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빠져드는 차의 매력 / 정선례
강진에는 약 10만 평의 태평양에서 조성한 월출산 다원이 있다. 수천 년 동안 풍화 風化를 겪은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솟아 있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수려함을 자랑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있어 길을 나서면 볼거리가 지천이다. 곡우 무렵에 그곳에 가면 어린 새순이 무수히 올라오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18년 유배 생활 중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6년 동안 오솔길을 오가며 우정을 나눴다. 봄이면 동백숲을 함께 걸었고 만경루에 올라 구강포 앞바다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그는 스님의 소개로 해남 대흥사 초의스님과 교류하며 더욱 차 茶의 매력에 빠진다. 유배지의 자신을 불행한 처지를 잊고 학문연구와 6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힘은 맑고 향기로운 녹차가 그의 곁에 항상 함께 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강진 백운동 주변에서 나는 차를 구해 마셨다고 한다. 백운동 옥판봉에서 나는 차라는 뜻의 백운옥판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 상표이다. 깊은 산 대나무 숲 오래된 차나무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차다.
이 지역은 초의와 다산의 영향을 받은 곳답게 곳곳에 녹차 나무가 자라고 차를 즐기는 문화가 있다. 해마다 지역에서 열리는 차 품평대회에 출품 준비하느라 산으로 막 돋아난 야생 찻잎을 채취하러 나간다. 차나무를 심고 찻잎을 직접 따서 만들고 우려 마시지만 나는 그 정도 실력은 안 된다. 곡우 이전에 겨울을 이기고 올라온 첫 잎을 따서 만든 우전차를 시작으로 참새의 혓바닥만 한 찻잎을 딴다. 산기슭에 자리한 우리 집 주변에는 밤과 낮의 기온 차가 크고 안개가 많다. 그래서인지 향이 은은하고 떫은맛이 덜하다. 취나물이나 고사리, 쑥처럼 찻잎도 깊은 산중에서 채취한 야생 찻잎을 덖어야 깊은 맛이 나는 것 같다. 곡우 穀雨 전에 따는 차를 우전이라 하여 가장 맛있다. 수확량이 적어 선물용으로 사용되며 마시고 난 뒤에도 맛이 순하고 입안에 향이 은은하게 남아 고급으로 인정받는다. 그다음에 따서 만든 차를 작설차라고 한다. 찻잎이 뾰족한 참새 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녹차는 따는 시기별로 맛과 향이 달라서 적기에 수확해야 품질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따는 시기가 이를수록 맛이 부드러운데 뭣을 하느라 올해도 늦은 감이 있다. 올해는 4월 20일이 곡우이다. 모든 일 뒤로 미루고 곡우전에 찻잎을 따서 우전차를 만들어야 하는데 우전차는 물 건너 가버렸다. 갓 돋아난 새싹을 부지런히 따서 작설차라도 만들어야겠다.
차 맛은 계곡이 깊어 물이 흐르고 척박한 땅에서 야생으로 오랫동안 자란 차나무에서 따야 자연의 풍미가 있다. 눈으로 보고 마시기만 했던 녹차를 농촌에 살면서 씨를 심고 가꾸어 수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녹차 따기이다. 햇살 좋은 날 이른 아침에 바구니를 끼고 새순에서 올라온 새잎을 따는데 흐린 날은 하지 않는다. 차는 따는 것부터 까다롭다. 이슬이 맺힌 찻잎이 최상품의 차를 만드는 재료가 되므로 열 일을 뒤로 하고 이른 아침에 나가야 한다. 멀리서 멧비둘기 우는 소리 들으며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찻잎을 톡 토독 톡 따다 보면 아침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집에 돌아와 그늘에 서너 시간 자연 바람에 말려 이물질을 제거하여 말린다. 찻잎의 양과 상관없이 그날 딴 찻잎은 면 보자기 그늘에서 서너 시간 시들기를 한 다음 당일 덖어야 한다.
