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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1
함석헌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이후 옛날의 신앙 친구들로부터「왜 퀘이커가 됐느냐」「정말 됐느냐」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싱긋이 웃고 맙니다. 옛날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싯귀에
문여하사루벽산 (問余何事樓碧山)
소이불답심자한 (笑而不答心自閑)
이란 것이 있습니다. 서울을 마다하고 두메산골에 와 사는 시인을 보고 너는 어째서 번화한 서울을 버리고 이런 궁벽한 산골에 와 사느냐 묻지만 자기는 싱긋이 웃을 뿐이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 아니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기 때문이다. 무엇에 끌려서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하는 것이 없다. 그저 그리고 싶으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내 심정도 말하자면 그러하단 말입니다.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아니 됐음 어떻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대답 아니 하는 것 혹은 못하는 것이 정말 내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내 그 심정을 몰라보고 계속 추궁해 묻는다면 내 대답은 「됐담 된 것이고 아니 됐담 아니 된 것이고」입니다. 됐다 할 수도 없고 아니 됐다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됐다」해도 그들은 오해할 것이고「아니 됐다」 해도 그들은 오해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됐다」해도 거짓말쟁이가 되고「아니 됐다 해도」거짓말쟁이가 됩니다. 혹은 반드시 한 가지 모양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스스로 좀 아는 나기 때문에 구태여 밝히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해 받게만 마련이기 때문에 받아도 좋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마음이 한가하다는데 입니다.
「정말 됐느냐」하고 묻는 것은 됐다면 큰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되기는 새삼 무엇이 됩니까? 사람들은 겉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됐다 아니 됐다 해서 기뻐했다 슬퍼했다 하지만, 소위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퀘이커가 됐다 해도 내가 나 이상이 될 것 없습니다. 내가 퀘이커가 아니 됐다 해도 내가 나 이하가 될 것 없습니다. 이래도 나요, 저래도 나입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 나대로인데 무슨 문제가 될 것 있습니까? 나는 무엇이 돼서 된 것이 아니라, 됨이 없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위 된다는 것이 그리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또 나는 되자는 것이지 되자는 목적과 그것을 위해 하는 힘씀이 없다면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되고 되고 한없이 끝없이 되자는 것이야 말로 사람입니다. 돼도 돼도 참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을 돼 보자고 시시각각으로 기를 쓰고 애를 쓰는 것이 삶이란 것입니다.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퀘이커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事實)이라 하지만 사(事)는 결코 실(實)은 아닙니다. 나타나 뵈는 것이 참은 아닙니다. 도대체 퀘이커는 (퀘이커만 아니라 모든 참이 다 그렇지만) 돼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일 돼서 될 수 있는 것이 퀘이커라면 나는 퀘이커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돼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돼서 무얼 합니까? 될 수 있는 것보다 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될 수 없기 때문에 되자고 애를 쓰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되자고 애를 쓰는 동안에 되어 진 것이 나라는 것이요, 또 퀘이커일 것입니다.
나는 퀘이커가 되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만 아니라 무엇이 되자고 온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나 위해 있지 내가 종교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면 알고도 모른 말입니다. 옳고도 잘못입니다. 예수가 아닙니다.「나」 입니다. 누구의 나란 말입니까? 아니, 아니. 누구의 나도 아닙니다. 나의 나 너의 나 하는 나는 작은 나 거짓 나입니다. 누구의 나도 아니요, 그저「나는 나다」하는 그 나가 큰 나요, 참 나 입니다. 그 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나는 그 나를 위해 그 나로 인해 있습니다. 나는 그 나안에 있습니다. 혹은 그 나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은 비록 그것이 지극히 큰 종교의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온 우주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나는 그저 살리시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누가 살리셨습니까? 그 자체가 살리신 것입니다. 그가 살렸기 때문에 내가 살았고. 내가 살았기 때문에 살려고 하고.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를 찾습니다.「찾으라 그러면 만난다」했습니다. 누구를 만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만난다고 했습니다. 