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7~8코스 (십리대숲, 대왕암)
이숙진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꿀잠 자고 난 아침 6시! 일출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시각이다. 어제 창문을 열고 바다 조망을 마음껏 즐긴 여운으로 커튼을 헤쳐 보니, 바다는 보이지 않고 그저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가져간 옷은 모두 껴입고 숙소 앞 진하해수욕장으로 나간다. 날씨가 흐려서 해돋이 보기는 글렀다.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면 나의 초현실적인 그리고 극사실주의 소원을 빌어볼 메시지를 준비했는데, 소용이 없게 되었다. 기다리다 무안하여 밀려드는 파도에게만 앵글을 맞춘다.
관광지에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다. 아주 후덕하게 생긴 여사장님이 친절하다. 대구탕 2인분과 생선구이 2인분을 주문했다. 대구탕을 넷이 먹어도 충분하게 준비해서 많이 드시란다. 생선도 가자미, 조기, 눈볼대(빨간 고기)가 푸짐하게 나온다. 반찬이 아주 맛깔스러워 칭찬 일색이니, 파김치와 갓김치는 어제 올케가 해 보낸 것이라고 한다. 역시 후덕한 사람은 도움도 많이 받는다. 올케가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친정도 잘 보살피는 것 같다.
오늘 일정이 국가 정원 십리 대숲이라고 했더니, 버스 시간표를 알아봐 준다. 점심 단체 손님이 있는 것 같은데, 일일이 인터넷 찾아서 알아보고 여유 있게 가라고 정류장까지 일러준다. 감동하여 홍보해 주려고 가게 명함을 챙겼다. 진하해수욕장 가시는 분은 빅토리아 호텔 근처 <삼시세끼> 생선구이 전문점(052-239-7366)으로 가면 실패하지 않는다. 배달도 된다.
사장님이 일러 준 버스 정류장에는 다른 일행도 와그르르한다. 그들도 해파랑길 걷느라고 집 나온 지 6일째란다. 정보 교환하고 왁자하게 떠들다가 목적지가 달라서 헤어졌다. 국가 정원 대숲에 가는 둑방에 올라서자 벌써 벚꽃 터널이 여의도 윤중로 못지않게 조성되어 있다.
국가 정원에는 징검다리가 운치 있게 기다리고, 전체 목단을 심어서 키우고 있다. 아마 오뉴월이면 만개하지 싶다. 그때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십리 대숲으로 들어가니, 키 큰 우듬지는 보이지도 않고 빽빽하게 들어 찬 대숲에 놀란다. 이 대숲이 십 리나 된다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행 중에는 다음 일정은 생각하지 않고, 여기서 좀 더 머무르자고 보챈다. 공기가 다르긴 하다. 가족과 와서 김밥 먹고 싶다는 분, 다음에 와서 종일 머물겠다는 분, 뭐 결론은 이 대숲이 엄청나게 매력이 있다는 현상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벚꽃 둑방에 올라서니 여기도 좀 더 걷다 가자고 애틋해한다.
우리는 일산해수욕장을 지나 대왕암 공원에 도착했다. 일단 순두붓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공원으로 진입했다. 입구부터 벚꽃이 흐드러졌는데, 진해 벚꽃축제인 줄 착각하게 된다. 사이사이 동백꽃이 아직도 볼을 붉히고 있다. 이 기막힌 봄의 꽃 잔치를 어찌할 것인가.
‘매화 년이 동백과 바람이 나니 목련이 질투한다.’ 라고 하더니, 똑같은 데자뷔 현상이 일어난다. 벚꽃 먹는 청설모, 지지배배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 동백, 개나리, 수선화, 자목련, 모두가 어우러져 바람 따라 흔들린다.
일행 중 한 분이 “나는 지금 천국에 와 있다.”라며 팔을 들어 아리랑 춤을 추자 모두 따라서 어깨춤을 들썩인다. 이들이 가장 행복할 때 하는 몸짓이다. 동백꽃은 진자리도아름답다. 사뿐히 내려앉아 카핏처럼 바닥을 꾸며준다.
꽃 잔치가 아니라 봄의 전쟁 같다. 문득 오세영 시인의 '봄은 전쟁처럼'이란 시가 떠오른다.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아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드디어 대왕암에 이르렀다. 기암괴석과 주상절리와 해송이 어우러진 바다에 바람이 몰아쳐 파도 심술이 장난이 아니다. 일제히 후드를 올려 모자위에 고정한다. 그냥 바위라고 하기에는 명칭이 빈약하니 대왕이라고 붙인 모양이다.
출렁다리를 건너는데, 바람이 너무 몰아쳐서 날아갈 것 같다. 난간을 꽉 잡고 후들후들 떨며 겨우 통과했다. 대왕암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데, 벌벌 떨며 난간만 꽉 움켜쥐고 웃음도 안 나온다. 이 바다와 이 바위와 이 해송을 이 파도를 어찌 두고 떠날 수 있으리오. 이 꽃길의 유혹을 어찌 뿌리치리오.
우리는 17:13분까지 울산(통도사)역에서 KTX를 타야 한다. 역까지 가는 리무진을 타고 편안하게 이동한다. 왜 통도사를 역 이름에 끼워 넣었는지 의아했는데, 울산시에서도 엄청나게 변두리에 있는 통도사 부근에 있어서다. 겨우 20분 전에 도착해서 플랫폼에 내려갈 수 있었다. 울산역에서 타실 분은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실수가 없겠다. 이박 삼일의 여정을 마치고, 다음 코스 경주를 기약한다.
첫댓글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즐거움에는 정신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이 있는데 정신적인 즐거움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듣고 머리로 생각하게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같아요.보각해 작가님의 기행문을 보노라면 보고 듣고 생각하게하는 세가지가 들어있어 마치 솔거가 그린 한폭의 사실화를 연상케 해요.
봄이란 젊을때는 늘 오는 것이라 생각.큰 감흥이 없지만 봄의 시간이 몇번 남지 않은 후기 노인들에게는 경이로움으로 다가오지요..지나가면 새로운 슬픔으로 전환되는 봄의 함성.동행하고싶은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글과는 획을 달리하는 단가 한편
<동해바다의 하얀 모래밭에서
게 한마리와 노닌다>
*이시가와 다꾸보꾸의 한줌의 모래*
<나무그늘아래 나비와함께 앉아있다. 이것도 전생의인연~~~>
-이싸 -
격조있는 댓글이 본문을 한층 빛나게 합니다. 그저껜 석촌호수 갔더니, 벚꽃이 만발했더군요.
평일에 인파가 발디딜틈이 없으니, 인구절벽이란 말을 무색하게 하더군요.
젊은이들이 저렇게 놀고만 있으니, 이나라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되더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