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락 시인 발표작
독거
누구고,
인기척에 엄마는 내다본다
밤새 통증으로 잠도 못 이루신
아, 그건
마음 한 사발
엎어지는 소리였다
문상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올해 연세가...
85셉니다.
아, 좀 더 사셔도 되는데
저마다
저 살아갈 나이
셈 한 번하고 돌아간다.
앞산, 그랬어
어릴 적 한 달음에 달려가곤 했었지
청운의 날개 펼쳐 낮게만 보이던 산
새벽별 머리에 얹고
약수 잔 나누었지
삼십년 격동세월 모습은 그대론데
그날 갔던 친구와 오늘 가는 친구는
지난한 인생만큼이나
가는 길도 다르지
쓰다달다 불평 한 번 안하던 너였지
‘내 나이가 어때서’ 곡조나 들으며
오늘은 돼지껍질에
탁주 한 잔 어떻겠어.
매호동 연가
줄곧 하늘에선 가랑비 내리는데
거실엔 라디오 소리 뒤 베란다 세탁기 소리
물소리 담장너머로 장 닭 긴 울음소리
열차 소리 초침소리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
그 사이 사이로 라울잎 돋는 소리
진종일 토끼 귀 되어 부르노니, 아 매호동 연가
리셋
거죽에 둘러쳐진
위선과 거짓부렁
버튼 한 방으로 허공에 날려버리고
더듬어 초기상태로
돌려 놓으리라
슬픔에서 고독까지
질투에서 증오까지
그리 아픈 것 잊을 수만 있다면
깡그리 뭉개 버린 뒤
다시 출발 하리라
음각
저 혼자
닿지 못해
어깨 낀 구릉지길
베이고
패여 가며
거친 숨결 쏟아냈던
우화루
꽉 찬 편액이
생둥 생둥 늙는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다
느닷없이
칼 날 들이대는 순간 있다
생사의
긍정과 궁극
피치 못할 길섶에서
지삿개
참다 참다 솟구쳐
거센 바다를 만났다
육각으로 딛고 서
버티어 온 수억 년
지삿개
뒤바뀐 지표
굳어버린 몸뚱이
누군가 바람 같은
손놀림으로 빚어져
켜켜이 엉겨 붙어
까만 속 다 태우고
파도는
축배를 든 채
잠든 영혼 깨운다
세렝게티
고요 속 저 긴장
숨죽인 세렝게티
대평원 쫓고 쫓기는 짐승들의 달음박질
본능적 기습 끝에도
이따금 놓치고 마는
체온은 상승하고 제 목숨 위태로워
오백 미터를 채
내닫지 못 한다
절박한 눈앞의 한 끼
날은 이내 저물고
명태
하필이면 입 꿰어 빨랫줄에 걸어놓고
죽어서 더 빛나는 꽉 찬 속 다부진 몸
세상은 너를 가리켜 명태라 부른다
줄 것 다 주려는 듯 속엣 것 열어놓고
달관한 속 풀이로 은성하는 몸 동아리
가없는 황갈빛 사랑 베갯잇 나부끼는
카랑한 겨울하늘 꽉 다문 집게 마저
놓치면 안 될세라 꼬챙이에 끼운 몸피
이따금 먼 파도 소리 곁에 와 쓸고 간다
저 죽어가는 자
폭풍과 맞서 싸우는 산자와 저 죽어가는 자 바위틈
부여잡고 발버둥 발버둥치다 종국엔 놓치고야 만 산
자의 죽은 목숨
벌새
가슴만 커다란 자그마한 고 새가
경련하듯 고단한 날개를 파닥이다
새끼가
궁금했던지
생목을 파고든다
꽃술에 취한건지 뒤로도 한 번 날아보고
한 참을 허공에 서 곰곰히 생각하다
하필 왜,
새가 됐을까
제 발목 콕콕 쫀다
대 못
너 아니면 내 어찌 한 순간을 버텼을까
빗대고 아스라한 고공에서 조차 너는
껴안고 한 몸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리고 밀쳐 넣어 결국엔 혼절컨대
맞닿은 촉감으로 소생하는 그 기운
기꺼이 상량고목도 미쁜 눈물 흘린다
함구
솔향기 은연한 용오름 계곡이다
오가는 사람 없고 물소리 드맑아서
간간이 뻐꾸기 소리 너는 입을 다문다
하늘 한 번 힐끔, 올려다보는 푸른 하오
누군가 너를 향해 겨냥하고 있는 듯해
읊조릴 마음 누르면 입을 열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갈 길을 바이 몰라
빛나간 예측 앞에 몹시 허둥거리던 너
솔향기 코끝에 닿자 너는 입을 다문다
탑
한 치 흩트림 없는 그대 앞에 무릎 꿇다
두 손 고이 모아 풍경 소리 듣는 저녁
층층 단 묵언의 설파 차마 발길 못 뜬다
아이콘
치열한 경쟁 속
넌 튀어야 했다
나직이 있다가도 일촉즉발 눈빛으로
한순간
가지고 있던 것
죄다 쏟아 붓는다.
차가운 모니터에 무표정한 자리다툼
걸 맞는 이름자
그림 한 폭 등에 업고
그대가
던지는 눈길
불꽃으로 안긴다.
키스
달거나 쓰거나
상관하지 아니 하고
한 번쯤 해보지 않고서는 말 못해
이따금
눈만 마주치면
곧장 불붙어 타오를 듯
운문사 가을
가지산 너른 자락 은행잎 소복소복
무 뽑는 비구니 빛살 친 대웅보전
파아란 하늘 당기며 빈 가을 맞고 있다
피는 저녁연기 머뭇대는 산그늘
이제 더 무엇을 바랄 게 있으랴만
에둘러 긴 목 빼고서 곁눈질 한창이다
위증
- 청문회 장
애초에 대답들은 다 정해져 있나
마이크는 지쳤고 시계도 졸고 있다
무심히 쌓아둔 서류
뻘뻘 땀만 흘리고
나는 모릅니다. 전혀 아닙니다.
어르면 마이동풍 찌르면 동문서답
‘내사 마, 세월이 약인기라’
감옥이나 간다는데.
의원은 장고 치고 언론은 북을 치고
공판장 동태 값도 부르는 게 값이라
저 난장 확실한 것은
위증은 가중처벌!
흔들가
저 물결 흔들흔들
흔들의자 흔들흔들
차도 흔들 집도 흔들
마음도 흔들흔들
이 땅에
살아남자면
죽자 사자 흔들흔들
첫댓글 문상 작품을 읽으며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조개 껍질은 조개 껍데기가 맞고
돼지 껍질이란 이름이
낯설지만 맞는 말인가봐요
지삿개는
제주에 있는 주상절리로군요
한번 가봐야겠네요
몸동아리는
몸뚱이의 방언
몸뚱아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