퀘이커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 전에 맨 첨부터 누가 지어준 것 없이 스스로 자기네를「찾는 자」라고 불렀답니다마는 나도 퀘이커의 일을 알기 전 나 스스로를 역시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왜 퀘이커가 됐느냐고.「왜」를 묻지만 왜란 것이 없습니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에 까닭이 없을 리 있습니까? 까닭을 묻는 것이야 말로 사람입니다. 허지만, 까닭을 물으면 누가 능히 대답을 합니까? 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까닭이 될 수 있습니까? 참 까닭이 되는 것은, 즉 모든 물건 모든 일의 밑뿌리가 되는 것은 대답으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까닭이 됩니다. 삶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죽음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남의 삶 남의 죽음, 즉 참 삶 참 죽음이 아니고 추상적인 삶, 죽음의 까닭은 설명할 수 있지만 내 삶 내 죽음의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첨이 그렇고 나중이 그런데 그 중간을 말해서 무엇합니까? 왜 됐느냐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럼 까닭은 아예 묻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니 물을래도 아니 물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까닭을 묻는다고 꼭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대답하되 반드시 말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다. 싱긋이 웃고 대답 아니하는 것이 참 대답 아니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또 대답을 하는 것은 꼭 물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음 없이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대답 못할 물음이야말로 참 물음이요, 물음 없이 하는 대답이야말로 참 대답입니다. 아닙니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이 참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그런 것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걸어온 내 생애를 돌아보며 스스로 내린 하나의 판단이 있습니다.「나는 실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날껏 해 본 일은 여러 가지 입니다. 그러나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이 없던 어린적은 말할 것 없고, 스스로 나라는 생각을 할 줄 알게 된 때부터라도 이렇게만 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자던 나와 된 나와의 사이에는 너무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나이면서도 또 나는 역시 나였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상은 내게 반드시 없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어리석은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는 이상주의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 보다도 어느 의미로는 도리어 너무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이 어떻게 먼 것, 나와 남 사이가 어떻게 떨어진 것, 앞이 어떻게 될 것이 너무도 빤히 내다 뵈여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할 데로 가고야 말게 합니다. 가 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은 하나도 실현해 본 것이 없고 나간 것은 한 발걸음도 내가 내켜 드리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워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 돼서 됐다기 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발길에 채인 느낌이 거기 있습니다. 두려움과 화평,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랑의 뒤섞인 것이.
까닭은 있다면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은 못합니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까닭은 내 까닭이지 누구의 까닭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의 일이지 누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와 너는 믿을 사이지 알 사이가 아닙니다. 믿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 위해 알자는 것은 거꾸로입니다. 믿음은 영혼의 지성소(至聖所)안에서의 일입니다. 거기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침묵 속에 하는 생명의 불사름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생명의 지성소 안에는 시(詩)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질문,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설명은 현상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은 지성소 휘장 안에 있지 휘장 밖 현상계에 뚫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그 발길에 체인 사람이 어떻게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은 즉음보다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내가 어려서 장난을 해서 손가락을 다처 피를 내고는 싸매주려는 어머니를 보고 보지 말고 싸매 달라고 했다고 어머니가 말해 주었습니다. 내 영혼도 그럴 것입니다. 나를 발길로 차는 것도 하나님이지만 또 그는 눈을 감고 싸매주기도 합니다. 