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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훈계
잠 31:1-9
1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2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8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잠 31:1-9 / [왕에게 주는 훈계] 다음은 르무엘왕의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쳤던 말씀이다. 2) 얘야, 내 말 좀 들어 보아라. 내 속에서 난 아들아, 내 말에 귀 좀 기울여 보아라. 내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너를 낳지 않았더냐!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3) 네 힘과 돈을 여자에게 쏟지 말아라. 이미 너도 알다시피 수많은 왕들이 그런 짓을 하다가 쓰러지지 않았느냐? 4) 르무엘아! 임금이 되어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임금이 되어 독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5) 술에 빠지게 되면 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가난한 빈민들의 인권을 감싸줄 줄도 모르게 된다. 6) 독한 술은 죽게 된 사람들에게나 주어라. 포도주는 상심해 있는 사람이나 마시게 하여라. 7) 그래야 한시름 놓을 게 아니냐! 그래야 근심이라도 잊어버릴 게 아니겠느냐! 8) 너는 입이 있어도 제대로 할 말을 못하는 이들의 입이 되어 진실을 말하여라. 누구 하나 기댈 이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바로 세워 주어라. 9) 입을 열 때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라. 빈민과 영세민을 보호하여라.
본 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잠언으로 잠언서 전체를 통해 강조되었던 주요 주제들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경계하여야 할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랴(1-2)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 왕으로서 지혜로운 통치자가 되도록 훈계합니다. ‘서원대로 얻은 아들’이란 표현은 르무엘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을 담고 있듯이 하나님께 받은 자식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랴”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은 훈계의 말씀이 중요함을 나타냅니다.
왕을 멸망시키는 일(3-7) 통치자가 헛된 욕망과 방탕함을 버려야 할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왕은 육체의 정욕에 빠져 타락하게 만드는 음녀에게 힘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로 인하여 큰 곤욕을 치렀고, 솔로몬은 많은 이방인 후궁들을 맞이하여 우상을 섬김으로 나라를 분열시키는 원인 제공을 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1장). 의약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독주가 소독, 마취 등 간단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치료제로 사용되었으나(마 27:34) 포도주와 독주는 사람의 판단 능력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방탕한 왕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스스로 법을 어기게 되고 자신이 돌봐야 할 가난한 백성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핍박하고 공의를 실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공의로 재판하라(8-9) ‘말 못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능력이 없어 억울하게 고통받는 자를 말하며, ‘모든 고독한 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무도 돌봐줄 자가 없어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통치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 물질적으로 크게 곤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고 먼저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사회에서 냉대받고 버림받은 연약한 자들의 형편을 살펴 궁핍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며, 그들의 억울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지도자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부름받은 자입니다.
적용: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당신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남성의 ‘머리 됨’(headship)은 여성을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려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권위와 책임을 의미합니다. 분명 하와가 먼저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아내의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부르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먹었느냐”하시며 직접적이고 개별적으로 책임을 추궁하셨습니다. ‘머리 됨’은 철두철미한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힘의 리더십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같이 하라고 남편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 설 교 >
왕의 법도
잠언 31:1-9 / 이한규 목사
< 싫은 것은 싫다고 하라 >
요즘 제일 답답한 사람은 싫다는데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다. 요새 많이 쓰이는 꼰대란 은어의 뜻은 간단히 정의하면 ‘싫다는데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꼰대 증상이 심하면 결혼은 피하고 인간관계를 주의하라. 아직 싫은 감정이 있는데 좋아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상대가 싫다는데 사랑한다면서 상대가 싫어하는 행위를 고치지 않고 자기 사랑을 무조건 받아달라는 모습은 꼰대 행위다. 누군가 은근히 혹은 위력으로 정당한 책무 외에 싫은 것을 부조리하게 강요할 때 싫은 것은 분명하게 싫다고 하라.
자기 혼자만 사랑한다면서 상대가 싫어할 자유도 주지 않으려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다. 그런 폭력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면 반드시 불행해진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남자가 데이트 신청이나 청혼이 거절되었다고 주먹질이나 칼질이나 황산 테러를 하는 남자다. 데이트 폭력은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라.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가족이나 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더 악질이기에 더 강력히 제지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요새 이성 감수성의 강조로 성 희롱이 나쁜 죄란 인식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성 희롱보다 더 나쁜 죄는 “왜 안 만나줘.”라고 위협하는 스토킹이다. 사실상 그런 위협이 왜 자신을 안 만나 주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왜 안 만나 주느냐?”고 위협하면 주위에 알리고 심하면 경찰에 신고하라. “안 만나 주면 나는 죽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만나 주지 말라. 그것도 소극적인 폭력과 위협이다.
< 왕의 법도 >
하나님은 세상을 힘으로 다스리거나 영혼을 강요로 이끌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힘으로 영혼을 이끌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왕은 힘을 절제해서 왕의 법도를 지켜야 하고 그에 준해서 힘 있는 리더도 리더의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가르친 왕의 법도는 무엇인가?
1. 호색을 금하라
본문 3절을 보라.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이 구절에 나오는 ‘하지 말라’는 두 번의 부정어가 원어에는 한 번만 나온다. 결국 이 말씀은 힘을 여자들에게 써서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힘을 여자들에게 쓴다는 표현은 여자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왕이 성적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여러 여자와 관계하면 여자들 간에 생기는 투기가 권력 투쟁으로 번져 왕과 나라를 파멸시킨다.
힘이 생기면 여러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려는 유혹을 잘 이겨내라. 한 사람으로 만족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돈과 힘과 권력이 없는 것이 낫다. 누군가가 왕이나 권력자를 지렛대로 삼아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는 요사한 아양을 잘 떨어 연하의 연산군을 가지고 놀면서 엄청난 뇌물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역사상 힘을 내세워 색을 탐하고 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에서 절세미인의 연극배우인 나나는 인생을 즐기며 돈을 벌려고 윤락을 한다. 그러자 많은 부자와 권력자가 그녀의 작업에 넘어가 파멸한다. 백작과 은행가는 가산을 탕진하고 군인 형제 중 형은 공금횡령으로 투옥되고 동생은 자살한다. 결국 나나도 화려한 집에서 전염병으로 죽는다. 호색의 죄는 관련된 모든 사람을 파멸시킨다. 왕과 권력자는 더 호색을 멀리해야 한다. 호색의 길은 오늘은 화려하지만 내일은 비참해지는 길이다.
2. 술을 삼가라
본문 4절을 보라.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포도주는 포도를 발효시킨 술이고 독주는 보리나 대추야자로 만든 도수가 높은 술이다. 왕이나 고위 리더는 국가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기에 바른 판단을 하고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술을 절제하라는 말씀이다. 특히 주권자들에게는 독주가 마땅하지 않고 왕들에게는 포도주조차 마땅하지 않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술 취함이 없도록 하라는 암시다.
왜 술이 최고 리더에게 마땅하지 않은가? 본문 5절을 보라.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왕의 핵심 책무는 법을 기억하는 것이다. 법은 왜 있는가? 기본적으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법이 없으면 힘이 진리가 되어 약육강식의 동물 사회가 된다. 그런데 왕이 술에 취해 법을 잊고 판단력과 분별력을 잃으면 약자의 송사를 굽힐 수 있기에 술을 절제해야 한다.
술 마시는 것이 죄인가? 어떤 사람은 술 중에 포도주만은 괜찮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성경에는 포도주를 좋게 언급한 말씀이 꽤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라고 했다(딤전 5:23).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란 별명을 얻으셨다(마 11:19). 그처럼 술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영성 증대를 위해 술을 삼가라. 특히 중요한 결정을 하고 중요한 책무를 감당하는 리더는 술을 삼가야 한다.
3. 약자를 살피라
본문 8절을 보라.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왕은 기본적으로 약자를 대변하고 살펴 주어야 한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할 수 없고 친구가 되자고 찾아오는 사람과 다 친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누군가를 멀리할 때도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까워진 사람은 누구도 경시하지 말라. 또한 싫은 사람이 치근대면 단호하게 멀리해도 그를 경시하지는 말라.
힘과 영향력이 없는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시하는 태도도 삼가라.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신실하고 책임적인 의견이라면 강자의 의견만 듣지 말고 약자의 의견도 들으라. 약자를 살피는 삶을 체질화시키려면 남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약자의 처지도 잘 살피고 약자의 의견도 잘 반영하면 타인 감수성도 커지고 인격 지수도 높아진다.
