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 27>"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 2)
♥† 속죄의 구원과 창조사적인 구원 †♥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성경은 교훈이나 윤리나 도덕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역사책도 아닙니다. 구원의 종류와 내용과 적용방법과 유형들을 말씀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인 겁니다.(요 5:39). 구원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자리로 이끌어 올리는 겁니다.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옮겨 앉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은 변화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전 것은 멀리 떠나고 새 것이 남아 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고후 5:17).
아니면 자신과 싸움을 계속하며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해서 안 되네 하는 푸념만 길게 남기고 패배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자신과 싸워서 이길 장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선한 내가 이겨도 악한 내가 지고, 악한 내가 이기면 선한 내가 집니다. 결국 자신의 구조 악에 의한 부조리가 노출이 되어 패배감과 상실감에 몸서리칩니다. 인문학으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명상이니 멍 때리기니 하는 걸로 되겠어요? 속에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육신의 생각을 하도록 하고,
결국 사망으로 이끌고 가고 있는데 나는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하고 최면을 건다고 괜찮아 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법이라는 건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만다는 원리입니다. 오직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이김을 주십니다.(롬 7:24-25).
구원의 종류에는 속죄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사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속죄는 죄인이 의인이 되는 과정의 필수코스이죠. 그 과정에 칭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보시는 거죠. 우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죄인 그대로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므로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우리의 양심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오케이 사인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다음 창조사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회복시키는 구원입니다. (창 1:27절).의 그 사람(에트 하 아담)으로 회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표본적인 사람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갖춘 사람입니다. 형상은 속에 있는 속성이며 모양은 밖에 나타나는 형체입니다. 형상은 유전자이며 모양은 바로 몸입니다.
그래서 말로 표리가 부동하다 아니면 표리동동하게 살아야겠다는 말을 하죠. 사실 표리가 동동한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모양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우리 구원의 모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목표이시며 과정이 되십니다.
창2:7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형체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 형체에 숨(미쉬마트)을 불어넣으시므로 혼을 가지고 살아 있는 존재 곧 네페쉬 하야(living soul)이 되게 하셨습니다.(창1:2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형상을 따라 모양을 만드신 겁니다. 흙으로 된 질그릇인데 무엇을 담도록 만들어져 호흡하며 살아가는 인격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창3장에서 잘 못 된 것이 그 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은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엡 2:1) 이와 같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으면 그 속이 깨끗하게 되고 성령이 내주하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속죄의 구원을 받으면 그 속에 있는 것은 쫓겨나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고전 3:16).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이를 놓치면 변화가 없는 구원이 되어 회전목마 타듯 제자리에서 뱅뱅 돕니다.(창1:27절)은 하나님의 신성에 의한 속성을 가진 완성차원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우리의 롤 모델이죠.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가 예수이시만, 예수는 속죄의 구주이시며 그리스도는 창조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고후4:4), 고린도교회가 들썩거리기는 하지만 사랑(고전13장)의 아가페)으로 변화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형상인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는 믿음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속죄는 받았으나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그 형상의 속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 확증하라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지 않으면 버림을 받는 믿음이 되리라 경고를 하는 겁니다.(고후 13:5).
신학으로 성도의 견인이 맞느냐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께 달라붙어야 되느냐 하며 왈가왈부하는 것도 사실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의미한 논쟁이 됩니다. 또 믿는 자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속죄와 창조의 구원을 알고 나면 깨끗하게 해결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면 인감도장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박혀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는데 왜 변화가 없겠어요? 자신의 인감도장을 찍어 주신 사람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실까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야곱을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니 다 변하고 바뀌잖아요?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신 속죄의 제사장이시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창조구원의 중보의 제사장이십니다. 이분이 저 분이고 저 분이 이분입니다. 다윗처럼 속죄의 구주이신데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왕 되신 구주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로서 십자가에서 엄청난 역할을 감당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다음 성령을 통해서 다른 보혜사로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주님은 진리가 되시고(요14:6) 성령은 진리를 알게 하시니 진리의 성령이십니다(요14장) 진리의 성령이 오신 다음에 말 그대로 기독교가 시작이 됩니다.
예수를 배우는 속죄의 구원을 지나 그리스도를 배우는 창조구원이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자기 부인이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믿음이 시작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는법도 배우게 됩니다.(마11:28-29) 안식은 속죄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마치므로 오는 것입니다.
속죄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속죄제물이심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의로 여기십니다.(롬 3:24) 죄인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속죄의 구원을 받습니다(마 1:21) 거기서부터 이제 창조의 구원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제가 늘 말하는 기독교가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승리로 자기 백성을 다 빼앗아 오셨습니다. 귀신은 쫓겨나가고 속은 비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안에 성령을 모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갈 수도 있지요.(눅11:24-26) 성령을 아는 지식이 잘못되어 은사로 나타나는 에피 성령만 강조를 하니,
그만 인격의 영이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진리의 성령을 간과하고 마는 겁니다. 그게 또 하나의 미혹이 되어 세상에 가득합니다. 에피 성령은 오락가락 하시지만 엔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속에 좌정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진리의 성령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경이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나 미혹의 길로 빠진 사람은 성경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계신 사람은 존재와 기질과 속성이 달라집니다. 곧 열매가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존재는 달라졌으나 속에 있는 것이 행사를 하지 못하므로 분별력도 없고 정체감도 모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아직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창조의 구원이 시작이 되면 과거의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신도 긴가민가하지만 한참 가면 자신 속에 두 존재가 있다는 걸 알고 성령을 구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달게 지게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엔 십자가가 나를 지고 달립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달라지고 정체감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드디어 몸짓으로 조금씩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 형상에 의한 모양이 달라진다는 말이죠. 따라서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기신 속죄의 제사장이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시는 중보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완결판인 로마서의 구원이 절실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개념이 바뀌고 자의식과 생각이 바뀌어 영의 생각을 하므로 말미암아 비록 표리가 부동한 인생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평강을 얻게 되는 겁니다.(롬 8 :6)
종말엔 필연적으로 계시록에 나오는 싸움이 치열하게 됩니다. 그건 창1장의 5일째 존재와 6일째의 존재와의 싸움입니다. 생육 번성 충만까지의 복"(창1:22-23)을 가진 네페쉬하야들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에크 하 아담(그 사람)들과 전투입니다.
그러나 속죄의 구원과 창조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형상 곧 속성과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까지의 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완성해 가실 겁니다.(빌1:6)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분별하여 듣고 믿음으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고 밤낮 그를 따르면서 인내로 남은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는 겁니다.(김요한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