어디 보자 하고 바르집는 것은 싸맬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성소에도 들어가지마는 또 이웃 속에도 사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말을 아니 할 수 있습니까?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믿으려다가 벙어리가 되어 나온 사가랴 마냥,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서투른 시늉으로라도 내가 지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만 나는, 죠지 폭스가 소위 말하는,「각 사람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에 응답」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황해 바닷가 조고만 농촌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때일수록 민중을 건저줄 종교가 필요하건만 그것이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는 유교도 불교도 선도도 있기는 있었으나 모두 굳어진 의식 비뚜러진 전통뿐이지 산 믿음 건전한 도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므로 사회에는 무지와 미신과 간난과 부패 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류 계급은 지위 권력 지식을 이용하여 민중을 억누르고 짜먹기 만 일 삼았고, 무지 무력한 민중은 모든 것을 운명 팔자로 체념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개조해 보려는 의욕은 어디가도 없었습니다. 불교는 목탁을 들고 동냥을 다니는「중놈」으로 표시가 되었고, 유교는 고린내 나는 상투의 썩어진 선비로 표시 되었고, 선도는 산간 주막의 요술쟁이로 표시가 되었습니다. 산엣 사람은 호랑이 승냥이 때문에 떨고 저자사람은 그 보다 더 사나운 양반벼슬아치 때문에 떨었으며, 낮에는 얼굴과 손바닥에 박혀 있는 팔자에 얽매여 우는 백성이요 밤에는 구석마다 골짜기 마다 씨글거리는 귀신에 눌려 떠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일반아 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낫던 그 지방에 있었습니다. 본래 평안도는 한국의「이방 갈릴리」여서 여러 백년 두고「상놈」이라 차별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고장으로 하면 우리나라 역사가 시작된 밑터라고 할 곳이요, 사람의, 기질로도「푸른산 날센 호랑이(靑山猛虎)」라는 이름이 표시하듯이 조상의 옛 모습을 고작 많이 물려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데 이상하게도 버림을 받아왔습니다. 우리 역사에 인간 이성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모를 일은 이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렇듯 천대 받아온 곳인데 그중에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내가 났던 마을은 더 심했습니다. 그야말로「스불론, 납달리」같아서「바닷가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 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밑바닥이니만큼 그 심한 정치적 혼란의 망국 시기에 있어서도 거기는 탐낼 것이 없는 곳이니 평화가 있었습니다. 너도 나도 다 상놈이니 계급 싸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나는 양반 상놈이란 말은 들었지만 양반도 상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종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리해서 나는 타고난 민주주의자가 됐습니다. 한 칠십호 되는 마을 안에 기와집은 꼭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 종가 집이요, 또 하나는 서당이었습니다. 열세 살까지 나는 우리 동리 안에서 술집을 못 보았고 갈보란 것은 열다섯이 지난 후에 장거리에 가서야 보았습니다.
그리나 간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만큼 새로워지는 데는 앞장을 섰습니다. 그것이 둘째 조건인 기독교의 들어옴입니다. 이「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속에 일찍부터「큰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무식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진보적이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일곱이나 여듦 때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일합방이 되기 전입니다. 마을 사람이 많이 기독교 신자가 됐는데 그들은 옛날의「구습(舊習)」을 타파하기 위하여 그중 하나로 정초에 세배 온 아이들을 보고, 옛날처럼 장가를 갔답네, 아들을 봤답네, 해서 축복을 하는대신,「우리나라 독립을 했답네」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감탕물 먹는 곳의 청소년은 난 곳의 이름이「사자 섬」이었던 같이 가장 씩씩한 기운을 가졌었습니다. 나는 그 대열 속에서 자랐습니다.
셋째는 우리 집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글자를 하나도 모르는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은 몰라도 무식하지는 않았습니다.
농사 이치에도 밝았고 사람 사귐에도 밝았고 의리에도 밝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러일 전쟁 때 일본군의 한 부대가 이 마을에 적전 상륙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때 벌써 바닷가에 나가 손을 잡고 일(一)자진을 쳐서 비폭력 반항을 했고, 그 군인들이 여자를 겁탈하려 들자 혼자서 몽둥이를 들고 나서 가엾은 양들을 위기일발(危機一發)에서 구한 것은 우리 할아버지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의업을 했고 말년에는 어머니와 같이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전도와 교육에 힘썼는데 나는 장성할 때 까지 그들이 누구에서나 한마디 시비 듣는 것을 보지 못했고 우리집안에서는 다툼소리가 난 일 없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굿을 한 일도 점을 치러 다닌 일도 없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은 교육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것을「신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학문이 가르쳐 준「신문명」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는 스핑크스였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입니다. 