예수님은 약자와 어울리기를 기뻐하셨다. 높은 사람과 어울리며 높게 보이려는 사람은 사실상 낮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잘 따르려면 외형을 갖춘 사람만 좋아하지 말라. 약자를 도울 때는 적선하듯이 돕지 말고 그도 내 인생의 동반자란 마음을 가지고 도우라. 유권자의 표를 얻을 계산을 하고 돕는 정치인처럼 남의 마음과 보상을 얻을 계산을 하고 돕지 말라. 받을 계산이 없이 약자를 살필 줄 알아야 사람은 사람답게 된다. 약자를 살피는 마음을 체질화시킬 때 하나님이 복된 인물 리더로 삼아 주신다.
4. 공의로 재판하라
본문 9절을 보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왕은 약자를 대변하고 살피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공의로 재판해서 곤고하고 궁핍한 자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다만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가 공의를 따라 행할 때 그들을 신원해야지 그들이 불의하게 행동해도 무조건 그들의 편을 들지는 말라. 베짱이처럼 놀기만 하고 수시로 약속을 깨면서 가난해진 사람을 무조건 편들면 그것도 불의다. 왜 법이 생겼는가? 힘에 의해 공의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법은 원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신명기 19장 21절 후반부에 이런 모세 율법이 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 모세 율법이 지금 기준으로는 엄한 것 같지만 당시 대중에게는 큰 기쁨과 평안을 주었다. 고대에 인권이 없었을 때 강자는 남이 자기 가족 한 명을 죽이면 그의 가족 전체를 도륙해 죽였고 눈에도 생명으로, 이에도 생명으로, 손에도 생명으로, 발에도 생명으로 갚아 죽였다. 그런 시대에 죄 지은 만큼만 죗값을 받게 한 율법이 세워졌으니 힘없는 다수는 법 때문에 큰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고대에도 법은 강자의 폭력으로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약자를 보호하려는 안전 장치였다. 그런 법을 불의하게 기득권 보호 수단으로 활용했기에 예수님은 율법 수호자인 바리새인의 위선을 무섭게 질책하셨다. 법이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어 적용되면 법은 대중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법은 범법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지 일반인에게 공포 대상이 되면 안 된다. 법은 힘으로 지배하려는 사람의 욕망을 막아주는 장치가 되어야지 그 욕망에 날개를 달아주는 도구가 되면 안 된다.
얼마 전 영국에 간 꿈을 꾸었다. 거기서 렌터카 시동을 켜는데 바로 옆에 경찰이 있었다. 그런데 꿈나라 영국에서는 경찰이 1미터 이내에 있을 때 차 시동을 걸면 안 된다는 법이 있었다. 그런 법을 모르고 차 시동을 걸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외국인이라 법을 잘 몰랐다고 하소연했지만 결국 법정에 세워졌다. 꿈속에서 힘들게 법정 공방을 벌이며 사투하다가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고 자유를 얻었다.
그때 악몽에서 깬 후 법이 상식의 토대 위에 형성되지 않고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공격하는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법도 그것을 시대와 상식에 맞춰 좋은 사람이 지혜롭게 선용해야 진짜 좋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기본 바탕에는 하나님 의식과 말씀이 있어야 하고 공의와 진리 의식도 넘쳐야 한다. 내가 말씀 안에서 바르게 잘 준비될 때 하나님은 나를 세상을 이끌 인물로 높여 주실 것이다. 늘 왕과 리더의 법도를 잘 갖춰서 인물 리더로써 세상을 복되게 만드는 촉매와 선봉이 되라.
나의 자랑스런 어머니로 기억하게 하자
잠 31:1-9, 29-31 / 고일성 목사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우리들의 부모님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언제 불러도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흐믓하게 하고 가슴 뭉클하게 하며 울먹이게 만드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낳으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오리/어머님의 사랑은 그지 없어라.
사람은 누구나 다 어머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적인 돌보심,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 가르침을 받았기에 오늘 우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헌금 하시는 분들의 소원 가운데 우선 자녀들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많습니다. 병들지 않고 약해서 골골하지 않고. 자동차 사고나 다른 사고로 아파하는 일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모 앞서가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다음은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사회에 나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공부 잘해라, 공부, 공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을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음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며 부부지간, 형제지간 화목하게 행복한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부부지간에 사랑이 없고, 형제 자매간에 화목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는 그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위한 어머님의 사랑을 무슨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한 선인(仙人)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한 곳에 이르자 사람들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살아 있을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나, 고생하던 사람, 잘 생긴 사람, 미운 사람 등 갖가지 사람의 뼈가 한테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무상한 거로군. 죽으면 모두가 뼈다귀만 남는데----” 그때 선인(仙人)은 제자들에게 이 뼈들 중에서 여자의 뼈를 골라 낼 수 있는지를 물었으나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입니다.
그때 선인(仙人)이 뼈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뼈다, 여자의 삶을 생각해 보아라, 어려서는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늘 못한 대접을 받는다.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면 온몸의 양분을 아기에게 주게 된다. 아기를 낳을 때는 몸 속의 많은 피들을 아기를 위해 흘린다. 젖을 먹이며 또한 자기 몸의 일부를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자의 살과 피뿐만 아니라 뼈 속에는 양분도 남아 있지 못한다 쓰디쓴 여자의 삶은 그 뼈를 이토록 가볍고 검게 만들지 않느냐?”
제자들은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의 고난의 찬 삶을 생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않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머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들을 존경하는 날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에 감사하는 날 입니다. 이 날은 부모님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날입니다. 이 귀하고 아름답고 뜻 깊은 날에 저는 자랑스런 어머니를 말씀드리면서 함게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참된 인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참된 인물이 필요합니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사람이 문제요, 어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요,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항상 사람이 문제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구성원이요,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성장하기에 오늘의 필요한 인물을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의 성격, 얼굴, 걸음걸이, 말 하는 것 등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보다는“그 어머니에 그 자녀들”이라는 말이 더 어룰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어머니의 품 안에서 배우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남이 진리입니다.
본문은 옛날 이스라엘의 한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시대나 환경을 초월하는 현숙한 여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 경건한 어머니는 그 가정을 바로 세우며 훗날 역사를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잠언14:1에“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한 여인에 의하여 그 가정의 행복을 이루며, 사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을 세울 수도 있고, 반면에 망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머니란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이며 순고한 뜻인가를 되새기면서 어머니의 사명과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이 시간 깨달으시고 자녀를 훌륭한 자녀로 양육하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어머니들을 닮아가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어머니는 자식의 밑거름입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어머니는 점점 늙고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만 자식은 그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갖는 순간부터 온갖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식은 어머니의 분신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어머니들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자라는 것이지, 지식의 힘이나 물질의 힘만으로 키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숭고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처해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에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위험도 불사합니다. 평소에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말합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모시겠다던 무리들도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 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은 주님의 십자가 바로 그 밑에 서 있었습니다.
작곡가 이흥렬씨는 일본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는데 피아노가 필요다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의 편지를 받아든 어머니는 솔방울을 모아 팔아서 400원을 송금해 주어 어머니의 피 맺힌 돈으로 야마하 100을 사서 평생을 사용했는데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양주동 박사가 글을 쓰고 자신이 곡을 붙인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어머니들 모두는 자녀들의 밑거름입니다.
이런 위대하고 숭고한 어머니를 자녀들은 잊지 말고 효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은혜 잊지 말고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나아가 어머니는 자녀들의 진실된 밑거름이 되십시요.
2. 어머니는 자녀의 거울입니다.
영국의 격언에 보면‘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그 자식과 같이 있다’고 했습니다.
‘J.F. 헤르바르트’는 말 하기를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필적한다”. 고 말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모든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격의 50%가 1세부터-6세까지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일본의 극작가요 소설가인‘야마모도 유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어느 여자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답게 된다는 것은 좀처럼 해서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좋은 학교 중의 학교요. 스승중의 스승이요. 교훈중의 교훈입니다. 자식들은 인생의 참 모습을 어머니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가정교육, 교회학교교육, 학교교육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어머니의 가정교육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어렸을 때에 접하는 곳이 가정이며 어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들이 제일 많기 때문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말합니다
“내가 나된 것은 오직 어머니 덕이라”고 말입니다.
링컨은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전부, 그리고 장차 되기를 바라는 것의 전부는 오직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의 덕이다”
나폴레옹은 말합니다.
