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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 형제 사랑(1-3)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하는 어떤 것이라도,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인간의 출발은, 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력한 존재로 출발한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마음만 먹으면, 의지만 있으면, 실천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실천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만약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인간의 열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인간의 열심이 보태어져서,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문을 본다면, 본문의 내용이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을 보면서 ‘형제를 사랑하자’, 2절을 보면서 ‘손님을 대접하자’, 3절을 보면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자’라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2: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소멸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자라는 말을 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과 손님 대접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았으니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은혜가 형제 사랑으로, 손님 대접으로,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은혜를 안다’라는 말이나, ‘나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하려거든, 자신에게서 사랑과 대접과 용서 등의 모습이, 보이는가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은 자신을 포기할 때 보이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 등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와주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해와 번거로움이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가 이미 자신을 포기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손해와 번거로움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을 전제한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포기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으로 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형제 사랑이 나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자신을 포기한 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물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크게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길이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인 것입니다.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세상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손님 대접 역시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 대접도 예수님의 대접을 받은 자에게서 보일 모습이기 때문에,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의롭게 하시는 대접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대접이 우리를 강권해서, 대접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는 달라야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만 사랑하는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에, 그 순간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내가 원하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손해가 되고 번거로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분명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툼과 분노, 시기, 이러한 모든 것은, 분명 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는, 여전히 다툼과 분노와 시기가 나타납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소원합니까?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사랑이 없는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만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사랑에 파묻힌 자신을 미워하기에, 그런 나를 다스리시고 징계해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는 다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 역시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과연 누구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되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신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세상 속의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자신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되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산다면, 그의 마지막은 성경이 언급한대로, 소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전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나사로로 살기를 원합니까? 비록 거지라 해도, 그 마지막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에서의 자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나에게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십시오.
2. 성도의 삶(4-6)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수준을,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나올 수 없음을 잘아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길 수는 없습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볼 때,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잠시 가질 수가 있지만, 타인의 큰 고통보다는 자신의 작은 고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학대 받는 것을, 자신이 학대 받는 것처럼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4절에서 말하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것은 음행과 간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5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돈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돈을 힘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각자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은, 돈이 있어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돈을 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돈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는 돈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여기며,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살아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다는 것을 아시면서, ‘사랑하라, 대접하라, 결혼을 귀히 여기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할 수 없음을 아시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은 순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자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면, 하나님이 말씀한 모습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을, 인간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말씀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질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게 능력만 받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지라고 명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능력만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능력 받으면 된다’라고 여긴다면, 지금껏 능력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증거밖에 안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산을 옮기는 기적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능력을 달라고만 외쳐댔지, 받은 적은 없다는 얘기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이 하신다면 산은 옮겨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산을 옮길 것을 명하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한다면, 산이 옮겨지는 것도, 뽕나무가 뽑혀 바다로 심겨지는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되는 것이지,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받아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를 붙드시고 다스리실 때, 그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도구로 부름을 받은 자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믿음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까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면서 새롭게 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는 수단과 도구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세상에 나타내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세우신다면, 우리로 하여금 산을 명하여 옮기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라지게 한 것도,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겠다는 뜻을 세우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홍해를 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고침 받고 믿음이 주어져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대접하라, 결혼을 귀히 여기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들은,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산도 옮길 것인데, 하나님이 너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뜻을 알았다면, ‘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소망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잘사는 것에 관심을 둔 채, ‘복 주십시오’라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주는 나를 돕는 이시라는 말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뜻, 곧 자신의 원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만을 소원할 뿐입니다. 주는 이러한 성도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곧 내가 세운 내 뜻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도 두려워 할 것이 없이, 주만 믿으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나를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를 징계하시고 때려서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소원하면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 순종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주는 성도의 이러한 소원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항상 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형제 사랑이 가능하게 하시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시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을 받아서, 위대한 일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뜻을 세우셨으니,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셨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으면, 항상 감사하는 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취되도록 주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에게서, 자기 뜻을 내어 놓으며, ‘이루어 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3.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7-8)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이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져가기에, ‘변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합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변한다고 여겨지는 것, 역시 겉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세상이나 사람은 불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말씀의 효력과 위력이 그대로 담긴 채,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악함에 있습니다. 곧 에덴동산에서 벌어졌던 범죄의 모습들이, 그대로 지금의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껏 중지됨이 없이, 에덴동산의 죄 아래서 세상은 흘러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변하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으며, 죄가 변하지 않는다면, 또 하나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의 예수님이나 오늘의 예수님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곧 2천 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나, 지금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나, 동일하신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의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세상의 죄로 인해 오신 분이라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도, 우리의 죄로 인해 오신 바로 그분이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안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동일선상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어떤 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내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죄입니다. 이처럼 죄 아래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동일하신 것이고, 말씀도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세상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계시된 그분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모습이,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까?
