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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폭풍의 중년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 칼 되니츠
빌헬름 프란츠 카나리스는 제3제국 정보국 아프베어의 국장이었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빅엿을 먹인 반나치 인사였다.
카나리스는 1887년, 도르드문트의 이탈리아계 기업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막시밀리안 그라프 폰 슈페 제독이 이끄는 아시아방면 독일 해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포클랜드 해전에서 슈페의 함대는 괴멸당했고, 카나리스 자신도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탈주(!)하여 독일로 귀향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종전까지 잠수함 함장으로 부임해 지중해에서 적군의 상선 18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킬 군항 반란으로 사작된 독일 혁명기(11월 혁명)에, 카나리스는 자경대를 만들어 무질서한 혁명세력을 억눌렀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암살자들을 재판한 군사 법정의 일원(대다수가 무죄로 방면됬지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카나리스는 제국 해군 소속의 의용대(Freikorps, 자유 군단)로서 군에 남아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고, 그는 이례적인 승진을 거듭해 1931년에는 대령의 자리에 올랐고, 베를린 순양함의 부장, 이어서 슐레지엔 전함의 함장의 직위를 맡게 된다. 이 시기부터 카나리스는 다시 정보국(1905년에 그는 이미 제국 해군의 정보 장교로 부임하고 있었다.) 업무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의용대 시절에 그는 좌익 인사의 정치적 암살에 앞장섰던 호른스트 폰 플러그-하투르크(심지어 카나리스를 기소하기도 했다. 무죄 선고를 받긴 했지만.)와 친일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와 함께 좌익 세력을 탄압하는 데에 일조했다. 실제 그는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다. 1930년에서 33년 기간 동안, 카나리스는 나치당과의 협력을 개시했는데, 이 역시 대다수의 당시 독일 군인들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그의 반공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겠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수권법을 통해 독일 내에서 절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는 독일 정보국, 아프베어의 수장으로 임명(1935년 1월)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제독으로까지 승진되었다. 1935년에서 35년까지, 그는 그의 출중한 스페인어 실력을 통해, 스페인에서 독일 스파이 체제를 구축했다. 카나리스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후방에서 프랑코의 보수세력을 지지하며 히틀러의 주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개입을 이끌었다. 1937년까지 그는 반공인사로서 히틀러의 지지자로 남아있었다. 독일 국민들, 심지어 힌덴부르크 대통령까지 그리 여겼듯이, 그 또한 히틀러와 나치당을 잿더미 속에서 독일을 부활시키고다시잿더미로집어넣었지만,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을 유일한 대책이자 구세주로 여겼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 그리고 메멜 할양까지, 히틀러의 과도한 해외팽창정책을 지켜보며 '아 이 새퀴, 빌헬름 2세꼴 나는 거 아니야?' 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히틀러의 정책이 독일을 재앙으로 이끌 것임을 직감했고, 그는 비밀리에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의 신사적인 성향은 나치 인사들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동과는 다분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카나리스의 스페인 정보원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교신 자료들은 그가 나치로부터 분명한 반대 선상에 섰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그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막으려 했고빅엿1, 프랑코에게 조언해 독일군이 스페인을 경유해 지브롤터를 점령하는 것을 막았다빅엿2. 카나리스는 직접 프랑코의 측근들을 만나 프랑코가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으며, 스위스와 영국 은행의 프랑코와 그 장성들의 소유 계좌에 막대한 액수의 자금을 입금해, 그들이 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하게했다빅엿3 카나리스는 심지어 미수로 그친 두 차례(1938년과 1939년)의 히틀러의 암살 음모에도 참가(!)했었다.