“나의 마음과 뜻, 나의 부지런함, 그리고 나의 자치(自治)는 모두 나의 어머니의 교육으로 얻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버이 여러분!
어머니는 자녀의 거울입니다. 잘 기르십시요. 덕스럽게 기르십시요. 인자하게 기르십시요. 사랑스럽게 기르십시요. 이웃을 위한 사람이 되도록 기르십시요.
착하고 성실하게 기르십시요. 신앙 안에서 바르게 자라도록 힘쓰십시요. 자녀는 거울인 어머니를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해당화는 선비들로부터 사랑받는 꽃으로 시(時)나 노래의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또 많은 문인 문객들이 해당화를 그렸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이 해당화를 소재로 시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어머니 이름이 ‘해당’부인인지라 아무리 꽃이라도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송구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유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심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평소의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로 하여금 효심을 자아내게 한 것입니다.
3. 한 남편의 어진 아내로서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잠언31:10절에“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29절에“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칭찬받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에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남편은 아내를 신뢰하고, 아내가 남편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잠언31장11절에 보면“남편은 그 아내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부부간에 피차에 의심하게 되면 그 가정은 그 순간부터 금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잠언서는 말합니다. 어진 아내의 내조로 인해서 남편이 사회에서 유력한 인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사회적으로 큰 인물로 만드는 부인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남편을 창피하게 만들고 밖에 나가서 일을 못하도록 하는 아내들도 많습니다. 한 가정의 행복도 어찌보면 아내에 의하여 크나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80세의 나이로 추운 겨울 이름도 없는 시골역에서 객사하여 죽었습니다. 그는 죽는 마당에 절대로 자기의 아내가 자기의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유언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3대 악처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창조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잘못 만나면 톨스토이와 같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후회스런 인생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3. 어머니에게는 자녀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숨겨진 힘이 있습니다.
에머슨은“어머니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린이의 미래의 운명은 어머니의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위대하고 숭고하고, 거룩한 어머니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어머니 한나로 인하여 하나님께 일생을 바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앙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모니카 여사는 허랑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하여 20년 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모든 교부 중 가장 위대한 교부로 추앙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아들이 된 것은 오직 당신께서 나에게 이런 어머니를 주신 까닭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자녀들 가운데 아직도 교회에 나오지 못하므로 걱정하고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가 계시다면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배우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눈물로 키운 자녀. 기도로 키운 자녀는 망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자녀를 위한 기도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는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불우한 환경, 모진 여건 속에서도 자식을 훌륭한 인물로 만드는 힘이 우리들의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일 것이며, 땀어린 수고와 희생입니다.
가혹한 매와 책망도 필요하지만 눈물의 기도는 자녀들에게 크나큰 감화를 주고 백번의 말 보다 한 번의 피어린 수고와 희생은 자녀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머니에게는 자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위대한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위대한 힘, 그 감화력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불태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는 반드시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4. 자랑스런 어머니로 기억되게 하는 길은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6:4절에“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어머니가 가장 자랑스런 어머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이의 장래 운명은 그 어머니의 하는 일에 달려 있다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말 하기를“불란서로 하여금 훌륭한 어미니를 가지도록 합시다. 그래야 모든 자녀가 훌륭해 질 것입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1483년 독일의 ‘아이스레벤’ 이라는 조그마한 동리의
한 광부의 집에서 태어나 믿음 안에서 자라고 어머니의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부패한 당시의 종교를 개혁하는데 과감히 나설 수 있었던 신앙의 영웅‘마틴 루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랑스런 어머니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소개합니다.
유대인의 격언에“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실 수 없으심으로 이 세상에 먼저 어머니를 보내 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깨달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님의 품 안에서 모든 것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창조자요 조각가요 훌륭한 자녀를 그리는 예술가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랄프 왈도 에메슨’은“인간들은 모두 그들의 어머니의 작품이다”라고 했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2:41-42절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의 남편과 함께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전례에 따라 예루살렘에 올아갔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가르치는 말씀에 순종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을 때도“돌에 맞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승인하였던 것입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그 본을 따라 갑니다. 보지 않는 것을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들은 본대로 행합니다. 음식 솜씨에도 가풍이 있는 까닭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은 음식의 솜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릴때부터 말씀에 순종하는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자라셨기 때문에 주님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는데 무리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순종의 모범이 자식을 위대하게 합니다.
우리는 좋은 본을 보여서 훌륭한 아들을 길러내는 성도가 됩시다. 겉만 낳았지 속은 낳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자녀들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등 모두를 배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2) 아들을 위하여 고초를 당하신 자랑스런 분입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근심 덩어리입니다. 더구나 마리아처럼 고통을 많이 당한 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걱정으로 시작된 것이 결국에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한숨에 잠자고, 그 눈물과 피를 마시고 자란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어머니의 거룩한 희생만큼 성숙되어 갑니다. 어머니의 수고 만큼 위대해지며, 어머니의 눈물 만큼 성결해집니다. 어머니의 고통이 자녀로 하여금 평안하게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로 눈물을 흘리는 부모가 있을 때 자녀들에게는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고 후일에 눈물은 면류관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3) 사랑의 훈계를 아까지 아니한 어머니였습니다.
‘매 끝에 효자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훈계를 아끼지 아니하는 어머니가 어진 어머니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어렸을 때의 엄격한 인간교육이 훌륭한 자식을 만듭니다.
자식이라고 무조건 이뻐하면 안됩니다. 책망과 의로 교육하지 않으면 훗날에 효도를 받지 못합니다. 과도한 칭찬과 무관심은 자녀들을 나쁜 길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혼을 내야 할 때는 혼을 내야 합니다.
훈계한 후에 자녀 몰래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다면 자녀들이 밝은 미래의 주인공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자랑스런 어머니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훗날에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왕으로서 주의할 일
잠 31:1-9 / 박조준 목사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르무엘왕을 솔로몬 왕이라고 말합니다. 르무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위한 자” 혹은 “하나님께 바친 자”입니다. 사무엘하 12장 25절에 솔로몬 왕에게 주어진 존귀한 이름이 있는데 여디디야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르무엘이란 이름의 뜻과 여디디야라는 이름의 뜻이 매우 가까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아마 르무엘이란 이름은 솔로몬의 어머니가 어릴 때 애칭으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닌가, 이런 추측도 합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애정 안에서 얻은 이익을 무척 귀하게 여겼던 것이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르무엘이란 어떤 이웃 나라의 왕자였고 그 어머니는 이스라엘 여인으로서 혹시 다윗의 가문의 여인으로서 그 아들에게 이 선한 교훈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한 일을 가르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며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한결같은 소원인 것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 미숙할 때는 주로 그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있으므로 이 때야 말로 그들 인격을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어머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선용하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로서 특히 어머니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옷만 철따라 해 입히는 것으로 된 것 아닙니다. 영양실조 되지 아니하도록 음식을 잘 해 먹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린아이들의 심령을 바로 지도하고 인격 형성에 있어서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대로 “한 남자가 성공하는 데는 두 여인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한 여인은 그를 보필하는 아내의 손이라”고 한말은 퍽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왕도 그 예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가 생각한 잠언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훈계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다 읽을 시간은 없지만 주옥같고 진주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까?
가령 잠언 3장 1-10절을 보세요. 4장 10-19절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잠언을 강해 하면서 저 자신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손자의 병법”을 읽으면 인간 처세에 많은 유익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는 대로는 잠언은 손자의 병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정말 무궁무진한 삶의 지혜가 이 잠언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60시간에 걸쳐서 잠언을 생각하였는데 앞으로 어떤 기회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다면 적어도 120시간 이상을 다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주간에 이 잠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너무 요긴한 말씀을 미쳐 다 생각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맛이 무궁무진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새 맛이 솟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왕에게 그 어머니, 모왕후가 주신 간곡한 훈계입니다. 2절에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할꼬” 여기 세 번씩 반복하여 자기 아들을 부릅니다. 이 모왕후는 그 아들 왕에게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고 큰 사명을 지고 있는 아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야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며 부심하고 있습니다.
요게벳은 그 아들 모세에게 바른 흉계를 하였기 때문에 후에 장성해서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고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나설 수 있는 결단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한나는 서원대로 믿은 아들 사무엘에게 바른 교훈을 하고 사무엘이 그 교훈을 순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 이끌고 나간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특별한 실수 없이 살 수 있어서 훗일에 우리에게 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모왕후는 그 아들을 향하여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부심 하다가 “내 아들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꾸짖는 것 같은 감을 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젊어서부터 너무 술과 계집에 끌리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장래를 염려한 나머지 그를 책망하고 엄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왕들의 생활이 대개 그러하였습니다.