7절에서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서 그대로 행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보였던 믿음만이 참되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아무거나 믿음으로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 1: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 세계는 그리스도가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충만된 세계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인데, 과연 그리스도를 부르는 우리가 그러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하늘로 가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지금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분과 동일하다면, 예수님을 부르면서 나의 복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이것이 사도들의 믿음이었습니까?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세상의 복을 구했고, 그것으로 자랑하였다면, 우리에게도 당연히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도무지 사도들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믿음 아닌 믿음, 곧 가짜 믿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일하신 분이라면, 어제의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 것처럼, 지금의 예수님도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구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는 예수님이 일하셨지만, 하늘로 가신 지금은 자기 백성에게 믿음과 힘을 주시면서, 일하도록 도우신다는 말을 하지만, 이것은 동일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하시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믿을 존재가 못되고, 하나님의 일을 맡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변화를 말하지 않고 있으니, 결국 다른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달픈 삶의 현실도, 동일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와 거룩과 진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지금도 동일한 뜻을 가지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고달픈 삶도, 성도에게는 불평할 조건이 못되는 것이고, 오히려 고달픈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으로 사셨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동일하신 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든 일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들인데, 그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남들 하는 대로 흉내 낸다고 해서, 신앙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고침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똑같은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돌아와 감사하는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면 문둥병자에게서 믿음은 무엇입니까? 병이 고침 받은 것입니까? 하지만 병은 나머지 아홉도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이 없는 자로 규정됩니다.
세상은 병 고침 받는 것을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문둥병은 당시에는 불치병입니다. 살았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병이 나았다면, 아마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이 대단해서, 하나님이 고쳐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병 나은 것과 믿음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아홉 명의 문둥병자도 고쳐주심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곧 믿음은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감사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병이 고침 받았다고 해도 결국은 죽습니다. 병 고침 받은 것이 영원한 사망에서 구출된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병 고침으로 인해서,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믿음 없음이 증거 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합니다. 나를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육신의 병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고치심으로써,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신 은혜를 생각한다면, 예수님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배척을 받고 죽었습니다. 사도들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오늘의 세상 역시 믿는 자를 환영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미움 받는 길을 피하려고 한다면, 결국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참된 그리스도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을 보면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묵상하고, 바로 그 분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4. 입술의 열매(9-15)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의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강제가 아니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동참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본래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자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며 영원이심을 알았기에, 예수님이 가신 길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길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등산로처럼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올라가도,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각기 가는 길은 달라도, 추구하는 것은 같으며, 결국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말들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과, 십자가에 피 흘리심과 은혜를 철저하게 짓밟는, 사탄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만이, 생명에 소속된 자로서, 영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는 자이며,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소망을 두지도 않을 자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지 않을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교훈은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으며, 그 교훈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악한 심령을 다스리고 고치면서,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교훈이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세상의 것을 약속 하거나, 신앙을 언급하며 인간의 열심을 북돋우어,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아닌 인간의 열심을 공로로 내세우고, 그 공로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이 지불하시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진리로 위장한 거짓된 교훈들이 난무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진리만을 고집하고, 진리만을 소망하는 자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9절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빙자한 여러 다른 교훈이 있다는 것이고, 그 교훈들에게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교훈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음식으로써 행한다는 것은, 음식을 먹고 먹지 않는 것으로, 신앙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곧 율법의 실천을 신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의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실천함으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고, 복을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은혜에 붙들려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것으로, 마음이 채워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함이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험이나, 체험들에게 마음이 끌리지를 않게 됩니다. 