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숙 - 금당벽화 (1955년)
목탁 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 속에 여운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구릉의 기복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무성한 숲과 숲, 스며드는 습기로 바위의 이끼는 변함ㅇㅄ이 푸른데, 암수 서로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애수를 돕는 듯했다.
담징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빛을 머금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갔다.
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 하늘을 바라 보고 있다. 그의 동광은 하늘 빛을 닮은 듯, 담뿍 부풀어올랐던 희열의 빛이 잦아들며, 몽롱한 꿈속에 잠기듯이 흐려졌다. 조용히 자리를 옮겨 앉은 담징은 묵묵히 고개를 수그렸다.
향수를 못 이겨 나그네의 신세를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맷돌을 만들어 이 땅의 사람들을 경탄케 한 것도 벌써 이삼 삭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담징의 사명은 그것에 있지 않았다. 생각하면 고국을 등진 지 3년, 보시의 길을 떠나, 백제 땅을 거쳐 신라에 머무르다 도왜한 지도 지금엔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름이 종교적인 보시였지, 사실 담징에겐 수학의 길이나 다름없었다. 북방 오랑캐들의 끊임없는 침범, 담징은 고국의 땅 고구려에선 편안히 화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예술적 포부를 마음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종교적인 보수라는 명복 밑에 수락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고국을 떠나 백제에 놀고, 백제를 거쳐 신라에 배운 담징은, 때마침 왜국의 초빙이 있어 이에 응했던 것이다.
왜국으밈 청에 응하긴 하면서도 담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 문제의 침범 이후 북방의 풍운은 날로 거칠어 갔으니, 어느 때건 다시 한 번 우레는 번개를 터지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양제가 다시 백만 대군을 수륙 양군으로 나누어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이 신라에까지 번져 왔을 땐, 바로 담징이 왜국의 초빙을 받고 신라 땅을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휩쓸리려는 이때, 조국을 영원히 등진다는 것은 하나의 도피임에 틀림없었다.
보시의 생활을 하면서도 고구려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담징, 지금 그의 조국이 오랑캐들의 발굽 아래 짓밟히려는 순간에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조국을 등진다는 건 견딜 수 없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전에 서면 승이요, 화필을 잡으면 속으로 돌아가 화공이지만, 조국이 위기에 처할 때엔 조국의 방패이어야 할 몸이었다. 어떻게 조국을 등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수한 고구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번민이기도 했다. 담징은 단연 도왜를 단념하고 조국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사세는 이미 당짐의 이런 순수한 열망만으로써는 처리될 수가 업성ㅆ다. 조국에 대한 국민적인 의무도 중했지만, 조국의 국제적인 신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떠나진 않았다 해도, 이미 언약한 후였던 까닭이었다.
오늘날까지 화필을 잡지 못한 것은, 조국을 염려하는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가혹한 자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아리같이 울리던 사슴 울음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뿌연 안개만이 담징이 앉아 있는 바위 밑에서 번져 오를 따름이었다. 어둠 속을 흐르는 은하의 잔별들은 총총히 빛나건만, 담징의 가슴속에 흐르는 회상과 전망의 꿈은 경경각각으로 흩어지기만 했다. (p.123-12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담징 - 김민환 (서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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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징은 다시 금방 벽면을 향하여 섰다. 벽면엔 아침 햇빛이 훤히 들이비치고 있었다. 담징은 정제해 두었던 채색 통을 날라 놓게 하고, 우거진 숲 사에 흐르는 냇물로 가서 속세의 때를 벗기려는 듯 몸을 깨끗이 닦고 닦았다. 어쩔 수 없이 터져 오르는 환희를 경건한 불심으로 바꾸어, 벽화를 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붓을 든 담징의 손끝이 무학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면, 진한 빛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부드러운 색조여,
그 속엔 백제의 다사로운 꿈이 깃든 속에 남국적인 정열이 어렸도다.
동방을 제패한 조국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는 여기 무르익어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 위에 흘렀다. 이른 봄같이 다사로운 감촉이 숨은 보살의 손끝엔, 지금 막 멸망당한 수많은 오랑캐들의 죽음을 조상하는 자비로운 불심이 흘렀다.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알알이 빛나고 줄 이어 맺혔으나, 국난을 막기 위한 단결된 그들의 정성이 여기 있도다.
담징은 비로소 붓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조국 땅에 두고 온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징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졌다. 담징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사바를 모방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붓을 든 담징은 한 걸음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갔다. 그대로 화면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담징은 다시 주춤 서 버렸다. 초승달 같은 아미, 열반의 세계가 그 속에 있어야겠는데, 거친 속세의 모습만이 떠도는 것 같았다. 넓은 듯 좁은 듯한 그 미간에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 담징은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씻기라도 하듯, 온 정성을 다하여 그 미간에다 일점을 찍었다. 그건 다시는 그의 의식에서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그의 입가엔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범할 수 없는 관음상이여.
그리운 사람의 환상마저 잊으려는 담징의 각고의 노력으로 열반의 상징 보살이 이루어졌도다.
벽면엔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담징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지가, 구현된 지상 열반의 세게에 도취하여 그만 합장한 채 꿇어 엎드렸다. 담징을 비방하던 모든 왜승들도 모두 합장을 하고 주지의 옆과 뒤에 꿇어 엎드렸다.
조국의 승전의 쾌보를 받지 못했던들 금당 벽화는 한탄 승 담징의 관념의 표백에 그쳤을는지도 모른다.
윤이 흐르는 생기여! 그것은 조국에 대한 담징의 충성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담징도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붓 대신 염주를 든 그도 뭇 승들과 같이 합장하며 꿇어앉았다. 누가 피워 놓았는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고가던 속세의 뜬 마음도 향불 연기를 따라 사라졌다.
가사를 입은 주지가 맨 앞에 앉아 목탁을 두들겼다. 누구인지 뒤에서 법고를 울렸다. 그때마다 뭇 승은 일제히 일어섰다가 앉으며 배례를 했다. 자기 손에서 이루어진 관음상이건만, 지금 담징에겐 그것이 자기 의식의 세게가 아닌 것만 같았다. 벽면엔 관음상의 미소가 삧나는데, 타오르는 향 연기 속에 목탁과 법고가 울리며, 뭇 승들의 합장 배례가 그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