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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8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코 3,31-35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3,31-35
성모님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극찬하고 칭송하는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화요일 강론>
(2025. 1. 28. 화)(마르 3,31-35)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1) 앞의 20절-21절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이 번역만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 되는데,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붙잡으러 나섰다.’는 ‘집으로 모셔가려고 했다.’입니다.
<친척들은, 또는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너무 바쁜 생활을 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혹사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여러 가지 나쁜 소문들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20절-21절의 ‘친척들’과 31절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모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워서’일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도 못하시고 일만 하시는 예수님이......
2)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내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혈육을 부정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 또는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참 가족’이다.”, 또는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나를 믿어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에 ‘내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두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ㄹ-12).”
쭉정이는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고, ‘알곡’은 그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알곡들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4)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말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여기서 “그분께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