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해가 구름에 가려 빨래 건조 상태가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이기에 내일까지 빨랫줄에다
걸어 두기로 했다.
햇살이 따갑지 않고 바람도 차갑지 않아서
산책하기엔 더없이 마땅한 날씨이지만, 그동안
하도 외출을 머뭇거려온 까닭에 산책길로 나서기에
주춤거려져 갈까 말까 하다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다 고단해지면 돌아서기로 맘 먹고 집을 나섰다.
하가등천을 거슬러 공용 주차장을 지나 지저분한 다리
아랫쪽으로 들어서도록 여전히 기운이 없고 숨조차 가빴다.
어딘가 의자가 있다면 잠시 앉아 쉬고 싶었지만, 마땅한
시설이 없는 걸 뻔히 알고 있으므로 도이2리 동네를 거쳐
아르딤복지관 까진 느릿느릿 걸음을 쉬지 말아야 했다.
다행히 시큰거리곤 했던 발목이 괜찮아서 그럭저럭
아르딤복지관에 도착하여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차량과 인적이 뜸한 데다가 건너편 산림청
수목원의 나무들조차 단풍은 커녕 잎의 색갈만 거뭇거뭇해 보였다.
여름에 비가 하도 많이 와서 나뭇잎 조차 빛에 굶주렸던가부다.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바람처럼 흘려 보내다가 말고
기왕이면 등받이를 갖춘 종합경기장의 벤치로 가 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큰길을 건너 통로 사잇길의 벤치에 허리를 기댔다.
문득 따끈한 국물 맛이 그리워지기에 버스를 타고 화성순대국집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은 시각이 다섯 시에도 이르지
못하였으니 만큼 조금이라도 더 걷는 게 건강을 기약하는 길이겠다
싶어, 큰 다리 위에서 실개천을 굽어보다가 돌아서서 새로 보수하고
붉은 색 계통으로 덧칠을 해 놓은 산책로에 들어섰다.
물병아리 여닐곱 마리가 놀고 있는 저류지 옆길로 대여섯 살 먹은
사내아이가 엄마인 듯 싶은 아줌마랑 사진을 찍어가며 퀵보드를 끌고
종종거리다가 굽어보는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거리기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오가 쟤만할 땐 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물살이 그려내는 동그라미를
감상하기도 하고 튀어오르는 물수제비에 까르르 웃어대곤 했는데...!
다시 휘적휘적 걸어서 어릴적 레오가 막대기 티라노로 할아버지의
데이노니쿠스를 공격하곤 했던 언덕 아래의 벤치에 도착했다.
경사진 녹지에 무리지어 선 산수유의 잎도 바깥쪽으로 부터 검게 말라가면서,
단풍은 커녕 쇠락하는 계절을 애도하는듯 누르팅팅한 색갈로 멍들어가고있는
사이사이로 예년과 다름없이 불그스름한 열매가 그나마 탱탱하게 맺혀 있었다.
맞은쪽 길 건너편으로는 휴먼시아 7단지의 벽체가 그럭저럭 깔끔해 보이는
가운데, 라우렌시오가 태어나 하늘채 어린이집까지 다녔던 704동 건물이
여전히 꿋꿋이 서서 흐릿한 눈길로 추억 어린 운동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빈센트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견디어 내던 아기의 모습과 그곳에서 마주치곤
했던 사람들이 지어내던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기는 물론 어미도 참 잘 견뎌낸 덕에 건재한 지금의 라우렌시오가 있거니...!
빈센트와 아주대와 아산병원과 강남의 교정 전문 치과와...라우렌시오를 태우고
첨으로 가보았던 그 병원들과 오가는 길에서 겪어낸 일들이 끝도 없이 펼쳐지며
무난히 잘 견뎌 낸 고통의 시간들이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손주들과의 기억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문득 한기가 들어 다시 큰길로 나와
버스정류장에 서니 직행버스는 자주 있으나 시내버스가 한 가지 밖에 없고 휴일엔
그나마 운행 횟수가 줄었는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머리를 굴리다가 가재리 아닌
1지구에 가서 따끈한 국물을 맛보기로 작정하고 다이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을씨년스런 날씨 탓인지 차도 인적도 뜸한 거리를 걸어 읍사무소 앞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니 문화원에 출강하곤 했던 허 선생이 떠올랐다.
요즘에도 가끔씩 길거리에서 목도되곤 하는 걸 보아 문화원 교습은 계속하는 모양인데
어째 한 번도 연락이 없을까?
아직 폐쇄중인 화성교육도서관 입구를 지나고 다이소 앞 건널목을 건너 휘어지니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골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편의점 앞에 앉아 담배 한 가치를 태우다 보니 가까운 곳에 육수당 간판이 보였다.
국물 맛으로 승부를 가른다는 국밥 전문가게이니 뭐든 먹을만한 게 있겠지?
출입자 명부를 작성하고 둘러보니 제법 손님들이 있는 편이라 안쪽 테이블에 앉으니
여기에서도 순대국을 파는데 이름하여 <부산 순대국>이었다.
서울식 국밥 집에 부산순대국이라...
물만 가져다 주고 영념 등은 셀프였는데 다데기와 들깨와 새우젓과 부추를 넣고
잘 저으니, 국물 맛이 깔끔하며 순대와 머릿고기가 깔끔한데다가 그런대로 푸짐하고
맛이 좋아서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찾아 오기를 잘 했구나 싶었다.
따끈한 국밥을 떠 먹으면서 차가운 것으로 포장 1인분을 주문하였다.
천천히 맛있게 먹었지만 배가 불러 결국은 밥을 조금 남겨 둔 채로 일어서서
터덕터덕 걷다보니 가을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어둑어둑한 길가에 네온사인들이
명멸하는 어스름이 사위를 채우고 있었다.
자주 걷는 길인데도 처음 보는 간판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찬찬하게 보면 어디에서나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한동안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이제는 고향처럼 되어버린 소도시의 밤을 즐겼다.
산책이라기 보다는 배회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바람에 구르는 낙엽같은 행보...
그럼에도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가을의 열매처럼 알알이 열리던 하루가
참으로 오랜만에 잊혀졌던 삶의 파편들을 이어주고 엮어내는 날이었음을 깨닫는 밤이다.
오늘 밤에도 잘 자거라.
소중한 나와 우리 가족의 기억들이여.
쉬엄쉬엄 10리를 걷다(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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