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이장가悼二將歌 _ 고려 16대 예종(1120년)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
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주을완호백호 심문제천을급곤 혼시거사의중 삼오사교직마우욕
망미아리자 급피가이공신량 구내직은 적오은현호사정”
☞ 예종이 1120년(예종15) 서경(西京:平壤)에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과 김락
(金樂)의 가면극을 보고, 두 장군에 대한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지은 노래이다.
신숭겸과 김낙은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 공을 높이 치하해서 태조
때부터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가 팔관회를 열고 여러 신하와 함께 즐기다가 두 공신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두 공신이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
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술은 누가 두 공신의 가면을 쓰고 허수아비춤을 추는 놀이를 했음을
알려 준다. 그런 풍속은 신라 이래로 이어져 왔는데, 두 공신의 일을 연유로 해서 팔관회에 편입되었다.
☙ 신숭겸 장군의 유묵遺墨
"친구여(태봉국 백성이여), 인편으로 전해온 소식을 들어보니,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해서 많이 안심(위안)이 되는구
나. 나만 여전하게 조용히 지내고 있자니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라네. 우리 서로 만나는 것이 아직 기약은 없지만, 서로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다만 우리 마음속에 서로를 사랑하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겠지. 당신(백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걱정하
는 마음에 정신이 어둡고 기운이 달려 이만 줄이려 하네." 이회 숭겸 <장절공실기 및 동국명현 유묵집에서>
☞ 이 글은 장절공께서 남기신 유일한 유묵이다.
백성들을 친구로 의인화한 편지 형식의 글로, 이는 육두품 등으로 서열화 된 부패한 신라와 궁예의 관심법과 폭정에 짓밟힌 태
봉국 백성을 구하고자 노심초사하는 장군의 애절한 애족 정신이며 나라를 근심하는 숭고한 우국충정의 마음이다. 이 정신을 왕
건 태조는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아 백성들을 위해 중폐비사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 :선물을 후히 주고 자신을 낮추어 겸양한다는 말. 고려 태조의 호족 회유 정책의 하나.
/ daum
/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180 (용산재)
☙ <박종인의 땅의 歷史>에서
신숭겸(?~927)은 전라도 곡성 사람이다. 춘천에서 자랐다는 기록도 있다. 후삼국시대 신천지를 꿈꾸는 왕건과 피를 나눈 형제
가 되었다. 하루는 왕건이 신숭겸에게 "하늘 나는 세 번째 기러기를 쏴보라" 하니 과연 그 기러기를 화살로 맞혔다. 마침 그곳
이 황해도 평산인지라, 감탄한 왕건이 신숭겸에게 평산이라는 본관을 내렸다.서기 927년 견훤이 신라 경주를 침략해 만행과 약
탈을 자행했다. 이에 구원 출정한 왕건이 대구 팔공산까지 진격했는데 견훤 부대를 당해낼 수가 없어 살아남은 100여 병졸과
함께 벼랑 끝까지 쫓겼다. 그때 신숭겸이 왕건에게 이리 말했다. "내가 형님과 군복을 바꿔 입고 싸우겠어요." 신숭겸은 견훤 진
영으로 돌진해 싸우다 목이 베여 죽었고 왕건은 무사히 탈출했다.
목 없이 돌아온 의형제 시신 앞에서 왕건이 울었다. 그리고 자기가 묻히리라 미리 봐둔 명당 터에 아우를 묻었다. 사라진 목 대
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함께 묻었다. 도굴꾼이 파갈까 두려워 봉분을 세 개 만들고 묻었다. 그게 바로 춘천 방동리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묘다.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 황금 두상을 꺼내려고 도둑들이 수시로 삽을 들고 나타났다고 증언한다.
여기까지가 춘천 신숭겸 묘에 봉분이 세 개 있는 이유다. 전설은 이어진다. 신숭겸이 전사하자 그가 타던 말이 머리를 물고서
곡성 동리산 기슭에 돌아와 사흘을 울고 죽었다. 산에 있던 스님들이 그 자리에 머리를 묻고 애마도 옆에 묻었다. 지금 동리산
태안사 뒤편에는 신숭겸의 목무덤이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곡성 목사동면 덕양서원에는 그의 태를 묻은 태묘가 있다. / 조선
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