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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주목한다 / 상징
― 이 광, 바람이 사람 같다(책만드는집, 2018) ― 이정환, 오백년 입맞춤(작가, 2018) ― 이형남, 쉼표, 또 하나의 하늘이다(고요아침, 2018) ― 인은주, 미안한 연애(고요아침, 2018) ― 조 안, 지구의 손그늘(고요아침, 2018) ― 한분옥, 바람의 내력(고요아침, 2018)
김남규
0. 은유 너머
상징을 간단히 정의하면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C. Brooks & Warren, Understanding Poetry, 1960)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조관념이 원관념을 포함하거나, 은유 너머의 세계를 지시하는 것이 바로 상징이다. 따라서 상징은 은유에서 출발하지만, 곧 은유와의 관계를 끊고 그 자체로 독립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의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모든 은유가 상징이 될 수 있고, 시인과 독자가 어떻게 쓰고 읽느냐에 따라 상징은 제각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가 ‘잘’ 아는 관습 상징, 보편 상징, 원형 상징 등은 손쉬운 기호-해석으로 ‘이것은 OO의 상징이다’는 어느 정도 확고한 심증心證을 가능하게 하지만, 시의 성패는 상징의 유무가 아닐 것이다. 시의 성패는 상징이 어느 차원까지 갔는지 즉 , ‘수직적 초월’을 얼마나 이뤘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의 요건 중 하나를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상징은 은유와의 관계를 끊고 은유 너머를 향해야 한다. 즉, 상징 앞에 ‘관습’이라는 꼬리표를 ‘얼마나 빨리’ 떼고 ‘최대한 멀리’ 은유로부터 달아나느냐에 따라 시의 미학적 성취도가 결정될 것이며, 진실 혹은 진리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관습에서 최대한 벗어나기 위한 상징은 어떠한 것인지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은 다시 ‘관습’을 질문한다. 관습(慣習,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 혹은 전통(傳統,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동 따위의 양식)의 정의가 이렇다면, 관습(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집단과 공동체의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징이되, 시 안에서 의미를 풍요롭게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물론 사私은유(혹은 사死은유)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해서도 안 된다. 하여,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을 믿고, 시집 전체에서 상징의 극단까지 최대한 끌어올린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인의 시집에서 단 한 편의 시로도 시집의 시적, 미학적 성취도를 매겨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로는 시인에게 돌아가겠다.
1. 그―이광, 바람이 사람 같다
띄엄띄엄 이어놓아 물길을 끊지 않고 흐르는 물도 비켜 길 한쪽 내어준다
여울진 생을 앞서간 그가 나를 부른다 ― 「징검돌」 전문
‘징검돌’은 문학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이면서, 다분히 상징적인 사물이기도 하다. 물을 건너게 하거나, 타자와 나를 ‘띄엄띄엄’ 이어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인데, 이광 시인 역시 그와 같은 발견에서 멀리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의 징검돌은 기존의 징검돌과 ‘결’이 다르다. 징검돌을 통해 타자를 만나거나, 나를 디딤돌 삼아 누군가를 이어주는 것이 기존의 징검돌이라면, 시인의 징검돌은 다음 징검돌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흐르는 물도 비켜 길 한쪽 내어”주는 징검돌의 윤리를 시인 역시 추구하면서, 그렇게 “여울진 생을 앞서간” ‘그’를 앞에 두고 있다. 내 앞의 징검돌 ‘그’. ‘그’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는 부모나 조부모 등과 같이 시인의 앞 세대인 혈육관계일 수도 있고, 종교적 의미에서 신神 혹은 초월자, 또는 시간이나 역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마치 소월이나 만해의 ‘님’처럼 명확하지 않고 정해지지 않은 대상인데, 이 대상을 한정할수록 시의 폭과 너비는 그만큼 좁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가 무엇을 지시하고 상징하는 것인지 추적하고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없어 보인다. 