)의 수행(修行)은 본문(本門)이니라, 또 중간(中間) 금일(今日)의 부처의 수행(修行)보다 니치렌(日蓮)의 수행(修行)은 뛰어난 것이니라.
본문(本門) 오대존(五大尊)의 본적(本迹) 구원본과(久遠本果)의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는 본(本)이며, 상행(上行) 등(等)의 사보살(四菩薩)은 적(迹)이니라.
니치렌(日蓮) 본문홍통(本門弘通)의 본적(本迹) 본인묘(本因妙)는 본(本)이고,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는 적(迹)이니라 운운(云云).
백육개초 百六箇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863~4쪽 별칭 : 血脈抄.안락행품(安樂行品)에는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근래(近來)·초심(初心)의 범부(凡夫)가 법화경(法華經)을 수행(修行)하여 성불(成佛)하는 방법(方法)을 설(說)해 놓았느니라. 신(身)도 안락행(安樂行)이고, 구(口)도 안락행(安樂行)이고, 의(意)도 안락행(安樂行)이니라. 자행(自行)의 삼업(三業)도 서원안락(誓願安樂)의 화타(化他)의 행(行)도 동일(同一)하게 후(後)의 말세(末世)에 있어서 법(法)이 멸(滅)하려 할 때라고 운운(云云), 이는 근래(近來)의 때이며 이상사소(已上四所)에 있느니라. 약왕품(藥王品)에는 이소(二所)에 설(說)해지고 권발품(勸發品)에는 삼소(三所)에 설(說)해졌느니라. 모두 근래(近來)를 지적(指摘)하여 물려 놓아두신 바른 문서(文書)를 쓰지 않고서 범부(凡夫)의 말에 의해 우치(愚癡)의 마음에 따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양여장(讓與狀)에 배반(背反)하여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한다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얼마나 본의(本意)가 없어지고 분하며 마음 아프고 한탄하며 슬프게 생각하시리요.지금 법화경(法華經)은 자행(自行)·화타(化他)의 이행(二行)을 개회(開會)하여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二翼)을 가지고 날면 장애(障碍)가 없듯이 성불(成佛)에 막힘이 없다. 약왕품(藥王品)에는 십유(十喩)를 가지고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역용(力用)의 승렬(勝劣)을 판정(判定)하였는데, 제일(第一)의 비유(譬喩)에 가로되, 제경(諸經)은 제수(諸水)와 같고 법화(法華)는 대해(大海)와 같음 운운(云云) 취의(取意), 실(實)로 자행(自行)인 법화경(法華經)의 대해(大海)에는 화타(化他)인 제경(諸經)의 중수(衆水)를 받아들임이 주야(晝夜)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증가(增加)하지 않고 감(減)하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덕용(德用)을 나타낸다. 제경(諸經)인 중수(衆水)는 잠시 동안도 법화경(法華經)이란 대해(大海)를 받아 넣는 일이 없다.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승렬(勝劣)은 이와 같으니 一로써 모든 예(例)로 하라. 상기(上記)의 비유(譬喩)는 모두 부처의 소설(所說)이며 사람의 말을 넣지 않았느니라. 이 뜻을 이해(理解)하면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추어 흐림없으니 이 문석(文釋)을 보고 어느 누가 미혹(迷惑)하리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이니 결(決)코 사람의 회석(會釋)을 끌어넣지 말 것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성불(成佛)의 직도(直道)이니라. 미혹(迷惑)하리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이니 결(決)코 사람의 회석(會釋)을 끌어넣지 말 것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성불(成佛)의 직도(直道)이니라. 