“무엇이? 내 아들아! 네가 살아 나가겠다고 마음먹은 인생의 행로가 바로 그것이냐?”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이 마로 이것밖에 더 없더냐? 내가 너를 좀 꾸짖어야겠다. 따끔하게 책망 좀 해야겠다. 너는 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너는 내게서 나왔어. 너는 내 태에서 난 아들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부모의 권위와 애정에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어떤 악의가 개재되어 있다고 의심해서는 안돼. 너는 내 분신이야. 나는 너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맛보았어. 나는 고통으로 너를 낳았지만 지혜를 얻어 선하게 되리라는 것밖에 내 수고와 고통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만 해주면 나는 충분히 보답을 받는 셈이다.”
“너는 내 하나님께 바친 자다. 너는 내가 하나님께 서원해서 얻은 아들 곧 하나님께 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께 되돌려 보내겠다고 약속하여 얻은 아들이며 또 그렇게 바쳐진 아들이야. 더구나 너는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주시도록 자주 기도 드린 아들이야. 그런데 이렇게까지 기도한 내 아들이 중간에 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니? 네게 대한 나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겠느냐?”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자, 그러면 이 어머니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음란과 술취함이란 두 가지 멸망시키는 조에 대한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이 죄에 빠지면 그 육신과 영혼이 파멸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다시 말하면 주어진 시간과 정력을 그런데 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교훈은 꼭 남자에게 주는 경고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도 같습니다. 공연히 낯선 남자에게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소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자리에 특별히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많이 계시니까 한 마디 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대학에 갈 때까지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어떤 학생은 주일에 교회 학교에까지 나오지 못할 정도로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물론 대학도 가기 전에 과외 공부한다고 부모에게는 속이고 으슥한 골목을 찾아다니며 재미보는 남녀 고등학생도 혹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고 엉덩이에 뿔났으니 그 장래는 뻔한 것이고.
대학엘 입학하면 다된 줄 알고 그 동안 놀아 보지 못한 것을 좀 풀어놓아서 공부와는 멀어지고 쓸데없는데 낭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사이 가장 대학가에서 유행되는 것이 소위 미팅이라는 것인데 별 것 다 많은 모양이죠? 남학생들은 여자 대학 찾아다니는 것이 일과이고 여학생들은 접수된 미팅 신청서 가운데서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괜찮은 상대를 고르기에 고심한다고 합니다. 과 대표(科代表)나 계열반 대표(系列班 代表)가 미팅 교섭차 만나는 것이 소위 프리미팅(Pre-meeting)인데 여기서 시간과 장소, 회비 타협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번호가 적혀 있는 미팅 티켓이 배부된다고 합니다. 3, 4년전만 해도 남자 8백원, 여자 5백원의 표값이 있었는데 요사이는 대개 무료라고요,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번호가 있는 미팅 티켓을 들고 지정된 다방에 가서 같은 번호의 파트너와 만나는데 가슴 설레이는 고비지만 판단을 날쌔게 해야 한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동안에 마음이 맞으면 장소를 다른 데로 옮기고, 아니면 그 자리에서 굿바이 하고 청산 결판을 내야 한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력이 쓰여지겠어요? 요즘 대학생은 대학 다니는 4년 동안에 평균 15-20번 하고 좀 많은 측은 50-70번 정도의 공식 미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비공식 미팅까지 합하면 공부할 시간 언제 있겠어요? 맨날 미팅하다 졸업장 받는 것 같아요. 어떤 이는 1년에 40번-50번 한다니 학생들 말대로 미팅에서 미팅으로 끝나는 인생인가 봅니다. ‘혹시나’하고 나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게 미팅의 본질이라고 하니 허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미팅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지 3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2, 2월엔 반창회 미팅, 3월에는 메인 미팅, 4월에는 벚꽃 미팅, 5월에는 딸기밭 미팅, 6 · 7 · 8월엔 아이스크림 미팅, 9월엔 배밭 미팅, 10월엔 등산 미팅, 11 · 12월엔 종강 미팅, 또한 달과는 상관없는 티 미팅, 피보기 미팅, 피아노 미팅, 토큰 미팅, 서클 미팅, 만나기 미팅, 교외선 미팅, 드라이브 미팅, 자전거 하이킹 미팅, 좋은 사람 나타날 때까지 꼭 맞는 사람 찾는 가봉 미팅, 하숙생끼리 하는 하숙 미팅, 재수생 미팅 등등.
밑천 안들이고 인기 있는 미팅이 소위 토큰 미팅인데 40원짜리 토큰 한 개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소위 절약형 미팅이라고. 시내 버스 종점에서부터 빈자리에 나란히 앉아 시내로 들어오며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이 통하면 함께 내려 훌 코스를 시작하고 시큰둥하면 버스 승객처럼 언제 알았느냐 하며 따로따로 제 갈 길을 간다고 합니다.
미팅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큰 공을 품고 나아가는 젊은 남학생, 여학생 여러분! 이런 일에 너무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소비하지 마세요.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그리고 4절을 보세요.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5절에서는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베드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왕이요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렇게 존귀한 것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바로 잘 간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포도주를, 독주를 퍼 넣을 수 있습니까?
술 마시는 일이 우리 몸 뿐만 아니라 우리 도덕 생활에 얼마나 해를 주는가 하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술 마셔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생각한대로 잠언 23장 29절 이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었으면 합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말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흔들흔들 한단 말이요)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마비가 됩니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세상에 술독에 빠진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6절에서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절에서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도 로마 군인들이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한 후 갈대에 꿰어 마시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독주나 포도주는 죽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산 사람, 살아야 할 사람, 일할 사람에게는 절대 금물입니다.
그런데 이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아십니까? 작년 일년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막걸리, 소주, 맥주, 과실주, 고량주, 법주, 위스키, 청주, 기타 순으로 공장 생산가로 따져 3,800억원 어치를 마셨습니다. 소매 가격으로 하면 7,000억원 어치를 마셨습니다. 보통 요리집에서 술값이 10,000원이면 안주값, 방 값, 화대까지 해서 30,000원은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줄잡아 작년 일년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술과 더불어 날아간 돈은 천문학적 숫자가 소비된 셈입니다. 그 뿐 입니까? 술과 여자는 떼 놓을 수 없습니다. 아까도 읽었지요? 술을 마시면 그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이고 마음에는 망령된 것을 발한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술에는 원숭이 피가 섞였기 때문에 술 마시면 못하는 장난이 없어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 취하고 방탕치 아니한 사람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세상 향락, 방탕한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예배당에 나온다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하나 하나의 심령에 세상에 취하지 말고 예수께 취하고 육신에 미치지 말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해서 미치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술은 꼭 마시는 술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취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 술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술에 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도 형제도 다 보이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의 술에 취한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세상 향락의 술에 취한 사람도 많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도취된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새 술에 취하라고, 예수에게 미치라고, 전에 사도 바울 같은 분은 예수에게 미쳤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새 술에 취했었습니다. 세상에 취하든지, 예수에게 취하든지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예수에게 미쳐야 합니다. 예수가 내 생활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예수만 나와야 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다 이런 축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의 훈계
잠 31:1-9 / 푸른교회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훈계한 잠언이라>(1절).
<르무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의 이름 만큼이나 경건하고 대단히 존귀한 왕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그게 다 그의 어머니의 훈계 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르무엘 왕을 양육한 어머니의 신앙교육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서원하여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2절).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과 너는 <내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라>는 것. 따라서 너는 나의 분신이고, 또 믿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어머니의 자식 훈계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바르게 전달되고 또 어머니가 바라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자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3절). <네 힘을 여자에게 쓰지 말라>는 것은 정욕에 빠져 기운을 허비하지 말고 그 힘으로 주어진 과제와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절대권력을 가진 왕들에게는 항상 향락과 정욕이 최대 걸림돌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왕들이 여자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르무엘 왕 어머니의 훈계를 바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모든 기운을 소진 시키는 정욕에 덜미 잡히지 마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영혼을 지키고 주어진 사명에 더욱 성실하십시오.