시의 리듬 안에서 기능하는 ‘그’를 보라. ‘그’가 시인을 부른다. 호명呼名에 응답하는 시인은, ‘그’와 함께 징검돌이 된다. 그러니까 시인은 ‘그’와 함께 “여울진 생”을 건너가는 것이다. ‘그’가 없으면, 내가 없으면, 징검돌은 완성되지 못하고 징검돌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누구인지의 문제보다, 그와 함께 하는(해야 하는) ‘나’의 태도가 중요해진다. ‘그’는 사라지고, 이제 나의 문제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징검돌이 될 수 있는지의 문제. “사람은 길을 닮고 길은 사람 닮아간다”(「산만디」)처럼 사람과 길은 함께 간다. 나는 ‘그’와 함께 간다. 그러므로, 시인의 존재 문제는, 시인의 존재를 문제 삼는 일은, ‘그’와의 징검돌-관계를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가에서 찾게 될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의 호명을 통해 주체 지워지는 나를 통해서만 그가 누구인지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독자인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2. 설렘―이정환, 오백년 입맞춤
태초에 설렘이 있었다 설렘이 당신을 낳았다 빛나는 눈동자 깊숙한 수정체 그속에 머물던 무지개 비로소 당신은 영원을 꿈꾼다 태초에 설렘이 있었기 때문에 완강한 사랑의 동아줄 잡았기 때문에 ― 「태초에 설렘이 있었다」 전문
태초에 말씀(요한복음 1:1)이 아니라 설렘이 있었다. 설렘은 이광 시인의 ‘그’와 같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당신’을 낳았다. 설렘은 “빛나는/ 눈동자”, “깊숙한/ 수정체”를 가진 ‘당신’을 낳았는데, 설렘은 그런 ‘당신’에게 빛나는 눈동자와 깊숙한 수정체에 무지개를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을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지개’가 무엇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태초에 설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설렘은 무엇인가. 설렘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리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놀랐을 때 또는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마음의 동요動搖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동요가 있어 설렘이 생겨났고, 이 설렘이 ‘당신’을 만든 것이니, 면밀히 말하자면, ‘당신’을 만나 설렘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설렘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생겼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처럼, 태초부터 설렘은 그 무엇보다 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설렘은 이미 존재했으나, “완강한/ 사랑의/ 동아줄/ 잡았기/ 때문에” ‘당신’이 생겨났고, ‘사랑의 동아줄’을 잡은 것은 ‘당신’이 아니라 설렘이다. 대상이 있어 설렘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설렘이 대상을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매커니즘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언제 어디에서든/ 바로 앞에 당신”(「바로 앞에 당신」)이 있어 시인은 당신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설렘은 ‘당신’을 만들었고, ‘당신’은 영원을 꿈꾼다. 그러나 여기서 영원은 ‘불멸’과 ‘무한’이 아니라, 시간 바깥, 시간성에 속하지 않는 ‘광대한 시간’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처럼 신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 전의 (무한하고 광대한) 시간은 시간 바깥, 계산할 수 없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지금까지 순간을 점點으로 하여 점의 무한한 집합으로서의 선線을 영원이라고 한다면, 그 선분상의 한 점은 ‘영원한 지금’(아우구스티누스)이다. 따라서 태초에 설렘이 있었던 무시간無時間에서 ‘당신’이 생겨났으니, ‘당신’은 당연히 영원을 꿈꿀 수밖에. 당신보다 설렘이 선행하고, 설렘은 영원이다. 우리는 지금 영원이라는 선분 상에 점들을 무수히 찍고 있다.