사십이년(四十二年)의 화타(化他)의 경(經)을 가지고 세운 바의 종(宗)들은 화엄(華嚴)·진언(眞言) 달마(達磨) 정토(淨土) 법상(法相) 삼론(三論) 율종(律宗) 구사(俱舍) 성실(成實) 등(等)의 제종(諸宗)이며, 이들은 모두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팔교(八敎) 중(中)의 교(敎)이고, 모두 이는 방편(方便)이며, 겸(兼)·단(但)·대(對)·대(帶)의 방편유인(方便誘引)이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說敎)의 차제(次第)이니 이 차제(次第)를 밝혀서 법문(法門)을 말해야 하며 만약 차제(次第)에 어긋 나면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일대교주(一代敎主)인 석가여래(釋迦如來)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設敎)의 차제(次第)를 밝혀서 일자(一字)도 어김없이 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여·경(經)에 가로되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법(說法)의 의식(儀式)과 같이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이 무분별(無分別)의 법(法)을 설(說)함」 이상(已上). 만약 이에 어긋나면 길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본의(本意)에 배반(背反)하며, 타종(他宗)의 조사(祖師)가 각기(各其) 자기(自己)의 종(宗)을 세워 법화종(法華宗)과 다툼은 잘못 중의 잘못이며, 미혹(迷惑) 중(中)의 미혹(迷惑)이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9~572쪽.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법(法)에 의(依)하되 사람에 의(依)하지 말라」고 운운(云云), 애처롭고 슬프구나, 말대(末代)의 학자(學者)는 불법(佛法)을 습학(習學)하여, 도리어 불법(佛法)을 멸(滅)함이라. 홍결(弘決)에 이를 슬퍼하여 가로되「이 원돈(圓頓)을 듣고 숭중(崇重)하지 않음은 참으로 근대대승(近代大乘)을 배우는 자(者)의 잡람(雜濫)에 의(依)하기 때문이니라. 하물며 상말(像末)에 정(情)이 엷고 신심(信心)이 과박(寡薄)하여·원돈(圓頓)의 교법(敎法)이 경장(經藏)에 넘치고, 함(凾)에 차는데도 잠시도 사유(思惟)하지 않고, 즉 눈을 가리게 되어 헛되게 살고 헛되게 죽으니, 오로지 어찌 가엾지 않으리」이상(已上), 동사(同四)에 가로되「더구나 원돈(圓頓)의 교(敎)는 본시(本是) 범부(凡夫)에게 주어짐인데 만약(萬若) 범부(凡夫)를 이익(利益)케 하려 하지 않았다면, 부처는 어찌 스스로 법성(法性)의 토(土)에 주(住)하며 법성(法性)의 몸으로써 모든 보살(菩薩)을 위해 이 원돈(圓頓)을 설(說)하지 않고서 어찌 모든 법신(法身)의 보살(菩薩)을 위해 범신(凡身)을 시현(示現)하여 이 삼계(三界)에 나타나셨겠느뇨, 내지일심(乃至一心)은 범(凡)에 있으니 즉(卽) 수습(修習)할지어다」이상(已上), 결국(結局) 기심(己心)과 불신(佛身)과 一이라고 관(觀)하면 속(速)히 부처가 되느니라, 고(故)로 홍결(弘決)에 또 가로되「일체(一切)의 제불(諸佛)은 기심(己心)은 불심(佛心)과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심에 의(依)하는 고(故)로 부처가 될 수 있었노라」고 이상(已上), 이를 관심(觀心)이라 하니 실(實)로 기심(己心)과 불심(佛心)과 일심(一心)이라고 깨달으면 임종(臨終)을 장애(障礙)할 만한 악업(惡業)도 없고 생사(生死)에 머물게 될 망념(妄念)도 없느니라.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敎訓)해야 할 선지식(善知識)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行)하는 행위(行爲), 거동(擧動)이란 거동(擧動),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소작(所作)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和合)해서 일체(一體)이므로, 죄과(罪過)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자재(自在)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自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재(自在)인 자행(自行)의 행(行)을 버리고 흔적도 없는 무명망상(無明妄想)인 벽사(僻思)의 마음에 주(住)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교훈(敎訓)을 배반(背反)하므로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자신(自身)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나의 마음의 거울과 부처의 마음의 거울과는, 오직 일경(一鏡)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면(裏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여래(如來)는 표면(表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셨느니라. 고(故)로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체(體)가 오직 一이니라. 