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연속 올림픽과 5연속 세계선수권 제패
신랄한 방송 해설로 피겨 인기 끌어올려
프로 선수들의 대회 창설, 방송 중계 힘써
전날 여객기와 헬기 충돌 참사로 스러진
보스턴 스케이팅 클럽과 각별한 인연도
미국 남자 피겨 스타로 두 차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5연속 세계피겨선수권을 제패한 뒤 해설위원으로도 명성을 날린 딕 버튼이 30일(현지시간) 95세 삶을 끝냈다고 AP 통신이 그의 아들 에드워드를 인용해 보도했다.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았는데 워낙 나이가 많아 자연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인은 가장 빼어난 성취를 거둔 남자 피겨 스타였으며, 피겨 스케이팅 기술을 가장 크게 혁신시켜 종목의 인기를 높인 선수로 평가받는다.
공교롭게도 전날 소형 여객기와 군 헬리콥터가 충돌해 워싱턴 DC 외곽 포토맥강으로 추락해 피겨 유망주 선수와 가족, 코치 등 적어도 14명의 피겨계 사람들이 한꺼번에 스러지는 비극이 발생했는데 그 중 6명이 고인이 한때 속해 있었고 여생을 내내 가까이 지낸 보스턴 스케이팅 클럽 인연을 갖고 있었다.
기업인 겸 방송인으로 버튼은 스케이팅과 선수들의 프로모션에 앞장 서 틈새 종목으로 여겨지던 피겨를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만들었다. 스콧 해밀턴은 “딕은 우리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figures)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스케이터는 한 명도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버튼의 영향력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됐다. 그는 1946년 미국선수권대회가 재개되자 열여섯 살 최연소에 초대 남자 챔피언에 올랐다. 2년 뒤 스위스 생모리츠 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는데 처음으로 더블악셀 기술을 선보였다. 미국 남자로는 최초의 올림픽 피겨 제패였다.
버튼은 미국올림픽위원회 홈페이지 인터뷰를 통해 “어쨌든 그 점프는 속임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들어봐. 난 해냈고 그게 중요한 것”이라고 대꾸했다.
이렇게 그는 국제 스케이팅계와 미국 아마추어 스포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저유명한 설리번상을 1949년에 피겨스케이터로는 처음 수상했다. 2001년에야 그의 뒤를 이어 미셸 콴이 같은 상을 받았다.
1952년 하버드 대학 학생으로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 동계올림픽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에서 최초로 트리플 점프(루프)를 성공해 새 역사를 썼다. 곧이어 다섯 번째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뒤 그는 아마추어 자격을 포기했다. 당시 모든 올림픽 종목들은 아마추어 아니면 프로를 선택하도록 강제했다.
1956년 하버드 법학 학위를 딴 버튼은 “스케이터로서 꿈꿀 수 있는 모든 일을 이뤄냈다"면서 "난 아이스 캐파데스(Ice Capades 쇼)를 즐기며 내 손을 스케이팅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내게는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TV 해설 부문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버튼이 있어 시청자들이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 경연 중에도 끼어들어 솔직히 해설해 많은 이들에게 생소했던 뉘앙스까지도 많은 것을 익히게 됐다.
1988년 올림픽 챔피언 브라이언 보이타노는 버튼의 자서전에다 "딕 버튼은 피겨 스케이팅역사와 그 본질적인 목소리의 관리인"이라면서 “그는 우리의 일상 어휘로 '러츠'와 '살코' 같은 용어를 만들어냈다”고 적었다.
1961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하려던 미국 피겨 대표팀 전원이 숨지자 대회가 취소됐다. 버튼은 ABC 스포츠 임원 루니 아를레지를 설득해 이듬해 대회를 생중계하도록 했다. 이때 해설위원으로 방송사에 합류했다.
전날 비극으로 목숨을 잃은 한국계 피겨 유망주 진나 한(Jinna Han, 13)과 그녀의 어머니 진 한, 한국계 입양아 유망주 스펜서 레인(16)과 그의 어머니 크리스틴 레인(49), 두 러시아 출신 전 세계 챔피언 에브게니아 쉬쉬코바와 바딤 나우모브 등 여섯 명 모두가 보스턴 스케이팅 클럽 사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1961년 참사 때도 같은 클럽 사람들이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버튼 역시 이 클럽에서 스케이트를 탔고, 여생 내내 가까이 지냈다. 그 클럽의 트로피 룸 이름이 그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대회를 끝낸 스케이터들이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몇 년 동안 TV를 위해 마련한 프로 대회를 운영해 많은 피겨 스타, 예를 들어 해밀턴, 토빌과 딘, 크리스티 야마구치, 커트 브라우닝과 카타리나 위트 등을 기용했다.
버튼은 1959년 캔디드 프로덕션(Candid Productions)을 세워 맞춤형 TV 프로그램 '배틀 오브더 네트워크 스타스'를 만들었다. 그는 연기에도 손을 댔지만, 링크가 주무대였다. 세 차례 미국 챔피언이었으며 NBC 스포츠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인 자니 위어는 "딕 버튼은 주제가 없거나 순간적으로 제한이 없는 피겨스케이팅 방송의 열리고 정직한 공간을 만들어냈다”면서 “그는 자신의 견해가 인기 있는 것이 아니었을 때조차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의 기운은 내가 그를 위해 연기할 때 늘 내 마음 속에 있었으며, 난 우리 코치들에게 했던 것만큼 그를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친 김에 위어의 발언에 귀기울여 보자. “난 피겨 스케이팅을 해셜하는 것에 대해 뭔가 아주 특별한 것을 생각한다. 선수로서 우리는 제대로 얘기할 기회가 희소했으며, 우리는 TV 목소리에 의지해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데 누구도 버튼처럼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 고인은 김연아, 차준환 등 우리 피겨 스타들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도 낯익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러시아)에 밀려 은메달에 그쳤을 때 "진정한 챔피언은 김연아"라고 편을 들고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오타비오 친콴타 회장 사퇴 청원에 동참했다. 4년 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차준환의 연기를 보고 "훌륭한 트리플 악셀을 선보였다. 그는 굉장히 흥미로운 스케이터이며 미래가 대단히 밝다"면서도 "좋은 스피드와 엣지를 길고 강하게 사용하지만, 포인트가 없다"고 보완할 점을 따듯하게 알려줬다. 신랄한 독설로 이름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또 발레 포즈에 지나치게 집착해 낡은 잣대로 피겨 스케이팅 연기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애증의 존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