그 어떤 경험도, 체험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어떤 경우에도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누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안수 받았더니 병이 나았더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병이 낫고 싶은 욕구의 자연적인 움직임입니다. 병든 자가 병이 낫고 싶은 욕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불치의 병이 무슨 방법으로 나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병 나은 것이 믿음의 증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된, 놀라운 기적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기적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된 기적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적이 기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아닌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성령이 왜 오셔야 합니까? 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 합니까?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다는 것은, 옛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기에,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은총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도 기적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착함도 의로움도 모두 부정하고, 오직 자신을 사망에 처한 자로만 보면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감사함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피 외의 모든 것은, 다른 교훈으로 말하며, 오직 은혜로써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기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10-11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레위기에 보면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6:30절에서는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고 말합니다.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 속죄제를 드립니다. 그때 바쳐진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영문 밖에서 불사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속죄 제물의 완전한 희생으로 주어진, 은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곧 영문 안의 세계와 영문 밖의 세계가, 제물의 희생으로 구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문 밖의 세계는 제물의 완전한 희생을 믿는 믿음의 세계인 반면에, 영문 안의 세계는 제물의 완전한 희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과 인간의 행함을 바라보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병 고침도 율법도,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보태어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간의 행함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순전하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실천도 해야 하고, 성령을 받아서 병도 고쳐야 하고, 기도해서 응답도 받아야 그것이 진짜 믿음이고, 은혜 아래 있는 증거라고 가르치는 모든 것이, 다른 교훈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참으로 깔끔하며,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기독교는 인간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믿음 자체만으로는 불안해하며, 보이는 것을 동원하여, 믿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는, 십자가 사건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보다, 병 나은 체험에 더 믿음이 가고, 응답 받은 체험을 더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찬송의 제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내신 긍휼과 사랑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뿐임을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찬송의 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성도의 입술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5. 인도하는 자(16-17)
13-14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 말씀에서 성도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는데, 성도란 영문 밖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문 안에서 영문 밖의 예수를 부르면서, ‘나를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된 성도는 지금 자신이 있는, 영문 안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영문 안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세상에 머물러서 신앙생활하며 살다가, 천국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떠나라는 말조차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 다 버린 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등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바울처럼 세상이 자랑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을 뜻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나에게 소중한 분이 누구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성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더러운 개똥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고, 그때 개똥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데,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인기가 없습니다.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복을 준다고 외치는 다른 예수가, 더 인기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보다는, 세상의 복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좋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똥을 약에 쓸려고 찾는다면, 그것은 개똥이 필요한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곧 개똥이 필요한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개똥이란 아무짝에 쓸모없는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 얘기를 개똥에 비유하며 말씀드리는 것이 좀 그렇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그 정도로, 하찮게 취급한다는 점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필요한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사망이라는 엄청난 병에 걸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끊임없이 세상이 걸려있는 병이, 어떤 것인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병든 상태를 깨닫게 함으로써, 유일한 치료자이신 예수님께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는 기뻐하시느니라.”
이 구절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단 선을 행하라는 것이나,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는 것을, 실천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천을 가지고 해결될, 영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문제가 인간의 실천으로 해결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천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실천하는 나를 기쁘게 보시고,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은, 단지 기독교의 상징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분명 실천을 의미하는 말씀 같은데,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이 선을 행하는 실천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서로 나누어주는 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선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까?