거울은 하나의 거울이라 해도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따라 명매(明昧)의 차별(差別)이 있다. 거울은 이면(裏面)이 있다 해도 표면(表面)의 장애(障碍)로 되지 않으며, 다만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의(依)해서 득실(得失)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相卽融通)하여 일법(一法)의 이의(二義)니라. 화타(化他)의 법문(法門)은 거울의 이면(裏面)을 향(向)함과 같고, 자행(自行)의 관심(觀心)은 거울의 표면(表面)을 향(向)함과 같으니, 화타(化他)의 때의 거울도 자행(自行)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心性)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거울을 즉신(卽身)에 비유(譬喩)하고, 표면(表面)을 향(向)함을 성불(成佛)에 비유(譬喩)하며, 이면(裏面)을 향(向)함을 중생(衆生)에 비유(譬喩)함이라. 거울에 이면(裏面)이 있음을 성악(性惡)을 단절(斷絶)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고, 이면(裏面)을 향(向)할 때·표면(表面)의 덕(德)이 없음을 화타(化他)의 공덕(功德)에 비유(譬喩)하며, 중생(衆生)의 불성(佛性)이 나타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느니라. 자행(自行)과 화타(化他)는 득실(得失)의 역용(力用)이니, 현의(玄義)의 一에 가로되 「살바실달(薩婆悉達)·조왕(祖王)의 활을 당겨 팽팽함을 이름하여 역(力)이라 하고 칠개(七個)의 철고(鐵鼓)를 부수고 하나의 철위산(鐵圍山)을 관통(貫通)하여 땅을 뚫고, 수륜(水輪)을 통과(通過)함과 같음을 이름하여 용(用)이라 함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이니라 모든 방편교(方便敎)는 역용(力用)의 미약(微弱)함이 범부(凡夫)의 궁전(弓箭)과 같다. 왜냐하면 옛날의 연(緣)은 화타(化他)의 이지(二智)를 받아 이(理)를 비춤이 고루 미치지 않으며, 신(信)을 생(生)함이 깊지 않고 의심(疑心)을 제(除)함이 다하지 못함이라 이상(已上) 화타(化他). 지금의 연(緣)은 자행(自行)의 이지(二智)를 받아서 부처의 경계(境界)를 극(極)하고, 법계(法界)의 신(信)을 일으켜 원묘(圓妙)의 도(道)를 더하며 근본(根本)의 혹(惑)을 끊고 변역(變易)의 생(生)을 손실(損失)함이라, 다만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을 함께 이익(利益)케 할 뿐만 아니라, 법신(法身)과 법신(法身)의 후심(後心)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도 또한 함께 이익(利益)하니, 화(化)의 공(功)은 광대(廣大)하고 이윤홍심(利潤弘深)함은 확실(確實)히 이 경(經)의 역용(力用)이니라 이상(已上) 자행(自行)」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역용승렬(力用勝劣)이 분명(分明)함은 물론(勿論)이니 상세하게 이것을 보아라,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춘 교상(敎相)이로다. 극불경계(極佛境界)란 십여시(十如是)의 법문(法門)이며, 십계(十界)에 서로 구족(具足)하여 십계(十界)·십여(十如)의 인과(因果)·권실(權實)의 이지(二智)·이경(二境)은 나의 몸 안에 있어서 일인(一人)도 누락(漏落)됨이 없다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여 불어(佛語)를 남김없이 깨닫느니라. 기법계신(起法界信)이란 십법계(十法界)를 체(體)로 하고, 십법계(十法界)를 마음으로 하며, 십법계(十法界)를 형상(形相)으로 하셨다고,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몸 속에 있었다고 믿음이라. 증원묘도(增圓妙道)란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둘은 상즉원융(相卽圓融)의 법(法)이므로 주(珠)와 광(光)과 보(寶)의 삼덕(三德)은 오직 하나의 주(珠)의 덕(德)임과 같아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불법(佛法)에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일생중(一生中)에 부처가 된다고 경희(慶喜)의 마음을 더하느니라. 단근본혹(斷根本惑)이란 일념무명(一念無明)의 잠에서 깨어나, 본각(本覺)의 생시(生時)에 돌아오면 생사(生死)도 열반(涅槃)도 함께 어제의 꿈과 같이 흔적도 없음이라. 