포도주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4-5절).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왕이 포도주를 마시고 독주를 찾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사회생활을 핑계로 음주 불가피론을 펴는데 반해 날마다 연회를 베풀며 주색에 빠져 살기 쉬운 왕을 향해 포도주, 독주가 마땅치 않다고 훈계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왕 같은 제사장들인> 우리 믿는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술은 우리로 하여금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게>하고 바르게 처리해야 할 일을 <굽게>합니다. 투명한 영성을 탁하게 하고 맑은 영혼을 흐리게 하거나 왕 같은 제사장의 품위와 위신을 손상시키기 쉽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고 재판할 때에 실수를 한다>며 한탄했습니다(사28:7). 의외로 술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하고 관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오.
송사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어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8-9절).
이는 힘없는 자, 고독한 자 편에서 그들을 위해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위해 보다 용감하고 담대하라는 당부요 곤고한 자, 궁핍한 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라는 권면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소위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이신 하나님 편에 서서 힘없는 이웃들을 두둔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송사에 앞장서야 합니다. 르무엘 왕 어머니의 훈계가 곧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당부임을 깨닫고 이를 성실히 수행하는 신실한 주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르무엘 왕을 훈계한 잠언
잠 31:1-9 /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조무웅 목사
우리가 달려오다 보니까 잠언의 마지막 장에 왔네요 처음 시작할 때는 이것 언제 끝나 하지요 거대한 광산을 뚫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인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반복된 것이 나오고 그래도 하나 하나 곰씹어 왔지요.
대게 잠언에 등장하고 있는 가르침의 스승은 누구였습니까? 솔로몬 그 다음에 우리가 마지막 지점에서 보았던 것이 아굴의 잠언이었지요 솔로몬이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솔로몬이 남자여요 아굴 아굴은 남자이지요 이게 사실은 지혜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남자라는 게 좀 유감스럽습니다.
그렇지요 지혜는 여인이지요 왜 지혜하면 여인이지요 어머니가 된다는 게 굉장한 지혜를 갖게 되는게 아닐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생명을 보살피고 두 분이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어요 사실 대만의 신학자인 송찬성 씨에스 송이라고 이야기 하는 그 분이 어머니를 가리켜서 영어로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Co - creater of God 그렇게 말했어요.
Co - creater of God 이렇게 이야기 하면 공동창조자야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 생명을 출산할 때 어머니는 공동창조자인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알다싶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아이와 탯줄로 이어져 있지요 탯줄을 끊지만 아이와 깊이 연대되어 있고 어머니의 깊은 자식에 대한 사랑 태중에 잉태했던 그 아이 출산에 산고를 통해서 낳았던 그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과는 깊이가 다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그 사랑을 긍휼하심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긍휼하심이라고 하는 그 단어는 여성의 모태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성의 모태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적한 용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자식에 대한 깊은 연민의 마음 그런 것 아니어요 아들아 혹은 딸아 차라리 너 대신 내가 아팟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렇지요 그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들 야곱에게 복을 네가 받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야곱이 두려워 떨자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창세기 27장 13절 아들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그렇지 않아요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지요
세상에 그런 분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화 할 수 없지만 그냥 살다가 지쳤을 때 어머니 소리 한 마디만 들어도 무엇과 같으냐 하면 하얀 앙금이 앉아 있는 병속에서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상짝 흔들리면서 앙금이 피어오르듯이 어머니는 그런 정서를 우리에게 자아 내지요
가장 고통 스러울 때 어머니를 떠오르면 다시 힘을 내게 되지요 이런 경우는 문학속에서 굉장히 많이 등장 합니다. 요즈음은 그 여성들은 요즈음은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지만 과거 전통속에는 살림을 했는데 우리 말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살림살이라고 하는 말도 보면 살리고 살리고야 이것이 겹쳐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엇이냐 하면 여성들이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생명을 유지해 가는 그 일에 가장 소중한 일이지요 이 일들이 살림살이들이 소홀히 볼일이 아니지요 그러기 때문 살림에 선수들인 그 분들은 어떻게 보면 이념이나 이런 것 보다 훨씬 생활에 밀착된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지요.
여성들이 살림의 지혜 생명의 지혜는 본능적으로 남성보다 나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솔로몬과 아굴의 잠언을 보면서 좀 아쉬운 것이 왜 남성들만 등장해 오늘 드디어 여성이 등장합니다.
1절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라고 말하지만
르무엘이 왕이 말하지만 그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을 전달해 준 것을 말합니다. 르무엘의 어머니가 어머니의 유지를 잘 받들어라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무엘이라는 왕이 이스라엘이나 유대 왕 가운데 있었나요? 없어요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에 엘자가 들어가지요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그런 뜻이어요 하나님께 헌신된 그러니까 이 사람이 유대나 이스라엘의 임금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겠다 생각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어요
금방 우리가 이야기 했듯이 르무엘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해준 교훈의 말씀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지 않아요 이것은 10절부터 나오는 이야기 현숙한 여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 현숙한 여인의 이야기와 대조되기 위해서 어머니가 여기 등장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게 됩니다
그 어머니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보아요
2절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여기 반복이 있지요 어떤 말이 반복이 됩니까? 무엇을 말하랴 내 아들아 이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복하는 것은 왜 반복을 할까요? 강조의 의미이지요 특별히 히브리어에서는 반복하는 것이 강조입니다.
헬라어도 역시 마찬가지다고 볼 수 있겠는데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눅 22장 31절 시몬아 시몬아 그렇게 겹쳐서
요 1장 5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겹쳐서 이야기 해요 이것이 강조하는 것이지요.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각각 세 번씩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아들을 향한 어머니가 마치 유언처럼 곡진하게 들려주고 싶은 말 자기의 삶의 어떤 핵심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간곡하게 들려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바람은 무엇일까요? 출세해 가지고 나에게 좋은 것 사주고 그런 것이 아니지요 대게 부모님의 꿈이라는 게 자식이 어긋난 길로 가지 않는게 부모님들의 가장 큰 꿈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않기 위해서 어머니가 신신 당부하고 있는 말이지요 세 번씩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나는 게 내 아들아 그 다음에 내 태에서 난 아들아 그 다음에 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이야기 합니다. 아들이라는 말이 조금씩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냥 아들 이것은 평상적 관계입니다. 그런데 태에서 얻은 아들 당연한 이야기이지 태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태라고 하는 게 태 줄로 연결되어 있었겠지요 너와 나는 둘이 아니야 정서적인 깊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그 다음에 서원대로 얻은 아들이라는 것을 볼 때 어머니가 기도해서 나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부탁드리고 그래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태에서 난 아들 서원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서원을 그 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머니의 곡진한 마음이 이 표현 속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시 127편 3절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하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낳은 아들은 그래요. 그 어머니의 첫 번째 교훈 3절이지요
3절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어머니가 신신 당부하는데 여자들에게 힘을 쓰지 마라 왕이라고 하는 존재는 특히 요즈음 같은 어떤 공화주의 세상 말고 옛날에 전제 군주들은 많은 아내를 두지 않아요 첩들을 두고 그러니까 그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힘이 있어요. 그러니까 네 힘을 그런 여자들에게 쓰지 말아라 굉장히 통속적 교훈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나 중요한 교훈이겠지요 우리가 알다싶이 신명기에 보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담겨 있는데
신 17장 15절 왕을 두지 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왕을 두지 말라고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모노 야위즘이라고 하는 데 오직 야훼 한 분만이 왕이지요
그들이 경험했던 것은 애굽이라고 하는 사회속에서 전제주의 국가속에서 그들은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고 살아왔지요 피 지배자와 피지배가 갈린 세상에서 피지배자로 살아 왔던 쓰라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해방되어 나온 자의 삶이 지배와 피 지배의 구조를 만들지 말라
그렇기 위해서는 왕을 세워서는 안 되고 그리고 무질서해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원리는 무엇을 통해 주어집니까? 토라에 의해서 주어지지요 율법이라고 이야기 하는 그 가르침의 원리를 따라야지 인간이 지배하는 구조속에 들어가면 안 돼 그런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부득히 주변에 있는 중앙 집권화 된 다른 나라들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지요 국가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보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자를 보면 밖에 성벽이야 안에 안에 창과(戈)자가 있어 나라는 무엇이 있어냐 하면 그 다음에 입구(口)자가 있지요 성벽이 있고 군사력이 있고 백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라고 합니다.