3. 쉼표―이형남, 쉼표, 또 하나의 하늘이다
잘 익은 열매 하나 푸른 늪을 품었을까
먹빛 속 서늘한 밤 동면의 경지인지 눈자위 발아할 기약 알 수 없어 애가 탄다 애가 타 깨어라 일어나라 예서제서 들깨어도 수험생 어둠 새벽 꽃등이 아스라이 보이는지
가시연 타는 속내를 소나기가 씻고 있다 ― 「쉼표, 또 하나의 하늘이다」 전문
이형남 시인에게 ‘쉼표’는 “잘 익은 열매 하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쉼표는 “푸른 늪을 품”었는데, 그 과정이 사뭇 유장悠長하다. 열매 하나가 품고 있는 푸른 늪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그 과정이 중장이다. “먹빛 속 서늘한 밤”이자 “동면의 경지”에서 “눈자위”는 “발아할 기약 알 수 없어 애가 탄다”. 작품에 언술된 ‘쉼표’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눈자위’가 누구의 것인지 ‘굳이’ 알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다만 먹빛 속 서늘한 밤에 눈자위 하나가 발아發芽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이 쉼표라는 것이다. 뒤이어 ‘열매 하나’ 혹은 ‘쉼표’ 혹은 ‘발아하지 못한 눈자위’는 “예서제서 들깨어”야 하는 ‘수험생’으로 이어진다. 수험생의 “어둠 새벽 꽃등이 아스라이 보이는” 풍경이 “먹빛 속 서늘한 밤 동면의 경지”와 같은 ‘푸른 늪’과 같으니, ‘열매 하나’가 ‘푸른 늪’을 품듯 ‘수험생’ 역시 ‘어둠 새벽’과 같은 고난과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야(버텨야) 함을,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그러나 조금은 희망적으로 보고 있는 시인의 눈빛을, 우리는 본다. “가시연 타는 속내”가 그러하듯 ‘소나기’가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나기’는 ‘기계 장치의 신’(deus ex machina,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와 극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결말을 내리는 신)이거나, 짐짓 딴청을 부리는 식으로 ‘끝내기 위해 끝내는’ 방식도 아니다. 소나기가 ‘쉼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내린 후 ‘어둠 새벽 꽃등’이 도처에 있다. 하늘에도 지상에도, 구름으로 혹은 가로등 불빛으로, 아니면 각자의 마음속에. 그것은 가시연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시연이 밀어 올리는(밀어 올리려고 하는) ‘잘 익은 열매 하나’ 혹은 ‘꽃등’처럼, 수험생을 비롯해 새벽을 깨우는 누구에게나 그와 같은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이 과정이 결과물(‘열매’)을 얻는 과정일지라도, 그 결과물을 ‘쉼표’로 보려 한다. 다시 말해, ‘잘 익은 열매 하나’도, ‘발아하지 못한 눈자위’도, ‘수험생’도 ‘쉼표’와 같으니, 제발 ‘쉼표’처럼 무조건 앞으로 진행되는 시간상에서 잠깐, 끊었다 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쉼표가 ‘열매’나 ‘눈자위’ 혹은 ‘수험생’, ‘꽃등’ 등으로 은유의 연쇄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유의 연쇄 자체를 ‘쉼표처럼’ 끊으려 한다. (올해 특히 간절했던)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렸으니 말이다.