손변역생(損變易生)이란 동거토(同居土)의 극락(極樂)과 방편토(方便土)의 극락(極樂)과 실보토(實報土)의 극락(極樂)의 삼토(三土)에 왕생(往生)한 사람·그 토(土)에서 보살(菩薩)의 도(道)를 수행(修行)하여 부처가 되려고 바라는데·인(因)은 변하고 과(果)는 바뀌어 차례로 전진(前進)해 올라가서 겁수(劫數)를 거쳐 머나먼 성불(成佛)을 기다림을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라고 하느니라. 하위(下位)를 버림을 사(死)라 하고 상위(上位)로 나아감을 생(生)이라 하며, 이와 같이 변역(變易)하는 생사(生死)는 정토(淨土)의 고뇌(苦惱)인 것이로다. 그래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이 예토(穢土)에서 법화(法華)를 수행(修行)하면, 십계호구(十界互具)·법계일여(法界一如)이므로 정토(淨土)의 보살(菩薩)의 변역(變易)의 생(生)은 줄고 불도(佛道)의 행(行)은 증가(增加)하여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를 일생중(一生中)에 짧게 해서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하므로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증도손생(增道損生)하느니라. 법신(法身)의 보살(菩薩)이란 생신(生身)을 버리고 실보토(實報土)에 거(居)하느니라. 후심(後心)의 보살(菩薩)이란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이니라. 단(但) 적문(迹門)에서는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며, 본문(本門)에서는 법신(法身)과 후신(後身)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느니라, 단(但) 지금은 적문(迹門)을 열어서 본문(本門)에 섭(攝)하여 하나의 묘법(妙法)으로 하는 고(故)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예토(穢土)의 수행(修行)의 행(行)의 힘을 가지고 정토(淨土)의 십지등각(十地等覺)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는 행(行)인 고(故)로 화(化)의 공(功)이 광대(廣大)하니라화타(化他)의 덕용(德用). 이윤홍심(利潤弘深)이란 자행(自行)의 덕용(德用) 원돈(圓頓)의 행자(行者)는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 일법(一法)도 누락(漏落)됨이 없이 일념(一念)에 구족(具足)하여 횡(橫)으로 시방법계(十方法界)에 편만(遍滿)하는 고(故)로 넓은 것이며, 종(縱)으로는 삼세(三世)에 걸쳐 법성(法性)의 연저(淵底)를 극(極)하는 고(故)로 깊으니라. 이 경(經)의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은 이와 같으며, 화타(化他)의 제경(諸經)은 자행(自行)을 갖추지 않으므로 새가 편익(片翼)을 가지고서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고(故)로 성불(成佛)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법화경(法華經)은 자행(自行)·화타(化他)의 이행(二行)을 개회(開會)하여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二翼)을 가지고 날면 장애(障碍)가 없듯이 성불(成佛)에 막힘이 없다. 약왕품(藥王品)에는 십유(十喩)를 가지고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역용(力用)의 승렬(勝劣)을 판정(判定)하였는데, 제일(第一)의 비유(譬喩)에 가로되, 제경(諸經)은 제수(諸水)와 같고 법화(法華)는 대해(大海)와 같음 운운(云云) 취의(取意), 실(實)로 자행(自行)인 법화경(法華經)의 대해(大海)에는 화타(化他)인 제경(諸經)의 중수(衆水)를 받아들임이 주야(晝夜)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증가(增加)하지 않고 감(減)하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덕용(德用)을 나타낸다. 제경(諸經)인 중수(衆水)는 잠시 동안도 법화경(法華經)이란 대해(大海)를 받아 넣는 일이 없다.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승렬(勝劣)은 이와 같으니 一로써 모든 예(例)로 하라. 상기(上記)의 비유(譬喩)는 모두 부처의 소설(所說)이며 사람의 말을 넣지 않았느니라. 이 뜻을 이해(理解)하면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추어 흐림없으니 이 문석(文釋)을 보고 어느 누가 미혹(迷惑)하리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이니 결(決)코 사람의 회석(會釋)을 끌어넣지 말 것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성불(成佛)의 직도(直道)이니라. 