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13일 토요일. 여행 15일 차.
어제 저녁 식사 후 거의 세시간 동안 불멍에 빠졌다. 잦아드는 불꽃만 응시했을 뿐 모든 생각을 지워버렸다. 참 오랜만이었다.
달 없던 밤 거봉(巨峰)의 희뿌연한 산체(山體)가 저만큼 남쪽으로 하늘을 가렸다. 멍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잠자리가 많이 늦어졌다.
오전 다섯시 창밖은 이미 밝았다. 커튼을 젖히니 때마침 일출시간. 첫 햇살이 낭가파르밧의 정상에 닿았다. 흰 구름은 넓게 산 허리에 걸렸다. 지긋이 내다보고 있자니 일순간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목조(木造)의 산장 양철지붕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난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 멀리 산 꼭데기는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데 창문 아래 어둑한 연못은 굵은 빗방울에 파문(波紋)이 인다. 저편은 밝은데 이편은 캄캄하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동시에 한 자리에 섞인 듯. 신비(神秘)란 바로 이런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이제 비는 그쳤다. 호수에 반영 된 산 그림이 아름다운데 건너편 침엽수림은 싱그러움을 더했다. 저 아래 메마른 황무지 세상과는 달리 하늘 닿은 여기가 녹색 풍요의 땅이 된 이유를 알겠다. 이웃한 산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리라. 이른아침 서늘한 공기에 무릅이 차다.
산장서 내 온 아침식사가 여기가 히말라야 오지임을 잊게한다. 짜파티는 기본이고 구운 빵에 딸기쨈 계란후라이와 병아리콩 커리. 게다가 식후에 짜이(茶)까지. 생각치도 못한 훌륭한 식사다.
이제 현지인 산행가이드를 앞세우고 출발이다. 산허리에 이제 막 피어나는 구름을 바라보며 히말라야의 침엽수림을 간다. 우선 '바열캠프(Beyal Camp)'에 도착한 뒤 잠깐 쉬었다가 더 윗쪽의 상부 전망대까지 갈 계획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고산지대라서 숨은 금방 차오르지만 눈만은 호강한다. 다시 구름이 짙어지나 싶더니 이내 비가 되어 내린다. 미리 우산을 준비하길 잘했다. 차츰 더 굵어지는 비는 이제 우박까지 섞여 내린다. 변화 무쌍한 히말라야의 날씨다.
두시간을 걸어서 '바옐 캠프(3,400m)'에 도착했다. 경사도가 크지 않아 평이한 이 코스는 걷기에 아주 좋다. 천천히만 간다면 누구라도 소풍하듯이 즐길 수 있는 트레일이다. 울창한 침엽수림과 드문드문 목초지(牧草地) 관통하여 흐르는 시냇물. 빙하수에 빗물까지 섞이어 유수량은 더욱 늘었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마저 호강한다. 이제 잠시 비는 그쳤다. 점심을 주문해 둔 로찌 주인이 따뜻한 차를 내온다. 근처에서 채취한 야생 허브란다. 캐모마일이라는데 매우 향기롭다. 찻잔을 들고 낭가파르밧을 올려다본다. 주봉(主峰)은 아예 구름 속에 숨었고 중턱 아래로만 겨우 허리를 드러냈을 뿐이다. 하지만 구름낀 경치 또한 절경이 되어서 역시나 눈이 호강한다.
상부 전망대까지는 아직 한시간을 더 가야만 한다. 궂은 날씨인 까닭에 갈까말까 약간의 갈등이 일었지만 결국 결심하고서 가이드와 함께 앞장섰다. 백여미터를 걸은 뒤 뒤돌아보니 많이 망설이던 나머지 세명도 역시 따라나섰다.
보조를 맞추어 한걸음 또 한걸음, 천천히 여유롭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면서 쉼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고산지대에서는 조금만 서둘렀다 싶으면 바로 반응이 온다. 호흡이 가빠짐은 물론이고 머리 속이 멍해지면서 어지럽다. 설령 아주 높은 고도가 아니라해도 약간의 고산 반응은 피할 수 없다. 전문 산악인에게야 별 게 아니겠지만 우리같은 일반 여행자들은 힘들어지는 높이다.
역시나 시간이 해결한다. 말 없이 한시간을 올라가니 커다란 바위 위에 펄럭이는 깃발로 표시해두었다. 푸른색 바탕 위에 초생달과 별을 품은 파키스탄 국기가 이방인을 맞는다. 여기가 바로 오늘의 최종 목적지 '낭가파르밧 상부 뷰포인트'다. 손목의 고도계에는 3,543m가 찍혔다. 이번 여정 중 트레킹으로는 최고 높이다. 주변의 파키스탄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며 함께 촬영을 청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오갖 기술을 시연하는 그들, 정말 사진에 진심인 국민이다.
되도록이면 좀 더 가까이서 만나 볼 요량으로 고봉의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신은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 않나보다. 구름에 가린 상황의 아쉬움을 저 아래에 펼쳐진 빙하 경치로 달랜다. 어쨌튼 이번 여행에 빙하만큼은 원 없이 본다.
서둘러 하산하여 바옐캠프로 돌아왔다. 비 맞은 몸이 춥다. 롯지 주인은 쎈스있게 난로에 장작불을 지펴두었다. 한 여름 칠월에 장작불이라니. 식탁 없이 바닥에 차려낸 음식이 정갈하다. 화덕에 구운 밀떡 짜파티는 기본이다. 함께 나온 닭고기 수프로 식은 몸을 덥히고 병아리콩 커리로 입맛을 다신다. 따뜻한 짜이(茶) 한잔 하고나니 나른하다. 불 지핀 난로 곁에서 식곤증이 밀려온다. 메트리스 놓인 구석으로 물러가 체면불구하고 누웠다. 툭툭, 장작 터지는 소리만 들릴 뿐 누구하나 잡소리를 내지 않는다. 기분 좋은 고단함. 졸립다.
구름이 더 짙어졌다. 가이드는 하산을 재촉한다. 큰 비를 만나게 되면 낭패다. 아니나 다를까 나서자마자 다시 비가 시작된다. 다행히 준비된 우산이 있다. 미끌림을 조심하며 천천히 내려간다. 빗줄기는 더욱 굵고 천둥소리마저 요란하다. 그래도 나그네는 서두르지 않는다. 내림길에는 별반 가이드의 도움도 필요 없겠다. 일행 다섯이 모두 흩어져 각자 하산을 하면서 고산 숲의 비오는 경치를 만끽한다.
하산을 완료하니 온 몸이 젖었다. 감기 기운이 생기는지 살짝 두통이 온다. 마침 먼저 하산한 일행의 방에 장작 불을 지펴두었다. 젖은 양말을 말려가며 불을 쬔다. 몸이 좀 따뜻해지자 두통의 기운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저녁 식사가 특별하다. 안내인 복만이는 별반 식재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탁 위에 짜장밥과 미역국을 올렸다. 성의가 대단하다. 따뜻하고 맛 난 음식이 고맙다. 배부르다.
비구름은 이미 사라졌다. 다시 낭가파르밧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비 내리면 저 위는 눈이 되어 쌓인다. 개인 뒤의 설산이 새로 내린 눈으로 더욱 하얗다.
서산에 달이 지자 별들이 빛을 다툰다. 낮에 내린 비로 인해 하늘이 더욱 청명하여 더욱 많은 별들이 드러났다. 여기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 아예 없으니 심신이 편안하고 여유 시간도 많아졌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심심도 하다. 시간 죽이기로 총총한 별자리를 촬영해본다. 밤하늘 별 사진 안에 낭가파르밧의 거대한 산체(山體)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