왕이 있다고 하면 왕을 돕는 관료집단이 집단이 생겨나고 군대가 만들어 져야 하지요 그런데 그 군대가 너무 강력해 지면 자기 힘에 대한 과신이 생기게 되고 자기 힘을 과신하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등 돌림을 이어질 수 밖에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된 사람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도 사 드려야 되고 이러지요
신명기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이 중앙 집권적인 국가를 만들지 않은 것이 좋아 그런데 어쩔 수 없어서 왕을 두어야 한다면 왕들은 이것을 명심해야돼
신 17장 16절 그는 병마을 많이 두지 말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병마을 얻기 위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서는 안돼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말 것이며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17절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것이며
병마를 많이 두어서는 안 돼 왕들은 애굽으로 그 백성을 되돌려서는 안 돼 애굽으로 되돌린다는 말은 그들이 돌아가도록 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떤 뜻입니까? 애굽에서와 같은 정치 질서와 돌아가면 안 돼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거기에 돌아가서는 안돼 그 이야기 그 다음에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라 왜 그 마음이 미혹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 이야기 합니다. 왜 은금을 많이 갖게 되면 자기가 전능한 것처럼 느껴져요 은금은 유사 전능성을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의지하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부득히 왕을 둔다고 하면 이러 이러한 것들은 두지 말아야 돼 여기에서도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 르무엘 왕의 어머니 사실은 그 어머니의 이름이 안 나옵니다. 무명입니다. 그 르무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이야기 네가 가지고 있는 힘 주어진 그 힘을 여자를 위해 쓰지 말아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런 말 들어 보셨나요 경국지색(傾國知色)이라는 말 경국(傾國) 기울 경(傾)자니까 나라가 기우릴 정도의 아름다움이어요 여러분 양귀도 아름다웠다고 하고 양귀비의 모습은 당 나라의 현종을 유혹했던 사람인데 양귀비의 모습은 뺏뺏 마른 사람이 아니거든요 퉁퉁하고 그러니까 미인의 기준들이 달랐지요
포사라고 하는 사람 들어 보셨어요 이 포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주나라의 유왕이 있는데 유왕의 애첩이야 정말 아름다웠데 어떻게 아름다웠는지 잘 모르겠어 정말 아름다웠데 누구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유왕에게는 첩들이 많았는데 유난히 예쁜 포사가 왕의 마음을 애달프게 만드는 것이 있어요
왜냐하면 웃지를 않아 정말 예쁜데 왕을 보면 다른 애첩들은 아양 떨고 그러는데 웃지를 않는 것이야 그러니까 왕이 어떻게 하든지 꿈이 무엇이냐 하면 저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아무리해도 안 돼 어느 날 어떤 시녀가 비단을 옷을 만들려고 비단을 짝 찢는데 그 소리 비단 찢는 소리 짝 하는 소리를 듣더니 칼칼 거리고 웃는 것이야 그러니까 왕이 그것을 보니까 포사가 웃었어 행복 했지요
날마다 수 없이 많은 비단을 찢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효용 법칙이 있지 않아 날마다 그것만으로 웃을 수 없지 않아 안 웃어 어떻게 해야 또 포사를 웃게 만들지 고민을 하는데 어느 날 전쟁이 난 것처럼 해 가지고 산 위에서 봉화불이 올라가고 그러니까 그 나라를 돕는 제후 국가들이 군대를 보냅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았구나 하고 우리가 도와야지 군대가 몰려오는 모습을 보더니 포사가 또 웃는 것이야 왕이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서 자주 봉화를 올리게 하고 제후국들이 군대를 몰아가지고 오는 것이야 그런데 올 때마다 어떻습니까? 황당하지요
어느 날 진자 전쟁이 난 것이야 봉화를 올렸는데 제후국들이 또 장난이지 하고 아무도 안 왔어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야 그것이 경국지색이야 이것이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거기에 빼앗기게 되면 왕이 해야될 마땅할 직무를 못하게 된다 어머니가 왕에게 하고 있어요.
힘이라고 하는 것이 네게 주어졌을 때 그 힘은 너의 사사로운 만족을 위해 동원되면 안 돼 그런 말을 어머니가 하는 것이지요 고마운 말이지요 왕을 무너뜨리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거스린 것이 왕위를 무너뜨린 것임을 어머니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4절 루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여기에도 마땅하지 않도다라고 하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술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마시지 말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왕의 직무를 잊어 버릴까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운 까닭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그 통치를 그에게 위임해 준 것이지요
무엇하라는 것입니까? 공의와 정의가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탐익하거나 그 속에 빠지게 되면 취함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직무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신신당부 세 번씩이나 마땅하지 않다 마땅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이라고 하는 것은 헛된 자만심을 그 속에 키워줍니다 그래서 여러분 술 먹어서 어려움을 겪은 왕들을 우리는 압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 왕 기억나세요 그러니까 이 벨사살 왕이 자기가 지배하고 있던 경내에 수많은 신하들을 불러저 천명이 넘는 귀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거나하게 벌립니다.
다니엘 5장 1절 왕이 얼마나 부요한지 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넉넉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잔치를 벌립니다. 취기가 도니까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내가 호탕한 사람인지 보여 줄까
다니엘 5장 2절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온 기명들 가지고 오라고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이야
5장 5절 그 때 갑자기 어떤 사태가 벌어집니까? 하얀 손이 나타나서 벽에다가 글씨를 쓰는 것이어요
혼비백산했지요 소람들이 그 글씨를 읽은 사람이 없는 것이어요
5장 8절 다니엘이 불러와서 읽지요 메네 메네 데게 우바르신
5장 25절 왕이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되었어 왕의 나라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
5장 28절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왕이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애 그렇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다니엘서 5장에 나온 이야기였어요
전에 우리가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독주에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처럼 사람들이 술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특권층이어요 옛날에는 그래서 술에 취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특권에 그 사람이 깊이 빠져든 상태입니다. 백성들의 고통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신신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지혜롭게 이야기 합니다.
5절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할까 두려우니라.
아 어머니가 정말 가르쳐야 할 것을 아주 살뜰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술에 탐익하면 벌어지게 되는 일들을 이야기 하는데
(1) 첫째는 법을 잊어버린다 하고 말합니다.
여기 재미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다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여기에 잊어버리다라고 하는 단어가 발음이 유사합니다.
재미있는 것이야 마시는 것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잊어버려 마시면 잊어버려 말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절묘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런 말놀이를 통해서 결국 포도주와 독주를 먹다 보면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되어 있어 정말 그렇지 않아요.
결국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러는데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기억을 해야 하지요 정말 기억을 해야 되는 데 정말 기억해야 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이 자리에 세움을 입은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망각하면 안 되지 않아요. 특별히 왕으로 부른 받은 사람들은 여기에 법을 잊어 버린다 어머니가 정말 지혜로운 분입니다.
(2) 그리고 가난한 사람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움이라 하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왕에게 주어진 힘은 무엇하기 위해서 주어진 힘이라고 생각합니까? 곤고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왕에게 권한이 주어 졌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약자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 10장 16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전도서 10장 17절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아주 적절한 교훈을 그에게 주고 있습니다.
6절 독주는 죽게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절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왕은 이렇게 탐익하고 너무 술취하면 안 돼 너무 고통한 사람들은 술로 마음을 달렐 수 있겠지 어머니는 그 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것은 다른 의미도 가질 수 있는데 때때로 기억의 고통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옛날 소설 가운데 현진건 선생님이 쓰신 운수 좋은날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첨지는 인력거 군이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인력거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데 병들어 있는 아내가 여보 오늘은 나가지 말지 그래요
그런데 퉁명스럽게 아내를 뿌리치고 나갑니다. 그 날은 운수가 좋았어요. 아침부터 댓 바람부터 두 사람이나 태워가지고 80전을 벌었어요 오아 이 돈을 가지고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 국물이나 사 가지고 들어가야지 그런데 학생 하나가 불러 가지고 어디까지 가는데 태워주세요. 망설이는데 1원 50전 드릴께요 아 큰 돈이야 오케이 태웁니다.