사십이년(四十二年)의 화타(化他)의 경(經)을 가지고 세운 바의 종(宗)들은 화엄(華嚴)·진언(眞言) 달마(達磨) 정토(淨土) 법상(法相) 삼론(三論) 율종(律宗) 구사(俱舍) 성실(成實) 등(等)의 제종(諸宗)이며, 이들은 모두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팔교(八敎) 중(中)의 교(敎)이고, 모두 이는 방편(方便)이며, 겸(兼)·단(但)·대(對)·대(帶)의 방편유인(方便誘引)이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說敎)의 차제(次第)이니 이 차제(次第)를 밝혀서 법문(法門)을 말해야 하며 만약 차제(次第)에 어긋 나면 불법(佛法)이 아니니라. 일대교주(一代敎主)인 석가여래(釋迦如來)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교(設敎)의 차제(次第)를 밝혀서 일자(一字)도 어김없이 나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여·경(經)에 가로되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설법(說法)의 의식(儀式)과 같이 나도 지금 또한 이와 같이 무분별(無分別)의 법(法)을 설(說)함」 이상(已上). 만약 이에 어긋나면 길이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본의(本意)에 배반(背反)하며, 타종(他宗)의 조사(祖師)가 각기(各其) 자기(自己)의 종(宗)을 세워 법화종(法華宗)과 다툼은 잘못 중의 잘못이며, 미혹(迷惑) 중(中)의 미혹(迷惑)이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9~572쪽.信力 行力 佛力 法力(신력 행력 불력 법력)
우리들이 불도수행하는 과정에서 성불(개불:즉신성불)하기 위한 네 개의 요소의 힘 즉 에너지를 말합니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어의구전 어서 970쪽)
信力이란 오로지 대어본존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行力이란 余事(여사)를 섞지않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부르고(자행)과 절복 등의 화타행을 하는 것입니다.
法力이란 妙法에 갖춰진 광대심원한 이익을 말합니다.
佛力이란 부처가 중생을 구하는 서원을 세워 그 성취를 원하는 것 즉 부처님의 힘입니다.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三道가 법신 반야 해탈의 三德으로 전하여 三觀 三諦 즉 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 이니라.
능거 소거 신토 색심 구체구용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中의 일이니라.
이것이 즉 법화의 당체 자재신력이 나타나는 바의 공능이니 결코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당체의초 어서 512쪽)
위 어문의,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但 법화경을 믿고 란 信力입니다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行力입니다.
법화의 당체 이란 法力입니다
자재신력 이란 佛力입니다.신력 행력을 힘쓸때 본존의 불력 법력에 의해서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생이 즉신성불의 이익을 얻는 것은 모두 妙法 五字의 대어본존님의 法力과 구원원초 자수용신이신 日蓮大聖人의 佛力에 의하는 것입니다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 다보(多寶) 시방(十方)의 제불(諸佛) 상행(上行) 무변행(無邊行) 등(等) 보현(普賢) 문수(文殊) 사리불(舍利弗) 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 석제환인(釋提桓因) 일월(日月) 명성(明星) 북두(北斗) 칠성(七星) 이십팔수(二十八宿) 무량(無量)의 제성(諸星) 천중(天衆) 지류(地類) 용신(龍神) 팔부(八部) 인천(人天) 대회(大會) 염마법왕(閻魔法王) 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예(例)컨대 새장 속에 있는 새가 울 때, 하늘을 나는 많은 새가 동시(同時)에 모이는데 이를 보고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성우문답초 어서 498쪽)"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三道가 법신 반야 해탈의 三德으로 전하여 三觀 三諦 즉 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 이니라.
