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아버지, 새엄마 / 박선애
우리 아버지는 키도 크고 뼈대가 굵어 강한 남자로 보였다. 낙천적이라 웬만한 일에는 걱정하거나 겁내지 않고 대범하게 처리했다. 큰일을 하도 많이 겪어서 단련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많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잘 우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다. 큰일을 겪으면 눈물도 마른다고 하던데, 우리 아버지는 예외였다. 해방 무렵 우리 민족의 비극을 그대로 겪은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의 슬픔과 짐은 참 컸다. 우리 아버지는 자주 울어서 그것이 더 강화된 것인지, 아니면 슬픔에 공감하는 힘이 생긴 건지 우리 일뿐 아니라 남의 슬픔에도 눈물을 잘 흘렸다. 동네에서 장례가 있으면 같이 울어 줘야 할 이유가 항상 있었다. 현기 아저씨 장례식에서는 목이 쉬어서 돌아왔다. 그 아저씨는 우리 동네 농토가 있는 옆 마을 사람으로 우리 들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건장한 분이었는데 아직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런 친분이 있어 상여 나가는 날 장지까지 함께했다. 그 집 장남이 스물다섯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할아버지 대신 가장이 된 나이와 같아 하루 종일 같이 울었던 것이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슬픔에 잠겨 한동안 마음을 못 잡았다. 때도 없이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서 어머니한테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올케언니가 결혼해서 처음 맞은 할머니 제삿날 아버지가 서럽게 우셔서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신 줄 알았다가, 십몇 년이 지났다고 해서 놀랐다고 종종 말한다. 또 우리 신애(작은아버지의 유복녀)를 보면 잘 우셨다. 네 살 때부터 키웠는데 참 예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객지에 나가 학교와 직장에 다니다가 명절에 왔다 갈 때면 꼭 눈물을 흘렸다. 신애가 결혼하고 나서는 웃으며 보냈다. 내 남동생이 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는 동안 초등학교 6학년이던 조카를 데리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제야 신애를 보며 눈물짓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머니 쉰일곱에 암 진단을 받았다. 몸에 이상을 느꼈지만 시골 병원, 한의원을 다니다가 병을 키워 버린 탓에 광주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서울로 가라고 했다. 그때는 암 걸렸다고 하면 죽는 줄 알던 땐데,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희망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수소문해서 원자력 병원으로 어머니를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수술 날짜를 잡아 놓고 집에 와서 추석을 쇠었다. 가기 전날 밤 아버지는 우리를 불러 앉혔다. “니 엄마 못 살리면 나도 안 오겠다.”라고 하며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따라 다 같이 울던 참 슬픈 밤이었다. 추수도 포기하고 어머니를 잘 간병해서 한 달쯤 지나 두 분이 같이 돌아왔다.
눈물 많은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새엄마로 오해받은 일도 있었다. 우리 동생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동네 친구 네 명과 함께 군대에 갔다. 마흔네 살에 낳은 늦둥이 아들을 군대 보내놓고 아버지는 대견해하면서도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보냈다. 마침내 논산 훈련소에서 수료식을 한다는 안내와 함께 초청장이 우리 집만 빼고 왔다. 그래도 우리 식구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이 보내다 보면 하나쯤 건너뛸 수도 있겠지. 그게 우리 집이어도 괜찮았다. 그런 것 안 받아도 다 알았으니까.
