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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을 도와준 고마운 인도인 K. P. S. 메논
‘유엔 감시 하에 남한에서의 총선’ 성사시킨 일등공신 김용삼 / 미래한국 편집장 dragon0033@hanmail.net
5월 18일 방한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로 인해 한국에서 인도 붐이 일고 있다. 그는 ‘모디노믹스’(Modinomics)라 불리는 인도판 ‘한강의 기적’을 통해 인도를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지도자다. 그런데 인도인으로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운 K. P. S. 메논의 본명은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샹카라 메논이다.
메논의 한국에서의 활동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
유엔한국위원단 의견 엇갈려 1948년 1월 8일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60여 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유엔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1월 25일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2월 10일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총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엔한국위원단도 국가별로 의견이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중립을 표방했으며, 시리아 대표는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공산 측에 유리하게 활동했다.
메논은 한국 도착 이틀 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북한에도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으며, 독립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단합하여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메논, 유엔에서 “남한에서의 총선거” 요구 당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좌우합작이 가능한 중도파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밀고 있었고, 메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논은 2월 19일 유엔 소총회에 참석하여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으로서 한국 사정을 설명하고 “유엔은 빈손으로 조선을 떠날 수 없다.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는 별개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중앙정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 이승만은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다”라고 연설했다. 이에 메논은 이승만이 주장했던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승인해 줄 것을 촉구했으며, 김규식이 아닌 이승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적 지도자로 소개했다. ‘남한지역에서의 총선 실시’라는 대업(大業)을 성사시킨 메논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승만은 그를 얼싸안고 목메어 울었다. 메논이 본국 정부의 의견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과정의 배후에는 모윤숙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1934년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그 후 남편과 결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파티에서 모윤숙과 첫 대면한 메논 박사는 첫눈에 모윤숙의 문학적 재능과 인품에 반하여 파티가 끝나고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비서를 통해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했다.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 메논을 이화장 만찬에 초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마침 이날 메논은 하지 장군과 저녁 선약이 있었는데 모윤숙으로부터 이화장 만찬 연락을 받자 “선약이 있으니 차나 한 잔 마시고 나오겠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메논과 모윤숙의 사랑 모윤숙은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그가 김규식이 주장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윤숙은 그것이 이상적인 통일론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의 총선거론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저녁 이승만과의 만남이 이승만과 남한을 위한 중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모윤숙은 메논에게는 비밀로 하고 하지 장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메논 박사의 비서를 사칭하고 “오늘 저녁 메논 씨가 급한 일이 생겨 저녁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덕분에 메논은 꼼짝없이 이화장에 붙들려 이승만과 식사를 해야 했다. 메논이 유엔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모윤숙은 메논에게 금곡릉 산책을 가자고 불러낸 다음 체면 불구하고 이화장으로 안내했다. 이승만이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한국위원단은 자신들이 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당 사회단체의 인물들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요식행위로 최소한 200명 이상의 지지자 서명을 받은 연서 명부를 요구했다. 김규식이나 김구는 지지자 서명을 이미 제출했으나, 이화장은 이기붕이 깜박 잊고 제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타이프를 쳐서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은 서명은 무게가 없다고 하여 모두 한지에 붓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에게 전달한 서명은 대부분 가짜였다.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꼬박 하루에 걸쳐 서로 다른 필적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파느라 땀을 흘린 것이다. 후에 모윤숙이 이 문제로 항의하자 이승만은 “정치라는 게 그런 거야. 모르면 가만 있어”라고 말했다. 다시 모윤숙의 설명이다.
‘이화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메논 씨의 코트 주머니에 이 두루마리를 가만히 넣었다. 이것만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죽을 죄를 지었어요. 실은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이었습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서류는 사무국을 통해 나에게 와야 유엔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는 가만히 내 손에 악수를 청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암시였다. 유엔한국위원단의 임무가 끝나 영영 인도로 돌아가기 며칠 전, 우리는 이화여대에서 두 번째 강연을 끝내고 이번에는 이화장이 아닌 진짜 금곡릉으로 마지막 산책을 갔다.’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 이승만은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후 더 초조해졌다. ‘이 박사가 내 이름으로 메논 씨에게 친 전보는 일주일 동안에 10통이 넘었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이승만은 모윤숙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1949년 6월 회현동에 집을 한 채 주면서 여기서 문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것이 펜클럽의 모체가 되었고, 이 집은 한국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여기에 문예사의 간판을 걸고 『문예』지가 탄생했고, 이를 이어받아 조연현이 『현대문학』을 발간했다. 모윤숙은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1949년 2월 메논의 초청을 받아 인도를 방문했다. 모윤숙은 인도에 한 달 간 머물며 국빈 대접을 받았고, 네루 수상과 환영만찬을 함께 했다. 1949년 3월 17일 오후 3시경, 모윤숙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연세대 뒷산에 있는 언더우드 2세(원한경) 댁에서 교수 부인들이 모였다. 이때 공산당원이 모윤숙을 살해하기 위해 원한경의 집에 침입해 총격을 가했는데, 그만 원한경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 여사가 그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모윤숙은 6‧25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적 치하의 서울에서 3개월을 숨어 살았다. 이 와중에 『뉴욕타임스』에 모윤숙이 한강에서 사망했다는 오보가 실렸다.
주일 인도 대사는 수소문 끝에 모윤숙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다시 곤경을 당하면 누가 매리언(모윤숙)과 써니(모윤숙의 딸)를 보호해 주겠소. 써니는 인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옥스퍼드에 유학 시킬 테니 빨리 일본으로 가서 몸을 회복한 후 인도로 오시오.”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국내 곳곳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문을 모아 1948년 『메논 박사 연설집』을 발간했다. 당대 최고의 인격과 지식과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메논과 모윤숙의 국경을 넘나든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한 편의 담백한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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