능거 소거 신토 색심 구체구용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中의 일이니라.
이것이 즉 법화의 당체 자재신력이 나타나는 바의 공능이니 결코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당체의초 어서 512쪽)
위 어문의,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但 법화경을 믿고 란 信力입니다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行力입니다.
법화의 당체 이란 法力입니다
자재신력 이란 佛力입니다.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법화초심성불초 어서 557쪽)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역용승렬(力用勝劣)이 분명(分明)함은 물론(勿論)이니 상세하게 이것을 보아라,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춘 교상(敎相)이로다. 극불경계(極佛境界)란 십여시(十如是)의 법문(法門)이며, 십계(十界)에 서로 구족(具足)하여 십계(十界)·십여(十如)의 인과(因果)·권실(權實)의 이지(二智)·이경(二境)은 나의 몸 안에 있어서 일인(一人)도 누락(漏落)됨이 없다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여 불어(佛語)를 남김없이 깨닫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어서 570쪽)
제목 : 妙法의 四力 : 信力 行力 佛力 法力(신력 행력 불력 법력)
信力 行力 佛力 法力(신력 행력 불력 법력)
우리들이 불도수행하는 과정에서 성불(개불:즉신성불)하기 위한 네 개의 요소의 힘 즉 에너지를 말합니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어의구전 어서 970쪽)
信力이란 오로지 대어본존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行力이란 余事(여사)를 섞지않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부르고(자행)과 절복 등의 화타행을 하는 것입니다.
法力이란 妙法에 갖춰진 광대심원한 이익을 말합니다.
佛力이란 부처가 중생을 구하는 서원을 세워 그 성취를 원하는 것 즉 부처님의 힘입니다.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 다보(多寶) 시방(十方)의 제불(諸佛) 상행(上行) 무변행(無邊行) 등(等) 보현(普賢) 문수(文殊) 사리불(舍利弗) 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 석제환인(釋提桓因) 일월(日月) 명성(明星) 북두(北斗) 칠성(七星) 이십팔수(二十八宿) 무량(無量)의 제성(諸星) 천중(天衆) 지류(地類) 용신(龍神) 팔부(八部) 인천(人天) 대회(大會) 염마법왕(閻魔法王) 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예(例)컨대 새장 속에 있는 새가 울 때, 하늘을 나는 많은 새가 동시(同時)에 모이는데 이를 보고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성우문답초 어서 498쪽)
"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 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 일체(一切)의 법(法) 일체(一切)의 보살(菩薩) 일체(一切)의 성문(聲聞) 일체(一切)의 범왕(梵王) 제석(帝釋) 염마(閻魔)·법왕(法王) 일월(日月) 중성(衆星) 천신(天神) 지신(地神) 내지(乃至)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천(人天)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법화초심성불초 어서 557쪽)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三道가 법신 반야 해탈의 三德으로 전하여 三觀 三諦 즉 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 이니라.
능거 소거 신토 색심 구체구용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中의 일이니라.
이것이 즉 법화의 당체 자재신력이 나타나는 바의 공능이니 결코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당체의초 어서 512쪽)
위 어문의,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但 법화경을 믿고 란 信力입니다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行力입니다.
법화의 당체 이란 法力입니다
자재신력 이란 佛力입니다.
신력 행력을 힘쓸때 본존의 불력 법력에 의해서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생이 즉신성불의 이익을 얻는 것은 모두 妙法 五字의 대어본존님의 法力과 구원원초 자수용신이신 日蓮大聖人의 佛力에 의하는 것입니다
".석존의 因行果德의 二法은 妙法蓮華經의 五字에 구족 하였다 우리들이 이 五字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因果의 功德을 물려 주시느니라."(관심의 본존초어서 246쪽)
위 어문의 수지하면 이란 신력 행력입니다.
五字란 법력입니다.
자연히 물려 주시느니라 란 불력입니다.