수료식에 맞춰 막둥이가 군대에 가서 어떻게 변했을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가족이 총출동했다. 발을 맞춰 착착 걸어가는 군대 행렬을 보면서 아버지는 “느그들 고생 많이 했다.”라고 혼잣말하면서도 눈물을 지었다. 우리는 동생이 소속된 부대를 찾았다. 머리 모양도 옷차림도 똑같아서 동생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안 보이자 아버지는 교관에게 물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답을 다른 사람에게로 미룬다. 그 사람도 답을 피하고 얼버무린다. 아들 만날 생각에 부풀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금세 심각하게 변하더니 몸짓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아버지는 수료식을 준비하는 단상 쪽으로 뛰어가서 계급이 높은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일제에 징병 가서 못 돌아온 형님과 군대 가서 목숨을 잃은 동생을 둔, 6.25 전쟁 참전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높은 사람이 즉시 부하를 불러 물으니 그제야 논산 국군 병원에 있다고 대답했다. 높은 사람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고 부하를 야단치더니, 우리를 병원으로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환자복을 입은 동생이 힘없이 걸어 나왔다. 헐렁한 환자복 속 마른 몸이 허깨비 같았다. 통통하던 볼살은 다 빠져 홀쭉하고 핏기 없는 얼굴에 광대뼈만 튀어나왔다. 귀 밑으로 턱뼈와 목 사이에 깊은 고랑이 패인 것처럼 쑥 들어갈 만큼 살은 다 빠져 버려서 가죽을 씌워놓은 해골 같았다. 그런 동생을 보고 너무 놀라고 안쓰러워서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 어머니와 우리는 진정했지만 아버지는 계속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힘든 훈련을 받다 보니 약했던 위에 구멍이 생겨서 수술했다는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더욱 서럽게 우셨다. “오메, 새엄마갑소잉. 엄마도 없는데 애기가 저라고 있으니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짠할까라. 그래서 저리 서럽게 우는 갑구만. 쯧쯧쯧.” 아까부터 힐끗힐끗 우리를 보던 옆 자리 면회객 아줌마가 끼어들었다. 느닷없는 말에 우리는 눈물이 맺힌 채 웃고 말았다.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도 어머니를 새엄마라고 놀린다. 동생이 병원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다녔다. 우리 집에서 논산까지, 차를 몇 번을 갈아타야 하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몸보신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싸 주는 어머니는 따돌리고 친아버지 역할을 혼자 하셨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눈물이 많다. 우리가 만나 나누는 화제는 그때그때 달라도 결국에는 할머니 이야기에 이른다. 우리 오빠는 할머니를 추억하다가, 또 작은아버지 돌아가신 일을 이야기하다가 꼭 울먹인다. 내 동생은 짠한 사람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면 작은 눈에 눈물이 금방 맺힌다. 나는 어려서 선생님이나 아버지께 억울하게 야단을 맞으면, 그게 아니고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눈물부터 나와서 하지 못했다. 첫 근무지를 떠나면서는 우느라 인사말을 끝내 못했다. 지금도 졸업식 날은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서, 또 헤어지는 것이 서운해서 울게 된다. 결혼식을 보다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인사하는 대목에서는 꼭 눈물이 나온다. 상담하다가 아이가 울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부모님이 늙으면서는 돌아가실까 봐 무서웠다. 조금만 아파도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막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때쯤 남편이 왜 그러냐고 흔들었다. 꿈이었다. 그렇게 겁나던 일도 닥치니 다 견뎌졌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5년이 넘었다. 시간이 지나니 슬픔도 아득해진다. 아직 학생일 때 돈 보내주라고 편지를 쓰다 보면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다. 오늘은 글쓰기 덕분에 울보 우리 아버지가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
첫댓글 아이구나, 선생님 엄마가 일찍 돌아갸셨구나. 짠한 마음으로 글을 열었습니다. 잠을 자고도 남을 시간에. 꼴등으로 글 올린다고 교수님게 지청구 듣고 지도도 못받음서. 하하. 읽는 내내 눈물과 웃음을 고루 섞었습니다. 다행히 어머님이 건강히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안도가 됩니다. 동병상린이갰지요? 휴~ 이젠 안심하고 자겠습니다. 내일도 학생들과 사랑싸움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많은 아버지 모습이 눈에 보이듯 합니다. 예전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많았는데, 엄마를 새엄마로 만들 정도로 따스한 아버지를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훌륭한 유산을 남긴 아버지 닮아 역시 선생님도 마음이 따뜻하시고요.
주제가 잘 드러난 글이네요. 눈물이 많은 사람은 누구보다 착하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런 분이네요.
옛날 남자 어르신들은 잘 울지 않는데요. 전 잘 우는 남자가 좋습니다. 따뜻한 사람일 거 같거든요. 역시나 글 여기저기서 눈물만큼 정도 뚝뚝 흐르네요.
휴, 제목보고 긴장되었던 마음이 글 읽고 스르르 녹습니다. 따스한 아버지 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라셨기에 선생님 가슴 속에도 사랑이 넘쳐 흐르는군요. 부전여전!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아버지 가셨으니, 우리 박 선생님 얼마나 슬펐을까요?
오래도록 그리워할 좋은 아버지를 둔 것도 얼마나 큰 복인가요/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