이것은 그때, 적어도 세속적으로는, 꼭 요구에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서양 사람이 불러서「은둔자의 나라」라고 하던 이 나라는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 시대에 들어가야 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빨리 번져 나간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하나는 그것이 민족주의를 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유교 불교의 썩어진 웅덩이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라는 소식은 듣고 가만있을 수 없는 자극을 주는 소리였지만 일본의 압박을 물리치고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그들의 선진국인 서양 여러 강국이 믿는 기독교를 믿어야한다는 생각이 더구나도 강해서 그 때문에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거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드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는 정말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반드시 교회에 대해 악의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후에 끼친 폐단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상하게 우리나라 기독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마는 그 유래는 당초부터 기독교와 민족주의 내지 군국주의가 함께 왔던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열세 살까지, 그때 일본 사람의 간척사업회사가 들어옴으로 이 순박한 농촌의 평화와 순결이 깨지게 될 때 까지는,지금까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교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민족 국가를 사랑하는 것 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옛날 같이 글공부 하여 과거 급제하고 입신출세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습니다. 학문이나 예술이란 것도 후에 가서야 생각하게 됐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 교육이 어떻게 자라나는 마음에 해가 있다는 것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사음식이나 피를 먹어서는 아니 된다 해서 무섭고 걱정되던 것도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부흥회를 하여 사람들이 모두 죄를 회개한다고 울고 가슴을 치고 하는데 나는 눈물도 아니 나오고 맹맹해서 괴롭던 생각, 억지로 울어 보려 해도 아니 되서 어쩔줄 몰라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때만 아니라 후에 장성한 다음에도 나는 남이하는 것같이 산에 올라가 밝혀가며 기도해 보려 애 쓴 적도 있으나 잘 되지 않았고, 통성 기도라 해서 벌집 쑤셔 놓은 듯이 떠드는 것을 들으면 불안한 생각만 났고 손뼉치며 할렐루야 찬송하는 것을 보면 연극 같이만 보였습니다. 아마 그런 점으로 보면 나는 타고난 천성이 퀘이커로 되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아마 어려서 받은 충격 중에 가장 큰 것은 열 살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받은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소학교에서 부터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나무총을 메고 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행진할 때는 북을 치는 고수였습니다. 그때는 지금 같은 동화 만화는 없었고 아이들은 모여 앉으면 서로 얻어들은 민족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운동회라 해서 몇십리 안팎의 학교가 모두 모여 나팔 불고 북치며 연합 운동을 할 때는 정말 춤이 웃슥 웃슥 나갔습니다. 먹지 않아도 기운이 났고 입은 것이 없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늘에 비하면 기술적으로는 퍽 유치해도 훨씬 더 교육적이었습니다. 오늘같이 정치가 학생을 원수같이 아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입니다.「학도생」이라면 네 자식 내 자식의 구별이 없이 그저 눈의 동자 같이 귀여워했고 산신당의 나무 같이 위했습니다. 세상이 참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나던 희망의 어린 순에 하루아침 서리가 내렸습니다. 나라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 어른들이 모여들어 엉엉 울며 하나님을 부르던 광경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물을 닦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공포심이 마음을 덮게 됐습니다. 이때까지 서울서 사다가 아껴가며 읽던 교과서를 감추어야합니다. 순사가 와서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듣는 것은 월남이 어떻게 망하던 이야기 일본사람이 우리나라 노동자를 속여서 멕시코에 팔아서 거기서 어떻게 쇠사슬에 매여 밤낮 울며 짐승 대우를 받으며 일한다는 이야기, 이제 일본이 우리를 모두 화륜선에 싣고 저 태평양 복판에 가져다가 빠쳐 죽인다는 이야기 그런 소리뿐입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불을 끄면 그 그림이 자꾸 눈에 보여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는 낙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면 누구나 의례히 잊지 않고「나라 위해 일하다가 철창에 들어가 있는 동포」와「해외에 나가 있는 지사들」을 보호해 달라 빌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사람들의 생각도 풀이 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장래에 의사로 만들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일본 말로 교육하는 공립학교에 가야합니다. 