히믈러, 괴벨스, 그리고 카나리스. 카나리스:님들 저X맨임ㅋ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용인하는 것으로 끝이 난 뮌헨 협정 기간 동안, 카나리스는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외무부장관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와 함께 나치독일 정부 내의 "반전" 단체의 수장으로서 활동빅엿4했다. 이들은 1938년의 전쟁이 독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고,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비록 이들이 적극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타도하는 데에 앞장서진 않았지만, 한스 오스터 대령과 베른트 기제비우스 대령이 주도하는 급진적인 반나치 단체와 손을 잡아 수면 밑에서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다. 당시의 나치는 독일 국민들의 '영웅'이었으며, 설령 정부 수반들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란 것을 카나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카나리스의 가장 대담한 시도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메친과 함께 히틀러를 납치해 제거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진공 전에 나치당 전체를 소거한다는 계획빅엿5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 클라이스트는 비밀리에 영국을 방문, 영국의 정보국인 M16과 고위급 정치인사들과 상황을 의논했다. 클라이스트가 포함됬던 반나치 음모에서 최고 우두머리직을 맡고 있던 카나리스의 이름은 이때부터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독일내의 고위급 장성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더라도 영국은 독일에 전쟁에 선포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고, MI6의 의견도 그러했다. 영국의 선전포고는 그들에게 있어 히틀러를 몰아내는 데에 충분한 구실과 지지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주테텐란트 점령에 관한 히틀러의 요구를 용인(...)한다아망했어요.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와 만난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트 달라디에는 전쟁이 아닌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담은 클라이스트와 카나리스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줬다. 오히려 이를 통해 히틀러는 국제적인 명성과 함께 중요한 인사로 더욱이 부상하게 되었다. 그는 이성적이고 타협적인 인물로 여겨졌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음으로서 히틀러의 인기는 한층 높아졌다. 카나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정직하지 못하고 멍청하기만 한 결정'의 뮌헨 회담은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고, 히틀러를 제거할 기회를 얻기 위해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1939년 1월, 카나리스는 "네덜란드 전쟁의 공포"라는 영국 정부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문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1939년 1월 23일, 영국 정부는 독일이 1939년 2월에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전술 폭격기를 발진시킬 공항들을 손에 넣어 장차 도버 해협을 넘어 영국 본토로까지의 폭격을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카나리스로부터 듣게 된다. 근데 사실 이건 뻥이었다. 카나리스가 영국에게 독일의 위험성을 내보이기 위해 과장한 것. 비록 히틀러의 실각을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그의 계획은 꽤나 성과를 거두었고, 1939년 2월에 체임벌린의 주도로 영국 정부가 "대륙 협정(The continental commitment, 프랑스의 방위를 위해 영국이 군대를 파견한다는 내용)"을 맺게 했다빅엿6.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뮌헨 협정이 체결된 1938년 9월 30일 이후로, 카나리스와 MI6의 접촉은 계속 진행되었다. 1940년 5월, 체임벌린의 후임으로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을 때, 카나리스의 기대는 다시금 새로워졌고 처칠과 함께 히틀러와 나치당의 퇴거를 위해 전심을 쏟아부었다. 한편, 해군 사관생도로서 카나리스의 막하에 근무한 적이 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이 당시 보안방첩대(SD,Sicherheitsdienst)의 수장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비록 그가 카나리스의 후배(하이드리히는 해군 통신장교 출신으로 군에서 불명예 제대를 하기 전까지 카나리스의 부서에서 근무했다.)이자 친구이자 이웃이었지만, 그는 곧 카나리스의 라이벌이 되었다. 하이드리히는 아마 카나리스를 아프베어의 국장에 올리는 데에 은밀한 도움을 주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 이유는, 카나리스의 전임자인 아프베어의 국장, 프파츠 대장은 나치당과 반대 일선에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드리히는 카나리스의 정보국, 아프베어를 그의 손아귀에 놓고 싶어 했고, 카나리스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반면에 카나리스는 표면상으로 하이드리히와의 친분을 유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정보국을 더욱이 성장시켜(하이드리히의 세력을 흡수해), 독일군 내에서 괄목할 만한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사실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의 약점, 그가 유대 가계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하이드리히를 암묵적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하이드리히가 상당한 정치적 야망을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상급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와도 정치적 암투를 벌였음에도 정작 카나리스에게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종합하면 아주 설득력이 없는 가설은 아니다.
리차드 바셋의 서술에 따르면, 카나리스는 폴란드 침공에 관한 히틀러의 브리핑에 굉장히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카나리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고, 그는 이를 수첩에 기록했으며 이를 영국의 MI6으로 전송빅엿7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나리스는 SS 특수 임무부대(SS Einsatzgruppen)에 의해 자행된 전쟁 범죄들을 목격했다. 그가 직접 주시한 벵진의 유대교 회당 방화뿐이 아닌, 아프베어의 정보요원들로부터 폴란드에서 벌어진 다수의 끔찍한 악행들이 보고되었다. 카나리스는 이러한 잔혹 행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개인 일지에 기록해두었다. 이 일지는 그의 반나치인사들 중 한 명이자 그의 친우였던 베르너 슈레더에게 맡겨졌다.
1929년, 해군에 복무하고 있을 무렵의 사진
폴란드 학살에 대한 보고를 들은 직후, 카나리스는 1939년 9월 12일, 북부 슐레지엔에 위치해 있던 히틀러의 지휘용 열차를 방문했다. 그는 일련의 전쟁범죄들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려 했고, 히틀러를 만나 보기에 앞서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이텔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카나리스가 "나는 폴란드 상류층과 카톨릭 주교들과 신부들의 제거를 목표로 계획된 대량 학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소!"라 말하자, 카이텔은 히틀러 앞에서 직접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을 삼가라며 그를 꾸짖었다고 한다. 즉, 폴란드의 전쟁범죄는 이미 독일 지휘계통 차원에서 계획된 조직적인 범죄였다는 것이 카이텔의 발언으로 입증된 것이다.