信力이란, 오로지 唯一 이 어본존을 믿고. 이 어본존 外에는 부처가 되는 길이 없다고 강성하게 믿는 것이 信力입니다.
行力이란, 해가 나오면 등불이 소용없다 비가 내리면 이슬이 별수없습니다. 지금 말법에 들어오면 余經도 法華經도 소용없습니다. 고로 余事를 섞지않고, 但 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하고 타인에게도 전해가는 것을 行力이라 합니다.
法力이란, 迹中化他(적중화타)의 三世의 諸佛의 인과의 공덕을 가지고 本地自行의 妙法 五字에 구족함입니다. 고로 이 어본존의 力用化功廣大(역용화공광대) 利潤弘深(이윤홍심 : 이윤 즉 이롭고 윤택하게 하는 것이 넓고 깊음)인 것을 法力이라 합니다.
佛力이란, 구원원초의 자수용신 나의 몸의 당체 자행화타의 인과의 공덕구족 원만의 妙法 五字를 我本立誓願(아본립서원)의 大悲力을 가지 고 한폭의 만다라 본존으로 도현해서 말법의 유치의 중생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들 중생이 이 본존을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자행화타의 인과의 공덕을 물려주시어 如我等無異(여아등무이)의 깨달음을 여는 것은 오로지 佛力인 것입니다
※ 四力의 관계성에 대해서
"비유하면 蓮華가 물에 살아도 만약 日光을 얻지 못하면 고사하는 것 처럼 중생의 善根도 佛力을 만나지 않으면 관행을 이룰수가 없다."(대지론 권一)
"꽃은 신력과 같고 蓮은 행력과 같고 물은 법력과 같고 태양은 불력과 같다 바로 알아라.
蓮華는 물에 의해 자라고 우리들의 信力 行力은 반드시 法力에 의해 자라는 것이다.
만약 물이 없으면 蓮華는 자라지 못한다.
法力이 없으면 어찌 信行이 일어나겠는가 때문에 본존을 우러러 받들어 法力을 기원하라.
물에 의해 蓮華가 자란다 해도 만약 日光을 얻지못하면 고사하는 것은 의심 없느니라.
우리들 중생도 法力에 의해 信力 行力이 일어난다 해도 만약 佛力을 얻지 못하면 信行의 퇴전 의심 없느니라.
蓮華가 만약 日光을 얻으면 반드시 잘 번영하고 꽃피는 것과 같이 우리들 중생도 佛力을 받으면 信行成就해서 재빨리 보리를 얻는 것이다.
法界에 가득찬 善根도 佛力을 못 만나면 아귀계 중생이니라."(니치칸 상인 관심의 본존초 문단)
※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에 대하여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敎訓)해야 할 선지식(善知識)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行)하는 행위(行爲), 거동(擧動)이란 거동(擧動),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소작(所作)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和合)해서 일체(一體)이므로, 죄과(罪過)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자재(自在)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自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재(自在)인 자행(自行)의 행(行)을 버리고 흔적도 없는 무명망상(無明妄想)인 벽사(僻思)의 마음에 주(住)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교훈(敎訓)을 배반(背反)하므로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자신(自身)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나의 마음의 거울과 부처의 마음의 거울과는, 오직 일경(一鏡)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면(裏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여래(如來)는 표면(表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셨느니라. 고(故)로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체(體)가 오직 一이니라. 거울은 하나의 거울이라 해도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따라 명매(明昧)의 차별(差別)이 있다. 거울은 이면(裏面)이 있다 해도 표면(表面)의 장애(障碍)로 되지 않으며, 다만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의(依)해서 득실(得失)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相卽融通)하여 일법(一法)의 이의(二義)니라. 화타(化他)의 법문(法門)은 거울의 이면(裏面)을 향(向)함과 같고, 자행(自行)의 관심(觀心)은 거울의 표면(表面)을 향(向)함과 같으니, 화타(化他)의 때의 거울도 자행(自行)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心性)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거울을 즉신(卽身)에 비유(譬喩)하고, 표면(表面)을 향(向)함을 성불(成佛)에 비유(譬喩)하며, 이면(裏面)을 향(向)함을 중생(衆生)에 비유(譬喩)함이라. 