나는 이때까지 사립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자존심을 꺾고 공립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현실주의가 내 천성을 억누르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장거리에 가니 순진성도 깨졌습니다. 성경 보는 기회도 줄었습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고등보통학교로 간즉 점점 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독교를 아니 믿는 척도 하고, 속으로는 그것이 가책이었고 이제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부득이 학문 길로나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만일 갔다면 나는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는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크게 달라졌습니다. 민족의 자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젊은이로서 그 운동의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물론 표면으로는 실패에 돌아갔습니다. 세계 큰 나라들의 정의감을 믿고, 일어나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될 줄 믿었던 것이, 되지 않았으니 실패라 할 밖에 없습니다. 본래 그 이리떼에 정의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독립은 비록 얻지 못하였어도 깨기 시작한 민중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은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신문 잡지 책 강연회를 통해 문화운동이 맹렬한 형세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에는 한국 사람은 북만주로 몰아내고 사람 살만한 이 반도 안에는 자기네 민족을 이주시키자는 소위 무단정책을 세웠던 일본이 날로 깨어가는 이 힘을 칼만으로는 누르지 못할 줄을 알고 정책을 다소 완화시켜 이른바 문화정치를 하게 됐습니다. 민족의 정신은 어느 정도 올라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 영향을 입었습니다. 그 때 중학교 3학년 끝에 그 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 나는 운동이 가라앉아 학생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때에도 다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뿌리치고 나왔던 일본 사람 앞에 다시 가서 잘못됐다고 빌고 들어가기가 차마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래 다시 봇짐을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수리조합의 사무원이 됐다, 마을 소학교에 선생이 됐다 하며 이태를 지나는 동안에 속이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뭔지 모르는 문제 때문에 번민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보다 전에 열일곱 살 때에 부모의 시키는 대로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내 아내와 결혼했고 시집을 오는 날은 나는 공부에 결석하기가 싫어서 자기 혼자 우리 집으로 오라 했었는데 이 두해 동안 우리는 잠자리에서 같이 운적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앞에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1921년 봄에 입학 시기도 벌써 지난 때에 가서,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감히 다시 공부 계속하겠다는 말은 내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다시 학교에 가라는 허락을 했습니다.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서울을 올라왔으나 벌써 개학날은 다 지났고 평생에 떼 쓸줄 모르는 나는 사무실 접수계에 가서 물어보고 않된다면 그대로 물러 나와서, 그렇게 하기를 몇 학교 하다가 결국 멋없이 집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이 됐습니다. 그때 뜻밖에 내 집안 형님이 되는 석규 목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는 우리 마을에서 맨 처음으로 서울 배재학당에 올라와 신학문을 공부했던 이요, 우리 마을에 기독교를 맨 처음으로 끌어들인 이요, 나를 특별히 보고 규칙으로 하면 열두 살이 되어야 서는 학습을 아홉 살에 서게 했던 사람입니다. 재주가 썩 있는 이는 아니지만 성격이 곧았습니다. 그래서 한 학자인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평해서 우직이라, 어리석은 것이 곧은 법이라 했습니다. 그 일형(一亨)이 아저씨는 인물로 났던 이입니다. 그런 시골구석에 났으면서도 글 잘하고 글씨 명필이고 체통 크고 기백 있어 농민혁명에 지도자 노릇 했습니다. 그때 남들이 다 잠자고 있는 때에 그는 가산을 팔아 신학문을 공부시키기 위해 큰 아들은 서울에 작은아들은 일본 동경에 사촌은 노령, 미국에 보냈습니다. 나는 글의 귀한 것을 그에게서 알았고 점잖은 것이 어떤 것임을 그에게서 보았습니다. 우리 가문이 왼통 그 지방에서 민족주의 애국운동의 중심이 되게 된 것은 주로 그의 영향이었습니다. 하여간 그 석규 목사를 뜻 밖에 서울서 만났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우직(愚直)식으로 여러 말 할 것 없이 정주 오산학교로 내려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늦게 늦게 스물한 살에 남 같으면 대학 졸업을 할 때에 중학교 삼학년엘 들어갔습니다.
