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난을 벗어난 일최공
6․25때 일이다. 경인년 5월 5일(단오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상면(上面) 청우산(淸雨山) 청우사의 불사 청을 받아 갔다가 5월 11 일에 청우사를 떠나 나의 거주지 파주군 안동포교당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청평(淸平)에 당도하니 어제 새벽 (6·25음력 5· 10)에 이북 괴뢰군이 가평읍에서 5리 되는 데까지 침입해서 작전중이라 하면서피난민들이 인산인해로 밀려서 서울 방면으로 향하여 가기에 나도 피난민들을 따라서 트럭을 얻어 탔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내려서 도보로 고생하고 근근히 서울 안국동 선학원(禪學院)까지 가서 밤새도록 총소리에 잠 한숨 못자고 있었다.
6월27일 새벽에 비로소 선학원 문밖에 나가서 알아보니 괴뢰군들이 벌써 시내 각처에 들어와서 요소마다 점령하고 있고 인심은 극도로 혼란해 갔다.
나는 이날 오전에 인왕산에 올라가서 괴뢰군과 국군들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는 것을 보고 비행기가 한강철교를 폭격하여 파괴되는 것도 구경하였다. 6월 28일에 춘성스님(현재 열반하셨다)과 작반(作泮)되어 선학원을 떠나 광주군 봉은사 견성암 (비구니 선방)으로 건너가서 최혜암 스님과 이수옥 스님 등을 만났다.
그래서 당분간 피난중인데 6월29일(음력 5월 15일) 저녁 예불을 하고 나서 총소리가 너무 요란하게 가까이 들리니 위험하므로 내가 대중 스님들에게 권해 말하되 ,
「자! 일이 이와 같이 다급해졌으니 별 도리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지극히 부릅시다. 」
하고 혜암, 춘성스님 나 셋은 객실로 돌아가서 나는 관세음보살만 일심으로 속으로 부르고 누워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누가
「뒷방으로 (춘성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가거라.」
하는 말이 들리기에 내가
「왜 뒷방으로 가라는가?」
의심이 나서, 앞방과 뒷방 사이에 큰 기둥이 서 있으니 그것이 의지가 될 것이니 곧 옮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곧 옮겼다. 내가 들으니 옆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므로 춘성스님에게
「스님도 어서 누우세요.」
하고 권해도 스님은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모양인지? 그대로 앉아 계시더니 땅땅땅하는 총소리가 크게 두 번 났다.
그제서야 내옆에 누워 계시더니 귀먹은 혜암스님이 놀라면서<이크>하고 일어나시고 춘성스님도 <이크> 하더니 옆으로 드러눕는다.
우리 있는 집 밑에 큰 방에서 어떤 비구니스님이 소리를 높여서 군인들에게 향하여 반항하되,
「아무 일 없이 수도만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왜 총질을 합니까?」
한다. 이 말을 듣고 마루에 나가 서 있으니 괴뢰군 대장이 내가 먼저 누웠던 방을 향하여
「이 방문 좀 열어라.」
내가 열어 보이니 아무도 사람이 없으니까 또 다시 묻되,
「이 절에는 국방군이 없느냐?」
「한 사람도 없소.」
하니까 대장이 줄지어 있는 군인을 향하여
「사격중지(射擊中止)」
하고 명령하여도 멀리 있는 군인들은 아직도 못 듣고 여전히 사격하고 있으니 대장이 또 다시 말하되 「사격중지!」
하고 큰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알아듣고 중지한다. 대장이 명령하되,
「돌아 앞으로 갓!」
하니 괴뢰군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그때 내가 군인들을 바라보니 눈은 사람잡아먹은 호랑이 같고 얼굴은 독기가 심히 나타났다.
내 생각에
「이북서 떠나 남침하여 오면서 사람도 많이 죽였고, 고생도 많이 해서 얼굴들이 그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먼저 누웠던 방에는 총알이 두 개나 벽을 뚫고 지나갔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더라면 그 총알에 맞아 죽었을 것인데 관세음보살을 부른 공덕으로 뒷방으로 옮겨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천행 만행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알아보니 괴뢰군 삼 백 명이 따발총(70방 .나가는 총)으로 정오 11시부터 저녁 까지 7 · 8시간을 두고 총질을 했으나 절에 스님 한분 다친 일도 없고 법당과 큰 방의문과 벽이 벌집 구멍같이 뚫렸으나 불상이나 보물 하나 상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일반은 참으로 불보살님의 신력과 도량신장들의 옹호하는 힘의 놀라움에 감격하였다.
<속편 영험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