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돈키호테』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읽어본 사람은 없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는 1605년에서 1615년에 걸쳐 2편이 발표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노벨 연구소’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문학에서 1위를 차지하며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를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나 일부를 쓰는 것이다.” 이 표현은 마치 ‘화이트 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로 정의한 것과 흡사해 보인다.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작품 돈키호테를 두고 “인간의 내부 세계를 가장 깊이 파고들어 묘사한 인류의 바이블”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돈키호테를 읽고 있으면 현대문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돈키호테만큼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독보적으로 받고 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정작 이 작품을 읽어봤다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일단 길어도 너무 길다. 1700페이지다. 그리고 1600년대의 유럽 문화와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고 읽기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제대로 만나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배경지식이 없어도 상관없다. 천천히 오랫동안 읽어도 괜찮다. 일단 시작하면 문화적 배경의 간극은 어느새 사라진다. 어떠한 관점으로 읽어도 내 삶과 맞닿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위대한 문학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문제는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이름과 호명에 관한 종교적 철학적 해석이 이미 다양하게 정의되어 있듯 이름은 인간 실체 형성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돈키호테가 편력 기사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제일 먼저 한 일 역시 자신에게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주인공은 기사소설에 미쳐 자신이 편력 기사 중 하나라는 과대망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소설 속 편력 기사의 삶을 모방하기로 선택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이 보편적인 이치를 몸소 실천하려는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다. 돈키호테가 진정 바라는 것은 편력 기사의 삶을 모방함으로써 ‘자기 창조의 의지’를 모험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1편의 5장에서 돈키호테는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존재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짓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모험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두들겨 맞거나 다치는 등 비참한 결과만을 초래한다. 하지만 돈키호테에게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모험은 자신이 세운 신념을 믿고 마음의 소리에 따라 행해지는 삶의 투쟁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가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의 문제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미쳐 살다 정신 들어 죽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이로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세르반테스 역시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에서 하나의 문제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작품 전체에 관통시킨다. 이러한 생각은 그 어떤 것도 속박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주어 좀 더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춤을 추던 ‘조르바’가 떠오른다.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랐던 수많은 문학작품 속 주인공들이 돈키호테를 열망했나 보다. 들판에 서 있는 풍차는 돈키호테에게 30개가 넘는 거인이다. 초라한 주막조차도 돈키호테에게는 은빛 찬란한 첨탑이 있는 성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지 미치광이의 환영과 헛소리인가. 돈키호테에게 사물의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 사물이 갖는 의미가 더 중요해 보인다.
돈키호테는 미쳐있을 때 살아있었고 정신이 들자 죽음을 맞이한다. 돈키호테의 죽음은 자기 창조의 의지가 꺾인 존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돈키호테는 이 점을 확실히 하고 죽는다. “전에는 ‘돈키호테 데 라만차’였지만 지금은 선한 자 알론소 키하노일세.”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자는 돈키호테가 아니라 알론소이다. 이로써 돈키호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산초들은 돈키호테와 함께 모험을 떠나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몸소 보여주듯이 비록 속박된 삶을 벗어나더라도 반드시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 사실을 예상한다면 두려움에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돈키호테는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네 마음속의 두려움이 네가 올바르게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내 삶의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굳은 신념과 용기와 미치광이 정신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책 익는 마을 유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