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이라.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19호실의 유래를 말하겠다.19호실은 바로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방호수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집 ‘To Room Nineteen: Collected Stories Volume One’(1994)에 나오는 방이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집 To Room Nineteen(19호실로)에 실린 소설들은 대부분 레싱의 초기 단편으로, 가부장제와 남성중심 등 전통적 사회질서와 사상 등에 담긴 편견과 위선 그리고 그 편견과 사상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도리스 레싱은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도리스 레싱의 단편들은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일상과 욕망, 때로는 저항을 가감 없이 묘사하여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레싱의 작품들은 전통과 권위에 억압받아 개인의 자유를 잃어버린 여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 19호실은 바로 전통과 권위에 억압받아 개인의 자유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어느 여성의 도피처를 말한다. 도리스 레싱이 특히 여성들의 위태로운 삶을 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지 이른바 19호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공간 바로 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그리고 남성중심의 사회라면 더더구나 여성들에게 19호실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도 요즘은 바로 이 19호실이 너무 그리울 것이다. 요즘은 가부장적 사회도 아니고 남성중심의 사회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성중심의 사회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그런 사회분위기이다. 그렇다면 19호실은 남녀를 떠나 우리 인간들이 혼자 머물고 싶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싼 환경과 분위기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렇다면 당신의 19호실은 과연 어디인가.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은 과연 어디인가. 아무도 찾지 못할 오지의 오두막이 19호실인가. 아니면 지하 깊숙히 자리잡은 벙커가 19호실인가. 그렇지 않다. 19호실은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멀리 있으면 자주 찾기 힘들다. 외롭거나 삶에 지치거나 말못할 괴로움에 처했을 때 불현듯 찾을수 있는 그런 장소 그런 장소는 바로 자신의 옆, 자신으로부터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혼자있다고 다 이른바 19호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근사한 그리고 남들과 떨어진 공간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면 19호실로 가치가 없다. 우선 편안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다. 비록 좁은 내방이지만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취할 수 있으면 머무는 시간이 단 몇시간이라도 자신의 19호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럭셔리한 방이라도 혼란스럽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그 공간은 도떼기 시장과 다를 바가 없다. 비록 궁상맞은 세간살이로 채워져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진무해줄 그런 공간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일정한 공간이 아니어도 좋다. 내가 아끼고 즐겨 찾는 대상이면 된다. 아니 공간도 필요 없다. 즐겨 찾는 책속에도, 즐겨 듣는 노래 속에서도 그런 19호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누가 알면 곤란하다. 19호실은 그야말로 자신만의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읽을수 있고 자신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은신처이다. 그리고 들으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노래는 아주 훌륭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신만의 19호실을 만들어 보시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개척해 보시라. 그 어느 누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어 보시라. 그러면 그곳이 바로 당신의 19호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19호실에서 하루의 피로를 푸시라. 그리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시라. 요즘처럼 코로나와 정치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화돼 심신이 피곤할 때일수록 자신만의 19호실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우리가 19호실을 필히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1년 2월 20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