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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
본문 갈 1:11~17
갈 1: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밝혀드립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13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적에 한 행위가 어떠하였는가를, 여러분이 이미 들은 줄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또 아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었습니다. 15 그러나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16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11.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っきり言います。わたしが告げ知らせた福音は、人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12. わたしはこの福音を人から受けたのでも教えられたの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によって知らされたのです。13.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かつてユダヤ教徒としてどのようにふるまっていたかを聞いています。わたしは、徹底的に神の教会を迫害し、滅ぼそうとしていました。14. また、先祖からの伝承を守るのに人一倍熱心で、同胞の間では同じ年ごろの多くの者よりもユダヤ教に徹しようとしていました。15. しかし、わたしを母の胎内にあるときから選び分け、恵みによって召し出してくださった神が、御心のままに、16. 御子をわたしに示して、その福音を異邦人に告げ知らせるようにされたとき、わたしは、すぐ血肉に相談するようなことはせず、17. また、エルサレムに上って、わたしより先に使徒として召された人たちのもとに行くこともせず、アラビアに退いて、そこから再びダマスコに戻ったのでした。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금 재확인하였습니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교리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일리 있는 이야기로 우리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사악한 세속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시선들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살게 하시고, 인생을 가장 복되게 살게 하시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복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주님을 바라보며, 그 은혜 속에 완전히 잠겨서 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의 시작과 원천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앞선 9절, 10절에서 강조하며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복음은 사람들의 사상이나 아이디어, 혹은 노력과 실력을 근거로 세워진 단순한 종교적 교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영생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담백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와 유익함과 형통의 축복을 누리는 길에 대해서 소개하고 선물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전도는 포교나 강요, 혹은 설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로 전파되고 전달되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됨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복음전도의 열매는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확신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우리가 지금 강해설교(講解説教)로 매주 나누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결론부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로 그리고 우리를 그 가지로 비유하셨는데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그런데 이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역할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는 방식 자체로 전하고, 전도하는 복음은 우리의 노력과 재력과 실력의 정도에 의해서 부흥하거나, 쇄락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복음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고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경험을 통해 계시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13절 이하에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입장에서 경험한 기록한 것이고요. 누가의 글로 설명된 곳은 사도행전 9장 1절~19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으니 꼭 댁에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새번역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말 개역성경과 일본어 성경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표현이 바로 이 ‘계시’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성경은 곳곳에 이 계시를 고백하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계시의 경험들도 많이 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세속적인 상식의 영역에서 이해하는 ‘계시’와 성경이 말씀하시는 ‘계시’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계시’라고 하면 어떤 환상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을 통해 신령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깨우쳐 주는 것으로만 말합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또한 이성을 초월하고 이해와 납득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모든 경험을 뜻합니다. 이 때 경험하게 되는 일이 환상적이고 이성을 초월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빛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것이나, 모세가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했던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혹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성경에서도 많은 경우 환상적이고 기적적이며 이성을 초월한 방식으로 계시가 나타나기는 합니다.
그와 더불어 성경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계시를 나타내시기도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아기로 태어나신 사건과 경험은 결코 환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탄생을 알려 준 별의 이동은 천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세는 친모가 아기를 바구니에 넣고 물에 띄워 보낸 것을 애굽의 공주가 발견함으로 그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하며 겪었던 수많은 박해의 경험도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살아계심, 그리고 역사하심을 드러내고 있기에 계시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경의 계시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반드시 환상적이고 기적적이며, 꿈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과 일터에서 느닷없이, 혹은 매우 소소하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방식으로도 주님은 당신의 모습을 신비롭게 나타내 주고 계십니다.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은 주변의 모든 여건과 형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발견하고 경험해 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매일 아침 동편에서 떠올라 서편으로 지는 태양의 움직임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시고 계심을 체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매일 밤에 잠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시편 기자의 글도 실은 하나님의 계시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성경적인 계시는 단지 상상을 초월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방식의 놀라운 일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을 포함하여 매우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감하게 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인 계시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모든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입장에 서 있었는지를 말하는데요. 복음의 박해자였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사악한 그에게도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초점은 환상과 기적이라고 하는 어떤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의 일상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 눈에 발견되도록 하시는 모든 현상들이 주님의 계시임을 믿자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보여주고 계신다고 여겨질 때가 있을 때, 그것이 계시인지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뭔가 상식을 뛰어넘는 경험들을 했을 때...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한 순종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주님의 계시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지요.
주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기고 헌신하려는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위한 소원이 자라기 시작하면, 내 눈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현상들과 도구들을 발견하는 의지와 지식이 함께 자랍니다. 그 의지는 결국 복음을 위한 계시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의 힘이 됩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라고 말하면 뭔가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나, 혹은 선별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영생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사람의 일상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유익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삶이 무엇보다 형통하고, 순조롭고, 무탈하고, 풍요롭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반드시 먼저 기도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고백이 기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 의를 구하려면 계시를 발견하는 눈이 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기를 기도한 것이지요. 우리의 노력이 성과와 성취, 성공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도 물론 기도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바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적으로 기도하려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기도하여 계시를 분별할 수 있는 시선을 갖춰야 하는 것이지요.
보는 눈이 있는 사람, 즉 안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이처럼 삶의 지평이 넓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도 상당하지요. 하물며 영생의 지평을 갖춘 인생이란 얼마나 더 복되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삶이 될까요? 너무도 멋지고 굉장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이고, 환상적이며, 기적적인 무엇인가를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완성하신 복음을 믿는 마음 위에 일상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헤아리고, 선택하며, 육신의 활동들을 결정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각자 고유한 일상다반사의 사명들을 맡은 주님의 천사이며, 대리인이고, 사명자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그 자체로서, 또한 계시를 몸에 지니고 살고 있는 천국 백성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기쁨과 활력이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전통과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러나온 오랜 전통의 지혜로운 교훈이나, 단순한 종교적 교리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빛 가운데 만나는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실은 우리도 그 빛과 계시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육체의 눈이 볼 수 있는 기적적인 환상을 포함하여,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든 현상들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모든 의지와 지식이 곧 계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교회와 복음의 약속과 그리고 예배가 그 계시의 터전이며 현장입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계시 한 가운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크신 은혜가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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