거울에 이면(裏面)이 있음을 성악(性惡)을 단절(斷絶)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고, 이면(裏面)을 향(向)할 때·표면(表面)의 덕(德)이 없음을 화타(化他)의 공덕(功德)에 비유(譬喩)하며, 중생(衆生)의 불성(佛性)이 나타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느니라. 자행(自行)과 화타(化他)는 득실(得失)의 역용(力用)이니, 현의(玄義)의 一에 가로되 「살바실달(薩婆悉達)·조왕(祖王)의 활을 당겨 팽팽함을 이름하여 역(力)이라 하고 칠개(七個)의 철고(鐵鼓)를 부수고 하나의 철위산(鐵圍山)을 관통(貫通)하여 땅을 뚫고, 수륜(水輪)을 통과(通過)함과 같음을 이름하여 용(用)이라 함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이니라 모든 방편교(方便敎)는 역용(力用)의 미약(微弱)함이 범부(凡夫)의 궁전(弓箭)과 같다. 왜냐하면 옛날의 연(緣)은 화타(化他)의 이지(二智)를 받아 이(理)를 비춤이 고루 미치지 않으며, 신(信)을 생(生)함이 깊지 않고 의심(疑心)을 제(除)함이 다하지 못함이라 이상(已上) 화타(化他). 지금의 연(緣)은 자행(自行)의 이지(二智)를 받아서 부처의 경계(境界)를 극(極)하고, 법계(法界)의 신(信)을 일으켜 원묘(圓妙)의 도(道)를 더하며 근본(根本)의 혹(惑)을 끊고 변역(變易)의 생(生)을 손실(損失)함이라, 다만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을 함께 이익(利益)케 할 뿐만 아니라, 법신(法身)과 법신(法身)의 후심(後心)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도 또한 함께 이익(利益)하니, 화(化)의 공(功)은 광대(廣大)하고 이윤홍심(利潤弘深)함은 확실(確實)히 이 경(經)의 역용(力用)이니라 이상(已上) 자행(自行)」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역용승렬(力用勝劣)이 분명(分明)함은 물론(勿論)이니 상세하게 이것을 보아라,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춘 교상(敎相)이로다. 극불경계(極佛境界)란 십여시(十如是)의 법문(法門)이며, 십계(十界)에 서로 구족(具足)하여 십계(十界)·십여(十如)의 인과(因果)·권실(權實)의 이지(二智)·이경(二境)은 나의 몸 안에 있어서 일인(一人)도 누락(漏落)됨이 없다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여 불어(佛語)를 남김없이 깨닫느니라."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 어서 570쪽)
"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 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 일체(一切)의 법(法) 일체(一切)의 보살(菩薩) 일체(一切)의 성문(聲聞) 일체(一切)의 범왕(梵王) 제석(帝釋) 염마(閻魔)·법왕(法王) 일월(日月) 중성(衆星) 천신(天神) 지신(地神) 내지(乃至)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천(人天)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법화초심성불초 어서 557쪽)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三道가 법신 반야 해탈의 三德으로 전하여 三觀 三諦 즉 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 이니라.
능거 소거 신토 색심 구체구용 무작삼신의 본문수량의 당체연화의 부처란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中의 일이니라.
이것이 즉 법화의 당체 자재신력이 나타나는 바의 공능이니 결코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를 의심하지 말지어다."(당체의초 어서 512쪽)
위 어문의,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但 법화경을 믿고 란 信力입니다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行力입니다.
법화의 당체 이란 法力입니다
자재신력 이란 佛力입니다.
신력 행력을 힘쓸때 본존의 불력 법력에 의해서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생이 즉신성불의 이익을 얻는 것은 모두 妙法 五字의 대어본존님의 法力과 구원원초 자수용신이신 日蓮大聖人의 佛力에 의하는 것입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