학살과 침묵에 충격을 받은 카나리스는 오히려 더욱 활동적으로 업무에 전념했다. 더 많은 부담을 감당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히틀러의 정권을 타도하려 노력하면서도 아프베어의 경쟁자였던 보안방첩대와 표면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은 그를 향한 나치 지도부의 신뢰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1940년 1월, 그는 해군 대장으로 진급되었고 그의 부하인 에르빈 폰 라하우젠과 함께 국방군 내의 비밀 조직(검은 오케스트라, Schwarze Kapelle)을 형성했다. 이 조직은 카나리스의 성향과 마찬가지로 반나치, 반히틀러를 기치로 하고 있었으며 슈타우펜베르크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 이후, 사실상 조직원의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자살을 강요받는다.
1941년 12월, 베를린에서 소집된 조직 회담 중, MI6의 문건에 따르면 카나리스는 "아프베어는 유태인 박해에 동참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지켜야 한다."라며 그의 뜻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양국간의 전쟁에서 불구하고 최소한 아프베어 내에서 만큼은 영국 정보국과의 제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카나리스는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 영국으로부터 소련군의 배치 상황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MI6의 수장이었던 스튜어트 멘지스는 카나리스와 마찬가지로 강경한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그는 카나리스가 나치의 광기를 몰아내는 것을 돕는 한편 소련의 첩보를 흘려 독일군의 전력을 소진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산국가였던 소련의 국력을 악화시키는 일거양득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다팀킬보소.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카나리스가 의외일 정도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자, 수상함을 느낀 하이드리히와 히믈러는 그와 정보국을 상대로 은밀한 조사를 시작했고못하면까이고잘하면의심받고, 그가 영국인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하지만 물증도 없는 데다가, 독일군 내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위상 덕분에 섣불리 보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HOI 장관 목록에 사용된 사진이다(...).
1942년 6월, 카나리스는 여덟 명의 아프베어 요원들을 파스토리우스 작전(미국 본토 테러 작전)의 일환으로 미국 동부 해안 지방으로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미국의 경제 시설들을 파괴하고, 국민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전 시행 이 주 뒤, 요원 중 두 명이 배신한 탓에 전원이 FBI에 체포되고 만다. 이들은 모두 민간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었기에(당연하지만), 제네바 협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오직 FBI에 협조했던 두 명의 요원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요원들은 워싱턴 D.C.에서 열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콜롬비아 교도소에서 전기의자형에 처해졌다. 파스토리우스 작전의 실패로 그 이후 미국 본토 내에서는 어떠한 공작 음모도 시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도 또한 카나리스가 의도적으로 실패를 조장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1942년 이후, 카나리스는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 정보원들과 접촉하기 위해 스페인을 빈번히 방문했다. 1943년에는 독일 치하의 프랑스에서도 영국인들과 만남을 가지려 했고, 실제로 127 상테 거리(127 Rue de la Sante)에 위치한 수녀원에서 제이드 아미콜이라는 암호명을 지닌 프랑스 방면 정보국 수장이었던 클라우드 올리버 대령과 접선하기도 했다. 이 만남을 통해 카나리스는 히틀러를 제거한 뒤,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 여부를 알고 싶었고, 처칠은 이 주 뒤 아주 간단한 내용의 답문을 보낸다. "무조건 항복." 아망했어요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머무르고 있을 무렵, 그의 보안방첩대와 카나리스의 아프베어 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데, 폴 텀멜이라는 체코 요원이 SD에게 체포당했기 때문이었다. 텀멜은 실상 영국측 요원으로 카나리스는 그를 구하기 위해 방첩대에 개입했고, 텀멜이 아프베어에서 일하던 이중간첩이었다고 설득했다. 하이드리히는 텀멜이 실상 카나리스의 MI6 접선원이라 추측했고, 그에게 조사를 위해 아프베어를 SD와 SS의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했다. 카나리스는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당장 아프베어가 하이드리히의 관할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락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카나리스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이 거세져 갔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체코 망명 정부와 영국의 SOE가 공모한 유인원 작전을 통해 프라하에서 암살당했고 이를 통해 잠시나마 아프베어와 보안방첩대는 공존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카나리스는 MI6과 접촉하기 위해 두 개의 접선 통로를 구축해 두었는데 하나는 취리히, 다른 하나는 스페인과 지브롤터를 통한 것이었고 바티칸에도 접선원을 두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정보 활동과는 별개로 유대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명들을 스페인으로 빼돌리며 나치의 마수에서 구출해내기도 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아프베어 요원으로서 명목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받은 요원 증명 서류를 들고 독일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바르샤바의 유태인 랍비, 요제프 이자크 슈니어슨이 카나리스의 보호를 받은 유명인들 중 하나로, 이러한 공로를 통해 카나리스는 유태인들로부터 정의로운 이방인(Righteous Gentile, 유태인에게 협력한 비유태계 인물)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베셀 폰 프라이타크-로링호벤 대령의 아들인 니키는 1972년, 뮌헨에서의 증언과 최근의 폭로를 통해 카나리스가 교황 비오 12세를 납치하려는 히틀러의 음모에 관여했음을 밝히고 있다. 