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 총각
옛날 두메산골에 나이 서른이 넘은 노총각이 하루는 산마루에 앉아 신세 타령을 하고 있는데 마침 한 스님이 지나다가 이 모양을 보고,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이생에 복을 지으면 내생에 잘 살 수 있다.' 는 말을 일러 주었다.
이를 계기로 노총각은 험하고 높은 고갯마루에 움막을 짓고 샘을 파서 그 고개를 넘어가는 나그네들에게 여름에는 시원한 샘물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짚신을 삼아 보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사 박 문수가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조선 숙종 17년(1691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서 태어났다.
이 재를 넘다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노총각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장가도 아니 가고 이와 같이 남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느냐?' '전생에 복을 못 지어 이생에 잘 살지 못하니 내생에나 잘 되고 싶어서 이러고 있습니다. 이에 박 어사는 외람되게 감히 왕이 되려 한다고 야단을 쳤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몇 해 후에 숙종 임금께서 왕자를 낳으셨는데 이 왕자가 박어사만 보면 질색을 하므로, 임금께서 괴이히 여겨 필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박어사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본 결과 그 내막을 짐작하고 하루는 박어사와 미리 약속을 하고 왕자의 원(怨)을 풀어주기 위하여 왕자 앞에서 짐짓 박어사를 야단하고, 그래도 원이 남아 있을까 보아 나중에 왕자(영조:당시, 영인군)의 스승이 되어 가르치게 하였다 한다.
3살 차이였던 박문수와 영조는 사제지간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1724년 34세의 박문수는 당시 31세였던 세제 시절의 연잉군을 시강원에서 만나 교육을 맡게 됐다. 후사가 없었던 당시 국왕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세자가 아닌 세제가 됐다.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던 연잉군과 박문수는 돈독한 우정을 나눴고, 연잉군은 "각자 힘써 서로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박문수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1728년 3월, 영남을 감찰하고 돌아온 박문수는 조정 회의도중 왕과 대신들 앞에서 돌연 전복 하나를 꺼낸다. 백성들이 고생해서 잡은 지역특산물인 전복을 강제로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되팔아 이윤을 남긴 양산 군수의 횡포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백성들의 고충을 대변하려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박문수가 왕 앞에서 저지른 행동은 전제군주제이자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한 짓이었다. 실제로 신하들은 박문수의 불경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왕이었던 영조는 오히려 박문수를 감쌌다.
기록에 따르면 박문수는 건장한 풍채를 지녔으며, 고집이 세고 소신이 강하여 대신이나 심지어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마는 유명한 '프로 직설러'였다. 그런데 박문수의 상사인 영조 역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일화에서 보듯이, 가족이나 신하를 가리지 않고 냉정하고 예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군주였다. 이처럼 서슬퍼런 영조가 드물게 신하에게 유독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보인 몇 안 되는 인물이 바로 박문수였다.
기록에 따르면 박문수와 영조는 여러 차례 뼈있는 '썰전'을 주고받았다. 박문수가 왕에게도 직언은 기본이고 과격한 말까지 불사하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
어느날 영조가 박문수에게 "경은 성품이 좋으나 모자란 건 학문일 뿐이다. 나 역시 그러니 우리 서로 힘쓰자"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농담을 날린다. 이에 박문수는 "지금의 학문은 겉만 번지르르해서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신은 학문이 없어도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간 크게 받아친다. 국왕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목이 달아날 판인데, 하물며 상대는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영조였다. 하지만 영조는 웃으며 "경이 아니면 누구도 이런 말을 못 한다"고 오히려 박문수의 직언을 이해해 줬다.
영조는 박문수의 죽음에 애통해 하며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였고,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아, 박문수가 이미 갔으니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라며 절절한 심경을 드러냈다.
* 영조의 어머니는 허드렛일을 하던 무수리였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