우리집에는 까만 무쇠솥이 아닌 커다란 백솥밖에 없어 작아도 차라리 바닥이 두꺼운 솥이 나을 것 같다. 미리 달궈진 압력솥에 찻잎을 붓는다. 센불에서 타지 않도록 빠른 손놀림으로 쉼 없이 위아래로 뒤적이기를 반복한다. 솥 내부가 매끄럽고 두꺼워야 고르게 덖어진다. 차에 냄새가 배어들지 않게 덖는 중에는 주위에서 음식도 하면 안 된다. 면장갑을 끼고 휘적휘적 저어 타거나 눌지 않도록 고루 뒤집어야 한다. 덖어진 찻잎을 면 보자기나 대바구니에 쏟아 낱낱이 탈탈 털어 열기를 빼준다. 김을 충분히 빼줘야 색감이 누래지지 않고 파릇하다. 그런 후 뭉쳐 궁굴리며 두 손으로 밀고 주물러 수분을 균일하게 해주며 상처를 내야 차 맛이 좋고 모양이 살아있다. 이런 과정을 아홉 번 반복한다고 하여 구증구포다. 아홉 번째 덖을 때는 사각사각 소리가 나면서 마무리 덖음이다. 마지막으로 켠 듯 만 듯한 불에 두세 시간 손으로 계속 휘저으며 가향을 해야 비로소 완성된 차가 마무리된다.. 그 과정을 거쳐야 향도 깊어지고 성질이 차분해진다. 이렇게 만든 차는 밀봉하여 몇 년을 둬도 변하지 않아 최고급으로 쳐준다.
청정지역에서 채취한 찻잎과 만드는 사람이 일체가 되어야 맛과 향 색이 맑아야 좋은 차가 나온다. 작업 내내 향이 올라와 고단한 과정을 잊게 했다. 녹차를 떫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좋은 찻잎을 제 시기에 따서 잘 만들면 맛이 부드럽다. 찻잎과 불, 정성이 만나 비로소 우리가 즐겨 마시는 한 잔의 차가 만들어진다. 100°c 끓인 물을 다관과 찻잔에 부어 데워지면 그 물을 따라버리고 다시 다관에 물을 부어 80°c로 식으면 찻잎을 넣고 3분 정도 우린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도록 하여 연하게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면 가슴에 차 맛이 스며들어 더 좋다. 좋은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 하루였다.
첫댓글 찻잎 따는 소리가 '톡 토독 톡' 나는군요. 강진에 가면 구증구포 차를 구입 해 마셔봐야 겠어요. '덖고 주무르고 탈탈 털어 말리고'를 아홉번! 그러네요. 쉽게 되는 것이 없네요. 명품 차가 되기까지를 생방송 보는듯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창밖의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며, 따뜻한 차 마시면 글도 잘 써지겠네요.
정선례 선생님은 정말 부지런 하세요. 그 많은 농사일을 다 하시고 거기에 차도 덖고 글까지 쓰시니 만능입니다.
우와 차의 달인이셨군요.
차 맛은 모르지만 정성이 담기는 것은 알지요.
강진에서 찻잎 따는 재미에 푹 빠졌던 일이 생각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세요!
청정한 곳에 자라는 차나무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더하여야 좋은 차가 되는 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강진 사랑이 지극한 줄은 알았지만 차에도 일가견이 있었군요.
대단합니다.
우리 집 밭에도 녹차 새순이 엄청 올라옵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기가 미안할 정도로 어여쁘네요.
봄은 가을의 열흘 맞잡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할 일이 지천으로
완두콩, 강낭콩 밭매기, 감자 붓하기, 축사일에 뭣부터 해야 할지 사방에서 손을 부르네요.
주말에 따서 바닥 두꺼운 냄비(압력솥이 제격)에 덖어 만들어 보세요.
처음에는 다 어설프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차향이 올라와서 기분 좋습니다.
자신 없으면 조금만 따서 덖어보기를 권합니다. 뱀 나왔으니 장화 신으세요,
삐죽 솟은 세 잎만 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