베셀 대령은 카나리스의 부하 장교로, 니키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잠시 억류하고 있을 무렵, 히틀러는 제국중앙보안성(Reichssicherheitshauptamt)에 에마누엘레 3세와 비오 12세를 암살하거나 납치함으로서 이탈리아인들에게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고 말한다. 2009년, 72세의 니키 폰 프라이타크-로링호벤은 이 계획에 대한 더 세부적인 정보들을 공개했다. 1943년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그의 아버지와 독일 정보국 내에서 공작 활동을 전담하고 있던 에르빈 폰 라하우젠은 카나리스의 언질을 받고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장성, 체자레 아메와 접선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계획을 아메에게 흘렸고, 아메 장군은 이 소식을 이탈리아 국내에 퍼트려 음모 자체를 분쇄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봐히틀러음모몇개좀던져봐라
카나리스가 적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은 점점 커져갔고, 하이드리히의 후임자였던 하인리히 뮐러는 그를 주도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뮐러의 계속된 수사와 보고 끝에, 결국 히틀러는 1944년 2월, 아프베어 요원들이 연합국에 귀순한 것을 빌미로 그를 아프베어 국장에서 해임시킨다. 그를 대신하여 발터 쉘렌베르크가 새로운 아프베어 국장이 되었고, 이 시점에서 아프베어는 사실상 보안방첩대와 합병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카나리스는 자택에 연금되었으며 이때문에 그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못했다.
1945년 4월 9일에 세워진 플로쉔베르크 반나치인사 추모비. 빌헬름 카나리스의 이름이 중앙에 보인다.
하지만 사실 7월 음모 이전, 스탈린그라트 전투 직후부터 카나리스는 나치 정권을 전복하고 장교와 장성들을 기소한 뒤, 히틀러를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7월 20일 이후, 카나리스의 오랜 경쟁자였던 SS의 수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자살한 반나치 장교들 중 한 명이 카나리스의 지기였던 것을 알아냈다. 계속된 심층적인 조사 끝에, 10번에서 15번 정도 되는 다른 암살 음모가 존재했었으며, 이들 모두 실패했고 최후까지 은폐되어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그리고 이 기도들에 참여한 대다수 인사들이 모두 카나리스와 막역한 사이였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고, 직접적인 물증은 없었다만 히믈러는 게슈타포를 통해 카나리스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히믈러는 이후 영국과의 협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분간 카나리스를 살려 두었다. 히틀러 또한 그를 억류해두는 것을 동의했는데, 추가적인 공모자들을 추려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가망이 없는 것임이 드러나자, 히믈러는 히틀러에게 카나리스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데에 필요한 승인을 얻어냈고, 오토 토르베크 판사와 발터 후픈코덴 검사 등 친나치 인사들을 동원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1945년 4월 9일, 한스 오스터 장군 등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플로쉔베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된다. 그리고 이때는 바로 종전으로부터 불과 한 주 전이었다. 처형 직전, 그는 모스 부호 형식으로 손가락을 툭툭 쳐 다른 수감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나는 독일의 영광을 위해 일한 것이며, 나는 변절자가 아니다.
카나리스는 공직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일등, 이등 철십자 훈장과 독일 은십자훈장, 그리고 국방군 20년, 25년 근속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카나리스의 두 부하 장교인 에르빈 폰 라하우젠과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는 전쟁 이후에도 생존했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카나리스의 반나치 업적들에 대해 증언함으로서 그의 공헌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라하우젠은 카나리스가 카이텔과 대화를 나누며, 독일 군부는 폴란드의 잔혹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으며 카이텔은 이것이 히틀러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대답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전후까지 생존한 카이텔은 전범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첫댓글 와우 멋진 반나치네요! 마지막 모스부호가 정말 인상깊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결국에는 말년에 처참히 고문받다가 죽죠.. 예전에 EBS 2차대전사 다큐에서 나온거 본적있어서 인상깊게봤습니다.
이래저래 대단한 인물이네요. 해상에서 탈주한 포로(...
ㄷㄷ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