그리고 막 인력거를 끌고 달려가는 데 빗속을 달리고 있는데 자꾸 자꾸 집 옆을 달려가면서 생각이 나는 것이어요 여보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그 아내의 모습이 생각이 나요 마음이 불길해요 그래서 학생을 내려 주고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선술집에 들어가지고 술 몇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건주정도 하고 주정도 하고 그래요 그리고 호기롭게 설렁탕 사들고 집에 들어오자 아내는 이미 죽었고 아들은 아내의 빈 젖꼭지를 문채 울고 있고 그래서 비통한 울음을 터트리는 이야기이지요 이것이 운수 좋은 날 그러니까 일제 식민지를 살고 있던 시절에 1924년에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그 식민지 시절에 살던 곤고한 빈민들의 고통을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운수가 좋은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쓸쓸한 세상이지요.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네가 술 마시고 탐닉하고 취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술이라는 것이 고통 받은 그 사람들이 먹고 해야지 술 먹으라는 권장은 아닙니다. 네가 먹지 말라고 하라는 이야기이지 사람들에게 술을 다 먹게 해 가지고 다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8절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절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 지니라.
자 왕의 존재 이유를 강동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어라 여러분 말 못하는 자의 입이 되는 게 힘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힘 있는 사람만 돌 봐 주는 게 권력 가진 사람의 일이 아니다고요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도 야훼의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십니까?
출 2장 23절그 백성들이 신음하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역사속에 개입하시지 않아요 이것이 왕 다운 것이어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잘 나가도록 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억울한 일 때문에 원망하는 자가 없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지요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해 입을 열지니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저마다 삶의 몫을 생명의 몫을 온전히 누리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그것이 모든 것 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정치 행위는 물론 나라가 발전해 가야 하지만 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버리고 가는 발전이어서는 안돼 억울한 사람이 없고 정말 생존에 경계선에서 몰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의 세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저는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땅 끝은 전 먼데 땅이 아니고 지금 벼랑 끝에 내 몰린 사람이 땅 끝이 아닙니까? 교회가 설 자리는 어디이냐 땅 끝에 선 사람의 보듬아 안는 것 그것이 존재 이유이지요 그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지요 예수 믿으세요 이것만이 복음 전파가 아니라 그들의 설 땅이 되어준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보아야 하지요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이고 정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는 말이지요
시편 72편은 왕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2절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러하리로다.
여기에서 산들이라고 하는 것은 저 높은 도봉산 북한산을 이런 것 이야기하기보다도 큰 산은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 작은 산은 하급 관리들 그런 사람들이어요
왕이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정말로 정의로 재판하게 될 때 의가 이루어져서 관리들도 사람들을 존중한다 이야기 하고 있어요
4절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시편 72편 13절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시편 72편 14절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의 피가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왕이 해야 되는 일이 이것입니다.
한 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있음을 환기 시키는 것 어떤 분은 그들을 불 투명하게 만드는 것 그들의 있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 그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권리를 위임 받은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다 이것이 르무엘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에게 신신 당부하는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 이야기이지요 그런 지혜로운 어머니들이 많아 져야 합니다.
내 자식이 남들에게 이기기만 바라고 내 자식이 남들보다 귀한 존재로 크는 것을 바라는 것이 귀한 어머니가 아니라 그 아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줄 아는 그런 세상 만들기에 기도하고 그렇게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가 지혜로운 어머니이겠지요 이런 어머니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르무엘의 잠언에 대해서
잠 31:1-9
우리는 그 동안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의 잠언과 숫자 격언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잠언서 마지막 장인 31장을 묵상할 때가 되었습니다. 잠 31장은 르무엘 왕을 위한 모친의 교훈과(31:1-9) 현숙한 여인에 대한 잠언(31:10-31)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르무엘 왕을 위한 어머니의 교훈(31:1-9)과 현숙한 여인에 대한 잠언에 대해서 차례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오늘은 르무엘 왕을 위한 어머니의 교훈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1. 왕을 위한 어머니의 교훈(1)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1).
이 짧은 신탁은 왕의 어머니가 르무엘 왕에게 가르친 교훈입니다. 원래 제목은 "르무엘 왕-신탁"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마사(북 아라비아의 영토?)의 왕, 르무엘"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NIV의 난외 주를 보라!).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경우, 왕의 모친은 왕궁에서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왕상 1 5:13, 왕하 11:1 참고). 이 교훈은 태후가 왕에게 해준 "통치자에게 필요한 교훈"입니다. 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정욕에 대한 절제(2-3)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2)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3)."
왕의 모친은 아들에게 가장 먼저 여인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왕은 거의 신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왕은 나라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이 왕의 요청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에 가까운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아내를 너무 많이 얻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이 너무 많은 여인을 아내와 후궁으로 얻으면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지나치게 정력을 소비하여 건강을 해칠 수도 있었고, 또 간교한 여인에게 빠져서 정사를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아합 왕은 아내인 이세벨로 인해서 온 나라를 우상 숭배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너무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가 말년에 우상에 빠져서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와 같이 왕은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 특히 여인에 대한 절제력이 필요합니다.
3. 술에 대한 절제(4-7)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4).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5).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6).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7)."
왕의 모친이 두 번째로 왕에게 하는 교훈은 술에 대해 절제력이었습니다. 왕은 여인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들이 만들어주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지나치게 탐식에 빠지지 않도록 절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왕이 포도주와 독주를 찾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 버리고 어려움을 당한 재판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독주는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잊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이 독주에 취해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4. 공의의 실행(8-9)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8).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9)."
마지막으로 왕의 어머니는 왕에게 곤고한 자를 위해서 재판을 통해 공의를 이룰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지방에서 해결하지 한 중요한 재판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모친은 왕에게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왕이 공의를 시행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면, 그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되고, 또한 백성들이 마음을 얻게될 것입니다.
적용: 르무엘 왕의 모친이 아들에게 한 교훈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자. 왕이 여인과 술을 조심하고 공의를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솔로몬의 어머니
잠 31:1-9
다윗은 충신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습니다. 그 일로 밧세바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하려던 일이 밧세바의 임신으로 감출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하룻밤의 은밀한 죄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불행의 씨앗인가, 축복의 씨앗인가... 이 사건을 감추려고 급급하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서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겨 버렸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를 살해한 비겁한 왕, 그 일로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일단락 마무리가 되었는가 했는데,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간음해서 나은 아이가 원인 모르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원인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아이가 앓기 시작한 것이지요(삼하 12:15).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삼하 12:14). 다윗은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어찌 되었건 내 자식의 죽음 앞에서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죽기라도 하고 싶은 게 부모의 심정 아닙니까?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죄의 댓가인지, 하나님의 징벌인지... 그것을 따질 것도 아니고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오직 내 아이를 살려달라, 살려달라... 그것 밖에는 보이는 게 없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러다 왕이 죽겠구나 싶어 장로들 까지 다 나서서 먹으라고 권하고 도우려 했지만 다윗은 아무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금식과 통곡으로 그렇게 밤을 지새던 7일 만에 아이는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죽음의 7일 동안 다윗은 어떤 심정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의 죄 때문에 아이가 죽게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아버지로서 은혜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을 앞둔 그때 진정한 회개기도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의 엄마는 어떠했을까요? 이 사건에서 아이엄마에 대한 기록은 한 줄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나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삼하 12:24)
밧세바는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밧세바의 마음은 다윗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는 제 정신일 수 없습니다. 내 아이가 죽어 가는데...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아이를 살려달라, 살려달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이 여기신다면 아이를 살려주시겠지... 더구나 내 아이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면...
아이의 죽음 앞에서 밧세바는 일생에 단 한 번 할 수 있는 깊은 회개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한순간 쾌락의 대가를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것입니다. 아이까지 잃었는데 인생에서 무엇을 더 건질 것이 있겠습니까?
육체가 다 무너지면 육체를 위해서 사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체가 무너지면 영혼을 바라봅니다. 영혼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주를 위하여 살겠다는 마음만 남습니다.
거기서는 간통한 여자가 현숙한 여인이 될 수 있습니다(잠 31:10~31). 그리고 서원하여 낳은 아들이 솔로몬입니다(잠 31:2). 진정한 회개 후에 서원하여 낳은 그 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삼하 12:24).
무엇을 서원 하였을까는 짐작할 만 합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궁핍한 백성들을 위한 왕, 벙어리들의 입이 되어 억울한 자를 위하여 공의로 심판하는 왕이 되게 하소서(잠 31:8~9), 밧세바는 솔로몬을 어릴 때부터 서원한 대로 교육하였을 것입니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까 구하라 하실 때 솔로몬은 망설임 없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들은 대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그리고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죄인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의 능력입니다.
