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전 스님의 본생담으로 읽는 불교
28. 마하쟈나카 본생(‘본생경’ 539번) ④아내의 반대
질긴 애욕에 묶인 왕비는 정신을 잃었다
이성 잃은 왕비, 왕의 출가 막으려 방화·파괴·약탈 등 자작극
고행자들 “인내·안정 채우고, 비하·거만 버려라” 왕에게 조언
출가자와 가족 심리 잘 그려…남겨진 이들의 최선은 ‘이타행’
설법을 듣고 있는 마하쟈나카 왕.
부처님의 출가일은 음력 2월8일로서 올해는 양력 2월27일이다. 지난 호의 연재가 출가 계기였다면 이번 호에서는 본격적인 출가의 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아내의 반대이다.
남편이 출가를 단행하자 아내인 시왈리 왕비는 격렬한 슬픔에 빠져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출가를 막으려고 한다. 출가를 둘러싸고 출가자와 가족과 이미 출가한 이들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마하쟈나카 왕은 결국 왕궁 안에서의 사실상의 출가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궁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물리적인 출가를 결행한다. 이를 사실상의 출가 생활인 심출가(心出嫁), 즉 마음의 출가에 대응하여 신출가(身出家), 즉 몸의 출가라 한다.
몸이 출가하기 전에 마음부터 출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를 발심출가(發心出家)라 하는데, 왕은 황폐해진 망고나무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고, 왕궁 안에서 정진을 통해서 더욱 욕망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질 대로 강해져서 출가하는 것이기에 발심출가의 전형이다.
왕비는 왕의 출가를 막기 위해 두 가지를 감행했다. 먼저 왕비는 장군을 시켜 허물어진 집과 공회당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리고는 많은 보물과 재물들, 그리고 왕궁이 있는 미틸라 도시가 타고 있으니 돌아가자고 하였다.
왕이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내 물건이란 하나도 없는 우리는/ 실로 편안히 살아가리라/ 미틸라가 남음 없이 다 타더라도/ 내게는 탈 물건 하나도 없네’
이렇게 말하고 왕은 북문으로 나가버렸다.
불을 지르는 것으로는 설득에 실패하자, 왕비는 장군을 시켜 마을들을 겁탈하고 나라가 약탈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왕비는 비적들의 난이 나서 이 나라는 망하려 한다고 왕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내 물건이란 하나도 없는 우리는/ 실로 편안하게 살아가리라/ 온 나라가 약탈당해 다 없어져도/ 내게는 없어질 것 하나도 없다.// 내 물건이란 하나도 없는 우리는/ 실로 편안하게 살아가리라/ 저 광음천(光音天)의 그 신들처럼/ 우리도 기쁨 먹고 살아가리라’
사랑하는 이의 출가에 반대하는 왕비의 마음은 너무도 간절하였다. 그녀는 나라를 불사르고 도적을 시켜 약탈하게 하는 등 왕비의 지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게송을 듣고도 사람들이 계속 따라오자 사람들을 돌려보내려고 작정했다. 그래서 왕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곳은 누가 통치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대왕님이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왕은 땅에 선을 긋고 이 선을 넘는 자는 처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왕비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는데, 왕이 등을 돌려 가는 것을 보고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가슴을 치면서 큰 길 위에 쓰러져 굴렀다. 그러자 그 선을 넘어갔다. 사람들도 따라서 넘어갔다.
왕비는 맨 정신으로는 이별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비는 왕이 선을 그어 못 넘어오게 하자 그만 기절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절은 본의 아니게 왕비가 왕이 숲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를 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깊고 깊어 죽음과도 흔쾌히 맞바꿀 수 있지만 그것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의 출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오래된 애욕의 습관화된 마음이 질기고 질겨 그냥은 끊을 수 없어 기절하고 또 기절했던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의 황금굴에 살던 나라다라고 하는 한 고행자가 이레 동안 선정의 즐거움에서 ‘아, 즐겁다. 아, 즐겁다’ 하면서 일어났다. 그는 천안통으로 마하쟈나카 왕의 대출리를 보고 그가 견고한 결심을 가지도록 충고하러 왕 앞의 공중에 나타났다.
‘고달픔, 게으름 또 꾀부림/ 싫증과 또 식후의 졸음/ 이들은 몸의 뼈가 되어 있나니/ 실로 장애는 수없이 많다// 저 모든 기쁨의 삶이/ 네게 영속하기 나는 바란다./ 만일 어떤 모자람이 있으면/ 인내와 안정으로 보충하여라// 비하(卑下)를 버려야 하고/ 거만을 버려야 한다./ 선업과 명지(明智)와 정법(正法)을/ 존경하면서 행각(行脚)하여라’
이렇게 가르치고는 그는 자기 주거로 돌아갔다.
또 다른 고행자 미가지나가 공중을 날아와 허공에서 왕이 왜 이 길에 들었는가를 물었다. 왕은 게송으로 답했다.
‘미가지나여, 나는 보았다./ 열매 연 빼어난 망고나무가/ 과일을 탐하는 사람들 때문에/ 못쓰게 된 것을 나는 보았다.// 실로 이와 같은 우리들인 걸/ 많은 적을 가진 군왕인 것을/ 적은 우리를 죽인 것이다./ 열매 있는 망고가 꺽이는 것처럼// 가죽 때문에 표범은 목숨 잃고,/ 이빨 때문에 코끼리는 죽는다./ 재물 있는 자는 그 때문에 망하지만/ 집도 짝도 없는 이를 누가 죽이리./ 열매 있는 망고와 없는 망고/ 이 두 나무야말로 우리의 스승이네’
이 말을 듣고 미가지나는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하고 자기 주거로 돌아갔다.
나라다의 충고 중 부족함을 인내와 안정으로 채우고, 비하와 거만 양자 모두를 벗어던질 것,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게으름을 극복할 것 등은 인상 깊은 구절이다. 더구나 모자람을 인내와 안정으로 채우라는 말은 깊은 음미를 요한다. 안정이라는 것은 마음의 안정이다.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면 먼저 바깥으로 향하던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 이것을 쉰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마음을 안으로 되비추어야 한다.
히말라야 고행자들 중 미가지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 게송은 마하쟈나카 왕의 출가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미가지나가 떠난 뒤에 왕비는 왕의 발 아래 몸을 던지고 말했다. 왕자를 왕위에 나아가게 하고 난 다음에 출가하라고 간청했다. 왕은 디가부 왕자가 나라를 부강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비는 “저는 어떻게 하리이까?”하고 물었다. 왕은 다음의 게송을 외웠다.
‘남에게 보시하기와/ 남을 돌보아주기와/ 음식을 베푸는 것(施食)으로 세상을 살아라/ 이것이 현인들의 그 법이니라.’
사랑하는 이와 의지하던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시왈리 왕비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의 걱정이다. 아들이 성공하고 나라가 부강한들 이 한 몸 나는 어찌 살아갈 것인가? 애정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도 이별의 아쉬움을 남겨둔 것이 있다. 현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은 청암사 조실 만우 스님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다음 싯구를 남겼다.
契闊無端閱幾生(계활무단열기생)
무단히 만나고 헤어지기를 몇 생이나 거듭했는가,
那堪君去我仍留(나감군거아잉유)
그대 가고 나면 나 혼자 어찌 견딜까나.
마하쟈나카 왕은 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기, 돌보기, 먹이기이다. 한 마디로 이타행이다. 남을 위해 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1671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