사람 많은 데는 무서워서 가지도 못하고, 어른보고 인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부끄러워 못하며, 바닷가에서 자랐으면서도 물에 들어가면 돌이요, 서울에서 늙으면서도 아직도 으리으리한 상점엔 들어가 물건도 못 사는 나에게 어느 것은 하나님의 발길 아닌 것이 있으리만, 이 오산학교에 간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된 일입니다. 그때까지 오산학교 있는 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내 나가는 길은 지금까지 뜻하지도 않았던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신 학교입니다. 처음부터 이 학교는 글을 가르치기 위해, 입신출세하는 길을 닦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문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 다. 당시에 얻을 수 있는 학문을 앞장서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것은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사람을 만들고 나라를 건지기 위해 세운 학교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서 된 것이었습니다. 남강 선생은 전반생을 장사로 지내다가 사업에 실패한 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깨닫는 바 있어 뜻을 결정하고 이 학교를 세워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이것을 경영하며 교육에 힘썼습니다. 도산의 연설이 무엇입니까? 태평양을 끊고 건너오는 새 시대의 사조였습니다. 도산은 그때 민족주의 민주주의가 한창인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넘어지기 직전인 나라를 보고 가슴이 타서 그 연설을 한 것입니다. 시대의 부르짖음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대세만 가지고는 일은 되지 않습니다. 거기 반드시 인격이 있어야 참 창조적인 운동이 일어납니다. 시대를 말하면 물결 높고 바 람 강한 바다 같습니다. 인격을 말하면 거기 뜨는 배입니다. 바다는 힘 있지만 그 힘은 반드시 사람을 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이기도 합니다. 그 힘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려면 튼튼하고 정밀하게 된 기계를 가지는 배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바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치나 알려면 오늘의 사회를 보십시오, 근대화라는 거센 시대 물결에 죽고 병신 되는 혼은 얼마나 많으며 나라의 정신은 얼마나 망가지고 있읍니까? 인격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무엇입니까?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시대를 바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심정입니다. 그 심정이 어디서 나옵니까? 공(公)에 살자는 정성에서 나옵니다. 서양을 보고 온 사람이 안창호만이 아니로되 어째서 안창호의 연설만이 감동적이었습니까? 그의 인격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산학교가 된 것도 시대의 영향이지만 그것은 남강의 인격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비 뒤에 버섯처럼 일어났다가 버섯처럼 또 쓰러져 버린 많은 학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오산학교는 남강의 인격의 나타 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요, 정신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오산을 살았습니다. 학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학생과 같이 자랐습니다. 선생 학생이 조밥 된장국에 한 가족이 되어 같이 울고 웃던 창초의 그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 불도가니었습니다. 그 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그가「이승훈이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줄 알았더니 이제 죽을 자리 얻었다」 하며 무릎을 치고 일어서서 동서남북으로 분주하여 3.1운동을 일으키자 일본 사람은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고 학교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칼에 찍히고 불에 타는 법은 아닙니다. 정신은 불사조(不死鳥)입니다. 오산학교는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내가 갔던 때는 옛 모습은 거의 없었습니다. 집도 옛집이 아니고 임시로 지은 초라한 초가에 책상도 걸상도 없는 마루바닥에 학생들이 모여 있고, 선생도 옛날 선생이 아니요 새로 모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오산의 전통이 붙어 있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흙속에 냄새가 남아있었고 뒷산 솔바람 속에 그 울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까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하던 무엇이 거기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정말 참 교육인가 했습니다.
나는 어느 사인지 모르게 이 담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국문을 배웠지만 한글의 의미를 나는 이때까지 몰랐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그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초등소학(初等小學) 유년필독(幼年必讀)에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하는 민족의 영웅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날껏 한국, 한국민중, 한국문화, 한국의 마음을 생각해 본적은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모습이 어렴풋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찾기 시작했습 니다. 나는 이때까지 관립 학교에 다닌다고 자부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았습니다.