내 입을 열어 전하게 하소서
잠언 31:7-9, 에베소서 6;19-20 / 이성희 목사
한국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상필이란 백정이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양반이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왔습니다. 먼저 온 양반이 “얘, 상필아, 고기 두 근만 다오” 했습니다. 최상필은 “예” 하더니 고기를 잘라주었습니다. 잠시 후에 다른 양반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백정이지만 나이 든 사람인데 마구 대할 수 없어 “최서방, 고기 두 근 만 주시게” 하였습니다. 최상필은 “예” 하더니 큰칼로 베어 듬뿍 주었습니다. 먼저 왔던 양반이 최상필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같은 두 근인데 내 것은 작고 저 것은 크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진 것입니다. “예, 손님 고기는 상필이가 자른 고기이고, 저 어르신 고기는 최서방이 자른 고기입니다”. 먼저 온 양반은 할 말을 잃고 돌아갔습니다. 입은 잘 열어야 덕을 봅니다.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어떤 입이 복이 있을까요? 어떤 말이 상급이 있을까요? 어떤 입이 상급이 클까요? 복음을 전한 입이 복이 있고, 복음을 전한 말이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복음을 전하는 입이 되어 하늘나라의 복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입은 마음의 하수구이고 말은 배설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쓰레기로 차 있을 때 우리의 말은 배설물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복음이 차 있으면 우리의 말은 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이렇게 패러디해봤습니다. “입은 마음의 맑은 샘이고 말은 생명의 열매이다”. 우리의 입을 열 때마다 샘물 같은 영생의 말씀이 솟아 우리의 말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놀라운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입의 역할은 여러 가지입니다. 먹는 일을 합니다. 말하는 일을 합니다. 숨 쉬는 일을 합니다. 입맞춤을 합니다. 얼굴의 표정과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입은 참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과 말하는 것입니다.
입은 칭찬도 하고, 욕도 합니다. 욥기 2:10에는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 말에 대한 욥의 태도를 말합니다. 욥의 아내는 입술로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입으로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입은 저주와 축복이 함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이 애급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모압왕 발락은 두려워하여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저주하라고 데려왔는데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민수기 23:12에는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입의 말씀이 축복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로 사가랴는 입이 닫혀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을 낳자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은 “우리 집안에 그런 이름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는 천사가 준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였을 때 비로소 입이 열렸습니다. 왜 입이 닫힙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격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에 입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때, 엉뚱한 말을 전할 때 입이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청각장애인들이 모이는 ‘영농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가끔 가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드리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찬양대는 열린 입으로 할 수 없으므로 수화로 합니다. 찬양대이지만 목소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찬양대입니다. 찬양대원보다 수화를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전파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누구나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기도가, 이런 기도의 부탁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9에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부탁하는 기도의 제목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입을 열어야 하는 까닭은 복음의 비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비밀이지만 이미 공개된 비밀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미 비밀이 아니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비밀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비밀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비밀이 아니기를 기대하십니다.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은 언젠가는 풀립니다. 성공의 비밀도 있고, 건강의 비밀도 있고, 삶의 비밀도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개되고, 노출되기를 원하시는 비밀입니다. 복음은 값싸지 않는 고귀한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공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22장의 가사를 보세요.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과 나 사이에 가진 기쁨, 복음의 은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마태복음 5:1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합니다. 2절에는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이 입을 열어 전하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서기관과 같지 않은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이 비밀을 전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이 비밀을 전하느라 고난을 당했습니다. 전하는 복음이 비밀이기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믿은 자 외에 알 수 없는 비밀이기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받은 자 외에 모르는 비밀이기에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 8:35에는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광야에서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4에는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가이샤라의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숨겨진 비밀을 풀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목포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만나는 사람에게 늘 “샬롬! 샬롬!” 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얼굴에 병색이 있고 시꺼먼 분을 만나 “샬롬”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분이 목사님의 친절에 감동이 되어 교회에 등록한지 3개월이 지나 목사님과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형편을 목사님께 얘기했습니다. 그는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었고, 가정도 행복하고, 평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피곤하고 몸이 부어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였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진해보니 간암 말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걱정하고, 회사도 걱정하고, 친구들도 걱정하고,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죽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 분은 ‘나는 곧 죽을 놈’이란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살놈! 살놈!’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죽을 놈, 죽을 놈” 하는데 목사님만 “살놈, 살놈”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나는 죽을 놈이 아니고 살 놈이다’. 목사님의 말에 그는 소망을 가지고 약을 먹었습니다. 의사의 지시대로 운동을 하고, 몸을 추스렸습니다. 의사는 3개월밖에 못 살 것이라고 했지만 3개월이 지나자 오히려 건강이 회복되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목사님에게 “목사님, 감사합니다. 내 육신도, 영혼도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비밀은 생명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생명이고, 복음의 비밀은 생명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는 내용은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를 하게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고 살리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바울이 외치고 싶은 한 마디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입을 열 때마다 복음의 비밀이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은 복음의 비밀을 폭로하는 입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0:10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복음을 받은 사람이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입을 열고 복음의 비밀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신은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20에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사신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신은 할 말을 담대히 해야 합니다.
‘사신이 됨’이란 ‘프레스뷰오’란 헬라어인데 전권대사(ambassador)가 된다는 뜻입니다. 전권대사는 최고통수권자의 입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두 번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합니다. 사신은 왕의 전권을 맡은 영화로운 직책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신은 자기 주인의 말을 정확하게, 용감하게, 담대히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911사태 11주년 기념일에 리비아에서 리비아주재 미국대사가 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미국대사가 죽고 나서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한 보복의지를 발표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강하게 보복을 선언하였습니까? 대사란 미국을 대표햐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죽었으니 미국의 대통령이 나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4에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바울이 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말은 대사로서 우리를 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제가 23년 전 연동교회에 부임 시 당회원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양보하라고 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는 양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양보하지 못할 것 첫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교단의 헌법입니다. 교단의 헌법은 개정되기 전에는 우리가 마음대로 바꾸어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교회의 오랜 전통과 역사입니다. 전통과 역사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는 다 바꾸고 양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을 양보하지 못합니까?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내가 바꿀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신’은 대사인데 내 맘대로 바꾸고,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주신 분의 말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가고 싶어 애급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등 떠밀려 애급으로 갑니다. 출애굽기 4:12에는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합니다. 담대하게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갈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하나님이 직접 필요한 말을 그 입에 주어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1:9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레미야의 입에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신탁을 받고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말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공회에 잡혀 가서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공회의 위협을 겁내기 않았습니다. 사신은 담대히 적극적으로, 당연히 필연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바울의 필연적 의무인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갔습니다. 공회 앞에서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였고,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그 입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입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일꾼들을 보세요. 스데반, 빌립, 디모데, 마가, 누가 그리고 모든 교회의 일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전한 자들입니다.
현대의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의 배달꾼입니다. 저는 설교를 듣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포함한 회중에 주신 말씀을 배달사고 내지 말고 잘 전하는 것이 좋은 설교입니다. 배달사고 내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 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담대하게 전해야 좋은 설교입니다.
포르투갈의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요한 3세의 위촉으로 인도, 중국, 일본까지 다니며 선교하였습니다. 그는 1552년 선교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국왕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유서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에게 보낸 유서는 당당했습니다. “폐하도 어느 날인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을 위하여 더욱 양심적인 국왕이 되십시오. 사람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왕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결산의 날을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 옛날에 왕에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선지자 이사야를 좋은 말씀의 선지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어 부젓가락으로 그의 입을 숯불로 지졌습니다. 그의 입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후에 얼마나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바로 전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연히 전해야 할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입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결론
우리나라의 맥도날드 햄버거의 빵 두께는 17mm이고, 고기두께는 10mm이고, 햄버거 전체는 44mm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양인 성인의 입의 크기가 평균 50mm입니다. 44mm의 햄버거를 입에 넣으면 꽉 찬 느낌을 주고 부담이 없어 더 맛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햄버거는 입에 맞춤형 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입에 맞는 맞춤형 말씀입니다. 누구나 전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각자에게 맞춤형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맞춤형 말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당연히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4세기에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이름은 “황금의 입”이란 뜻입니다. 크리소스톰이 설교할 때면 성도들의 박수와 눈물과 회개 때문에 설교가 중단되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설교시간에 위정자들을 거침없이 꾸짖었고, 사치와 향락을 깨우쳤습니다. 그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입이 마음을 여는 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을 통하여 당연히 전할 말씀 담대히 전하여 사람을 깨우치고 변화시키고 구원받게 하는 놀라운 우리의 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입에 맞춤형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당연히 전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담대히 전하는 주님의 사신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