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육지라면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페친 중 한 명이 페이스북에 조미미의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을 육성으로 불러서 올렸습니다. 술을 마시고 부르거나, 어느 모임에서 마이크 앞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일상에서 콧노래 비슷하게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녹음해서 올린 페친은 댓글을 써주고, 제가 올린 글에 댓글을 다는 사이지만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단순하게 글을 올리는 문체라든지, 정서로 볼 때 50대 후반이거나 60대 초반으로 추측을 할 뿐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즐겨 부르던 노래라서 반가움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반복해서 듣는 동안 문득 조미미의 육촌 고모가 옆 동네에 산다는 말을 들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 히트를 할 무렵 작은 산골 면 소재지지만 전파사가 세 곳이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고쳐 주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 출장 수리를 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파사 앞에는 스피커가 있었는데 주로 ‘바다가 육지라면’ 이란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전파사뿐만 아니라 집마다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에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조미미 육촌 고모가 우리 동네 산다!” 하며 자랑을 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조미미의 육촌 고모라는 사람이 옆 동네 어디쯤 사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조미미 육촌 고모가 사는 동네가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도 않고, 교통이 빠르지도 않아서 거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옆 동네에서 일어난 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이면 내 가족 안에서 일어난 일처럼 좋아해 주고,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콧등이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 소재가 끊어지면 흔히 자기 동네 사람 자랑을 합니다. 우리 동네 사는 누구네는 송아지를 두 마리 낳았다, 우리 동네 사는 어느 집 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신발 공장에 갔는데 이번 추석에 와서 송아지를 사 주고 갔다는 등의 자랑입니다.
저녁을 짓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신 어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서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요새 송아지 한 마리에 얼마댜? 그 집 횡재를 했구먼.”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아궁이 안의 불길을 다스리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 줍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들의 일도 내 일처럼 반겨주고, 안 좋은 일은 동정해 주는 정도니까 일가(一家)에 대한 정도 각별했습니다.
종고모할머니의 손자면 촌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 종고모 할머니의 증손자인데 친구들 앞에서도 저를 ‘아저씨’라 불렀습니다. 그 동창이 금강 줄기에 있는 동네에 살고 있어서 토요일에 가끔 놀러 갔습니다. 강가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친구의 아버지가, 자식의 동창인 저한테 “동생 왔냐?” 하며 촌수를 앞세워 저를 대해줬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은 어른이 아들 친구에게 동생이라고 대우를 해 줘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밥상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형님, 밥이 정말 맛있습니다.”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동창도 “아저씨 저녁 먹고 밤고기 잡으러 갈까?”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촌수가 먼 친척도 사촌처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성만 같아도 동질감을 느끼며 친척처럼 여겼습니다. 성이 같다는 이유로 ‘일가’를 앞세워 말다툼할 때 같은 편이 되어 주거나, 아낌없이 먹을 것을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볼일이 있어서 산책 삼아 냇가를 따라서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냇가 길의 끝은 하상 주차장입니다. 하상 주차장에 도착해서 길 쪽으로 올라가다 조카뻘 되는 동창을 만났습니다. 자동차에 앉아 있는 동창은 농협에 다니다 정년퇴직을 한 후에 어느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아저씨니까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었습니다.
동창이 타고 있는 차에서는 웬 젊은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 인사해라. 나한테는 아저씨뻘이고, 너한테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다.”
제가 낯선 시선으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챈 동창이 인사를 시켰습니다. 제가 할아버지뻘 된다면 젊은이는 동창의 아들입니다. 그런데도 동창은 더는 아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도 운전대를 잡은 자세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저 역시 굳이 아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손자는 봤느냐? 어디 살고 있느냐? 는 등 일가로서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들을 입안으로 삼켰습니다.
동창과는 다음에 시간이 되면 만나서 술 한잔하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동창이 탄 차가 하상 주차장에서 도로로 올라서서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한때는 일가를 앞세워 서로의 집을 오가며 정을 쌓았던 시절은 그저 추억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창을 만난 것을 잊어버리고 볼일을 보러 갔습니다.
현실은 가족 간에 목숨을 빼앗고 잃어버리는 사건도 그저 가십일 뿐이니까요.
금발 속 은빛 머리카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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