오산 이년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생각하는 인생을〉뒤 늦게나마라도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소질이 내게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열 살이나 된 때인지 사랑에 오셨던 일형(一亨)이 아저씨가 일러주던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사람이 하는 것 없이 썩어서는 못쓴다는 글을 지어 바쳤더니 선생이 굉장히 칭찬을 해 주던 기억이 있고, 구약 창세기의 천지 창조 이야기를 배웠는데 그럼 하늘 땅 있기 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허공일 것이다. 그럼 허공도 있기 전에 어떤 것일까 생각해도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하다가 만 기억이 있 습니다. 후에 와서 생각하면 내가 왜 더 파고들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도 있지만 나는 그 정도 밖에 못되었습니다. 그래도 날뛰기 보다는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키워 줌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공부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 할 때에 포프라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속으로 바닷가로 지향 없이 헤메인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산에 오니 거기 유영모 선생이 교장으로 오셨습니다. 말로 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인생이란 생각, 생명이란 생각, 참 이런 것이 모두 다 그때에 시작됐습니다. 톨스토이 이야기 노자의 이야기를 선생님에게서 첨으로 들었습니다. 일본 말은 보는 때이므로 일본책으로 로맹 롤랑,베르그송, 입센,브레이크…… 을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읽은 것도 이때였고 타골의 기탄자리를 보는 동시에 웰즈의 세계 문화사 대개를 학생 경제에도 맞지 않게 사서 읽었습니다. 이들이 다 오늘까지 잊지 못하는 스승이요 벗이 됐습니다. 더구나 이 나중 것은 내게 큰 영향을 주어서 나로 하여금 역사에 취미를 가지게 했고 세계국가주의와 과학주의 사상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 오산 시절부터 나는 옛날 같이 남을 따라서 미리 마련된 종교를 믿기 보다는 좀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시작 됐습니다. 거기서 유 선생님의 영향이 크고 또 그 시대의 까닭도 있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첨에는 좋은 듯 했으나 나중에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났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을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올라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아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굳어지면서 겉으로 보기에 어느 정도 부드러운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의 지사(志士)라던 사람들이 많이 변절 타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는 반면 종교는 점점 현실에서는 멀어져 오는 세상주의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도 많이 그랬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서 교회에 차차 가기가 싫었고 점점 비판적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1923년 봄 나는 대학 공부를 하려 일본 동경으로 갔는데 그해 9월 초하룻날 큰 지진이 일어나 동경시의 3분의2가 하룻밤 사이에 다 타버렸습니다. 그때 일본은 전쟁 이후의 불경기에 빠져 있었는데 이 틈을 타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민심 수습책으로 무죄한 한국 사람을 희생시키기로 간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러 떠도는 말을 만들어 퍼뜨려서 한국 사람이 폭동을 계획하며 강도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약을 친다고 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후 생활고에 몰리는 우리 노동자는 일본으로 많이 갔습니다. 단기한 일본 민중은 그 책략에 속아 흥분했습니다. 일본도 대창 몽둥이를 들고 한국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여름 방학이라 학생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주로 희생된 것은 불쌍한 노동자였습니다. 못 하도록 금하는 것을 우리 사람들의 손으로 조사한 것만도 5천명에 달했습니다. 나는 한주일 동안을 꼬박 문 밖에도 못 나갔고 방안에 있었습니다. 그 피 비린내 나는 회리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몇 달 동안은 한국 학생은 하숙을 들기도 어려웠습니다. 길가에 지나가노라면 장난하는 어린이들의 놀음소리도 한국사람 사냥을 하고 있으리 만큼 살벌한 기분이었고 학교 선생이 교실에서 한국 학생이 있는데도 내놓고 나도 조선사람 사냥을 했노라고 자랑 삼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은 불살생을 강조하는 불교의 나라요 동경 안에는 기독교도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상당한 신학교도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하룻밤을 경찰서에 잡혀 가서 새고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감옥 길의 입학식이었습니다. 하룻밤 지나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제 일본 민족이란 어떤 민족인지 알았다기 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런 것일진대, 지식인 상류사회란 것이 이런 것일진대,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도덕으론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 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 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 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의 썩어져 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 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학생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 머리를 길다랗게 기르고 스데기라기 보다는 몽둥이를 들고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주의자들끼리는 민족의 차별 없이 일본 사람 조선 사람이 서로 동지 노릇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내 친구도 나를 설득시켜 사회주의로 끌어가려고 기회만 있으면 힘을 썼습니다. 나는 오래 고민 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나는 뜻하지 못 했던 빛을 만났습니다.