4. 심장―인은주, 미안한 연애
서툴게 뭉쳐져서 쉽게 녹는 첫눈 같이 우리도 사라지면 용서를 받게 될까 잡았던 손을 놓친 게 네 탓만 같았는데
어둠이 쌓여가는 늦저녁 포장마차 순대 썰던 주인 왈 내장도 드릴까요 뜨끈한 심장 있나요 심장으로 주세요
지나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쳐서 못 본 사이 지나쳐서 멀어진 사이 몇 번째 검은 밤일까 긴 겨울이 앞에 있다 ― 「심장으로 주세요」 전문
심장이라는 신체 부위는 각별하다. 신체 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 동시에 영혼이 깃든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I ♥ U’, ‘I ♥ NY’처럼 ‘하트(♥, heart)’는 영혼이 깃든 곳, 내가 내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영혼이 깃든 신체 부위에 대한 논란은 4,000여 년 정도 지속돼왔다. 처음에는 심장이냐 뇌냐가 아니라 심장이냐 간이냐 하는 것이었다. 심장이라고 생각한 원조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심장을 미라로 만든 시신 속에 유일하게 장기로 남겨두었다. 반면에 바빌로니아인들은
간에 인간의 영혼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영혼은 뇌와 심장 중 한 곳에 있다고 논란이 일어났으나, 최근 뇌사자 문제를 통해 뇌보다는 심장을 인간 생명 유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기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심장=영혼’ 등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물론 영혼은 신체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시인이 ‘주문하는’ 심장은 결국 영혼의 문제, 관계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첫 수가 흥미롭다. “서툴게 뭉쳐져서 쉽게 녹는 첫눈”이 심장으로 자연스럽게 은유된다. 서로의 교감交感이 오래가지 못하고, 첫눈 녹듯이 그렇게 소멸되는 관계. 시인은 돼지고기의 여러 부속고기 중 심장을 선택한다. 간이나 허파가 아니라 심장이다. 시인은 지금 부재한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보고자 한다. “뜨끈한 심장”을 가진 자와 관계를 이어가려는 시도는 무위에 그칠지라도 욕망은 시도 자체인 법. “지나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고, 당신과 나는 “지나쳐서 못 본 사이”에 “지나쳐서 멀어진 사이”가 될 것이다. 시인은 생각한다. 이 밤이 “몇 번째 검은 밤”인지, 얼마나 “긴 겨울”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내년에도, 먼 훗날에도 같은 말을 할지 모른다. 첫눈처럼 쉽게 녹는 심장, 재탕, 삼탕으로 데워지는 심장이라도 좋으니, 지금 시인 앞에 부재한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있어달라는 희화된 목소리 “뜨끈한 심장 있나요 심장으로 주세요”가 생각보다 처연凄然하다. 시집 제목 ‘미안한 연애’처럼 연애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시인에게 이번 첫 시집은, 권태와 일상성에 찌든 한 여자와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내 안의 어떤 여자”(「미안한 연애」)를 맞이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기존의 한 여자에게 미안한 일이겠지만, 덕분에 시인이 태어났다.
5. 먹물―조안, 지구에 손그늘
눈 내리는 호숫가 수묵담채 치고 있다
메마른 마음눈도 눈밭에선 촉촉이 젖고
점점이 걷는 사람들 먹물처럼 스민다 ― 「석촌호수」 전문
하얀 도화지 같은 설경雪景에 “먹물처럼” 스미는 사람들을 ‘수묵담채’로 표현하였다. 물론 호숫가에 하얗게 쌓이는 눈발 역시 수묵담채 중의 하나가 될 터. 온몸으로 눈발을 받는 호숫가는 눈을 녹여가며 얼음의 둘레와 두께를 조금씩 키워갔을 것이다. 호숫가는 시인의 “메마른 마음눈”도 온몸으로 받았으니 얼마나 자애로운가. 그리고 그 호숫가를 “점점이/ 걷는 사람들”이 조금씩 먹물처럼 호숫가에 스미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메라 앵글이 ‘줌 아웃(zoom out)’되면서 먹물이 스며드는 풍경이 점점 작아지며 흰 설경이 ‘와이드숏(wide shot)’으로 강조될 것이다. 시화일률 혹은 시화일치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은유의 연쇄가 아니라, 이 은유를 만들고 있는 주체의 자리다. 석촌호수의 풍경을 보면서 “수묵담채 치고 있다”, “점점이/ 걷는 사람들/ 먹물처럼 스민다”고 말하는 시적 주체의 자리. 이 주체의 자리는 어디인가. 바로 “메마른 마음눈도/ 눈밭에선/ 촉촉이 젖고” 있다고 말하는 자, 호숫가를 내려 보고 있는 자다. 호숫가의 먹물처럼 스미는 자 중 하나가 아니라, 주체는 호숫가 바깥에 있다. 주체는 호숫가를 보며 메마른 마음눈을 가진 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메마른 마음눈이 촉촉하게 젖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자, 곧 “걷는 사람들”이 먹물로 스미듯 자신 역시 호숫가에 먹물처럼 배어드는 자다. 따라서 수묵담채를 치고 있는 것은 석촌호수와 익명의 다수가 아니라, 석촌호수와 시인 개별이다. 시인은 그저 호숫가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풍경에 스며들고 있다. 먹으로 그린 선線에 얇게 채색한 수묵담채. 시인은 설경에 먹물로 번져가거나 선 하나가 되고 있다. 그 바탕이 되는 설경은 자연이나 초월자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겠다. “메마른 마음눈”을 촉촉하게 젖게 하는 대상.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채색은 독자의 몫이다.