서로 나누어주는 것도, 여러분이 아무리 실천을 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전부를 나누어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믿음으로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으며, 서로 나누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만이 참된 것이고,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 사랑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만이 참되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를 살리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병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는 참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믿음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알았기에, 자연히 예수님의 가치와 귀함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필요할 수밖에 없기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그곳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가 선이라는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나눈다는 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 날 위해,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마음으로 형제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형제가 어려울 때, 자연스럽게 돕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도우면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니까, 선을 행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기 스스로 선한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 사랑하자는 마음을 먹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희생하자는 마음을 먹고 희생하는 것도, 역시 희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희생, 섬김, 구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도로 살아가는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붙들어 인도하는 인도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인도자는 내 영혼을 위해, 나를 대신해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도자에게는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도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영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자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인도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인도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형제를 돕고 인도하는 그 모든 일들이,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이루시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말씀에만 모든 관심이 있게 되면, 자신에 대해서도, 형제에 대해서도, 오직 영혼의 문제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서로가 인도자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6. 기도하라(18-19)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쨌든 자기 유익이라는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신을 믿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에서, 어쩌면 좀 더 고급한 삶을 위해서, 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에게 국한 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도 결국 자신을 위해, 자신의 문제를 신에게 내어 놓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사도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의 연약성을 인정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곧 ‘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됨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은, 사도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목사가 성도들에게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세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대부분은, 목사가 능력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건강하기 위해서, 목사가 목회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국한된 경우가 많습니다. 곧 목사 자신이 능력이 있고, 성공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함으로써, 성도는 목사를 위해 존재하고, 목사를 섬겨야 하는 것임을, 암암리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도로서 목사를 사랑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목사가 성도에게 목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목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차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목사라고 해도 믿음이 나은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존재일 뿐임을 내어 놓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도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연약함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부탁하는 기도의 내용은, 성도들에게로 속히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성도들에게 속히 돌아가고자 한 것은, 그들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것이지, 굳이 기도를 부탁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선하게 행하는 것 자체가, 사도 자신에게 속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에 거하고, 또한 선하게 행하게 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임을 알았기에, 이 모든 것을 두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하고자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는 선한 행위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어서,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하지 못한 우리에게서, 선한 행위가 보인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선하지 못한 자에게서 선한 행위가 보인다면, 그 행위는 분명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곧 나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무엇으로부터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도는 성령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란, 성령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성도에게 맺어지는, 성령의 활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열매이며, 따라서 나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두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세워서, 무엇인가를 하시고자 하는 뜻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선한 일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나타내고자 속히 돌아가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가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이니, 하나님의 선한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기도는 온통 나의 욕망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세우고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가 서로 기도한다는 것도,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서 어렵고 힘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하셨는데, 예수님의 기도에는 그 어디에도, 자신의 뜻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이 사라짐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부릅니다. 무엇을 위해 부릅니까? 날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기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성도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내 뜻은 상관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도로서 정당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뜻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관심이 내 뜻과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우리의 뜻과 소원이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히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그 뜻대로 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아십니까? 우리가 서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기도를 부탁하겠습니까? ‘연약한 내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서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기도는 이 땅에 붙어 있기 위한 욕망이라고 한다면, 성도의 기도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는, 출애굽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난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참된 성도의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참여되는 기도입니다. 곧 ‘하나님, 저로 하여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에 동참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세계에 동참하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의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서로가 기도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라면, 욥이 당한 재앙까지도 내게 허락해 주옵소서.’라는 의미까지 포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선하게 행하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마음은 선을 원하는데, 몸은 항상 악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나를 두고 한탄하는 것도 없고, 기도하는 것도 없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참된 성도로 살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야말로 내 뜻을 무너뜨리고 포기하는 것이기에, 진땀나는 기도이며, 나의 본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 기도가 나와진다면, 그것은 그에게 선한 양심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7. 주 예수 그리스도(20-25)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한 방법을 얘기한 적이 없고, 소위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이 실천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이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전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살펴오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악한 나를 용서하며,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새롭고 놀라운 은혜 말입니다.
이 은혜는 구약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들어 인도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믿음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온 것이었음을,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믿음의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다스리고 고치면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 1:1-2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히브리서의 시작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기적과 사건으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께 있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채 말씀하시는데,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나를 향한 채 말씀을 듣는다면, 결국 말씀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둔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돕는다고 하는, 다른 예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20-21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큰 목자고, 목사는 작은 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양들을 인도할 크신 목자이지,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인도하는 자란 목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자들을 인도하고,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라, 큰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21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끌림 받는 성도에게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러분이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을 쓰고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으로 인해 근심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뜻을 두시고, 행하고 계신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행함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에,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해서 믿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두고, 행하시는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구원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구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즐거움을, 자기 백성들 속에 이루심으로써, 그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전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설하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잘 만들었다’ ‘좋다’라고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길에 서서, 빛으로 생명의 길로 오신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 뜻에 행하는 것이 됩니다
23-25절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가, 형제 디모데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만나고 싶은 심정을 말하는 것은,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짐으로, 선한 일이 온전하게 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고, 선한 일이 온전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모이고 만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만남에 그리스도가 없고 진리가 없다면, 그냥 사람의 만남이고 친목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가 있고 은혜를 나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한 뜻을 이루시는 일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행하게 하고 말하게 하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믿음에 의해, 자신의 뜻이 무너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의의 세계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으로 주어진 복을,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시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되고, 성도들이 출현하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한 결과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그 뜻에, 그대로 행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