1924년 나는 동경고등 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서 떠날 때는 한 때 미술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습니다. 나는 거기 상당히 취미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정 했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 주려 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겨울도 지나가고,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려 나섰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반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 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선생님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어느 날 우치무라 선생의 시를 소개해 주시다가 그의 유명한 백치원(白痴院)에서의 일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어느 때 펜실베니아주의 어떤 백치원에 있은 일이 있는데 거기 아주 악질적인 백치인 대니라는 아이가 있어서 어느 일요일에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규칙으로 하면 마땅히 저녁 아니 주는 벌을 씨워야겠으나 거룩한 날에 차마 할 수 없음을 생각해서 자기 밥을 대신 그에게 주고 자기는 굶었으므로 그것이 그 백치원의 전 학생을 감동시켰고 그 할 수 없던 대니로 하여금 해가 가도 아니 잊고「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하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그것을 듣고 감명 깊어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살아있는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찌무라가 살아 있어 성경 강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나의 놀램, 또 기쁨! 물론 위대하다고만 들었지 그의 신앙사상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다만 존경하는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고로 무조건 믿고 존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후 곧 김교신의 소개로 그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를 무교회 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홋카이도 대학 출신으로 저「얘들아 야심을 가져라(boys be ambitions)」로 유명한 월리암 클락 (William S. Clark)의 남긴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입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한 일이 있었고 그의「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됐는가」하는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변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한 사무라이 기질에 자유 독립의 정신이 강했던 그는 교회 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했는데,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 한다고 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무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인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정통적인 신앙인데 있습니다. 한때는 신문기자로 이름을 날린 일도 있고 천황의 칙어에 대해 경례를 정중히 하지 않았다 해서 국적으로 몰렸던 일도 있습니다. 저서도 퍽 많고 지금 일본의 정신적 지도층에는 그의 제자가 많고 우리나라에서도 표면으로 무교회라고 시비는 하면서도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날 그는 예레미아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이 강한 그는「이것이 참말 애국이다」하면서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지금도 그 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며 계속해 나가는 동안 오랜 번민이 해결 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천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 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을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 둘 때 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는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귀절을 읽고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날이 못 되어 나는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 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왼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민족이요, 둘째는 신앙이요, 셋째는 과학입니다. 민족 없이는 나 없으니 나는 민족적 전통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내 신앙적 양심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나는 또 현대인으로서 실험을 토대로 하는 과학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나 민족 전통을 위해 과학적 진리를 꾸부리는 것은 비겁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사 생각 없이 진리 그 자체를 위해서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가 낡은 전통이나 교회 신조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일 지옥엘 가야 한다면 나는 그까진 종교나 민족은 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 했습니다. 그러니 그 세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역사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가르쳐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고난의 메시야가 만일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 될 수는 어찌 없겠느냐?」나는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의 의미는 될씬 더 깊어지고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건마다에서 전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얻어 교수를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고난의 역사」입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기조(基調)를 고난으로 잡고 그 견지에서 모든 사건을 해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이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 끼리 또 모여서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해 계속 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나오게 되려 할 때에 여섯이 의론하고 동인제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우려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 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산 10년 동안 나는 대체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차차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여섯이 신앙동지였을 때 우리는 다 교파적인 것을 싫어하여 무교회주의란 말도 잘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을 너무하여 하나의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쨌는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그러노라고 해도 밖으로 부터 신앙 교만이라 고답주의 (高踏主義)라 하는 평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차차 사람 수가 늘어감을 따라 그 중에는 우치무라를 존경하는 나머지 아주 그 숭배자가 되어 버 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 반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남이 그러는 꼴을 보아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 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 땄는데,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촛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 해석의 참 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힘썼습니다. 언젠가 우치무라 선생이 자기 제자들 보고「자네들은 밤 낮 성서 성시 하기만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넓게 보지 않으면 않돼」하던 말이 늘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넓게 독서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해석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노라니 의문이 차차 생겼습니다. 전에는 문제없는 것 같던 것들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그 하나는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 의지를 가지는 도덕 인간에게 대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대한 복음주의 신앙의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전에 선생이 해 주었던 말을 잊어서가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거기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깊은 체험 보다는 감정의 도취인 것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과를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 낫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 서로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파고드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 됩니다. 그러면 사색하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르는 어린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서는 행동하는 도덕 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두 미신에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남 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 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해 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이 없이 대신해 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이 못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속에 감격하는 사람은 대개는 인적의 개변, 곧 죄의 소멸은 없이 그저 기분으로만 감사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 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 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 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서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끝이 없는 문제지만,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내딴으로 풀어버렸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딴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곧 내 육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 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자기중심적인 감정뿐이요, 도덕적으로는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죄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이러한 판단을 내리워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치무라의 신앙과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쩐지 선생에 대한 반역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강한 것이 내속에서 나를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선생을 차라리 배반할 수는 있어도 나는 나 자신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사제의 의리라는 감정에 몰려 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구태여 남에게까지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새삼스러이 나는 무교회는 아니라, 우치무라의 제자는 아니라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는 생각이 반드시 선생과 같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생각이 아무리 달라졌더라도 나는 아무 사사 마음에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담 가서 다시 달라질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진리에 충실하고저 하는데서 나온 변화였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내 믿는 바로는 이렇게 나는 나에 충실하는 것이 도리어 우치무라의 정신이요, 그를 스승으로 대접하는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로 몇 해가 지나갔습니다.
씨알의소리 1970.4월 창간호
저작집30; 7-15
전집20; 4-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