6. 칸나―한분옥, 바람의 내력
본시 내 울음은 저 불 속 칸나의 것
마른 입술 깨문 채로 또 다른 불에 닿는,
못 지울 상처의 꽃인 것 울컥대는 내 목숨은 ― 「칸나」 전문
‘칸나’의 붉은 이미지가 여러 은유로 확장되고 있다. 처음 칸나의 붉음은 ‘내 울음’이었다. 오히려 ‘내 울음’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불 속 칸나의 것”이다. 그래서 “마른 입술 깨문 채로 또 다른 불에 닿는” 것이 칸나인지 시인인지 알 수 없으며, “못 지울 상처의 꽃”인 칸나는 “울컥대는 내 목숨”과 같다. ‘울음=칸나=또 다른 불=상처의 꽃=목숨’이라는 등호가 성립하면서 이제 칸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시인에게 고유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또는 우리에게 일반 사물 칸나는 한분옥 시인의 고유한 칸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붉은 색은 불 또는 목숨, 상처 등의 부정적이면서도 생명력 강한 이미지로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칸나의 붉은색에서 시작된 이 은유의 연쇄 사슬이 강렬해 보이는 것은, 붉은 색의 강렬함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서 그러하다. ‘내 울음’을 당기는 것은 ‘불 속’을 가진 ‘칸나’다. 붉은 칸나가 모여 있는 곳을 ‘불 속’으로 표현한 것인지, 울음 자체가 불과 같아서 칸나에게 옮겨 붙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울음과 칸나가 함께 불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 그 불에 다가가려면 모두 “마른 입술 깨문 채로” 가야 한다. 불이 옮겨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불이 칸나의 불로 옮겨 붙었고, 그 불이 다시 다가서는 자에게 옮겨 붙을 수 있다. 아니, 옮겨 붙을 것도 없이 주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위험한 저 불은 “못 지울 상처의 꽃”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불-꽃’인 것이다. 이 ‘불-꽃’은 곧 칸나의 이미지와도 닮았으니, “울컥대는 내 목숨”이 저기 불꽃에, 그리고 내 마음에 있다. 불이 옮겨 붙듯 은유가 옮겨 붙는다. 이 시에 가까이 가려는 자는, 불붙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7. 새로운 감수성을 위하여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유 너머의 세계는 과연 의미가 있는가. 가시적인 것, 지금 있는 것의 존재 여부를 묻는 것도 쉽지 않은데, 비가시적인 것, 지금 있지 않은 것不在을 지시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보편상징, 원형상징이라는 일반적, 관습적 담론 안에서는 (매우) 안전한데, 굳이 안전한 곳 바깥으로 탈주해야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하고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은유 너머를 추구하는 일은, 지금 우리의 사물과 그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를 문제 삼는 일이며, 다시 사물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언어로 더럽혀진 사물을 복권하고, 사회적 관습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감수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감수성은 낡은 감수성과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것이다. 이광 시인의 ‘그’, 이정환 시인의 ‘설렘’, 이형남 시인의 ‘쉼표’, 인은주 시인의 ‘심장’, 조안 시인의 ‘먹물’, 한분옥 시인의 ‘칸나’는 기존의 은유도 기존의 것도 아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바깥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일반명사를 ‘다시’ 볼 것이다. 우리의 ‘고유명사’로 만들기 위해서다. 시인은 고유명사를 많이 가진 자다.
김남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조집 일요일은 일주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