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인데,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고비마다 딛고 일어설 힘이 되어주었던 인연들이 불현듯 나타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인연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당연히 없었겠지요. 참 고마운 인연들이지요. 인생이 불행하다 느끼는 건 어쩌면 그런 인연들을 만나지 못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내게 찾아와 따스운 손 내미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인연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저의 스승이신 이정배 선생님의 <스승의 손사래>를 읽으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8월부터 의성향토사연구회의 문화재청 공모사업이 열띠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무국장을 맡은 탓에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일을 돕고 있습니다. 4년째 진행하고 있는 향교를 활용한 1박2일 프로그램은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신청하는 이들이 많아 금세 신청이 마감되곤 하지요. 4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오는 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9일 토요일)은 문화재청에서 두 분이 내려와 모니터링을 하는 날이어서 더욱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준비된 일정을 하나하나 진행하였습니다. 오전 향교체험을 마치고 점심식사 후 교회 앞에서도 보이는 구성산 구봉에 위치한 문소루(聞韶樓)에 올랐습니다. 문소루는 교남사대루(嶠南四大樓), 즉 영남 지방의 사대루로 불렸던 누각 - 의성(義城)의 문소루(聞韶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 중 하나로 이 중에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문소루가 위치한 구성산은 1896년 의성에서 일어난 의병 - 병신창의(丙申倡義) - 의 첫 전투가 벌어진 의미있는 장소입니다. 문화해설사이신 사무처장님께서 역사에 관한 설명이 이어가실 때 이것 저것 묻는 분이 계셨습니다. 의성에 관해 진지하게 알고자 하시는 분이라 여겨져서인지 왠지 마음이 갔습니다. 문소루에 걸터앉아 옆에 계신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는 궁금해하셨던 의성의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설명하는 사람도, 설명을 듣고 묻는 사람도 서로가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교직에 몸담고 계셨다가 퇴임하셨는데, 이오덕 선생님의 제자라는 말씀에 눈이 번뜩 뜨였습니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경계가 풀어져 버렸습니다. 이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은 제가 줄곧 존경해 마다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전우익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최완택 목사님, 최근의 인연인 안동의 안상학 시인까지 저의 인생에 소중하게 자리하고 계신 분들이지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서로 같은 분을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 이 얼마나 소중하고 힘이 되는 인연인지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후 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아쉽지만 짧은 만남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이름도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김익승 선생님입니다. 전교조 활동을 하시며 아이들을 위한 참 교육에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시고, 특별히 이오덕 선생님이 만드신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전 이사장이시기도 합니다. 김익승 선생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지라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하였더니 저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존경에 마다않는 선생님이셨고, 삶으로 참 교육을 행하신 참 스승이셨음을 제자들이 남긴 흔적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배워서 남 주자’는 선생님이 평생 품고 사셨던 철학입니다. 배워서 나 홀로 성공하면 그만인 세상에서 참된 배움을 통해 철저히 남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임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던 것이지요. 이렇게 좋으신 분을 뜻밖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요? 선생님은 오후에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앞으로 좋은 만남 이어가자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지요.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202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